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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백성의 자격. 함석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가장 복음적인 말씀으로 흔히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구절은, 이것을 고립한 일어(一語)로만, 즉 아무 역사적 관련이 없이 그저 고뇌하는 인생을 보시고 예수께서 발하신 자비의 선언이라고만 보아도 감사의 눈물 없이는 지나가지 못할 위대한 말씀이다. 또 사실 일반적으로 하는 해석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말씀의 근본 뜻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것을 그 발(發)하시던 때의 실지 경우를 심중에 두고 씹어보면 일층 더 놀라운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하시던 때의 심중을 헤아리려면 창세기 첫머리부터 읽는 것이 정당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그만두고라도 적어도「마태복음」9장말(末)에서부터는 보아야 한다. 거기 보면 예수께서는 그 무한히 자비하신 눈으로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간구하여 일꾼을 보내어 추수하게 하여 주소서 하라”(마태복음, 9:36~38)고 제자들에게 명하여 전도의 급한 것을 말씀하시었다. 곡식이 누렇게 다 익어 추수하기가 시각이 급하게 된 것같이 인심의 상태가 천국 복음의 전파를 기다림이 그렇게 급하였다. 그래서 10장에 보면 12제자를 불러 권능을 주시고 간독(懇篤)한 주의를 주시어서 사방으로 보내어 전도하게 하시었다. 그리고 자기도 “가르치시며 반포하시려고 각 성에 가시었다.”(마태복음, 11:1) 그리하여 농부가 누렇게 익어 고개가 푹푹 숙으러진 곡식단을 기쁨으로 걷어 들이듯이 회개하여 아름다운 영혼을 천국문 안으로 안아드리기를 기대하시었다. 그런데 실지는 어떠냐. 결과는 기대와 달라서 “권능을 가장 많이 펴신 고을이 회개치 않았다.” (마태복음, 11:20) 이때에 예수의 마음이 어떠하였으랴. 한번 생각하여볼 필요가 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농(濃)한 법이라, 무한한 사랑의 맘에 느껴진 아픔도 무한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고로 죄가 없는 그의 말에도 거룩한 질투가 불붙지 않을 수 없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마태복음, 11:21)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마태복음, 11:23)
육의 생각으로 하면 천지가 아득하고 가슴이 연(鉛)같아지며 혼백이 황(黃)밀처럼 녹으려 할 때다. 내 희망아 너는 어디 있느냐 내 이상아 너는 어디로 갔느냐 하고 부르짖을 때다. 그러나 저는 육으로 난 자가 아니요 성령으로 난 자였다. 고로 욕(慾)에 속한 사람같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실패 속에 도리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를 보시고 더욱 광명의 나라로 올라가셨다. 그리하여 25, 6절의 저 놀라운 기도가 되어 나왔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태복음, 11:25~26)
누가복음에 보면 이 기도를 하시는 때에 예수는 “성신(聖神)으로 기뻐하시었다”(누가복음, 10:21)고 하였다. 과연 성신 아니고 육으로는 이런 아름다움, 이런 장엄, 이런 영광, 이런 성스러움이 있을 수 없다.
감사의 기도 있은 후 거룩하신 흉중에 광명은 한층 더하고 확신은 새로 더하였다. 그리하여 새 증거가 있다. 27절은 예수 자신의 독백이라고도, 혹은 하나님과 그 지으신 만물 앞에서 하신 진리의 표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을 잠심(潜心)해보면 이 안에 종전에 비해 진리의 일단 높은 계시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일반으로 천국을 반포하였으나, 사람이 거기 응치 않고 들어오는 자는 일부 소수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태복음, 11:27)
하는 새 진리에 이르렀다. 여기서 예수의 전도 방침은 일변할 수밖에 없어졌다. 종래 일반 공중을 상대로 하시고 교회당을 찾아들어가 가르치시며 널리 전파하시던 것을 그만두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며 오묘한 천국복음을 일부 소수자에게만 말씀하시고 일반 청중에게는 들어도 듣지 못하며 보아도 보지 못하게 하시려는 듯 비유가 아니고는 말씀하시지 않는 방침을 취하시게 된다. 위에 말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는 선언은 이 새 전도 방침을 표명하시는 제일성이었다. 고로 그 뜻의 중심은 흔히 생각 하는 것같이 “다 내게로 오라”는 ‘다’에 있는 것이 아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이라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른다. 너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은 내게로 오너라 오면 내가 너희를 내 나라에 받아들여 편히 쉬게 하리라, 하시는 뜻이다.
