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여전히 바쁘다 / 곽주현
달가닥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한 번 잠이 들면 웬만해서는 깨지 않는데 화장실 갈 시간이 되어 비몽사몽 상태로 있었던 것 같다. 벌써 날이 샜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어두워 사물을 분간하기 어렵다. 핸드폰을 켜보니 이제 네시다. 아내의 하루가 벌써 시작되었나 보다. 나는 아직 한밤중인데 그녀의 시간은 대낮이다. 눈 뜨자마자 시작하는 아침 운동도 이미 끝냈을 것이다. 엊저녁에 하다 만 일을 계속하려고 일찍 서두르는 것 같다. 참 바지런도 하다.
며칠 전에 땅콩을 캤다. 시들어 가는 줄기가 많아 쇠스랑을 꺼내 들었다. 수확 시기를 놓치면 다 된 곡식을 버리게 된다. 특히 땅콩은 더 그렇다. 조금만 늦어도 썩거나 싹이 올라와서 먹을 수 없다. 그런다고 너무 일찍 거두면 알갱이가 덜 여물어 입에 넣을 것이 적어진다.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이 작물은 땅에 습기가 많으면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쇠스랑으로 파면 아내는 줄기를 잡아 올린다. 예상과는 달리 주렁주렁 달려 나온다. 물이 잘 빠지게 둑을 높게 해서 심었더니 그런 것 같다. 작년보다 훨씬 더 많이 수확했다. 오져서 서로 쳐다보며 웃는다. 이런 재미가 있기에 농사 짓는 일이 힘들지만 그만두지 못한다. 맑은 샘물로 잘 씻어 말렸다. 힘도 들고 배도 출출해서 농막 평상에 앉아 잠깐 쉰다. 잘 익은 감 두 개를 따서 하나씩 먹는다. 그 틈에 아내는 쌀을 씻어 밥을 안쳐놓고는 상추, 무잎을 솎아 점심때 먹을 쌈 거리를 마련한다.
며칠 후에 잘 말린 땅콩을 집으로 가져왔다. 아내는 오자마자 그것들을 까기 시작한다. 밭에서 하루 내내 일해서 피곤하기도 하련만 가만있지 못한다. 그런데 손으로 땅콩 껍데기를 벗기는 게 쉽지 않다. 꼬투리의 끝을 엄지와 검지로 눌러 벌려서 알갱이를 꺼낸다. 딱딱해서 손가락도 아프고 힘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도와줘야 하는데 샤워를 하고 텔레비전을 켠다. 아시안게임 기간이라 볼거리가 많아 이 채널 저 채널로 바꾸어 가며 경기를 시청한다. 그런 일은 안사람의 몫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기고 있는 축구를 보고 있지만, 아내의 바쁜 손놀림이 계속되고 있어 어째 불안하다. 할 수 없이 땅콩을 한 움큼 집어 까는 척이라도 한다.
집사람 앞에 놓인 그릇에 붉은 알갱이가 수북하다. 잠깐 멈추는가 싶더니 세탁기를 돌려놓고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한다. 때가 되었는지 밥을 짓고 된장찌개를 끓인다. 곧 상이 차려진다. 어느 틈에 구웠는지 내가 좋아하는 고등어 한 마리도 올라와 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치더니 곧장 밖으로 나간다. 내일 아침에 먹을 달걀과 우유가 떨어졌다 한다. 돌아와서도 또 땅콩 자루 앞에 앉는다. 집안일이 쉴 틈 없이 이어진다.
똑같이 밖에서 일하고 들어와도 어느새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식탁을 차리는 것을 보면 절로 혀가 내둘러진다. 여자들은 남자에게 없는 ‘근면 유전자’를 따로 가지고 태어난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둘이 살아도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는데 부모님 모시고 아들딸 셋이 함께 있을 때는 어떻게 생활했는지 상상이 안 된다. 그때는 이러는 줄 몰랐다. 간혹 집안일이 많아 힘들다고 투정하면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고 오히려 핀잔을 줬다. 아내는 전업주부였기에 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정년하고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주부가 날마다 해내야 할 집안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테면 이제야 철이 든 것이다.
