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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공동체 -게토'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2천년 가까이 세계곳곳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왔다. 그들은 유럽,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등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지켜나갔다. 이러한 유대인 공동체를 '게토(Ghetto)'라고 불렀다. 기독교 문화권인 유럽에서 게토는 박해와 따돌림의 상징인 반면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은 여러 종교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정적인 터전을 이룰 수 있었다.
각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뭉칠 수 있도록 해준 구심점은 그들의 종교, 즉 유대교이다. 유대교는 종교임과 동시에 그들의 역사의 기록이다. 유대교의 경전 '토라(Torah)' 에는 유대민족의 시작과 융성, 그리고 몰락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유대교를 지킨다는 것은 같은 역사적 기억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토라'를 제외하고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언어 다르고, 관습 다르고, 외모 다르고, 심지어 예배 드리는 방식이나 지키는 절기도 다르다. 살고 있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그 지역에 동화되는 게 당연하다.
유럽 각지의 민족주의는 같은 언어 같은 종교를 기준으로 형성되지만 이런 기준으로 보면 유대인은 하나의 민족으로 분류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유일신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 이라는 선민사상은 여러 이질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고 이스라엘이라는 현대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큰 접착제 역할을 하게 된다.
19세기 유럽의 유대인들 (아쉬케나지 Ashkenaz, 주로 독일 과 프랑스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유럽 계몽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과학과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민족주의와 공화정을 지지한다.
반면에 왕정체체에 사는 소아시아나 북아프리카 유대인들은 세계관이나 사고방식이 다르다.
심지어 동유럽 유대인들은 사회주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의 민족주의는 유대인에게는 고통이었다. 특히 슬라브 민족주의가 일어난 동유럽에서는 그 박해의 정도가 심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유럽의 민족주의는 자신들이 꿈꾸던 사회의 이념이 될 수 없었다. 자연스레 그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보게 된다. 이렇게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이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한 주축세력이 된다.
'팔레스타인 이주의 시작'
유럽의 유대인들은 로스차일드가문과 같은 금융인, 상공업인, 전문직, 과학자, 문화예술가, 등 비교적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유럽사회가 안정적이라면 유럽에 그대로 머물고 있을 사람들이다.
그러나 19세기에 불어닥친 민족주의의 열풍은 유럽 사람들에게는 열광과 희망의 바람이라면 유대인들에게는 엄혹한 시련의 바람이다. 민족주의는 '우리'와 '타인'을 구분하는 이념이고, 같은 민족끼리는 서로 담합하게 하도록 이끌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배척하도록 하는 동전의 양면성을 가진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이르자 유럽 곳곳에서 반유대주의 바람이 드세게 일어난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참혹한 박해가 잇따르자, 유대인들은 더이상 유럽에서 안전하게 살 수 없다고 심각하게 느낀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민족국가를 만드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간다.
1894년 자유와 평등 우애를 자랑스러워 하는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한다.
나폴레옹 3세의 전통적 강대국인 프랑스가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신흥국가 프로이센에게 의외의 패배를 당한다. 보불전쟁이다. 그 분노와 망신을 어딘가로 쏟아내려는 프랑스인들은 허술한 짐작으로 프랑스군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간첩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무조건 확정범인이 되어버렸다. 12년이 지나서야 무죄가 선고된다.
드레퓨스 사건을 지켜보면서 유럽 각지의 민족국가 건설에 깊은 인상을 받은 유대계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어 헤르츨 (Theodor Herzl)은 유대인만의 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장한다. 유대인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 기존의 일부 주장을 '유대인 국가(Der Judenstaat,1896)'라는 저술을 통하여 최초로 정치적으로 공론화시킨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유럽의 유대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이듬해부터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다. 세계시오니스트기구(WZO, World Zionist Organization)을 창설하여 유대민족기금을 모금한다. 로스차일드가문같은 유대인 대부호들을 통하여 거금이 모이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도 많아진다.
시오니즘을 유대교의 종교적 운동으로 이해하는 이들도 많지만, 사실 20세기 초 대다수 시오니스트들은 유대교를 깊이 신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 유럽 사회에 유행하는 탈종교, 세속주의, 심지어 종교를 거부하는 공산주의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그러다 보니 유대교의 결집력이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약하다.
만약 유럽에서의 민족주의가 극성을 부리지 않았다면 유대인 민족국가를 만들자는 시오니즘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 이주자들은 살 길을 찾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건너가 일상적인 생활에 전념한다. 유대교를 국교로 삼는다거나 국가이념으로 삼으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사회주의적 이상에 따라 '코뮌'이라는 소규모 공동체를 건설한다. 함께 모여 땅을 개척하고 농장을 세운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척박한 땅에서 수확은 적고 자연환경 다르고 우호적이지 않은 주변 현지인들 등에 실패하여 미국이나 유럽으로 되돌아가는 이들이 많아진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대규모 집단농장을 시도한다. 때마침 러시아에서 발생한 공산주의 혁명의 영향을 받아 팔레스타인 사회를 단순한 농장이 아닌 공산주의 형식으로 바꾸겠다는 시도를 한다. '키부츠'라는 대규모 집단농장, 즉 공동생산 공동분배라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지향한다. 거기에 공동안보 체계도 만든다. 대규모 농장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조직적으로 무장도 갖춘다. 소규모 집단농장에서 공격적이고 능동적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한다.
