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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1: 1592년 4월 13일, 12만의 일본군이 조선을 쳐들어왔다. 부산진 함락 1592년 4월 14일, 한양함락 1592년 5월 3일, 무섭게 북상하는 일본군의 기세에 선조는 피난길에 올랐고 일본군은 한양에 이어 평양까지, 일본군 평양입성 1592년 6월 13일, 파죽지세로 점령했다.
내레이션2: 왜노(倭奴)가 상국(上國: 중국)을 침범하고자 본국을 끌어들여 같은 편으로 삼으려 했으나, 본국이 의리를 지킨 까닭에-선조실록, 선조 25년 9월 2일,
되려 성을 내고 흉포를 부려 한양-개성-평양이 함락되고 백성은 전쟁에 짓밟혔습니다 (倭奴將犯上國 欲引小邦爲黨, 緣小邦守義, 故發怒肆兇, 三京失守, 生民魚肉)-선조실록, 선조 25년 9월 2일,
북경(北京) 명나라의 수도
내레이션1: 명나라 조정은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조선의 원군요청에 조선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 것 선택의 기로에 놓인 明, 마침내 조선으로의 파병을 결정한다. 조선과 明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7년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그날 明의 선택은 15~16세기에 동아시아 최대 강국이었던 明의 운명을 뒤흔들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삼백아흔다섯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1592년에 발발했던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의 이야기로 시작을 해봤어요.
이시원/배우: 그런데 우리가 이번 시리즈 제목이 신제국의 탄생이잖아요. 근데 주제가 청나라가 아니라 명나라, 그것도 임지왜란 속에 명나라 이야기네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17세기 중국에서는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었죠. 바로 당시를 주름잡았던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제국 청나라가 부상하게 되는데 바로 그 유명한 明-淸 교체기의 원인을 제공한 배경이 되었던 여러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임진왜란이었습니다.
최원정: 김동환 소장님이 나오신걸 보니까 이 시기가 세계 경제사의 흐름으로 중요한 시기인가 봐요.
최태성: 제목이 쩐의 전쟁이잖아요.
최원정: 쩐하면 김동환 소장님이시잖아요.
김동환/대안금융경제연구소: 그렇게 되는군요. 明淸의 흥망이 당시에 국제적인 돈의 흐름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구요. 임진왜란을 쩐의 전쟁이라고 할만큼 돈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하거든요. 근데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끝까지 이 방송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최원정: 사실 명청교체기라는 주제로 몇 회 함께 하실텐데 대한민국이 이분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저희의 주제선정이었습니다. 어떤 분인가 하면은 명나라의 임진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사료를 번역하는데 참여하셨고 만주족과 청나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계시는 박민수 교수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일동: 환영합니다.
최태성: 교수님 맞으시죠?
박민수/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네, 맞습니다.
최태성: 만주족을 연구하셨다 해서 노 교수님이 나오시는 줄 알았는데,
박민수: 제가 오랑캐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김동환: 청 분위기가 좀 나죠.
이시원: 혹시 변발하고 나오실 줄 알았죠.
박민수: 제가 준비가 좀 부족했나 봅니다. 역사저널 그날의 열정팬이었는데 이렇게 출연하게 되니까 정말 성공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이시원: 저는 솔직히 청나라 하면 기억나는 이미지가 마지막 황제, 이미지거든요. 그래서 변발하고 화려하고
최원정: 저는 약간 망국의 이미지? 서태후가~
박민수: 사실 청나라가 만주족이라고 하면 야만족이고 무지막지한 오랑캐를 떠오르실텐데 사실 이들을 동아시아 역사에서 좋든 싫든 조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로 우리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게 되실 것입니다.
최원정: 박민수 교수님이 하버드에서 공부하셨대요. 하버드! Do you know Harvard?
허준/방송인: 아니 왜 미국에 가서 청나라를 공부하세요?
박민수: 사실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옌칭 연구소라는 곳에서 제가 박사논문을 썼는데요 (하버드-옌칭 연구소 Harvard-Yenching Institute-미국 하버드 대학교 내에 설립된 동아시아학 연구기관), 거기 미국 옌칭 연구소에서 전 세계의 가장 많은 만주 자료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다양한 언어의 방대한 자료를 소장한 옌칭 도서관), 방문 연구원으로 만주족과 청대사를 연구한 박민수 교수,
최원정: 청나라를 제대로 알고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들이 있다고 해요. 청을 대표하는 문화 먼저 알아볼까요.
---------스튜디오 무대에서 청 태극권 복장을 한 두 성인 도인이 무술 시범을 보임-------황비홍의 무술, 太極拳 태극권, 진식태극권 제19대 제자의 무술시범,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태극검-------
일동: 감탄 박수
이광용/아나운서: 무대 뒤에서 보는데 숨이 막혀요. 조금 전에 선 보이신게 황비홍의 무술이죠?
고재식/진식심의훈원 태극권 협회장: 태극권은 약 470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 전에 운동은 모두 근육위주의 운동이었는데 태극권은 몸속훈련입니다. 기를 가지고 하게 되어있습니다. 명나라말 혹은 청나라 초에 진왕정 명인께서 (태극권(太極拳)-명말청초(明末淸初) 명인 진왕정이 척계광의 <기호신서>, 도교경전 <황정경>을 토대로 창시한 무술), 척계광이란 장군의 기호신서, 그 다음에 도와경전인 황정경을 토대로 이 태극권을 창시하였습니다.
