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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망할 여자."
휘린은 한 시간 동안 열 두 번은 넘게 바라본 벽시계의 시침을 다시 바라보며 입안
으로 욕설을 주워 삼켰다.
"날 두고 바람피지 말라고 그리고 엄중하게 경고했건만, 감히 날 따돌리고 주지하라
는 인간을 만나러 가? 강승빈, 오기만 해봐라, 죽었다!"
학교에 남은 사무를 처리하고 잠시 쇼핑 좀 하고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퇴근하여 돌아왔을 때도 승빈은 집에 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좀 늦는가보다, 무
심하게 생각하며 그녀에게 전화를 했지만, 승빈의 휴대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새신랑이 처량맞게 넓디넓은 집 식탁에 홀로 앉아 가정부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있으려니 약이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이 분위기가 신혼재미에 녹아나는 새신랑의 밤풍경 맞아? 강승빈, 어디 두고 보자!
결혼한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은 새신랑이라면 말이다. 마땅히 새색시의 상냥한 미
소를 마주하며 퇴근을 해설랑은, 양복저고리를 받아주며 작은 새처럼 조잘거리는 아
내의 귀여운 수다를 뒤로하고 찐한 뽀뽀를 나눈 후에 상쾌하게 샤워를 한 다음, 아내
가 정성과 사랑을 담아 보글보글 끓인 찌개를 앞에 두고 아!~~~~ 입을 벌리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 사랑스러운 색시가 밥 한술에 굴비 살점 뜯어 올려 입에 넣
어주고 감칠 맛 나는 해물탕 국물을 떠 먹여주는 분위기. 뭐 이 정도가 되어야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천하의 윤휘린이 처량맞게 홀로 앉아 남편 허락도 없이 옛애
인을 만나러 간 괘씸한 마누라를 기다리며 다 식은 미역국을 퍼먹고 있어야 하느냔
말이다.
"두고 보자, 으드득. 강승빈이. 날 버리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바람피운 것에 대하여
내가 반드시 정의의 응징을 내리고야 말겠다."
이를 갈며 마치 미역 줄기가 그녀인 양 질겅질겅 씹고 있는 참이었다. 달칵 현관
문이 열렸다.
"이 씨! 날 버리고 대체 어디 갔다 왔어!!~~~~~~~~"
열 받은 김에 휘린은 냅다 신고 있던 실내화를 벗어 현관 쪽 승빈에게 던져버리며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너 거짓말하지마! 학교간다 그래놓고 순전히 뻥만 깠어, 너! 지금까지 바람피우다
왔지? 내가 다 안다, 이 망할 여자야!"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나운 그의 고함소리와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남편의 위엄에 졸아 든 것이 분명했다. 현관머리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서있는 그녀
에게서 아무 말이 없는 것 보면. 휘린은 입안에 든 밥알과 미역 줄기를 단번에 삼키
고 벌떡 일어났다. 너, 오늘 죽었다. 강승빈이.ㅡㅡ^
차마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다는 듯이 승빈은 현관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 여쟈
를 어떻게 요절내줄까 하고 살기등등하게 현관머리로 나간 휘린은 깜짝 놀라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어, 왜 그래? 왜 그러는거야? 내가 화내서 너무 놀라 이러는 거야?"
승빈이 질린 얼굴을 들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살레살레 고개를 젓는 그녀의 얼
굴이 너무 참혹해서, 너무 아프고 절망스러워서 휘린은 가슴이 털컥 내려앉는 기분이
었다.
"승빈아. 너, 왜 그래? 왜 이러는 거야?"
"...휘린씨."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누가 널 이렇게 힘들게 했어?"
승빈이 두 팔을 내밀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꿈을 꾸듯이 몽
롱했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듯이 무섭게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
다.
"....그 여자였어. 휘린씨. 오유나 그 여자였어."
극심한 피곤이었나 보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승빈은 곧바로 침대에 눕더
니 금새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휘린은 그녀가 잠든 침대가에 앉아 드러난 승빈
의 팔다리를, 그녀의 머리결과 부드러운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녀가 오늘 밤 느꼈을 무서운 분노와 충격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런데 왜 자꾸만
이상하게 실쭉 실쭉 웃음이 나올까?
'강승빈. 너 정말 귀여운 여자다. 그거 아냐?'
10년만에, 그녀를 폭행하라 사주한 여자. 어떻게 보면 한 하늘을 이고 살수도 없을
만큼 지독한 악연으로 얽힌 여자.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터지는 가증스러운 여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처절하게 망친 그 일을 그 망할 년은 단지 재미삼아 한 <장난>
이라고 했다나?
