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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722호)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요 4:3-30)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1. 하나님은 영이시다.
또한 천사들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사람만이 영적 존재이다. 특별히 사람을 창조할 때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다.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 영적 교제가 사람의 범죄함으로 끓어졌다. 사람은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을 허락하셨다. 다시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진정한 교제를 원하시는데 그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며, 사람의 힘이 아닌 오직 성령으로 예배드릴 때만이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시고, 성령께서 함께하는 예배를 통하여 축복하신다.
왜, 영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시 여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분과 장소를 중요시 여겼다. 또한 제사드리는 법을 중요시 여겼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마리아에서 드리는 예배는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마라아 여인이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 20).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물질에 속하여 버렸고, 죄 아래 속하여 버렸다. 우리의 힘으로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인도함 속에서만 신령한 세계를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인격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예배는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2. 성령으로 예배드림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1) 예배 전 충분한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준비할 수 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성도가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할 때, 또는 별도의 시간을 가지고 기도할 때 즉시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일주일 동안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 순종하는 삶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 살아가면서 삶 속의 죄악으로 인하여서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 있으며, 심령이 무뎌져 있고, 각질이 끼여 있는 상태다. 그러기에 예배하는 성도는 성령의 온전한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방해되는 요소를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 이때 충분한 예배 전의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준비하자. 예배 전의 충분한 기도와 찬양은 예배를 예배답게 만들며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예배로 나아가게 한다. 물론 예배 전의 찬양과 기도도 하나님 보시기에 예배의 일부분이다. 이 시간은 우리의 세상에 찌든 각질을 벗겨 내는 시간입니다. 즉 찬양을 부를 때, 찬양의 가사를 입술로 반복합니다. 마음으로 부릅니다. 심령에 새겨집니다. 이때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영적인 어둠이 떠나가며 찬양은 영적 기도가 되고 회개가 되고 고백이 되며 우리를 참된 예배자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일주일 동안 세상에 살면서 심령을 무디게 만든 것을 온전히 제거하며,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지기에 충분한 기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시간을 가지지 못하면, 허겁지겁 준비되지 않는 예배를 드린다면,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대할 수 없으며,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예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삶의 예배와 주일 예배를 연결시켜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예배, 삶의 제사도 강조하셨다. 일주일 삶의 예배를 온전히 드린 성도는 주일예배를 통하여 더욱더 큰 은혜를 누리며, 다시금 일주일의 생활을 예배를 참되게 드릴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축복된 순환 구조입니다. 그런데 일주일 삶의 예배가 엉망이면 주일의 예배도 성공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을 깊게 만나기 힘듭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기 힘듭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과 삶에서 교제하였던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밧세바와 동침 후,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고 하나님을 속이면서 사는 삶 속에서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제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주일은 약한 사람, 죄지은 사람이 더욱더 와서 회복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영적 교제를 위해서는 다윗은 철저히 회개한 후에 하나님과 다시금 교제가 이루어졌다는 알고, 더 깊은 예배를 위해서, 성령이 충만한 예배를 위해서 삶의 예배에 항상 성공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회개는 성령으로 예배드리기에 강력한 축복의 도구이다.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는 회개를 통해서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 늘 삶이 예배인 사람이었다. 그런 다윗의 제사를 통해서는 더욱더 축복을 누렸다. 그런데 강력한 죄가 하나님과 다윗을 가로막았고, 점점 더 하나님과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윗은 회복을 위하여 힘써 보았습니다. 다윗은 제사도 드려봤습니다. 간구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니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돌이킬 때, 다시금 만나 주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예배는 물질적인 것이 아닌, 상한 심령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친 것도 회개함으로써 세례를 받고 그리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예배 가운데 풍성한 성령의 역사를 이루게 합니다. 또한 성령의 임재가 임하면, 더욱더 회개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그리고 더욱더 거룩한 은혜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하여 다윗에게서 떠나셨던 성령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회개를 통하여 성도에게서 떠나셨던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를 통하여 예배 가운데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하던 성도들의 심령에 은혜가 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축복의 순환으로 바꾸는 귀한 방편입니다.
4) 넷째는 성령님이 싫어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
(1)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라.
(2) 성령을 거절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
(3)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행위을 하지 말라.
(4) 성령을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잘못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하지 말라.
(5) 성령을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반대로 성령의 도구가 되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 성령을 사모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성령은 놀랍게 우리의 예배가운데 역사하십니다.
3. 성령으로 예배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 알아야 한다.