이광용: 이것뿐만 아닙니다. 청나라를 대표하는 황비홍의 트레이드 마크 이걸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변발과 치파오 입은 마네킹 등장), 머리는 길게 늘어뜨린 변발과 중국의 전통 복식이죠. 치파오~
이시원: 남자가 입는 것도 치파오인가요? 저는 솔직히 치파오는 여자만 입는 옷인 줄 알았어요. 착 붙어서 실루엣을 드러내고 옆에 다리를 탁 튀어서 각선미를 드러내는 아주 관능적인 옷~
고재식: 중국의 북방지역은 산세가 험하고 매우 춥습니다. 이동을 빨리 해야 되기 때문에 만주족은 말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말을 탈려니까 현재의 치파오는 여성만 입는 줄 알고 있는데 말을 탈려니까 남녀 모두 옆트임이 터져있어야 말을 탈 수 있습니다.
허준: 추우니까 롱 패딩은 입어야겠는데 말도 타야 하니까 다리가 걸리니까
이시원: 일종의 멋으로 트여 있는 줄 알았어요.
이광용: 모든 일은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치파오 라는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요?
박민수: 원래 치파오의 치(qi/旗)는 만주족의 고유한 군사-행정조직의 팔기(八旗)에서 나온 말인데요. 중국어에서 치(qi)=팔기의 기(旗)이구요, 파오(pao)=두루마기 포(袍) 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치파오 하면 만주족의 팔기 사람들이 입는 두루마기 라는 뜻이죠. 그래서 남녀 구분이 따로 없습니다.
허준: 그러면 약간 한국말로 하면 군대의 깔깔이 말이네요.
박민수: 네, 그렇죠, 전투복인 셈이죠.
이광용: 그런데요, 이 변발, 황비홍의 헤어 스타일, 이 변발도 그런 이유가 있었을까요?
고재식: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 만주족들은 전쟁이 많았었습니다. 그래서 갑옷을 입어야 되고 머리에 투구를 써야 되니까 땀이 난다든지 하면 굉장히 불편하겠죠. 그래서 머리 앞 부분을 없애 버리고 뒤에 머리카락만 남겨두었습니다.
이시원: 앞 머리 내려오면 거추장스럽잖아요.
허준: 근데 사실은 국군의 날 보면 투구를 쓰는 전투원들도 머리를 미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그러면 이해가 안 가는 게 다 밀어야지 왜 뒤는 남겨요?
고재식: 그 이유가 있습니다. 만주족들은 머리카락에 사후 영혼이 들어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경우 시신을 다 못가져오기 때문에 그때에는 머리를 잘라가지고 돌아와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이광용: 갑자기 궁금한데 변발을 다 했어야 했잖아요. 교수님? 청나라 때 변발안하면 어떻게 되나요? 혹시 잡혀가서 벌도 받고 그러나요?
박민수: 어떻게 됐을 것 같으세요?
허준: 혹시 거세를?
박민수: 아이구, 진정하시고 사실은 변발 했을 때 단발했던 사람들이 신체발부 수지부모 (身體髮膚 受之父母) 몸과 머리털,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 한족들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유행했던 이 말 한 마디면 자세한 설명은 안할텐데요. 순서대로 헷갈리지 말고 잘 들어보세요. 유두불유발(留頭不留髮)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 카락을 남기지 말고, 유발부유두 (留髮不留頭) 머리카락을 남기려면 머리를 남기지 마라.
이시원: 교집합이 절대 안된대요.
최태성: 변발 안 하면 죽으라는 뜻!
허준: 머리 카락 안 자르면 목 자른다.
박민수: 내 명을 어기면 머리가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죠. 무시무시했던 청의 슬로건~ 그렇다고 만주족을 너무 잔인하게만 보지 마시구요. 만주족은 왜 이렇게 변발을 강요했을까요? 생각을 해봅시다. 소수의 정복자였던 만주족이 자기의 100배가 넘는 한족들을 통치할려면 아무래도 한 눈에 딱 띄는 표시가 필요했겠죠.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너 만주 좋아해? 우리한테 안 덤벼들꺼야 이렇게 물어볼 순 없잖아요. 그러니까 가장 안전하고 눈에 확 띄는 확실하고 강렬했던 변발이 우리편이라는 걸 보여 줄 수 있는 거죠.
최원정: 피아식별 장치네요.
이광용: 만주족과 청나라에 대한 이야기, 오늘은 살짝만 맛을 보신거구요. 이 이야기들은 다음 주에도 다음 주에도 계속됩니다. 출연하신 고재식, 최송배님 감사합니다.
허준: 사실 100분의 1의 민족으로 100배가 넘는 한족을 다스리는 소수 민족, 청도 대단하지만 더 중요한 건 우리 머리 속에 치파오도 그렇고 변발도 그렇고 중국하면 떠오르는 많은 부분이 청의 문화잖아요.
최태성: 외부에서 바라보는 이런 시선, 치파오나 이런 모습에 대하여 지금 중국 한족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민수: 그렇죠, 최근에는 중국 한족들이 한푸(漢服)라고 해서 우리 고유의 한족의 옷이 우리 전통옷이다 라고 하고 홍보도 많이 하고 드라마에서도 입고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근데 변함없는 사실은 우리가 사극하면 조선시대 사극을 떠올리잖아요. 그때 조선시대 복식이 나오는 것처럼 중국 사람들 한테 가장 익숙한 사극은 아무래도 前왕조였던 청이었기 때문에 변발하고 치파오를 입고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죠.
최태성: 지금 갑자기 우리가 만주족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만주족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민족이잖아요. 이전에 있었던 민족이 여진족?
박민수: 그렇죠, 여진족부터 시작하죠. (여진(女眞)-동부 만주일대에서 거주한 퉁구스 계통의 집단) 여진(女眞)은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이성계부터 시작해서 혹은 이성계 이전에 12세기에 고려가 있었을 때에도 동북지역에 있었던 女眞에서부터 시작을 했다고 합니다.