이로써 보면 이 선언은 예수가 그 길을 넓히면서가 아니라 실패 후에 전도 방침의 일대 전환을 하여 길을 좁히면서 하신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에게 실패가 있다면 이상하게 들을 수 있으나, 예수에게도 실패가 있다. 예수에게도 있다기보다도 예수의 일생은 사람의 말로 하면 실패의 일생이라 함이 정당하다. 저의 부족 무능력으로 인하여서가 아니라 인간의 완악(頑惡)으로 인하여서다. 예수라도 성신을 거역하는 완강한 인심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복음의 역사에서 자미(滋味)있는 것은, 실패는 항상 보다 높은 급의 진리를 끌어내는 일이다. 인간이 신의 경륜에 거슬리지 않고 순종하면 물론 그것으로 성의를 이루시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거슬린다 하여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에 돌아가지는 않는다. 거슬리면 거슬릴수록 그로 인하여 한층 더 높은 진리가 드러난다. 예수의 공중 전도가 만일 성공이 되었다면 물론 이상 없이 좋은 일이요 그로써 하늘나라가 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중은 그를 거절했다. 거절했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을 불러 천국 백심을 삼는 귀한 진리는 나타났다.
그러면 일반전도에 실패하신 예수는 왜 새 전도의 대상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불렀느냐, 그것이 우리가 알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그를 위하여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왜 지혜 있는 자, 지각 있는 자에게는 천국 이치를 감추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는 것이 성의냐.
둘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냐.
셋째, 아들이 자기의 하고자 하는대로 나타내어 보여준다는 것과 내게로 오라는 것과는 어떻게 관계가 되느냐.
첫째에 관하여는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고 명쾌하고 힘있는 바울의 말을 들으면 족하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 1:26~31)
예수의 말씀하신 ‘어린아이’를 설명하면 ‘어리석은 것’ ‘약한 것’ ‘천 한 것’ ‘멸시받는 것’‘없는 것’이다.
둘째,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라는 것도 그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은 진실히 살려는 한, 짐임을 면할 수 없다. 사회에 대한 의무라는 것이 짐이요, 가정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이 짐이요, 오척 단구(短軀)를 70년간 지구 인력에 항거하여 끌고 다니는 것이 우선 짐이다.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이 방촌지간에 들어 있는 것이 짐이다. 가릴 것 없고 꺼릴 것 없이 그저 달라고 손을 허위적이는 것 이것을 욕(慾)이라 하고, 누를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이 그저 올라가자고 불길처럼 타는 것 이것을 이상이라 하며, 내가 울거나 웃거나 냉연(冷然)한 태도로 자기 올 데로 오고 자기 갈 데로 가는 것, 이것을 자연이라 하는데, 그간에 일점 깜박거리는 존재가 있어 “너는 선할지어다!” 하고 명령을 한다. 과연 인생이란 짐을 진 존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온갖 활동은 이 짐을 처분하려는 데서 나온다. 경제 여기서 나오고 정치 여기서 나오고 학문 예술이 여기서 나오고 사상 도덕이 여기서 나온다. 쟁탈도 여기서 나오고 도적질도 여기서 나온다.
짐을 진 것은 그처럼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지는 상태요 거기 대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나 그 마음의 태도로 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그 짐을 지자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 짐을 면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이 후자인 것은 물론이다. 문명이란 다른 것 아니요 인간이 짐을 벗어보자는 노력이다. 크기로는 국가간의 전쟁으로부터 작기로는 개인 간의 싸움에 이르기까지 그 구경 목적하는 바는 다 같이 자기 짐을 좀 벗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벗는 방법 중에 가장 철저한 것이 자기 짐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세상이 강자라는 것은 그 짐을 기탄없이 잘 떠넘기는 자요 지자(智者)라는 것은 그 짐을 가장 교묘하게 떠넘기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강자되기를 원하고 지자 되기를 원한다. 한번 칼자루를 쓰다듬으며 호령하면 주위의 약자가 공구(恐懼)하며 자기의 최귀(最貴)의 소유로써 바치면서도 입으로 그 덕을 찬송하니 그것이 잘난 자 아닌가. 한번 선웃음을 치고 부자의 등을 어루만지면 수전노도 그 궤를 열어 만금을 바치며 그 돈을 가졌으면 스스로 저축의 고심을 않고도 인망 있는 사회사업가가 될 수 있으니 그것이 능한 자 아니며, 한번 삼촌설(三寸舌)을 놀리면 상관의 신용을 얻을 수 있고 과부(寡婦)의 신뢰를 얻을 수 있어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고 유족한 생활을 할 수 있으니 그것이 지자 아닌가.