마음 넓고 인격 수양 잘된 인간 강승빈. 구질구질 뭉개진 똥 덩어리 같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청산하기 위해 큰 결심하고 그 여자를 용서하기로 했지만, 그런데 정작 이
여자 하는 꼴이 아무리 생각해도 점잖게 말로 충고해서 될 일이 아니더라나. 착해지
는 것은 다음날부터 하기로 하고 인생 딱 한 번만 망가지기로 결심한 후, 그 여자를
보기좋게 박살을 냈다고 그녀는 굉장히 <반성(설마?.. ㅡㅡ;;)>하는 낯빛으로 고백했
다. 그런 승빈의 활극을 들으면서 왜 그렇게 휘린은 흐뭇해지던 것인지....
나 잘했죠 하는 칭찬을 바라는 눈빛을 하고, 잔다르크처럼 이를 악물며 승빈은 마
치 그 간악한 여자가 앞에 있기라도 하듯이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 망할 년 머리를 확 뜯어버려야 했던 건데.. 지하 선배만 아니었으면 그냥 의자
들고 머리통을 박살냈을 거야. 내가 당신 체면 생각해서 그 정도로 끝냈는데 말이지,
내일 당장 그 년 경찰서에 집어넣어 평생 콩밥 좀 먹게 해요! 아우 씨펄!! 생각하면
할수록 분하네! 더 퍼부어주고 올 걸 잘못했어. 그 잘난 낯짝에 오선지를 그려주고 쌍
코피를 터뜨려야 했다고."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럽던 여자를 속 시원하게 혼구멍냈지만 왜 이렇게
마음이 개운치 않느냐고 슬퍼하던 그녀. 사실 그녀는 웃으면서도 통곡하고 싶었던 것
이리라. 결국은 알아버린 진실에 대한 막막함.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것들에 대하여
그녀는 왜냐고 고함지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면서 승빈이 반항적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나 정말 바보 같아서... 아. 정말 바보 같아. 정말... 정말.... 그래서 싫었어."
그녀가 흐느낌처럼 웃으며 마치 피난처를 찾는 사람처럼 휘린의 가슴에 깊이 얼굴
을 묻었다. 아마도 자존심 강한 그녀는 자신의 눈물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리
고 그녀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세상에서 난... 사람이...제일.. 무서워요, 휘린씨."
"그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존재가 사람이야.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리면서도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양심의 가책도 전혀 못 느끼는 사람도 많
거든."
우울한 휘린의 말을 들으며 승빈의 어깨가 가냘프게 흔들렸다.
"설마 그때 일.... 그 여자가 시킨 짓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알아. 넌 너무 바보처럼 착한 여자니까... 사람이 그토록 잔인하고 사악할 수도 있
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겠지."
"자기 때문에 그런 일 벌어졌다고..... 지하 선배 너무 힘들어했어. 그 일을 알고 나
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만약.... 내가 그 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만 이
런 무서운 진실을 알고 있었겠지. 그는 과연 내게 오유나가 원흉이라고 말해 주었을
까?"
"아니. 못할 거다. 그가 미리 알았어도 과연 그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었겠
니. 자신 때문에 네가 참혹하게 망가지게 되었다고 고백할까? 다 내 죄라고 고해성사
라도 할까? 아니 절대로 감히 그러지 못했을 거다. 사람은 그렇게 용기있는 존재가
아니다, 강승빈."
".....내가... 지하 선배 원망한다면... 나 나쁜 여자일까? 휘린씨?"
그러나 휘린은 바보같이 착한 그녀가 이미 지하를 용서했음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비겁하고 나약하고 때때로 아주 치졸한 존재라는 것을 그녀는 이해하고 있
다고, 그리고 곧고 당당한 그녀는 용서할 수 없는 일까지 용서할 줄 아는 강함을 가
진 존재였다.
복수는 나의 몫, 휘린은 승빈의 부드러운 머리타래를 쓰다듬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가족들과 승빈의 명예까지 걸려있는 문제라 유나라는 그 여자를 공개적으로
법정에 끌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승빈이 당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
악녀에게 응징을 내리리라. 그리고 그 역할은 누구보다도 무형이 잘 할 수 있을 것이
다.
'이것을 끝으로 네 악몽이 완전히 끝났으면 좋겠다. 마누라. 다시는 네가 상처받지
않도록, 가슴아파 하지 않도록 내가 널 지켜. 널 행복하게 해. 넌 그냥 내가 너에게
줄 행복한 세상 안에서 마음껏 웃으며 사랑하며 살면 돼. 그게 네가 날 사랑하는 방
법이고 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거야, 승빈아.'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승빈의 휴대 전화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액정화면 안에 지하
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내 아내에게 무슨 볼일 있습니까?"
