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
ㅡ전문영
요 앞까지만 나갈게요 멀리는 못 가고
철봉에 허리를 대고 한 바퀴 돌자
주머니의 동전이 사라지고 친구는 유괴 당했다
그치만 친구는 계속 발행되는 동전과도 같고
난 또 친구가 생기고 친구는 나를 초대하기도 하고
그/녀는 주사를 끊은 뒤에도 털은 계속 기르고 있다고 한다
털은 아름답지 않아서 우리가 수용해야만 하는 존재로 늘 명백하고
그저 밖으로 쭉쭉 쫓겨나가면서 자신을 미화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거라고
그/녀가 말했더라면 내가 슬쩍 동의하기도 하는 식의 대화를 상상해보지만
정작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끊임없이 차에 설탕만 탈 뿐이다
그리고 나는 설탕이 흐르는 그/녀의 내장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내는 능력을 부여받는다
설탕을 타고 부르릉 우리를 떠나 사라지는 것들이 있고
설탕이 어딘가에 처박혀 조용히 죽어갈 때
모든 행인은 변장할 생각조차 않는 유괴범들이다
그러니 내가 예전에 번역한 희곡에 나왔던, 익명의 주인공을 아직도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아이다호 보이시에서 배앓이를 하고 있고, 희곡에는 의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행히 내게 약간의 의학지식이 있어 잠시 희망을 품기도 하지만
그/녀가 책 속에 있지 않더라도 나는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희망을 품은 최선의 유머가
그/녀가 아이다호 안에 있다는 말을
아이다호가 그/녀를 삼켰다는 말로 쉽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평하게도 아이다호 역시 결코 그/녀를 방문할 수 없고
그건 내가 저녁밥 대신 저녁을 홀랑 다 먹을 줄은 알면서도
정작 내 위장을 방문하지는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의 심장은 나에게서 가장 멀고
희곡에 그/녀가 배앓이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오지 않기에
나는 그/녀의 눈물을 기대하지 않으며 덕분에 내 걱정은 선정성과 거리가 멀다
1961년 소련 남극 탐사대의 유일한 의사 레오니드 로고조프는 자기 배를 스스로 갈라야 했다
메스의 칼날만이 그가 자신의 내장들을 마중할 수 있던 최선의 거리였다
나는 칼로 젖은 머리를 자르며 아무런 결락을 느끼지 않고
따라서 배웅은 없다 머리카락들은 뱃전에서 등 떠밀리는 승객처럼 부들거릴 뿐
신문지는 포복 도중에 죽은 사병처럼 허리를 낮추고 방 한구석에 쓰러진다 잘린 머리카락들을 전부 구멍 난 등에 이고서
무심코 소파의 방석을 뒤집자 동전들이 숨어 있었다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하고
/계간 『열린시학』 2015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