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이 / 임정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오후, 부고 문자가 왔다. 해남 현대장례식장, 마음이 쓰였지만 지워버렸다. 저녁이 되자 둘째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큰누나 시어머님 돌아가셨다는 연락받았지?" "네, 읽고 삭제했어요." "아무도 갈 사람이 없다. 우리라도 다녀오자." 안 가고 싶다 말하고 싶었다. 그도 내가 큰언니와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을 터. "내일 저녁 해남에서 보자." 하고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는다.
아버지는 첫딸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밑으로 딸 둘을 낳고 엄마는 가시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죄인이 되었단다. 아들이 귀한 집안에 남자 아이가 생기자, 큰언니는 부모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맏이가 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들었다. 집 안의 궂은일을 다 해놓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노고를 인정해 주지 않고, 동생에게 무엇인가를 양보하지 않으면 욕심이 많다고 말하고, 부모가 없으면 네가 보호자야 라고 돌보는 의무까지 나누어 준 것에 부담을 느꼈다는 말을 큰언니에게 들었다. 마음 한편이 울컥했다.
언니는 눈이 동그랗고 얼굴도 계란형에 키도 컸다. 70년대 미니스커트 입고 양산 들고 찍은 사진은 그녀의 전성기 시절의 모습이다. 목포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아버지는 맏딸을 자랑스러워했다.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딸에게 들은 깨알 같은 의학 지식을 장날이면 약방에 가서 아는 척 허세를 부렸단다. 조카가 병원에서 일한다는 말을 듣고 삼촌이 군청에 다리를 놓았다. 언니는 해남 군청 보건직으로 특별채용 되었다. 그녀가 공무원이 되었던 배경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큰 힘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옛말에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처럼 그녀는 친정 살림에 큰 도움이 되었다.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했고 초가지붕에서 기와집으로 시골집 고치는 데 힘을 보탰다. 더구나 결혼 비용도 언니가 벌어 놓은 돈으로 치렀고 비상금과 퇴직금 전액을 아버지에게 주었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었다. 마을 앞 논은 맏이 것이라 말했지만, 제삿밥은 아들이 차려준다는 생각에 딸들 몰래 두 아들에게만 재산을 주었다. 큰언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형제자매에게 그 억울한 마음을 토해냈다.
그는 서울 아파트에서 신접살림을 꾸렸다. 형부도 8남매 맏이다. 남동생 일곱, 여동생 한 명, 시할머니가 계시는 장손 집에 맏며느리다. 시집살이가 보이는데도 서울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스물여덟에 결혼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건사할 시댁 식구들이 많은 언니는 늘 일이 많았다. 가족 모임에서 시댁 불평을 털어 놓았다. 때로는 친정에 보탬이 된 자신의 선행을 말하곤 했다. 그때마다 등장한 마을 앞 논 이야기는 낯선 외국어 같았다. 아버지를 비난하고 몰아붙이고 토라져 가버렸다. 불편한 장면을 만들었다. 그녀는 전쟁에서 피난 가듯 친정 소굴에서 도망쳤을까? 맏이에게 주지 않았던 그 논은 아버지의 침묵 속에 잠겨 버렸다.
친정 모임은 점점 줄어들었다. 엄마가 시골에서 혼자 있을 때 설사가 잦아 해남병원에서 진료했다. 의사는 간단한 장염이라 말했다. 약만 받아서 먹는 중 얼굴에 노란 황달이 보였다. 광주 전대병원으로 갔다. 신우암, 암세포가 퍼져 손댈 수가 없다는 말을 듣자, 모친은 의사에게 치료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시골집을 고집했다. 안타깝게도 그곳에서 함께 살면서 간호 할 자식이 없었다. 병원을 다녀야 해서 광주 우리 집으로 모셨다. 아픈 엄마보다 형제자매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차라리 안 온 게 낳았다.
맏이의 욕구 표현은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투병 중인 엄마한테 큰아들에게 가 있지, 돈 한 푼도 안 준 딸 집에 계신다고 잔소리했다. 큰딸로서 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녀의 몸은 애지중지하면서 엄마는 힘들지도, 서럽지도, 아프지도 않으리라 생각하냐. 나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는 울면서 서울로 올라갔다. 그 이후 요양원에 있던 엄마 상태가 좋지 않으니 얼굴 한 번 더 보러오지 않겠냐 했더니 "됐다."고 말했다. 자신밖에 모르는 그런 매정한 사람으로 변했다.
13년의 세월이 지나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녀에게 가는 길은 내게서 멀지 않지만, 길 주변은 산이 높고 숲이 우거지고 골이 가파르다. 큰언니가 나를 부둥켜안고 운다. "와 줘서 고맙다."
첫댓글 내가 독해력이 부족한 탓인지, 누가 돌아가신 건지 모르겠어요.
네, 고쳤습니다.고맙습니다.
언니가 상처를 크게 받아서 마음이 돌아서버렸나 봅니다. 많이 희생했는데 알아주지 않으면 억울함이 생기는 것 같아요.
매정하게 했어도 동생과 잘 지내고 싶으셨겠죠. 선생님이 먼저 손 내미셔서 고맙게 생각하시겠네요. 어휴, 인생 쉽지 않습니다.
제가 언니 처지라도 상처받았을 것 같긴 해요.
송향라 선생님 말대로, 진짜 인생 쉽지 않네요. 하하.
잘 읽었습니다.
나이들수록 형제 자매끼리의 정이 더 그리워지더군요. 너른 마음으로 먼저 손 내미신 선생님이 훌륭하시네요.
의절하고 사는 형제간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선생님 글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니도 짠하구요. 가까운 사이의 상처가 더 깊고 오래가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족간 상처는 자꾸 건드리는 일이 생기는 거 같아요. 장례식장에서 화해하신 거 같아 다행입니다.
과거에 이런저런 일 다 묻어두고 이제부터라도
우애 있게 지내야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먼저 손 내미신 선생님 많이 칭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