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시간
“요즘
제가 아내를 만나면 자주 하는 말입니다
저 정말
아내만을 끔찍이 사랑하는 애처가 같죠?“
내 나이 65세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모은 돈으로
사업을 한답시고 30년을 쉼 없이 달려온 것도
모자라
회사를 키운답시고
밖으로 돌며 가정일엔 소홀했지만
능력 있는 남편 소릴 들으며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끌었다고
자부하며 살아오던 어느 날
친구들과 동창회다 송년회다 뭐다 해서
술 한잔 걸치고 들어오는 나를 본 아내는
“저희 남편은 왜 안 들어와요...
저희 남편이랑 같이 술 마신 거 아니었어요?“
아내의 농담에
올해 연기대상은 당신한테 줘야겠다며
"그러지 말고 커피나 한 잔 타죠"
초조히 시계만 바로 보고 있던 아내를 보며
“뭐해??
커피 한잔 달라니깐..”
“아직 저희 남편이 안 들어왔단 말이예요”
어둠에 녹아버린 햇살로
또 다른 아침이 펼쳐진 다음 날
아내의 손을 집고 찾아간 병원에서
내 귀에 들려온 한 마디
“아내분이 치매십니다.”
이날 이후부터
“당신 많이 먹어?”
“이렇게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당신 가만히 있어 내가 할게....“
이 말들은
제가 늘 사용하는 말이 되었답니다
그날 밤
유리창에서 졸고 있는 햇살을 따라
낮 잠이 들었다 일어나보니
거실벽에다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아내가 먼저 들어옵니다
“이건 남편 밥
이건 내 밥...“
“왜 남편 밥은 크고 당신 밥은 작아?“
“우리 남편이 나보다 더 많이 고생하니까”
가슴으로 젖어오는 미안함을 놓아 둘 곳을 찾다
어제 병원 갔다 오면서 산 귤 봉지를 보고선
“당신 좋아하는 귤 샀어.”
검정비닐을 거꾸로 들어
안에 든 귤을 다 쏟아내더니
“우리 남편이 좋아하는 사과는 하나도 없잖아”
바라보는 마음속에 든 눈물이 비칠까
애써도 기어이 흘러내리고 마는 눈물을 본
아내는
"사람 눈이 왜 두 개인 줄 알아요?"
.....
"혼자 울면 외로울까 봐...
두 개래요 "
더 잃을 거라곤 눈물밖에 없었던 나는
그 말에 더 깊어진 울음을 내보이고 말았지만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던 아내는
어느새 자신의 방에서 잠들어 있었고
난 그 옆에 지친 몸을 좁다랗게 따라 누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떠보니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아내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잠 안자고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현관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내 구두에 검정 칠을 하고 있던 아내가
“출근하는 우리 남편 구두 닦아놓으려고..”
자신이 닦아놓은 구두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아내를 보며
“얼른 세수하고 이빨 닦자“
“아니야..
남편 넥타이도 골라줘야 하고
와이셔츠도 다려줘야 해“
뭣하나 자신이 먼저였던 적이 없었던
남편 바라기 아내를 보며
제 눈에서는 아침 댓바람부터
떨어뜨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던
눈물 하나가 또 다시
..또르르 ...
손등을 타고 흐르고 말았습니다
미역국에 밥 한 덩이 말아놓고
수저를 챙기는 사이 생수병에 든 물을
국에다 따라버리는 아내
"배불리 많이 먹으라고?
고마워 여보..."
그날 저는 미역국에 눈물까지 말아 먹으며
금 간 하루를 주워 담아야만 했습니다
그날 저녁
아내는 하루의 뜨락을 서성이다 들어 와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벽에다
그리고 있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자는 사람은 누구야?"
"우리 남편 ...
밖에서 힘들게 일하니까
여기서 쉬게 하려고..."
그런 아내를 보며
내가 여전히 나로 남을 수 없어
눈물만 흘리고 있던 내 무릎을 베고 어느새
잠이 들었던 아내가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나더니
초조하게 벽에 걸린 시계를 비라 보면서
베란다 밑을 휠끔휠끔 내려다보는 모습에
“뭐해 자다 말고..?”
“우리 남편이 아직 안 왔어요”
“자고 있으면 오겠지?”
“올 시간이 넘었는데...”
종종거리다 소파에 쪼그리고 앉더니
시계와 현관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내를 보면서 아픔을 들어내지 않는 갯바위처럼
버티던 내 가슴은 또 한 번 무너지며
이 삶의 무게를 꽃 잎 한 장으로 감추고 싶었습니다
동트는 새벽을 따라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쪽잠으로 버티던 아내가
남편 올 시간이라며 시장바구니를 챙겨
밖으로 나가는 걸보며 난생 처음 시장이란
곳을 나와 본 나와는 달리
"이건 울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거"
“......”
나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남편에게
뭘 해줄까라며 입가에 걸린 콧노래를 부러다
집으로 온 아내는
“남편 오기 전에 동태찌개 끓여놔야겠다.."
준비해 놓는 재료들을 넣지도 않고
무우 하나만 딸랑 냄비에 담아 끓이고 나서는
“어떤지 한번 먹어봐?”
“와 맛있네...”
그날 다른 건 다 잊어도
남편을 생각하는 그 마음만은
잊지 않고 있던 아내가 끓여준 동태찌개는
태어나 처음 먹어본 맹탕 국이였지만
흐르는 눈물로 간을 하며
먹는 이 시간마저 누가 지워져 버릴까
가슴 졸이며 먹어야만 했습니다
이제는
아내가 어지럽힌 집 구석구석을 돌며
치우는 것도 제 몫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잠든 틈을 타
집안 이곳저곳을 정리하던 내 눈에
장롱 곳곳에 가지런히 달여놓은 옷가지들과
싱크대 안에 소곤소곤 놓여있는 그릇들까지
아내의 손길 하나하나를 매만지며
감춰덨던 눈물을 또 흘리고 있었지요
"저,,의사선생님..
제가 치매 걸린 건 아니죠?"
"아...네
무척 건강하십니다"
"우리 남편을 힘들게 하면 안 되니까
꼭 미리 말씀해 주세요"
자신이 치매인 줄도 모르는 아내는
내가 의사인 줄 알고 이런저런 질문을 해대더니
건강하다는 말에 해맑은 웃음꽃을 피우다 잠든
차 안에서 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치매면 어때!
내가 지켜줄건데....
자신밖에 몰랐던 남편 때문에
아내의 시간을 다 써버리게 한 것 같아
깊어진 이 눈물로 되돌려줄 수 있기를
바래고 또 바래며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눈물로 끝날 것 같은
두려운 우리 부부의 미래앞에
흔적없이 찾아온 새벽에 앉혀놓고
달한 조각 비어물며 소주잔을 기울여가던
나는 머리 위를 지나가는 일출 한 움쿰을
가슴위에 올려놓으며
가까이 있는 가슴시린 이 손을
뜨겁게 잡아준 적이 언제였는지...
두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코 사이
고랑을 따라 내려오던 숱한 밤을 보내며
저는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시간을 되돌려 주기로...
햇살 한 조각
구름 두어 푼
바람 한 움큼이
적적하게 놓여있는 아침
해맑은 거리를 달리는 택시안에는
뒤좌석에 이런 푯말이 걸려 있었습니다
라고...
펴냄/노자규의 골목 이야기
첫댓글 아침부터
가슴이 먹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