허준: 여진과 만주족이 있는 사이에 고구려가 지배했던 땅이잖아요. 고구려 민족을 보면 한반도 민족과 만주족 북쪽에 있는 기마민족 두 개가 합친 게 고구려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보면 청이 고구려 후예가 아닐까?
박민수: 너무 멀리 가지 마시고요. 충분히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사실 고구려도 그렇구요. 여러분들 교과서에서 한번쯤 배우셨을 발해 있잖아요. 발해도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죠. 그 말갈인이 바로 女眞의 전신입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보면은 굉장히 일찍부터 한반도에 있는 우리 한민족과 관계를 맺고 있는 거죠.
최태성: 말갈족->여진족->만주족
이시원: 갑자기 만주족이 가까워졌어요. 멀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고구려와 연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최원정: 만주 벌판 하면 뭔가 우리의 것, 우리의 것이었던 광활한 듣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 그런데 혹시 만주족은 무슨 언어를 쓰는지 알아요?
이시원: 만주어가 따로 있어요?
최원정: 들어본 적 있어요?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박민수: 지금 제가 가고 있는 곳은 외국의 청대사 연구자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가고 싶어하는 곳입니다.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이곳? 롯데 월드~ 그 옆에 자리한 三田渡碑, (三田渡碑(대청황제 공덕비/1639년)-병자호란에서 패배한 후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 높이 5.7m, 너비 1.4m, 무게는 32톤에 달함), 이 비석이 세워진 지명의 이름을 따서 三田渡碑 라고도 부릅니다. 엄청 크죠. 재미 있게도 여기 국내에서 가장 큰 건물 바로 옆에 서 있죠. 조선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죄를 지었고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일으켜서 너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라는 정의로운 전쟁으로 포장하는 우리가 받아 들이기 어려운 내용인데요. 사실 이 비문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비석 안에 만주어, 몽골어, 한문 이 3가지의 문자로 기록된 독특한 비석인데요. 마치 고대 이집트 문명의 로제타석, (로제타석 Rosetta Stone-이집트의 도시 로제타에서 발견된 비석, 고대 이집트 신성(상형) 문자, 민중문자, 그리스 문자 등 세가지 문자가 새겨져 있어 이를 비교해 신성(상형) 문자를 해독), 이 그리스어를 가지고 이집트의 신성문자 그리고 민중문자를 해독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것처럼 이 三田渡碑는 1639년에 세워졌으니까 17세기 초에 가장 이른 시기에 만주어 몽골어 한문이 같이 쓰여진 비석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가치가 높습니다. San Han I ba=삼한의 땅이, tumen aniya ojorongge=만세에 이르는 것은, enduringge han i sain de kai=성스러운 한의 좋으심 덕분이도다, 만주어가 한국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주어 학습을 통해서 그 동안 청나라 역사에서 밝혀지지 못했던 부분들을 많이 밝혀내고 있습니다.
최원정: 한국어 같은 형태라면 어순이 같다는 거예요?
박민수: 만주어는 우리말과 같이 어순도 같고
최태성: 주어+목적어+서술어 순서인가요? 중국어는 주어+서술어+목적어
박민주: 그렇습니다.
이시원: 그러면 진짜 우리말과 가깝네요.
허준: 제가 억측을 한 게 아니라니까요
박민수: 그래서 하버드에서 만주어 수업이 열렸는데요. 그때 제일 높은 점수를 받는 학생이 바로 한국유학생들입니다.
최원정: 교수님, 오늘 이곳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해서 반갑습니다 라는 걸 만주어로 해 보신다면 가능한가요?
박민수: si sai yun 안녕하세요 Muse gemu dsaiu gucu kai 우리는 모두 좋은 친구입니다.
허준: 마지막 kai가 무슨 뜻이에요?
박민수: 그게 kai는 ~입니다. ~이도다 라는 뜻이죠.
허준: 반갑다 카이,
박민수: 경상도 방언하고 굉장히 유사하게 들리기는 합니다.
최원정: 근데 현대 만주어를 쓰는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들었는데~
박민수: 네, 지금 중국에 남아 있는 만주족이 한 100만 명 정도 된다고 하거든요. 그중에 만주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수백 명이고 방금 말씀드린 일상대화로 쓰는 사람들은 수십명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사멸위기에 빠진 거죠.
이시원: 그렇게 귀한 언어를 아시는 교수님을 저희가 이곳에 모신 건가요?
박민수: 아이구, 그렇지는 않구요.
이시원: 근데 어떻게 보면 청나라 라는 게 300년 이라는 굉장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넓은 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주어 자료가 많을 텐데 그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이 많이 사라지고 이게 사멸되고 있다고 하니 참 안타깝네요.
박민수: 사실 만주족은 과거 우리처럼 말은 있었는데 글은 없었거든요. 근데 여진족을 통일한 누루하치가 세종대왕처럼 1599년 만주어를 창제합니다. 만주어가 중요한 이유는 쓰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만주어로 쓰인 이것이 수많은 역사적인 자료가 남아 있거든요. 그래서 만주어로 쓴 자료는 바로 이 청나라에서 중요한 문서들이나 특히 대외비였던 문서들이 바로 만주어로만 작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시원: 보물이네,
박민수: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한번쯤은 들어보셨을 네르친스크 조약, (네르친스크 조약 Treaty of Nerchinsk-1689년 동시베리아의 네르친스크에서 청과 러시아가 체결한 국경확정조약), 1689년에 청과 러시아가 맺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국경조약이죠. 이 때 중국측 조약원본은 오직 만주어로만 작성되었습니다. 한문이 끼어들 틈이 없었던 거죠.
이시원: 그러면 중국 근현대화 청나라 역사를 알려면 만주어가 필수겠네요.
최원정: 뭔가 역사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언어네요.