더 많은 키부츠들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초기 이주민 중에 이스라엘 건국의 걸출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온다. 초대 총리 벤구리온, 세번째 총리 에쉬콜, 여성 총리 골다 메이어 등이 그들이다.
'커지는 갈등'
1917년 발표된 벨푸어 선언은 유럽의 유대인 사회를 고무시킨다. 1차세계대전 전쟁 중이고 승리를 위해 무엇이든 걸어야 하는 영국 정부는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시오니즘을 지원한다는 미끼를 던진 것이다. 영국의 외무장관이 유대인의 유력 가문인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팔레스타인 이주 운동은 한층 더 활기를 띤다.
영국의 유대인 국가 건설 약속은 1922년 국제연맹이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결정하는 문서에 다시 한 번 명기된다. 아랍인들은 분노한다. 영국이 통치한다는 사실도 참기 힘든데 거기다 유대인 국가 건설 공약까지 더해지자 아랍인들은 조직적인 저항에 나선다. 1920년대는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아랍의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시점이다.
유대인 인구도 점차 늘어간다.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기 전인 1882년의 유대인 인구는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에서 4%에 불과했으나 키부츠가 세워진 1922년에는 13%, 유럽 유대인의 탄압이 본격화된 1935년에는 28% 1947년에는 30%까지 늘어난다. 유대민족기금이 사들이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토지는 점점 넓어지면서 유대인의 일자리는 늘어나는 반면 일자리를 잃은 현지 아랍인의 반감은 점차 커진다. 이제 양측의 대결은 불가피하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이 몰려오자 점점 더 공격적으로 저항한다.
1921년 양측 합하여 3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충돌에 이어 1929년 무장한 아랍인들에게 유대인 67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생긴다. 더이상 상황을 낙관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서 유대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한다. 통제할 수 없는 무력충돌이 계속된다.
1936년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이주를 적극 지원하는 영국 위임통치 정부에 저항하여 총파업과 함께 무장 공격을 시작한다. 이에 강력 대응을 하는 영국 정부와 유대인에 의해 약 3년에 걸쳐 5천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사망한다. 한편 이 과정에서 2차세계대전의 조짐을 느낀 영국 정부는 회유책도 생각한다.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중재안'
1937년 영국 정부는 아랍인과 유대인의 중재를 위한 방법으로 거주 인구를 기준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하는 '필 보고서'를 내놓는다. 아랍인들이 거부하자 유대인 이주자의 상한선과 함께 유대인의 토지 매입을 제한하고 10년 이내 팔레스타인 독립정부를 출범시킨다는 방안을 새로이 내놓는다. 이번에는 유대인들이 반발한다.
유대인의 과격 무장세력들이 영국 정부기관을 공격한다. 이에 충격 받은 영국의 여론이 크게 바뀐다. 팔레스타인에서 당장 손을 떼라고. 그때까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보물 인도를 지키는 중요한 길목이었기에 공을 들여 왔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도가 독립해나가자 영국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영국은 물러나고 이제 UN으로 넘어간다.
'이스라엘의 건국'
UN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SCOP)을 구성한다. 아랍인들이 위원회의 참여를 거부하는 동안 UN은 팔레스타인을 분할하고 예루살렘은 어느 쪽도 아닌 UN 관할에 둔다는 과거 영국 정부의 '필 보고서'와 흡사한 해법을 제안한다.
아랍인들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UN총회를 통과한다. 유대인 국가 건설이 공식화된 것이다.
강대국 영국의 약속도 있었지만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드러난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 비극이 국제적인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킨 영향이 크다.
또한 유대인들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의지는 단순하고 집요한 반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유대인을 공격만 할 뿐 별도의 국가 건설은 꿈도 꾸지 않았다. 하나의 칼리파에 하나의 이슬람 공동체라는 당연한 개념을 오랫동안 가져온 아랍인들에게 지도에 그어진 국경선은 무척 불편하고 낯설다. UN의 결정에 드세게 저항할 뿐이다.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는 내전 수준의 폭력 충돌이 계속 일어난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1948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한다. 동시에 전쟁 준비를 한다.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 침공 준비를 마치고 돌격 신호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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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요약: 중동은 왜 싸우는가(박정욱)
다음 편은 '건국과 동시에 시작된 전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