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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장 넓어지는 천하 (4)
진목후(晉穆侯)는 당숙우로부터 9대손이다.
그는 제나라 공녀(公女) 강씨를 부인으로 삼아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구(仇)였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성사(成師)였다.
그런데 그 이름의 뜻이 묘했다.
구(仇)란 '원수'라는 뜻인 반면, 성사(成師)는 '일을 이룬다' 혹은 '전쟁에서 이긴다'라는 뜻이다.
어째서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이러한 두 아들의 이름을 놓고 진나라 대부 사복(師服)이 예언하면서 걱정했다.
- 괴이하도다! 이름이란 그 사람을 칭하기도 하는 것이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자는 구(仇)라 하였으니, 구는 원수이다.
작은 아들은 성사(成師)라 하였으니, 성사란 큰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뜻이다. 이처럼 장자(長子)와 차자(次子)의 이름이 반대로 되었으니, 진나라는 장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 이 예언대로 되었다.
진목후(晉穆侯)가 죽자 그 동생 상숙이 군위를 찬탈하여 스스로 임금이 되자 세자 구(仇)는 일시적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내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상숙을 공격하여 군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진문후(晉文侯)이다. 이때가 BC 781년으로 주왕실에서는 주선왕이 좌유와 두백의 귀신에게 화살을 맞아죽고 주유왕이 왕위에 올랐던 때이다.
진문후(晉文侯) 10년에 주유왕이 견융의 공격을 받아 죽고, 주평왕이 새로 왕이 되어 도읍을 낙양으로 옮겼다.
진문후 시대까지는 별 탈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진문후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진소후(晉昭侯)가 군위에 올랐을 때 진(晉)나라의 혼란은 싹트기 시작했다. 진소후는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무슨 생각에서인지 숙부인 성사를 곡옥(曲沃)의 백(伯)에 봉한 것이었다. 봉건 속에서 또 봉건을 행한 것이었다.
곡옥(曲沃)은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 일대의 땅으로, 당시 도성인 익성(翼城)보다 크고 강성한 성읍이었다. 여기서 백(伯)이란 영토를 다스리는 사람, 즉 영주를 의미한다. 성사(成師)가 곡옥 백에 봉해지자 사람들은 그를 환숙(桓叔)이라 높여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진(晉)나라가 둘로 갈라졌음을 뜻하는 것이요, 군주가 둘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환숙(桓叔)은 이때 58세로 인품과 덕망이 높아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당시의 뜻있는 사람들은 또 예언했다.
- 진나라 환란은 장차 곡옥에서 시작될 것이다. 가지가 근본보다 크고 화려한데, 어찌 난이 없기를 바라겠는가.
아니나다를까. 진나라 대부 반보(潘父)가 그의 주공인 진소후를 살해하고 덕망 높은 곡옥 환숙(桓叔)을 익성으로 맞아들였다. 환숙도 익성으로 진출할 뜻을 가지고 있었는지 즉각 군대를 거느리고 달려갔다.
그러나 익성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모두 환숙(桓叔)을 좋아할 것인가.
이번에는 반대파가 힘을 규합하여 환숙을 공격했다. 사정의 여의치 않자 환숙은 재빨리 곡옥으로 후퇴했다. 이에 진나라 대부들은 진소후의 아들을 군위에 올리니, 그가 진효후이다. 난을 일으킨 반보(潘父)는 물론 체포되어 주살당했다.
한편 환숙(桓叔)도 얼마 후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것이 곡옥 장백(莊伯)이다. 장백 역시 익성 진출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그는 몇 년 동안 강력한 군대를 키워 마침내 익성을 공격했다. 진효후 15년때의 일이었다.
정통성을 지닌 진효후는 장백을 맞아 분전했으나 끝내 패하고 곡옥 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익성 점령을 눈 앞에 둔 장백(莊伯)은 그러나 익성 귀족들의 강력한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곡옥으로 후퇴했다. 익성에서는 진효후의 아들 진악후(晉鄂侯)가 군위를 이어받았다.
진악후 2년은 BC 722년.
주왕실 연호는 주평왕 49년이요, 노은공 원년, 정장공 22년이다.
정장공이 동생인 태숙 단(段)의 반란을 제압하고 어머니 강씨를 영 땅에 안치시킨 해이기도 하다. 공자의 <춘추>는 바로 이 해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렇듯 익성과 곡옥으로 갈라져 심한 권력 다투을 벌인 진(晉)나라는 그 뒤로도 계속 공격과 재공격을 거듭한 끝에 무려 67년이 지나서야 그 막을 내리고 하나로 통일되었다.
- 최후의 승자는 곡옥파.
곡옥 장백의 아들 칭(稱)이 본가인 익성의 군주 진민후(晉緡侯)를 죽이고 익성을 통합, 흡수해버린 것이었다. 이후 그는 재빨리 익성에 있던 온갖 보화를 주희왕에게 갖다바쳤다.
주희왕은 나라 안에 1군(一軍)만을 둘 수 있다는 조건부를 내걸고 그를 공식적인 진(晉)나라 제후로 인정해주었다.
그가 진무공(晉武公)이다.
이 해는 제환공이 견 땅에서 제2차 회맹을 하여 패공으로 불리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진무공은 통일을 이룬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은 군주가 아들 궤제(詭諸)인 진헌공(晉獻公)이다.
진헌공(晉獻公)은 꽤나 정력적이고 호전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또한 중원의 판도가 급격히 변화하고 있음을 직감했던 모양이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오랜 세월 동안 내란으로 쇠약해진 진(晉)나라 국력을 회생시키는데 주력했다.
먼저, 본가와 환숙(桓叔) 계보의 공족들을 제거함으로써 공실의 안정을 꾀했다.
그런 후 도성을 익에서 강으로 옮겨 부흥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군대를 훈련시켜 영토내의 여융(驪戎), 적족(狄族)등을 토벌하여 진나라 만년 골칫거리인 오랑캐들을 제압하였다.
이때부터 진(晉)나라는 비로소 중원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중원의 제후들 또한 진나라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리 말하지만, 진(晉)나라는 제나라에 이어 두 번째로 중원 패업을 이루는 초강대국이 된다. 그 주역이 춘추시대 두 번째 패공인 진문공(晉文公)인데, 진헌공은 바로 그 진문공의 아버지이다.
진문공이 어떤 과정을 거쳐 군위에 오르고 패업을 달성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진헌공(晉獻公)에 대해 좀더 소상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