마치 그의 얼굴을 후려갈기듯이 딱딱한 휘린의 눈빛과 목소리에 애초부터 질린 것
일까? 지하의 얼굴이 가면처럼 굳어있다.
-"....윤휘린씨. 승빈이에게 아니라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말하세요."
"....꼭 전해주면 좋겠습니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그리고..."
목이 메여 차마 말하지 못하는 듯, 장성한 사내의 눈에서 거짓말처럼 눈물이 흐른
다. 그러나 그가 사납게 주먹을 들어 그 눈물을 지워버렸다. 지하는 다시 고개를 들어
곧게 휘린을 응시했다.
-"전..... 떠납니다. 당신 말대로 다시는 승빈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마지막 부탁은 할 수 있겠죠? 승빈이를... 꼭, 꼭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
"그건 내 일입니다. 내 아내에 대하여 내가 책임진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만 끊
죠!"
휘린은 매몰차게 먼저 수화기의 off 버튼을 눌러버렸다.
"누구... 전화?"
승빈이 잠에 취한 얼굴을 들고 휘린을 바라본다. 휘린은 미소지으며 그녀의 눈을 다시
감겨 버렸다.
"아, 별 것 아냐. 어서 자. 내 친구야."
휘린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지하의 마지막 말을 뭉개버렸다.
그 다음날, 승용차 한 대가 험한 미시령 고개에서 운전자의 조작미숙으로 벼랑에
굴러 떨어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망가지고 불에 탄 채 발견되었다는 뉴스 또한 휘
린은 절대로 승빈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사고를 당한 그 승용차가 지하의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어 보았자 대체 좋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승용차 안에서 불에 타고 심하게 훼손된 남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도대체 무엇하러 그녀에게까지 알려준단 말인가?
<33>
-"새 아기냐?"
"네. 아버님."
-"도착했구나. 내려오너라."
승빈은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종종걸음으로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한 승용차로 다가
갔다.
오늘 그녀는 시아버지 윤회장과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했다. 시어머니 지여사가 계
모임 친구들과 나흘 예정으로 일본 온천 여행을 떠나버린 것이다. 자신에게 사전 허
락도 받지 않고 거기다가 남편은 혼자 버려놓고 이래도 되는 거냐고, 자기는 이제 마
누라에게 퇴물로 버림받았다고 굉장히 오버하며 한탄하는 시아버지의 모습이 얼마나
웃기든지.
-"아버님 하시는 말씀이 어쩜 그리도 인간 윤하린씨를 닮았냐? 아니지, 한솔 아빠
가 아버님을 닮은 건가? 오버하는 건 진짜 집안 내력인가 봐. 정말. ㅡ,.ㅡ"
시어머니의 돌발적인 가출(?)사건으로 인하여 상당히 살기등등해진 성북동의 불편
한 분위기를 알려주며 동서 나해는 노인네 사랑싸움 중간에서 자신이 못살겠다고 말
하며 깔깔 웃었다.
"어머님은 갑자기 왜 가신 거래요?"
-"그냥 바람쐬고 싶다고 가셨어. 그 나이에 남편 응석(?) 받아준다고 스물 네 시간
집안에만 계시리? 일주일은 더 계실 모양이야. 아버님께서 일본으로 쳐들어가시기 전
에 우리가 무슨 방도를 세워야지 안되겠어."
시어머니가 없으면 모든 사람이 다 눈치챌 정도로 기운이 빠지는 애처가 시아버지
께서 일주일이나 그 사랑하는 어부인을 못 보시게 되었으니 심기 불편한 것이 당연하
지. 토라진 어린애처럼 입이 만발은 튀어나온 그를 위로해야겠다고 나해가 승빈의 옆
구리를 찔렀던 것이다.
-"동서가 먼저 아버님께 데이트 신청해봐, 도련님도 안 계시는데. 아마 무척 좋아하
실 거야. 아버님께서 동서를 무지 귀여워하시는거 알지?"
휘린은 일주일 전에 중동과 터키의 현지 공장을 돌아보는 출장을 떠났다. 결혼한 후
처음 떨어진 그들이었지만, 생각만큼 쓸쓸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녀를 잠시도 혼자
두지 않는 극성스런 성북동 식구들의 배려 때문이리라.
나해의 귀뜸이 아니었다 해도 듬직한 나무처럼 크고 넓은 시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어버린 승빈에게 시아버지 윤회장은 다
시 돌아온 친정 아버지 대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빈은 유니버셜 발레단 송년
공연 티켓을 예매해놓고 시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아버님, 저랑 데이트 해요
하고.
언제나 여자들에게는 최고로 친절한 시아버지 윤회장은 승빈이 다가가자 차 문을
열고 나와서 그녀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승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직접 운전하셨어요?"
"솜씨가 녹슬면 안되지. 타거라. 늦었다."