소위 활동가, 수단가, 민완가, 일꾼 하는 것이 그 가면을 벗기고 정체를 붙잡아보면 이 짐을 떠넘기는 재조(才操) 노름꾼 아닌 것이 없고, 정당한 사업을 사회도덕에 거슬림 없이 하여서 성공하노라는 사람의 일까지도 진실의 수술대에 올려놓고 보면 이 지혜도(智慈道)에 의하지 않은 자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이것을 생존경쟁의 원리라 하며 처세의 철학이라 하며 성공의 비결이라 하여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조금도 의심치 않으려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또 그와 반대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기 짐을 감히 벗어보려 할 줄을 모르고 더구나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 할 줄을 모르고 다른 사람이 자기 것을 가져다 그 등 위에 지워도 항거조차 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피할 줄 모르고 변명할 줄을 모르고 과장할 줄을 모르고 남을 이용할 줄을 모른다. 고로 사회가 항상 저를 가리켜 단순한 자라하고 무재(無才)한 자라하고 우직한 자라 한다. 그러나 가장 곤란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저희에게 부탁한다. 대개 그들은 회피할 줄을 모를 뿐 아니라 명하는 대로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구히 짐을 진 자로 신음한다.
전자를 우리는 사람 중에 대인(大人)이라 하고 후자를 소인(小人)이라 한다. 대인이란 그 마음이 크기 때문이요 소인이란 그 마음이 적기 때문이다. 대인은 스스로 강자로 자임하고 지자로 자허(自許)한다. 우인간(友人間)에 있어서는 스스로 우이(牛耳)를 잡아 주선자(周旋者)가 되고 사회에 있어서는 스스로 지도자연하여 민중을 좌우한다. 저들은 외(外)를 힘쓰고 내(內)를 다스리지 않는 자요 결과를 보고 동기를 논치 않는다. 고로 목적은 수단을 신성화 하고 법률의 범위가 도덕의 범위라고 믿는다. 그것을 가리켜 대범이라 하고 불구소절(不拘小節)이라 하고 현실적이라 한다.
소인은 참 소한 사람이다. 저들은 세계보다도 자기 가슴 속을 더 중대시하고, 결과보다 동기를 존중한다. 인력거 자동차를 불안스러워 못 탄다 하고 한마디 원활한 말을 못하여 취직자리를 놓치고 책임감 하나를 무시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과오의 결과를 자기가 쓰고 세상이 어려워 산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기와 대학을 마다하고 촌숙교육(村塾敎育)을 주장해보기와 백미를 폐하고 현미 소미를 먹자 하기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생활을 한다.
지식이 누구보다 반드시 없었던 것 아니건만 오직 양심 때문에 그를 못쓰고, 두뇌가 누구보다 반드시 둔탁한 것 아니건만 다만 뵈지 않는 신 때문에 재간을 발치 못하고, 그리고는 세상으로부터는 편협하다는 말을 들으며 고루하다는 욕을 먹으며 시대인식을 못한다고 조소를 받고 자존한다고 비난을 당하고 내종에는 못난 자로 무시를 당하고 만다. 그리고 약한 그 어깨 위에 넘치고 넘치는 짐이 쌓여진다. 예수가 부른 것은 이 사람들이다. 저는 세상의 잘난 자에게서 실패한 후 이 못난 자 이 소심자들을 불러 그 백성을 삼기로 하였다.
셋째, 왜 그들을 불렀나. 그들의 무슨 자격을 보고 부르셨나. 다른 것 아니요, 진실 때문이다. 인생에 맡겨진 짐을 떠넘길 줄 모르고 지고 가자는 그 진실 때문이다. 이들은 소하기는 소하나 그 진실이 족히 새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참 성전을 건축하는 재료로 쓸 만하다. 저들은 비록 크나 그 안에 진실이 없다. 자기 짐을 떠넘기고 인생이 있을 수 없는데 있는 듯이 생각하고, 제가 세운 것 아닌 것을 제가 세운 듯 하나님의 것을 도적하고 민중을 기만하는 데 허위가 있다.