최태성: 어쨌거나 내력을 교수님이 보여주셨으니까 죽 얘기 전에 우리가 명나라부터 얘기를 해야될 것 같애요. 잘 아시겠지만 1592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잖아요. 그때 조선침략했을 때의 명분이 뭐였냐면 정명가도(征明假道) 또는 정명향도(征明嚮道)였어요. 이게 뭘까요? 명나라를 치러갈 테니까 조선이 길을 안내하거나 내어 놓아라. 조선 입장에서는 목적은 명나라니까 명나라가 당연히 조선을 도와야지 라고 해서 요청을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최원정: 명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이시원: 당시에 명은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었잖아요. 그런데 정명가도~일본이 우리를 친다고 해? 그러면 이건 자존심 때문에 안되고 요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보면 미국이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잖아요. 큰형으로서 가만 놔둘 수가 없죠. 도와 줘야죠.
김동환: 그런데 경제적으로 보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애요. 우리가 미국을 천조국이라고 하잖아요. 국방비로 천조를 쓴다는 얘기예요.
최원정: 그래서 천조국이에요? 하늘 천이 아니고~ (천조국(千兆國)-엄청난 경제력으로 국방비를 지출하는 미국을 말하는 은어),
김동환: 미국이 전 세계 국방비의 40% 이상을 쓰거든요. 그러니까 엄청난 국방비를 쓰는 거죠. 그런데 그때 세계의 중심 아시아의 맹주였던 명의 입장에서도 엄청난 국방비를 쓰고 있었을 거예요. 몽골이나 여진이나 북방의 오랑캐로부터 영토를 지킬려면 거기다가 조선에 파병을 해야 한다. 많은 병력을 수송하고 전투하고 식량을 대고 이런 상황이면 돈문제 굉장히 심각했을 겁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에요.
이시원: 근데 만약에 조선을 돕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그 주위에 많은 국가들까지 명을 떠받들지 않겠죠. 어차피 우리 도와 주지도 않는데 뭐라고 조공받치고 그래~그렇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분열을 막기 위해서도 도와 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박민수: 실제로는 처음 원군요청을 받은 명도 조선을 의심했습니다. 왜냐면 혹시 조선이 일본에게 길을 내주면서 정명가도 하면서 우리를 유인해서 뒤통수를 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만큼 무지했고 별로 신경을 안 썼어요. 그래서 피난 길에 올랐던 선조가 진짜 조선 임금이 맞는지 실물을 한번 보고오라 해서 조선을 왕래한 사신을 보내서 얼굴을 보고 오라고 시킬 정도였습니다.
최원정: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자마자 거의 보름 만에 수도를 함락하고 두 달 만에 평양성이 함락되고 조선이 갑자기 후퇴하니까 의심할 수 밖에 없어요.
이시원: 한 마디로 그 속도라면 금새 명까지 도달할 것 아녜요. 근데 진짜 조선 왕이 확인되었으면 빨리 파병을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최태성: 지금 일본이 조선을 침범해서 명으로 넘어갈 때 명과 만나는 지점이 어디냐 하면 요동지역이 되겠지요. 만약에 일본이 평양을 점령하고 요동으로 들어서면 바로 명과의 전쟁이잖아요.
이시원: 북경이랑 너무 가까운데요.
최태성: 그렇죠, 그래서 명의 판단은 일단 급한 불은 끄자 해서 요동 지역의 5천 군사를 평양까지진출시킵니다.
------------(동영상) 파죽지세의 일본군을 진압하러 나선 명군, 1592년 7월 17일, 명의 조승훈 부대 평양성 공격, 그러나 조선의 지리와 일본군의 실체에 어두웠던 명나라군 일본의 기습을 받아 대패-----------
최태성: 이쯤 되니까 명나라가 깜짝 놀라는 거예요. 오~ 일본이 변방의 오랑캐가 아닌데~진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칼을 갖고 명을 치는구나 라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대로는 안되겠다 해가지고 그해(1592년) 12월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부대 4만 3천명을 조선에 파병합니다.
허준: 아니 김동환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천조국에 해당하는 명나라가 4만 3천명을 보냈다고 하면 이건 진짜 조금 보낸거 아녜요? 43만 명도 아니고
박민수: 숫자로만 보면 많은 숫자는 아닌데요. 그런데 질로만 보면 당시에 가장 최정예 부대였습니다. 축구경기로 비유를 해보면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고 있던 손흥민, 황희찬 선수까지 소집했던 국가대표 1군을 투입했던 거죠.
허준: 근데 우리는 400명이 뛰어, 대군 앞에 1군, 2군이 무슨 소용이에요. 그리고 사실은 명나라가평화로운 시대를 한 100~150년을 전쟁 없이 보냈거든요. 이때 당시 1군이라고 해도 A매치에서 150년 동안 한번도 안 뛴 거예요.
최원정: 대적하는 일본군은 전투경험이 어마어마하게 많찮아요. 일본군은 센코쿠 시대 통일전쟁을 100여년간 내전을 치르고 온 군인들이었다.
박민수: 허준님 말씀처럼 명도 건국 초와 같은 날카로움은 많이 무디어졌겠죠. 근데 당시에 가장 핫한 부대가 있었습니다. 바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두 달 전인 1592년 2월에 바로 몽골에서 귀순했던 보바이(哱拜)라는 사람이 영하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요. 이때 명은 요동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이여송 부대를 영하로 파견을 합니다. 요동에 있던 이여송 부대가 투입이 된 거죠.
--------영하의 난(寧夏之亂), (영하(보바이)의 난 1592-명에 귀순한 몽골인 보바이가 세력이 커지자 독립하기 위하여 일으킨 반란), 이여송(李如松)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요동에 있던 이여송 부대를 투입, 1592년 9월 몽골족의 근거지를 불태우고 영하성을 물에 잠기게 하여 진압-------
박민수: 그래서 겨우 진압에 성공하게 돼죠. 그리고 나서 이여송 부대의 다음 행선지가 어디냐 바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조선입니다 (당시 이여송 부대의 경로-영하-요동-조선),
이시원: 근데 저기 거리가 얼마에요?