승빈은 헤죽 웃으며 조수석으로 다람쥐처럼 쪼르르 올라탔다.
"밥은 먹은 게야?"
"짜장면이요."
"너, 얼굴이 반쪽이다. 짜장면을 왜 먹어? 밥을 먹어야지."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더니 시아버지 윤회장 눈에 둘째 며느리인 승빈은 아무래도
더 어리게 보이고 더 안스럽게 보이는가 보다. 승빈은 꺄득이며 웃었다.
"낼 모레가 월급날이잖아요. 돈이 없어서요. 저 용돈 좀 주세요, 아버님."
"쯧쯧, 인석 말하는 것 하고는... 휘린이 놈이 생활비 안주더냐?"
"칫, 월급을 타오면 뭣해요? 그 남자, 제 맘대로 무지 카드만 긁고 다니는데요. 힝,
지난 달에는요. 월급 반을 카드 결제한다고 가져갔단 말예요. 그래서 저가 관리비도
못 낼 뻔했단 말예요. 그런데도 맨날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자고 꼬시고, 퍽퍽 쇼핑
만 잘 한다구요. 제가요, 그래서 이번 달에도 그러면 자기 카드 다 잘라버린다고 그랬
어요."
"잘 했다. 그놈은 어려운 것을 몰라서 그런다. 네가 아주 다잡아서 사람 좀 만들어
라."
그 말이 채 끝나자 말자 승빈은 아주 진지하게 시아버지 윤회장에게 되물었다.
"그럼.. 아버님. 제가 휘린씨를 막 패도 되요?"
지구를 반 바퀴 돌아서 터키의 자기부상 철도 가설 공사현장에서 현장감독과 이야
기를 나누고 있던 휘린의 등골에 싸늘한 기운이 확 스치던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분명 작업복에 땀이 배어날 만큼 무더운 날씨인데 왜 뼈가 시린 추위를 느끼게 되
는 것인지 휘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득득 긁고 그리고 다시
현장감독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나 조만간 그가 한국에 돌아가면, 승빈이 공작해 만들어놓은 경악스럽고 처절
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느낀 소름끼치는 추위는 유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될 터인데...
불쌍하다 밴댕이. 딱 걸렸다. 윤휘린.
승빈이 생글생글 웃으며 옆구리에서 간질간질 꼬시는 바람에 시아버지 윤회장이 휘
린의 카드를 전부 지불 정지시키고, 그의 월급은 모두다 승빈의 통장으로 집어넣으라
고 지시했다는 참혹한 진실을 지구 저편에 있는 그가 어찌 알리요? 거기다가 '그 놈
이 말 안 들으면 막 패라'고 야구 방망이까지 사 주었다는 사실까지 알면 아마 윤휘
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터인데..
고로 남자는 모름지기 장가를 잘 들어야 행복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다시 한번
입증이 된 셈이다.
"어떠셨어요?"
공연관람을 마치고 근처의 찻집에 가서 홍차를 마셨다.
승빈은 아직도 무대 위에서 춤을 추던 무희들의 그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몸에 대한
감동을 버리지 못했다. 본의 아니게 토슈즈와 바를 놓아야했던 과거의 아픔은 뒤로
하고 아직도 자신이 얼마나 춤을 사랑하는지, 무대 위에서 움직이던 그들이 마치 자
신처럼 느껴지던 감정의 전이를 느끼면서 흥분해서 시아버지께 물었다.
"좋더구나. 오랜만에 아기 때문에 좋은 구경을 했는걸. 그런데, 너도 발레를 했다고
하지 않았니?"
승빈은 아쉬운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옛날이죠 뭐. 유치원 때부터 했는데...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무용을 하셨어요. 아마
도 그 내림이었던가 봐요. 하지만, 바를 놓은 지가 십 년이 넘었는걸요. 발레는 몸을
쉬면 힘들어요."
"춤을 추고 싶은 거냐?"
승빈은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혹한 삶을 홀로 헤쳐나갈 때 그녀에게 있어 무용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요 구
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절망이기도 했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서, 감당하고 견뎌내야
할 삶의 무게에 치여서 자꾸만 멀어지던 꿈이었지만 그러나 끝끝내 포기할 수는 없었
던 열망.
"..아니요! 아니... 네."
잠시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어쩐지 몸이 아파왔다. 그래서 혼자서 하다못해 음악을
틀어놓고 힙합이라도 추어야만 했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것은 그녀가 숨쉬
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본능이었고 달성해야할 소명 같은 것이었다.
"발레를 했지만... 사실 전 발레보다는 어머니 뒤를 이어 현대무용을 하고 싶었어요.
언젠가는 저도 무대에 올라 친정 어머니처럼 갈채를 받으며 춤을 추는 꿈을 꾸기도
했었지요. 비록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럼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지 않니?"