가끔 아들딸 집을 방문해 보면 집안일을 부부가 서로 도와 함께하는 모습을 본다. 밥상 차리기, 설거지하기, 다과 준비 등 우리 세대에서 보기 어려웠던 일들을 젊은이들은 스스럼없이 해낸다. 이렇게 예전과 달리 남자가 손을 넣어주는 일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대충 헤아려 봐도 아직도 주부가 하는 일의 반의반도 못 하는 것 같다. 아들들에게 집안일을 더 많이 하라고 이르면 힘껏 도와주고 있다고 말한다. 가사(家事)는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서로 나누어서 하는 것이라고 고쳐 말해준다.
세탁기, 청소기 등 가전제품의 보급으로 주부의 일이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어나고 대부분 직업을 갖게 되어 집에서 일할 시간이 없어 지금도 여전히 힘들어한다. 그렇다면 해도 해도 티가 안 나는 가사 노동 시간은 얼마나 될까?
올해(2023년) 통계청이 발표한 것을 보면 맞벌이 가구는 하루에 여자는 세 시간 7분, 남자는 54분이라고 한다. 글쎄 어떤 기준으로 이런 계산을 해내는지 모르겠지만 맞지 않는 것 같다. 그것도 10년 전에는 남자가 30분쯤이었는데 지금은 두 배 늘어나서 그렇단다. 내가 보기에는 여자가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을 것 같은데 말이다. 어떤 분이 전업주부가 가사 노동을 돈으로 환산해 놓은 것을 봤다. 하루 여덞 시간, 주 5일, 시급 12,340원, 매일 여덞 시간 외 수당, 주말 수당 등을 계산하면 매월 칠백 만원이 넘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이러면 나는 늘 한 달에 몇백만 원씩 아내에게 빚지고 사는 셈이다. 아이고 큰일 났다.
가사는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무지한 남자는 이제 없다. 그만큼 세상이 많이 변했다.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가사 대부분을 주부가 맡아 하고 있어 힘들어한다. 외출한 아내가 들어오기 전에 얼른 청소부터 해야겠다.
첫댓글 선생님, 한겨레신문 칼럼으로 보내야겠어요. 너무 재미있고 유익하고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근데 월 칠백이라니요! 이 글 우리 남편에게 보여줘야겠어요.
하하하
저도 매달 7백을 법니다.
누가 주진 않지만요.
선생님 글이 정말 좋아요.
임정자 선생님 말처럼 어따 보내야겠어요!
사모님이 참 부지런하시네요.
선생님 글은 늘 따뜻하고 정감이 있어 술술 읽힙니다. 라디오 방송에 '여성시대, 지금은 라디오 시대'
등 더 많은 분이 함께 듣게 보내시기를 권합니다.
예전 농촌의 어머니들은 대단했습니다. 독박 육아에 살림뿐만 아니라 농사까지 지어야 했으니까요. 사모님도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글이 너무 맛깔납니다. 사모님도 부지런하시고 선생님도 따뜻하시네요.기분이 좋아집니다.
하하하! 한 달 급여 모두 아내에게 줘야겠네요. 정말 아내들이 수고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
글도 잘 쓰시고, 무엇보다 사모님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선생님의 시선이 느껴져서 참 좋아요.
그런 마음이라면 저는 하늘의 별도 따올 것 같습니다.
하하!
늘 느끼는 거지만 선생님 글은 따듯해서 참 좋아요. 제목을 '아내는 여전히 예쁘다'로 읽었어요. 하하. 글의 분위기는 제가 잘못 읽은 느낌인데요. 선생님같은 남편들이 많아지길 기대해 봅니다.
다른 선생님들처럼 저도 따뜻한 마음을 느꼈어요. 이해해주고 걱정해주시는 선생님도 참 좋으신분 같습니다.
읽는 재미와 맛이 있습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면 숙제하는 마음으로 써서 올린 제 글을 되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