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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고등보통학교는 1925년 개교를 했다. 고보가 4년제였으나, 1924년 경성제대가 들어서면서 5년제로 늘어났기 때문에 진주고보 1회는 1930년 졸업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경성제대와 궤를 같이한다.
경성제대 예과 첫 입학의 영광은 이듬해인 1931년 예과 8회로 입학한 강희근(姜熹根)이다.
법학과 8회 졸업하고 이후 당시 최고 직장이었든 조흥은행에 근무했다.
그는 이태 뒤 예과를 졸업하면서 동아일보 3월 23일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 졸업은 3월, 입학은 4월에 행해졌다.
책에 의하면 두번째 입학생은 1934년 예과 11회에 문과 갑류(법학과) 16명 중에 박재섭(朴在灄)이다.
박재섭은 법학과(사법) 13회로 졸업하고, 이후 고려대 법대 교수 및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세번째 입학생은 1935년 이과 25명 중 박우균(朴雨均)이다.
그는 의학과(병리과) 13회 졸업했다. 책에는 그의 이후 행로를 '이북'으로 적고만 있다.
네번째 입학생은 1936년 예과 13회 문과 갑류 11명 중에 박우승(朴雨升)이다.
그는 법학과(경제) 14회로 졸업하고, 책에는 그의 이후 행로를 '이북'으로만 적고 있다.
박우균과 박우승은 이름을 보면 형제나 사촌쯤 되지 않을까 싶다.
만약 그랬다면 당시 진주권역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박우균과 박우승은 '이북'이라고만 적고 있는데, 책에서는 '이북'과 '월북'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품었던 꿈과 삶의 궤적은 어떠했을까?
이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기회가 앞으로 생겨날까?
1937년 예과 14회에 이과 29명 중 최재학(崔在鶴)이 5번째 입학생.
그는 의학과(외과) 15회로 이후 부산 시립병원장을 역임했다.
일제는 경성제대에 정치학과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모를 리 없다.
마찬가지로 이공학부보다 의학부를 중시했다.
의사는 순수 기술인인데다, 졸업후 취업의 길이 넓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의과를 지원했고,
따라서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들은 주로 의대교수와 병원개업을 한다.
진주고보는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진주공립중학교'(5년제)로 교명을 변경했다.
1938년 예과 15회 입학생 중에는 문과 갑류(법학부) 15명 중에 양태동(梁太東)이 문과 을류(문학부) 19명 중 배종호(裵宗鎬)가 진주중학교를 대표해 입학했다.
양태동은 법학과(행정) 16회로 이후 강원도 법무관을 했고,
배종호는 철학(서양철학) 16회를 졸업하고 연세대 교수 및 동양철학회장을 맡았다.
(*느낌상. 8,90년대 고려대 법대 교수를 한 배종대 교수가 있다. 배종호 교수와 항렬이 같은 듯.)
1939년 예과 16회 문과 갑류 23명 중에 정재균(鄭在均)이 입학했고, 예과 중퇴를 했다.
1941년 예과 18회 이과 을류 24명 중 박우실(朴雨實)이 입학하였다.
그는 서울대 1회(1947년)의 기록을 갖게 되었는데, 역시 이북했다.
이로써 박우균, 박우승 그리고 박우실은 한집안 형제임이 거의 명확해지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총 9명이 경성제대에 입학하면서 진주고의 이름을 드높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향배는 조국의 갈길과 궤를 같이 하면서 천양지차로 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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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경성제국대학은 처음에는 조선제국대학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띄어쓰기를 잘못하여 '조선제국 대학'라고 하면 조선제국이 멸망하지 않은 양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그해 곧바로 경성제국대학으로 바꾸었다. 경성제국대학의 준말은 경대가 아니라 성대(城大)이다. 우리는 전문대학은 대학, 종합대학은 대학교로 통칭하지만 일본은 똑같이 대학이라고 한다. 따라서 경성제국대학교라고 하면 잘못된 표기이다.
*)참고로, 일제 때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이들이 많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이를테면 와세다대 '전문부'를 졸업한 이들이 많았는데, 전문부라고 하는 건 지금으로 치자면, 각급대학에서 설치한 최고경영자 과정 등등의 아류이다. 와세다대 전문부를 '이수'하고 와세다대 졸업을 사칭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경성제대에 대한 신뢰는 일본 본토 대학의 학적부 출신보다 높았다고 보아도 좋겠다.
*)경성제대는 1924년 개교하여 법문학부 18회, 의학부 17회, 이공학부 3회의 부가 있었고, 1945년 문을 닫았다. 일본에서는 1974년 개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문집이 발행되었다.
첫댓글 흠... 경성제대 산악부를 정리하고 있는 걸 어찌 알았을꼬....
그러려면 竹中要를 알아야하고 泉靖一과 飯山達雄을 알아야하는데...
소화8년 늦은 가을 이츠미를 위시한 경성제대 예과생중 산을 좋아하는 자들을 모아 스키산악회를 결성했고...
이들이 예과를 수료하고 35년 본과에 진입하자 산악회가 결성되어...서울부근 산에서 등산과 암벽을 연습하고 북조선의 산으로.... 당시 회원중에는 조선인도 꽤 있었던듯... 산악회 회지도 발간했는데 6호(1941년)만 전하고 있지요. 당시 타대학 산악회와는 사뭇 다른 발자취를 남겼는데...
^^ 경성제대 산악부가 적임자를 만났네요...~
경성제대 산악회 회지이야기까지 들은 적이 있는데, 역시 '와운루'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