"네?"
찻잔을 놓고 윤회장은 승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네가 춤을 추고 싶다면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이다."
"하.. 하지만... 제가 무용을 포기한지는 십 년이 넘었는 걸요?"
승빈은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다시 춤을 시작할 거라곤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
다. 그냥 취미로 즐기며 살아가는 것만로도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여겼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춤을 다시 시작하라는 윤회장의 말
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듯한 강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미 몸이 굳어져서... 힘들어요. 뼈가 견뎌내지 못할 거라구요. 춤을 출 수 있는 몸
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저 못해요, 아버님."
"세계적인 무용가 홍신자씨도 남들이 무대에서 내려올 나이인 서른이 다 되어서야
무용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너도 못할 것이 뭐가 있지?"
"어, 저는..."
"사는 것은 별 것 아니다. 그리고 아주 짧지. 짧고도 한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사람이 신명도 나는 거고 사는 보람도 생기는 거고 그리고 파생적으로 주
변도 같이 행복해지는 거지. 난 네가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넌 재능도 있
고 열정도 있어. 그것을 그냥 썩일 테냐?"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준열한 윤회장의 말 앞에서 승빈은 아무 말도 못하고
탁자 끝만 내려다보았다.
"물론 지금처럼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겠지. 집에 돌아와
남편 와이셔츠나 빨고 찌개나 끓이며 네 남편 하는 일에 내조나 하면서 아주 평범하
게 살수도 있겠지. 물론 그것이 가치없다 말하지는 않겠다. 또 그렇게 살아도 행복하
다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네 삶의 전부라고 생각해보렴. 그러고도 정말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주 천천히 승빈은 고개를 저었다. 눈을 들어 윤회장을 응시하는 승빈의 눈에는
물기가 고여 있었다.
".....아니요. 그렇게 살면... 저... 정말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버님. 전, 저
는... 정말, 정말 춤을 추고 싶어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이듬해 2월 8일. 설날 다음날. 성북동 윤지유 회장 댁 가족실.
예년대로라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윷놀이라도 하고 있어야 할 지금 이 때.
성북동 거실에는 때아닌 시베리아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차가운 북풍이 불어오는 근원지는 바로 두 사람. 창가의 소파에 앉은 지무이 여사
의 옆에서 붙어 앉아 삐친 얼굴을 한 승빈. 그리고 팔짱을 끼고 턱을 치켜 든 채 살
기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휘린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절대 타
협 불가능 모드의 침묵과 꼬나봄의 시선에 넓은 거실은 지금 온통 살얼음 같은 긴장
감이 흐르고 있었다.
누구라도 한마디만 했다간 삽시간에 거대한 허리케인이 몰아칠 것만 같은 분위기를
깨고 지금껏 침묵한 채 손 아래 동생 내외의 싸움(?)을 지켜만 보던 하린이 한마디
툭 던졌다.
"투표, 해! 그게 공평하겠다."
"투표는 무슨 얼어죽을 투표야? 내 마누라가 유학가는 데에 왜 가족들 투표가 필요
한 건데? 엉? 이건 나하고 내 마누라 사이의 문제라고."
휘린이 발끈해서는 거칠게 항의했다. 겁도 없이 형 하린의 말에 토를 달며 반항하
는 것으로 보아서 소심하고 애교많은(?) 본성 속에 숨은 윤휘린의 더러운 성깔이 마
침내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내가 이해를 하겠다. 이 나이에, 나이 서른인 여자가,
그것도 결혼해서 남편도 있는데, 오로지 토깽이 같은 아기를 바라는 남편의 뜻을 무
시하고 유학을, 그것도 저 혼자서 뉴욕으로 날라 가겠다는 것에 대하여 내가 왜 찬성
해야 하는데? 그리고 왜 그 문제에 대하여 남편인 나를 빼고 다른 식구들이 난리를
치는 건데? 엉? 이래도 되는 거야? 내가 이렇게 배신당해도 되는 거냐고오!~~~~"
"칫, 누가 뭘 어쨌다고 그래? 내가 바람이라고 피웠남? 진짜 오버하고 난리야."
승빈이 입이 만리나 튀어나온 채로 종알종알 했다.
말 그대로 환장해서 죽을 지경인 윤휘린. 반성을 하며 조용히 고개를 떨군 채 순종
을 해도 시원찮을 마누라 덤비는 꼴에 밴댕이 소갈머리인지라 다시금 뿔이 돋기 시작
해서 승빈을 향해 삿대질까지 하며 게거품을 물었다.