허준: 몇 천 킬로미터는 훌쩍 넘어요.
이시원: 그러니까요 저기 왔다 갔다 하느라 지쳤을 텐데~
김동환: 근데 병력만 그냥 걸어가지만은 않았을 것 아녜요. 무기-전쟁물자도 다 가지고 왔을테니까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 같애요.
최태성: 그리고 또 많은 변수가 있어요. 지금 보시면 알겠지만 요동에서 영하로 이동한 것은 수평적 이동이었잖아요. 영하에서 요동으로 와서 조선으로 내려왔겠죠. 기후 변화도 있죠. 기후도 중요합니다. 기후가 다르면 몸이 확 달라지거든요. 또 하나의 문제는 요동은 벌판 기동중심이에요. 조선 땅에 딱 넘어오는 순간 말들이 힘들어집니다. 산이 많이 있잖아요. 그리고 말이 쭉 갈 수 있는 길이 만들어져 있지 않고요. 게다가 비가 왔다면 땅이 진창이 되잖아요. 말들은 죽어갑니다. 굉장히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거죠.
최원정: 구원병이라고 내려 왔지만 사실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겠네요.
김동환: 그런데 이여송 부대가 결정적인 착오를 하나 해요. 저 먼 거리를 무기 외에도 식량이나 생필품이다 이런 것들을 다 이고지고 가야 되니까 이게 불가능 하거든요. 그래서 그때 당시에 국제적으로 통용됐던 화폐 즉 은을 지고 간 거예요.
이시원: 똑똑한 거 아녜요?
김동환: 은으로 보급품을 사서 수많은 대군을 먹이고 재우면 된다 했는데 은을 지고 갔더니 조선은 은을 안 받아주네요.
박민수: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경략 송응찬 이란 사람이 있었어요. 이 사람도 기록에 답답한 심경을 남겨 놨습니다. “조선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무역도 통하지 않아 비록 은전(銀錢)이 있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많은 병사가 (압록)강을 건넌 이래 지금까지 채소와 고기, 장(醬) 같은 것을 입에 대보지도 못했습니다-송응창의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 은을 싣고 왔는데 조선에서 은을 안 받아 우리가 먹을 쌀이나 반찬도 못사고 병사들이 입을 솜옷이나 신발도 못산다고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시원: 그거 희한하다,
최원정: 조선에서는 왜 은을 안 썼죠.
이시원: 설마 그 당시에 조선이 무역이 별로 발전하지 않아서 은을 쓸만큼 교역이 많지 않아서
최원정: 은광이 있었던가, 은이 별로 없어서,
최태성: 일단은 제가 설명을 드릴게요. 우리나라 함경도 단천에 은광이 있구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은을 제련하는 기술을 연은 분리법이라고 하는데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16세기 초 조선에서 발명된 기술, 납과 은의 녹는점 차이를 이용해 은을 추출), 이 은을 제련하는 기술을 우리가 먼저 개발을 해서 일본에 전해줬죠. 일본이 조선에서 배웠던 은 제련법 때문에 은 광산이 엄청 늘어났거든요. 16세기 은광개발 열풍이 분 일본, 세계 2위 은 생산국에 등극, 은을 통해 축적된 엄청난 부,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조총 무기를 조달, 조선침략의 발판이 된 은광개발,
이시원: 이상해요. 국제 무역은 은이 필요하고 은도 나고 은 제련기술도 있는데 도대체 왜 안쓴 건가요?
허준: 이때도 쇄국정책?
최태성: 이유가 있어요. 오히려 은광을 폐쇄시켜 버려요. 그건 뭔가면 사실 명 나라와 조선은 조공관계에 의해서 외교관계가 움직이고 있잖아요. (조공-책봉관계-중국과 주변 국가 사이에 제도화된 독특한 동아시아의 외교형태), 조선이 명한테 뭔가를 주면 명도 조선에 뭔가를 주는 일종의 교환관계에 있었는데 조선이 명한테 대표적으로 주는 물품은 인삼이었어요. 중국에서 인삼을 가져오라고 얼마나 다그치는지 몰라요. 그런데 명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은, 은이 조선에서 많이 난다 그러면 조공 물품에 뭐가 추가 되겠어요?
일동: 은이지
최원정: 그러니까 수탈에 대비한 전락이었어요.
최태성: 은 없어요. 이렇게 나온 거지요.
박민수: 그래서 명군 사령부도 고심 끝에 두 가지 보급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일단 한가지는 조선과 가장 가까운 요동-산동 지역에서 명나라산 쌀과 보급품을 매입해서 이걸 육지로 바다로 배송시키는 거죠. 그래서 꾸역꾸역 조선으로 보내는 거죠.
이시원: 복잡하네요.
김동환: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보급로가 굉장히 길고 복잡해진 거예요. 처음에는 은 갖고 가면 됐지 했는데 이제는 사람, 말, 수레도 보내야지 그러니까 명나라 장군들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거예요. 이것도 전쟁 비용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한 인플레이션인 거죠. 손쉬운 방법이 바로 두번째 방법이었는데 그건 바로 조선에 손을 벌리는 거죠.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이니까 조선이 책임져라.
허준: 트럼프네요. 너희 땅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니까 돈 내놔.
최원정: 이런 자세라면 또 얼마나 고압적이었겠어요. 우리가 누구 때문에 왔는데 너희들이 책임져 이럴 것 아녜요.