성령은 예배 가운데 영적 진리를 깨닫게 하여 주시는 분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또한 예수님은 진리이시다. 즉 하나님은 진리이시다.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십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그 진리의 핵심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 지셨다는 진리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는 분은 예배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예배가운데 성령이 주관하시지 않는다면, 영적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목숨이 끊어져도, 고난이 있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말씀가운데 회개의 영을 허락하십니다. 성령은 말씀가운데 죄를 발견케 하며, 죽게 된 처지를 발견케 하시며 그리고 회개의 영을 허락하십니다. 성령은 믿어지는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신앙생활 20년을 해도 그리스도인인지, 세상사람인지 분간이 안 가는 성도는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면 순종하게 되어있습니다. 예배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임할 때 목사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믿어집니다. 내 죄를 사했다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동정녀 탄생이 믿어집니다. 즉 성령이 임하기 시작하면서 육신적인 안목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성도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전 것들이 부질없이 보이며, 영적인 보화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온전히 드려 신앙생활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진정한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쁨과 희락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예배가운데 역사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만날 수 없습니다. 진리를 깨달음도 없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는 회개도 없고, 사죄의 확신도 없습니다. 치유도 없고, 영적인 축복도 없습니다. 이곳에는 진정한 위로보다는 사람들의 위로만을 얻어서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예배가 아니고는, 그 예배로 말미암아 감화를 얻지 못하고는 일주일 동안 믿음으로 세상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관하시며, 성령을 사모하는 성도의 예배는 회개가 넘치며 찬양이 넘치며 기쁨이 넘치며 능력과 비전이 넘치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영이,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예배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예배자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전적인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을 잘못된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가장 큰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사람에게는 있으며 전심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만나주십니다.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그만둔다면, 그것이 믿음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 이때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까? 전심으로 찾으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찾아야 합니다. 사망 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 예수님을 만나기를 구했던 삭개오,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구했고, 만나기를 구했습니다. 왜 구했습니까? 자신이 사망가운데, 불행가운데 있기 때문에 구했습니다. 자식이 귀신 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은 애절하게 예수님의 찾았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은혜를 구했습니다. 눈먼 자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 만나기를 구했고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때 어떠한 자세로 구했습니까?
전심으로 구했습니다. 전심으로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절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구해야합니다. 오늘 예배시간에도 이 같은 간절함 속에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간절히 구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만이 참된 평화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다윗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을 가졌습니다. 그에게는 권력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 후에 그리고 매일매일의 삶가운데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멀리 떠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가까이 가기 위하여 하나님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죄와 세상은 멀리 해야 합니다. 이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역사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축복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예배 : 코람데오와 코람스마트폰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유다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라고 말씀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오직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고 했다.
'코람데오'는 라틴어 'coram deo'에서 파생되었다. 'coram'은 '앞에서' 또는 '앞에'를 의미하며, 'deo'는 '하나님'을 나타낸다. 따라서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 또는 '하나님 앞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면 상당수가 '코람데오(coram deo)'가 아니라 '코람스마트폰(coram smart phone)' 중독으로 변절되는 현상들이 나타나서 매우 우려스럽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 앞에서 고개 숙이고 스마트폰을 검색하는 것에 몰두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 들려야 할 것인가? 지금 시대가 그렇게 흘려가니 그대로 방치해야 할 것인가?
예전엔 교실에서 선생님이 교탁을 치며 주목(注目), 주목하라는 소리에 모두들 화들짝 놀란 적이 있었다. 어떤 학생이 선생님의 강의을 듣지 않고 딴 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이 지금 예배를 드리는 예배실에서 설교를 듣지 않고 그 시간에 스마트폰 검색에 몰두하는 자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설교시간에 '주목하세요'라고 할 수도 없고, 물론 예배실 입구나 주보에 예배 시간에는 스마트폰을 끄거나 보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상당수의 교인들에겐 우이독경(牛耳讀經)이다.
예수님은 "진정 예배하는 자들이 신령과 진실로 예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예배가 신령과 진실함에 근거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것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모든 순간에 신령과 진실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는 단순히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드리는 행위를 넘어서, 우리의 삶 전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 태도, 심지어 생각까지도 온전히 드려야 한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롬 12:1).
예배(Worship)라는 말은 ‘가치(Worth) 있는 지위’(신분, Ship)에게 적절한 영광과 존경을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배는 오직 창조주(創造主)시며, 구속주(救贖主)되신 하나님께만 그 합당한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찌어다”(시 96:8)라고 했다. 예배는 진실로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와 존귀와 찬송과 사랑과 복종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으로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수단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코람스마트폰'이 아니고 '코람데오'이다. 하나님 앞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 -
[출처] 기독교 일간지 신문 기독일보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35522#share
매주 11,000여 명의 회원님들에게 한 번씩 보내는 칼럼입니다.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문지기) 드림
양천구 신정로 11길 63 강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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