"이 씨! 조용히 안 해? 뭘 잘했다고 입을 벌려? 내 카드 다 잘라놓고 내 월급 다
압수해놓고 내 차까지 세금 많이 든다고 팔아 치워버린 주제에! 자기는 자기 하고싶
은 대로 다 해놓고 그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 날 버리고 유학을 가시겠다? 야, 강승
빈. 너 그러면 안되지! 너 그렇게 독하게 굴면 진짜 벌받는다. 알어?"
말 그대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대성통곡을 하고싶은 인간 윤휘린. 믿었던 사람에게
뒷통수를 맞아도 이렇게 대차게 후려맞을 수가 있는 것인가?
남편이라는 불쌍한 인간은, 오직 저만을 호강시켜주겠다는 일념 하에 먼 먼 이국에
까지 출장을 가서 땀흘리며 일하고 돌아왔건만, 이 놈의 마누라라는 것이 집구석에
앉아서 해치운 사악한 짓 좀 보소.
공항까지 마중 나온 승빈이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그 사이도 참지 못하고 찐한 삐
리리를 연출하며 환영을 해 주길래 역시 나한테는 마누라밖에 없구나 하며 흐뭇해 한
것도 잠시. 저녁을 먹자말자 인간 강승빈. 떡하니 안면 몰수한 채로 하는 말, "나, 자
기 차 팔아버렸어" 이러는 것이 아닌가?
"허거걱!!! 내... 내 차, 내 예쁜 미르를 팔았다고라고라?~~~~ 그거 국내에는 단 한
대뿐인 신형인데!! 자기가 팔아치웠다라고라??"
"응."
"왜, 왜?!~~~~~~~~~~~~"
"자기 연봉에 비하여 너무 과한 차라는 결론이 나서 말야."
"내....차. 내.. 이쁜 차!! 누, 누가 허락했어? 엉? 엉?!~~ 너더러 내가 기름값 내라고
그랬냐? 세금 책임지라 그랬냐? 그런데 왜 이런 만행을 저지른 건데?"
"당신 신탁 구좌가 다 동결됐거든. 아버님이 십 년 있다가 풀어 주신대. 그리고 당
신 월급도 다 내 통장으로 들어올 건데, 내가 계산해봤더니, 생활비하고 카드 빚 갚고
적금들면 당신월급으로는 그 차 운영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팔았지. 성북동 형님이
타시던 중고 차 우리더러 헐값으로 준다 하길래 좋다고 그랬어. 내일 박기사님이 가
지고 올 거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극악한 말을 하는 승빈의 뻔뻔함에 완전히 게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간 윤휘린.
지금껏 회사에서 받는 연봉은 씹다버릴 껌 값으로만 알고 살던 밴댕이. 심심하면
신형으로 비싼 차만 골라 바꾸어가던 우아한 취미생활. 번쩍번쩍한 카드들을 들고 다
니면서 폼나게 마구 긁어대던 멋지구리 인생이 완전히 쪽박나게 생긴 것이다. 이 뻔
뻔하고 사악한 마누라가 시아버지더러 남편 용돈을 더 올려주라고 공작을 해도 모자
랄 판에 있던 돈까지 깎게 하고 곳간 열쇠까지 빼앗아?
아니 아니다.
그놈의 콩깍지가 죄라고, 휘린은 심호흡을 하며 그래도 한번 알뜰하게 살아보려는
기특한 어부인을 이해하려고 무진장 노력했었다.
뭐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법. 새 차? 할부로 사면되지 뭐. 신탁 동
결? 해봐라. 감춰둔 주식 팔아먹지.
이렇게 생각하며 간신히 자리에서 털고 일어난 휘린. 승빈이 그 다음에 터뜨린 폭
탄만 아니었다면 정말, 정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누라의 천인공
노스러운 행동을 참아내려 했었다.
중증 두통과 심장병으로 끙끙 앓으면서 처량맞게 베란다에 나가 담배 한 대를 척
피워 물었는데.... 바로 그 순간 연타로 등뒤에서 떨어지는 천둥벼락. 마치 옆집에 마
실이나 다녀온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승빈이 한마디를 툭 던진 것이다.
"나 뉴욕으로 유학 갈 거야. 다음 달에."
그날 휘린은 불붙은 담배를 그대로 삼킬 뻔했다. 뒤로 넘어가 베란다 10층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밤 내내 펄펄 뛰며 난리를 치던 휘린, 죽어도 갈 거
얏!! 하고 고함을 치는 승빈을 이끌고 새벽같이 성북동으로 달려갔것다?
결혼 한지 반년도 안된 철딱서니 둘째 며느리가 당신 아들인 남편을 버리고 혼자
유학을 가겠다는 있을 수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부모님과 형님 내외도
알아야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휘린의 편을 들어주어야 할 식구들이 전부다
어찌된 것이 남 일처럼 코만 후비고 못 들은 척 귀만 파고 있는 것이냔 말이다.