최태성: 실제로 그 당시에 명군의 약탈이 심각했거든요. 일본군의 약탈 때문이 아니라 명군의 약탈 때문에 조선은 너무 힘들었거든요. 명군의 약탈이 너무 심해 가지고 살림살이 쌀을 땅에 묻고 도망 다니는 일이 있었는데 이런 말이 있었어요. “왜적은 얼레빗(梳子) 같고 명나라 군사는 참빗(蓖子) 같다-유성룡 징비록,
허준: 어렸을 때 제 할머니가 머리 간지럽다고 하면 참빗으로 싹~
최태성: 참빗처럼 꼼꼼하게 긁어간다고 해서 명군을 참빗이다 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어요.
김동환: 어쨌든 현실은 보급로가 길어지다 보니까 돈이 많이 들어갔다는 게 현실이었거든요.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 이에요. 제가 자료를 보니까 명군이 7년 전쟁 동안 쓴 비용을 당시의 은 기준으로 780만 냥을 썼다구요.
최원정: 그게 지금으로 어느 정도인 거예요?
김동환: 상상이 잘 안 돼지요. 근데 은1냥=쌀 2석을 살 수 있는데 쌀 2석을 현재 한화 가치로 72만원 정도합니다. 계산을 해보면 무려 약5조6천억 원이에요.
이시원: 이거 정말 돈을 발랐다고 해야 되나 부었다고 해야 되나
김동환: 그래서 쩐의 전쟁이라고 하죠.
최태성: 이건 새로운 접근이네 재미 있네 이 이야기는 교과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새로운 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최원정: 그러니까 명나라는 밑 빠진 독에 계속 돈을 붓고 있는 그런 입장이었네요. 그런데 명나라는 그 안에서 또 다른 쩐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광용: 중국의 사극을 보면 꼭 등장하는 화폐가 있습니다. (붉은 상자), 이 안에 담겨 있는데요. 이것이 무엇이냐? 바로 銀子라는 것입니다. 말발굽 모양=마제은馬蹄銀, 이걸 마제은 이라고도 부르는데~
이시원: 저거 중국 옛날 사극 보면은 거기에서 국수 한 그릇 주세요 하면서 저걸 딱 주고 그러잖아요.
허준: 그건 은 색깔이 아니고 다른 색깔이야
이광용: 국수 한 그릇 값으로 이걸 준다구요? 혹시 재벌집 막내 며느리세요?
허준: 아까 은1냥이 72만원이라고 했어요. 이건 몇십냥이에요. 자그마치 50냥! 50냥이 얼마인지 아세요? 50냥=약 3600만 원 이에요. 큰 일 납니다.
김동환: 이광용 아나운서가 말씀하신 것처럼 저게 몇 천만원 짜리이니까 저걸 쪼개서 국수 사먹고 그럴 수는 없으니까 그때 그 당시 규격이라든지 화폐 모양을 가진 것만 유통이 된 게 아니고 그땐 규격화되지 않은 화폐도 화폐의 기능을 가지고 유통 되었어요.
이광용: 명나라 시대에 유럽은 16세기 대항해 시대였습니다.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에서 은채굴 열풍이 불었는데요. 아메리카에서 채굴한 은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였느냐 명나라였습니다. 유럽은 은으로 명에서 나는 도자기나 차 이런 것들을 구매해 가서 명품 쇼핑을 당시에 했던 것이고요. 명나라가 연간 1톤에서 200톤 이상의 무역흑자를 냈다고 합니다. 은이 풍부하게 유입되면서 명나라에서는 은으로 결재를 했구요. 햇빛처럼 쓰였던 거죠.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세금까지 은으로 납부했다고 합니다.
박민수: 당시 유행한 말이 중국(明)은 세계 銀의 무덤이다. 세계 銀의 블랙홀이다 라는 말이 돌 정도로 銀이 넘쳐났습니다. 명 중기 이후부터 상품경제가 발전하고 유통망도 발전해서 거금을 벌어들이는 상인들이 굉장히 많았는데요. 특히 강남의 양저우에 있는 소금 상인들은 사치 행각이 엽기적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은 만냥을 쓰고 싶은데 뭐가 있을까 뭐를 멋있게 보일까 고민을 하죠. 탕진을 하고 싶어서 얇은 금박을 삽니다. 얇은 금박을 사서 탑 위에 올라가서 바람에 날리는 거죠. 이것이 명의 플렉스다.
이시원: 막 쓰다보면은 보통 결국에는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요.
이광용: 맞아요, 잘 나가는 명에게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은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시대에서 얼마 못 가서 은이 없어서 살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발생했어요.
허준: 무역로를 보면 은은 지금 계속 명으로 몰리고 있어요. 거기서 아무리 사치를 해도 은이 명나라 안에서 돌아다닐텐데 없다 라고 하는 건 누가 은을 먹어요? 왜 은이 없어져?
이광용: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은의 유입에 차질이 생겼어요. 당시 아메리카에서 은을 채굴하던 유럽의 잘 나가던 나라들,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등이 유럽 패권전쟁을 엄청나게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전쟁 비용을 은으로 충당했던 것입니다. 명으로 가는 은의 양이 확 줄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했어요. 일본에서 나는 은도 명나라로 많이 들어갔는데 일제 은도 명나라로 가는 양이 급격하게 줄어든 거죠.
김동환: 뭔가 상거래를 할려면 그 결재 수단인 돈이 있어야 되는데 돈이 부족한 상태가 되면 상거래가 위축되겠죠. 거기다가 이 때 당시 은이 잘 안 들어온다는데, 그런 소문이 나거나 징후가 발견이 되면 그걸 내가 갖고 있고 싶지, 상행위를 통해서 교환하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하고 싶지 않은 생각도 있잖아요. 사실 이렇게 되면 전반적으로 경제가 위축이 될 가능성이 있고 이렇게 되면 디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난다 (디플레이션 deflation-경제가 전반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
최태성: 인플레이션의 반대
김동환: 그렇죠, 그렇게 되면 이제 우리가 1929년대에 경험했던 대공황 같은 경제위기로 들어갈 수 있는 빌미가 있는 거죠.