사구(砂丘)는 아무리 높아도 실없이 무너질 것이다. 사구 같은 그 대인들을 가지고 신의 전을 지을 수는 없다. 고로 예수가 자기 하고자 하는 대로 나타내어 뵈이는 것은 그 대인에게가 아니요 소인에게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예수의 마음에 어찌 차별이 있으리오마는 대인은 스스로의 강(強)과 지(智)로 인하여 예수를 요구하지 않는다. 고로 그들을 부를 수는 없다. 소인은 그 지는 짐에 견디지 못하여 하는 자다. 고로 저들은 복음을 요구한다.
그와 같이 진실이란 것이 문제되기 때문에 수고하고 짐 진 사람을 그저 가련히 여겨 무조건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나타내 뵈어 그로써 하늘 아버지를 알게 하기 위하여 마음의 진실한 자를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한 조건이 있다. 그것이 곧 29절이다. “나는 마음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28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는 말을 인용하는 사람들도 이 29절을 이어서 인용하는 사람은 적다. 그것이 이 의미를 심해(深解)하지 못하는 증거다.
28절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의 마음의 진실을 보고하시는 말씀인 줄 아는 사람이면 29절의 말을 잊을 리가 없다. 인생은 어디까지 진(眞)이요 실(實)이요, 그저 안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은 무조건이라 하나 그는 마음의 태도에까지 적용할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를 배우는 일이 엄밀히 요구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멍에란 무엇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성경의 다른 기자가 말하기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브리서, 5:8~9)
하였다. 그리스도의 멍에란 고난의 멍에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지우시는 짐을 지는 일이다. 십자가의 멍에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을 배운다.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그 진실한 마음 때문에 천국에 가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멜 만한 자격이 있다. 고로 불러서 나를 배우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함은 대단히 잔혹한 듯하다. 이미 세상에서 수고하는 자에게 또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라, 안식을 주마하는 것은 거짓 약속이 아니냐고 하고 싶다. 우리는 여기 대하여 많은 말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 말이 이미 끊어진 지경이기 때문이다. 다만 허다 진실한 영혼이 실지 경험한 사실을 말한다면 거기 기묘한 교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 자는 어찌된 일인지 그리스도가 자기의 짐을 바꾸어 졌고 자기 몸은 대단히 가벼운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하는 데 대하여 “아멘” 하게 된다.
우리는 기도하기를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10) 한다. 이 땅 위에, 이 서로 짜먹고 뜯어먹고 멱살을 서로 물어뜯는 이 지구 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를 위해 제일로 요구되는 것은 인생이 진실해지는 일이다. 빈곤이 있으면 빈곤을 정직히 지고 가려하고 불행이 왔으면 정직하게 불행을 당하고 가려는 진실한 마음이다. 그런데 눈을 들어 세상을 보면 진실이란 터럭끝만치도 없다. 갑이 불행을 을에게 떠넘기려고, 을은 다시 병에게 넘기려고, 그러는 동안에 불행은 2배가 되고 3배가 되어 꺼꾸러지는 자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이 꺼꾸러지고 허망한 수단으로 영화에 뜨는 자는 바람에 난무하는 겨와 같이 공중에 떠 있다.
가장 높이 뜬 자는 가장 허망한 자다. 그런데 온 세상이 왼통 그 가장 높이 뜬 가장 허망한 자가 되지 못하여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장 못난 자, 가장 소(小)한 자, 가장 젖냄새 나는 자를 택하여 오는 나라를 약속하심이다. 다만 우리 등에 지워져 있는 이 조그마한 짐을 보시고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 지극히 적은 자다. 다행히 체적의 극소함을 인하여 뜸을 얻지 못하고 왔다. 만일 우리에게 동리에서 구장(區長)의 지위라도 오고 학교에서 교장의 지위라도 오고 학문에 다소 성취하는 것이라도 있어 체적이 다소라도 증대하는 일이 있으면 우리는 곧 자기 짐을 떨어치고 뜰 수 있는 자다. 하늘나라 백성이 되고 싶을진대 체적의 증대, 가장 경계할 것은 이것이다. 주여 우리의 지극히 적은 중량에 적합한 지극히 적은 체적(體積)을 허하여 주시옵소서!
성서조선 1938.12 119호
저작집30;18-249
전집20;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