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2월 10일 동학혁명이 일어난다. 전라도 고부에서 조병갑이란 군수가 너무 극심한 수탈을 했다. 말도 되지 않는 세금을 만들어 백성을 수탈을 했다. 죽은 남편, 한 살짜리 아기, 자기 남편 등 마구 세금을 걷어 갔다.
전봉준의 아버지는 관아에 끌려갔다가 죽임을 당한다. 이에 전봉준이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을 따라나선 사람들이 20만 명이 이나 되었다. 임진왜란 때 8천명, 병자호란 때 8천명 정규 군사가 있었다.
농민이 이렇게 들고 일어난 것은 도저히 못 살겠다는 분노의 분출이었다. 동학농민 혁명군은 전주를 비롯한 경상도, 충청도 지역을 다 점령했다. 이제 경기도와 한양을 점령하면 우리나라 역사가 완전히 바뀔 절호의 기회였다.
이때 고종은 동학 농민 혁명군과 타협을 하지 않았다. 민심이 천심인데 백성과 타협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반성을 해야 할 일이다. 고종은 동학 혁명군과 타협하지 않고 청나라에 자신을 지켜달라고 구걸을 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2,800명을 보냈다. 청나라는 고종을 지켜주는 호위 군사 보낸 것이다. 이때 일본군이 8,000명이 들어왔다.
이들 두 나라 군대가 벌인 전쟁이 청일전쟁이다. 외국 군대가 남의 나라 땅에서 전쟁을 한 것이다. 경기도 평택, 성안, 안성지역이 전쟁터였다. 이 전쟁은 나라의 꼴을 갖지 못하는 조선을 누가 먹을 것인가 하는 전쟁이었다. 청나라가 평양으로 도망가자 청은 군사 2만 명을 더 보냈으나 만주지역으로 쫓겨간다. 이때 남은 군사는 200명 뿐 이었다.
이에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는다. 여기에는 기막힌 조약 내용이 있다. 조선은 독립국으로 선포한다. 조선이 속국이 아니라는 뜻이다. 조선은 속국이 아니니까 ‘일본이 조선을 먹어도 되다.’는 뜻이다. 이것이 시모노세키 조약이다. 일본은 조선을 그냥 먹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명성황후이다.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찾아가서 ‘우리를 좀 지켜줘라.’고 요청을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조선이 일본으로 넘어갈 것 같으니까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이다. 러시아가 일본에게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3국 간섭이다.
일본은 다 먹은 나라를 여우같은 명성황후 때문에 먹지 못한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은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죽인다. 고종이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으나 낭인 20명이 돌아가며 강간을 하다가 새벽 5시에 불태워 죽인다. 이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을 할 때 낭인 20명 중 한 명 다름과 글로 남겼다. ‘오늘밤 참으로 가소가노(可笑可怒)할 일이 벌어졌다고 적었다.’
고종은 이 비참한 광경을 보고 러시아 공사로 도망을 간다. 1년 2개월을 그곳에 사는 동안 선교사들이 총을 들고 고종을 지켰다. 조선이란 국가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런 비극적인 일은 국가가 백성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04~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난다. 러시아인 7만 명과 일본인 4만 명이 함흥 앞바다에서 싸운다.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와 우리나라를 놓고 싸운 것이다. 전쟁은 일본이 승리를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우리가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리고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을사늑약 :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으며,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통해 영국으로부터도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인정받은 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이 조약을 강제하여 체결하였다.)
그런데 이 5년 동안 당연히 의병이 일어나야 했다. 경기도 용인에서 이익삼이란 의병장이 ‘나라를 건지자, 하고 ’나를 따라 나서라!‘ 했는데 불과 15명 함께 했다. 백성들이 나를 구할 생각이 없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 800명이 우리 국민 4만 명을 죽이는 동안 일본군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우금치 학살)이런 일은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시대적 현실이었다. 동학군의 화승총과 일본군의 기관총의 차이였다. 고종은 운명이 다한 알량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에게 동학농학혁명군 진압을 요청했다. 이 땅과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자 들불처럼 일어난 동학농민혁명군에게 그 어떤 타협도 없이 조선왕실은 일본군과 연합해 민족을 살해했다. 보위를 지키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인 고종은 결국 조선을 송두리째 일본에게 빼앗기는 용서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 중국은 어떻게 생각했냐? 중국은 포로로 인정했다. 우리는 ‘징용’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은 속국’으로 여긴 것이다. ‘속국’사람을 데려다 쓰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이다. 이런 일본인들의 논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성노예, 위안부, 징용노예 변상을 요구하지만 일본 정치가들은 이를 절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다. 우리만, 우리나라에서만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지 현실 세계는 전혀 딴 세상이다.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그 어떤 저항도 없었기 때문에 1910년에 일본 식민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과거급제해서 모든 권력을 누렸던 양반들은 무엇을 했는가? 나라를 되찾으려고 무슨 노력을 했는가?
그때 양반 자제들은 모두 동경으로 유학 갔다. 나라가 망했을 때 수령과 방백들 모두 국가를 되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모두 도망갔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에서 돌아와서 판검사, 경찰, 선생, 교수가 되어 36년 동안 친일 앞잡이가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미군정이 그 사람들을 그대로 국가의 요직을 맡겼다. 일제 앞잡이였던 세력이 지금까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이들은 친일세력이 되어 아직도 친일의 향수를 품고 살고 있다.
결국 조선 500년과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변한 것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지금 가장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런 호황은 우리민족이 생명을 존중하고 백성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이 민심을 천심으로 여기며 살아온 결과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대열에서 국가를 이어 가려면 국민을 주인으로 여기며 생명을 존중하는 유구한 배달민족의 정신을 하루 빨리 되살려야 할 것이다.
◼탄허 스님 : 역사에서 인관업보에 관한 법문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일본은 지난 5백 년 동안 무려 49차례나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만약 임진왜란 때 천운이 우리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면 세력으로만 보자면 일본에게 우리 땅을 열 번도 더 빼앗겼을 것이다. 수차례 왜군의 침략으로 삼남(三南)은 쑥대밭이 되었고, 결국 함경도까지 함락되면서도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국운 덕분이었다. 즉 우리 선조들이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동양의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며 남을 해칠 줄 모르고 살아온 것이 결국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동양 사상의 근본원리인 인과법칙이자 인과응보이며 우주의 원리이다.
출처 : 성필립보 생태먀을 황창연 신부님 특강,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