이광용: 명나라가 바로 그 디플레이션 아주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시달렸는데요. 그런데 바로 그,때 저 멀리 변방에서 조용히 세력을 키우고 있던 오랑캐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잠시 후에 계속 되겠습니다.
허준: 어떻게 보면 전 세계가 은으로 대동단결하고 있는 이 싯점에서 들어오는 데에서는 더 이상 은이 들어오지 않고, 명에서는 돈을 써야 되는데 제일 많이 쓴 데가 임진왜란으로 5조, 이게 세계적으로 보니까 명이 무너져 내려가는 게 눈에 보이네요.
이시원: 이 세계사 안에서 우리나라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해야 하나요. 우리나라에서 있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최원정: 나비효과 처럼 임진왜란이 국제 흐름을 바꿔놓고 있는 거예요. 명나라 입장에서는 은으로 했지만 은으로 망하기 직전이에요. 서북쪽에서는 보바이의 반란, 남동쪽에서는 임진왜란, 국가재정이 말이 아니었겠네요.
박민수: 그리고 나서 바로 저 멀리 서남쪽 파주 지역에서 발생한 양응룡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도, (양응룡의 난-1597년 명의 파주지역 토사 양응룡이 일으킨 묘족의 반란), 은 200만 냥을 탕진합니다. 당시 명 조정의 일년 세입이 400만 냥이었습니다. 서북쪽에 180만 냥, 동남쪽에 780만 냥, 서남쪽에 200만 냥 해서 거의 1000만 냥이 넘어가는 거죠.
허준: 조선에다가 뿌린 돈이 명의 2년치 재정을 탕진했네요.
최태성: 이 세 개가 언제 일어났느냐 명 황제 만력제 시기에 다 발생을 해요. 그래서 이것을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 이라고 합니다.
최원정: 군사적으로 승리만 하면 뭐해요 지금 안으로 다 곪아 있는데
김동환: 우리가 팍스 아메리카나 라고 말하잖아요.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평화), 미국에 의한 평화, 그럴려면 미군에 의한 많은 주둔지에 미군들을 보내고 그 주둔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비용을 쓰죠. 유럽도 그렇고 아시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내부적으로 경제가 어려워지다 보니까 우리나라가 경험했듯이 아까 트럼프 얘기 하셨는데 트럼프 내부에서도 분란이 일어났잖아요.
허준: 소장님,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생각 났는데요. 지금 미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엄청난 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평화유지를 하는데 전 세계가 돈을 많이 쓰고 있잖아요. 혹시 미국이 지금 명과 같은?
이시원: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애요.
김동환: 내가 볼 때는 한 가지 차이가 있어요. 미국은 지금 많은 무기를 수출하잖아요. 근데 명은 그때 무기를 수출할 수 있는 통상이 없었거든요. 그 차이가 있는 거죠.
최원정: 단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실리는 확실히 챙기고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최태성: 미국은 군비를 회수하고 있는데 명은 그 회수가 안됐어요.
이시원: 萬曆三大征 안에서 어떻게 보면 明이 命을 다하고 있네요.
박민수: 조선의 임진왜란이 가장 明의 明을 줄이고 있었죠. 사실 임진왜란 때 쓰였던 780만 냥이라는 숫자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어떤 신하의 상소문에서 한번 언급된 게 어쩌다가 정설로 굳어진 것이죠. 최근에 한 중국 학자는 요 예산을 한 2000만 냥까지 확대해서 추산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전쟁과 관련된 사료와 숫자는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걸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자기 성과를 부풀리거나 피해를 축소하거나 당시의 어떤 입장과 의도에 따라서 너무나 조작되고 왜곡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분명한 팩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불과 50년 만에 그 대단했던 明 나라가 命을 다하게 된 겁니다. 明의 임진왜란 참전이 어떤 방식으로든 明이 운명을 다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최원정: 우리도 주식을 해서 한 2000만원 잃었는데 친구들에게 나 780만원 정도 잃었어~명나라 입장에서도 780만 냥보다 훨씬 많은 전쟁비용을 지출했을지도 모른다.
최태성: 어쨋거나 이 明이 은 때문에 命을 다해갈 즈음에 바로 은 때문에 다시 새롭게 등장하는 민족이 있었으니 그 신그룹이 누구다?
일동: 만주족~
최태성: 청을 일으킨 만주족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허준: 그러면 여기서는 무슨 은광이 터졌길래 갑자기 은이 많이 생겼다는 겁니까?
최원정: 만주 벌판에 큰 은광이 터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이시원: 이럴 때 천축의 힘이 발휘되는 것 아닐까요? 만주족은 차곡차곡 은을 모우고 있었던 거죠.
김동환: 몇 년 전에 기억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십원 짜리 동전이 품귀현상이 있었어요. 그래서 조사를 해보니까 어르신들이 경로당에서 쩜심을~어르신들 주머니에 들어간 10원 짜리가 유통이 안 되는 거예요. 명 말기 은은 유입이 되는 데 유통이 안 되고 그냥 숨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시름 시름 경제가 약해지고 그리고 이제 군사적으로도 어려워지고 청의 공격을 못 막는 상황 쪽으로 간 거죠.