펄쩍 뛰는 휘린의 반응에 하린이 너 그렇게 까불면 맞는다!~~ 하는 눈빛을 하고 냉
정하게 잘라 말했다.
"너희 내외 문제지만 우리 식구들 문제이기도 하니 투표하는 게 공평하지. 제수씨가
딴 것도 아니고 못 다한 꿈을 펼치기 위해서 유학을 가겠다는데 우리가 무작정 반대
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네가 그렇게 기를 쓰고 반대하는 이유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합리적이지 못하고 말야."
"합리적? 얼어죽을! 그럼 제 하나의 꿈을 위하여 사랑하는 남편을 버리고 가는 게
합리적이냐? 남의 일이라고 말 그렇게 쉽게 하면 형, 안 되지! 형은 형수가 꿈 찾는다
고 혼자 유학간다면 보내주겠어?"
"보내주지. 잊었냐? 이 사람은 혼자 파리로 갔잖냐. 그것도 6년이나."
"저는 이혼하고 갔어요, 여보, 당신이 절대로 안 된다고 해서요."
잘난 척 하는 하린의 입을 한 대 쥐어박듯이 나해가 아주 상냥하게 대꾸했다. 그녀
가 생글생글 웃으며 휘린을 바라본다.
"죽어도 동서는 가겠다는 것 같은데, 서방님이 끝까지 반대하면 뭐 그 수뿐이네요.
두 분이 이혼해야죠."
"그래. 그렇게 두 내외가 마음이 안 맞으면 할 수 없는 것 아니냐? 부부지간 양보
를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오래 못 가는 법이다."
나해의 말에 보태기라도 하듯이 윤회장이 한마디했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모친 지여사도 맞아, 맞아! 하고 맞장구를 친 것은 그때.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감지한 밴댕이 휘린의 등골에 소름이 짝 끼치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것 요상하게 분위기가 흘러가네... 잘못하면 이 자리에서
승빈과 휘린더러 당장 갈라서라 이런 말이 나오는 거 아닌가?
간이 약간 졸아든 휘린은 일단 한발자국 물러서서 어름어름 말을 수습했다.
"아니, 뭐... 내가 이혼을 하겠다는 게 아니고.... 나는 다만, 이것은 부당하다 이거지!
길에 나가서 물어봐요! 결혼한 지 반년도 안된 남편 놓아두고 마누라 혼자 유학가버
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나는 뭐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거지!"
"사내자식이 마누라 하나 품에 감싸고 키워주지 못하면서 무슨 얼어죽을 남편 권리
타령이야?"
지여사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휘린은 그나마 제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어머
니까지 승빈의 편을 들자 완전히 열을 받았다. 그래서일 것이다. 감히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어머니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만 것은.
"하지만 안돼요! 난 못 보내! 안 된다구우!~~~~"
"왜?"
"....왜냐면, 왜냐면..."
"그래, 왜냐고? 네 대답이 합리적이면, 제수씨도 네 말을 들어줄 거 아냐? 무작정
반대만 하지 말고 말을 해 이놈아!"
모든 사람 눈이 휘린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승빈도 손에 쥔 손수건을 잡아 비틀면
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휘린은 마치 미친놈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득득 긁으며 알
맞은 말을 찾으려 노력했다.
대체 왜 승빈이 유학을 가는 게 싫을까?
그녀가 오래 전 포기했던 꿈을 찾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그녀가
행복하면 그 역시도 행복한 것이니까. 그녀가 미래를 향해 행복한 꿈을 향해 나아가
기를 바라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바로 휘린 자신이니까.
만약 그녀가 혼자 뉴욕으로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도 미국 본부로 자리를
옮기면 될 것이다. 방법을 찾는다면 얼마든지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빈이 혼자 떠난다는 말을 듣던 순간, 휘린의 마음속에서 문득 무엇인가
하나 뚝하고 분질러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아주 고통스러운 기억 같은 것
이기도 했다.
한 여자를, 정말 소중한 사람을 그렇게 놓아준 적이 있었다.
한번도 진정 행복한 웃음을 웃어보지 못했던 그녀가 정말 행복해지라고. 정말 사랑
하는 사람 옆에서 한번은 웃으며 살아가라고, 그 사람에게로 고정된 정직한 자신의
마음을 접어버리고 그 사람을 보낸 적이 있었다.
너무 보고싶어 그리움에 지칠 때면, 잠시 비행기만 타면 가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자신을 속이며 그렇게 놓아준 그 사람. 그것이 영원한 이별인지도 모르고... 아무런 슬
픔없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렇게 손에서 놓은 적이 있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부모를 잃은 고아처럼 그토록 소중한 여자를 어이없이 잃어버리고는 오랫동안 그 사
람을 찾아 아프게 방황하게 될 줄도 모르고....
다시는 그렇게 보내지는 않으리라 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가장 정직한 그의 심장
이 속삭이는 대로 사랑하고 곁에 두리라 마음먹었다. 삶이 다시 한번 그에게 소중한
사람을 하락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놓아주지 않고 아프게 하지도 않고 후회없이
사랑하리라 다짐했었다.
휘린은 돌아서서 승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발을 옮겨 승빈 곁에 다가가 살
짝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거기 가서... 당신, 영영 안 돌아오면 난 어떡해?"
"...휘린씨."
"나는... 당신이 내 옆에 없으면 불안해. 당신은 날 의지하지? 하지만 난 당신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더 당신에게 의지해. 당신이 잠 못들어 나를 끌어안을 때 나도 그래.
나는 당신이 너무 소중해서...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서...
나는 당신이 눈 앞에 안보이면 너무 무서워."
아아, 이 여자를 사랑한다.
휘린은 두 팔로 승빈의 어깨를 아듬으며 사무치도록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랑하다 못해 심장이 저릴 만큼. 잠시라도 떼 놓으면 그가 갈망에 못 이겨 죽어버
릴 만큼 그렇게 이 여자를 사랑한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어찌 손에 놓으랴? 절대
로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곁에서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보송보송하던 승빈의 눈이 휘린의 그 말에 문득 안개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휘린씨."
"그러니까 가지마. 아니 갈려면 나랑 같이 가자. 승빈아."
"쳇, 아주 영화를 찍으시는군. 야, 서니. 들어가자! 애들 눈 가려! 미성년자 관람불가
야. 저 놈은 염치도 없나? 어떻게 부모님 앞에서 저따위 낯뜨거운 짓을 할 수가 있는
거야?"
눈꼴이 시다 못해 치켜 올라간 하린 내외가 아이들을 몰고 삼층으로 사라지고, 철
딱서니 없는 막내아들이 제 마누라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가지 말라 애원떠는 모습에
기가 찬 윤회장 내외. 아주 주접을 떨어라! 이러면서 첫 번째 부부싸움에서 화해한 신
혼부부가 연출하는 낯뜨거운 광경을 피하여 이층으로 피신을 하셨다.
승빈이 휘린의 팔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진솔하고 연약한 애원에 마음이 허물어진
것이 분명했다. 휘린은 마음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더 애끓는 목소리로 마누라
를 꼬셨다.
"너 혼자 가면 난 아마 불안해서 잠도 못 잘 거야. 술 많이 먹고 음주운전 할지도
몰라. 그래서 다치거나 병 날거야. 그러니까 승빈아. 안갈 거지? 나 버리고 가지 않을
거지?"
"...그래도 갈 거야."
배신감에 치를 떨며 막 고함을 치려는 휘린의 입술을 승빈이 손가락으로 막았다.
"갈래요. 왜냐하면... 당신에게 돌아올 수 있으니까."
승빈이 손을 들어 부드럽게 휘린의 볼을 쓸어 내렸다. 그녀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신뢰로 빛나고 있었다.
"돌아올 곳이 있어서 떠나는 거야. 그래서 나 떠날 수 있는 거잖아. 항상 당신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거 아니까, 날 사랑하는 것을 아니까, 난 혼자 갈 수 있어. 여보, 진
짜 약속할게. 정말 멋진 사람되어서 당신에게 돌아오겠다고. 작은 내가 사랑하기에 정
말 크고 멋지고 아름다운 당신에게 걸 맞는 여자 되어서 꼭 돌아올게. 당신이 날 기
다리는 거 아니까 난 아마 수천 배 더 힘낼 수 있을 거야. 당신에게 빨리 돌아와야
하니까. 늘 기다리고 있을 당신 보고싶어서 나, 죽도록 힘내서 열심히 할거야 그리고
당산에게 돌아올게."
윤휘린, 강승빈 부부싸움 라운드 원. 강승빈 WIN! 윤희린 LOSE!
<에필로그. 혹은 프롤로그,>
새해 4월 강승빈 학교 사직하고 뉴욕 <머스커닝햄> 무용스쿨로 유학 떠나다.
6월, 윤휘린. 미국 현지법인 본부장으로 발령 받다
3년 후 2월, 강승빈 임신 6개월의 몸으로 무대에 서다. 윤휘린 심장마비 일보직전으
로 병원에 실려가다.
7월, 강승빈 첫아들 윤 강을 출산하다. 같은 달 뉴욕 <머스커닝햄> 무용스쿨 졸업하
다. 윤휘린, 아버지 교실에 등록하다.
그 이후.... 기록없어 확인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