박민수: 그 많던 은은 누가 다 먹었을까요? 명이 세금을 은으로 거두었다고 했잖아요. 세금 대부분이 어디에 쓰였냐면 바로 북로(北虜)-남왜(南倭), 북쪽 오랑캐와 남쪽 왜구를 막는 국방비로 사용했습니다. 국방비를 쓰는데 직접 중앙에서 지방으로 군대를 보내는 것보다는 그 지역의 실력자들한테 알아서 그 지역을 관리하게 하는 게 훨씬 노력과 비용이 덜 들었겠죠. 만주 이전엔 여진으로 불렸었죠. 아직 통일 되기 이전의 여진은 지역마다 독립적인 여러 이름을 가진 여러 부족들이 있었습니다. 명은 이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협조적이고 순종적인 부족들한테는 교역권을 대가로 주는 이런 식으로 관리를 했던 거죠. 말을 잘 들으면 교역권을 많이 주고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교역권을 줄이는 거죠. 이렇게 상호견제와 충성경쟁을 통해서 오랑캐를 오랑캐로 통제했던 거죠.
최원정: 以夷制夷네요.
최태성: 진짜 재미있는 사실이 있어요. 지금 이쪽 지역에서 당시 오랑캐를 쥐락펴락 했던 중국인이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이성량이란 사람이 있었거든요. 이성량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중국에서 파병 온 장수가 있다고 했잖아요.
일동: 이여송
최태성: 이성량이 바로 이여송의 아버지예요. 이성량에게 순종하며 교역원을 받고 성장했던 여진 가문이 나중에 청나라를 건국하는 누루하치 가문입니다. 이게 이렇게 연결됩니다.
허준: 명나라에서도 저 멀리 관리가 힘드니까 돈으로 해결하고 교역권도 주고 너희들이 알아서 관리해 대신에 내가 너한테만 힘을 줄게 라고 키운 게 누루하치예요.
최태성: 그게 결국 명나라를 망하게 만든 거죠.
이시원: 국방비를 평화비용으로 썼던게 명을 망하게 만들고 누루하치 가문을 키운데 쓰였다.
허준: 이거는 예전 고대 카르타고서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 역사 전세계 전쟁사에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돈으로 산 평화는 분명 나라를 망하게 만든다.
박민수: 그리고 아까도 말씀이 나왔지만 누루하치 세력은 하루 아침에 해성처럼 등장한 아이돌 그룹은 아니었어요. 예전부터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점점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주변 지역을 통합해 나가는 거죠. 물론 그때 명도 신경을 쓰고 있었죠. 저네들 크고 있네 신경을 썼지만 그때는 아직 명의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정도였죠. 변방에 오랑캐였을 뿐이었죠. 나중에 그들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정복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거죠.
최원정: 어찌 보면 명나라의 똘마니인데 힘을 키워가지고, 형님 자리를 좀 내어 주시죠. 오늘 명나라의 임진왜란 참전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니까 굉장히 달리 보이죠.
허준: 이 때의 역사만 알더라도 현재의 국제정세를 알고 지금 우리나라가 취해야 될 것들이 어느 정도는 눈에 보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이번 편, 다음 편을 집중해서 보면 진짜 2023년 대한민국이 취해야 될 길이 보이지 않을까
김동환: 은을 매개로 한 국제경제 질서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명이 저렇게 소멸해 갔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결국은 그 나라 구성원들 국민들의 지혜의 총량이 결국은 지금 시대에 맞는 부국강병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시원: 이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가고 싶다.
최원정: 항상 뒤늦게 후회한다.
최태성: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오늘 이 시간에 중원의 주류가 무너지고 변방의 비주류가 성장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올해 혹시 변방의 비주류라고 생각하시는 많은 분들이 계실텐데 역사저널 그날을 통해 가지고 어떻게 주류가 되는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최원정: 아무데서나 들을 수 없는 명청 교체기였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95회 신제국의 탄생, 청나라 ① 명을 뒤흔든 쩐의 전쟁, 임진왜란에서 정리).
① 1592년 4월 13일, 12만의 일본군이 조선을 쳐들어왔다. 부산진 함락 1592년 4월 14일, 한양함락 1592년 5월 3일, 무섭게 북상하는 일본군의 기세에 선조는 피난길에 올랐고 일본군은 한양에 이어 평양까지, 일본군 평양입성 1592년 6월 13일, 파죽지세다. 왜노(倭奴)가 상국(上國: 중국)을 침범하고자 본국을 끌어들여 같은 편으로 삼으려 했으나, 본국이 의리를 지킨 까닭에 되려 성을 내고 흉포를 부려 한양-개성-평양이 함락되고 백성은 전쟁에 짓밟혔다 (倭奴將犯上國 欲引小邦爲黨, 緣小邦守義, 故發怒肆兇, 三京失守, 生民魚肉)-선조실록, 선조 25년 9월 2일, 북경(北京) 명나라의 수도 명나라 조정은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조선의 원군요청에 조선을 도울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인 明, 마침내 조선파병을 결정한다. 조선과 明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7년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그날 明의 선택은 15~16세기에 동아시아 최대 강국이었던 明의 운명을 뒤흔들었다. 17세기 중국에서는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었다. 당시를 주름잡았던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제국 청나라가 부상하게 되는데 明-淸 교체의 원인을 제공한 배경이 되었던 여러 사건 중의 하나가 壬辰倭亂이었다.
② 明淸의 흥망은 당시 국제적인 돈의 흐름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쩐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청나라는 만주족이고 야만족이고 무지막지한 오랑캐인데 조선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이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청나라 청을 대표하는 문화 황비홍의 무술 太極拳 은 약 470년 전에 만들어졌다. 그 전에 운동은 모두 근육위주의 운동이었는데 태극권은 몸속훈련이다. 기를 가지고 하게 되어있다. 명말청초 진왕정 명인은 척계광이란 장군의 기호신서, 그 다음에 도와경전인 황정경을 토대로 태극권을 창시하였다. 청나라를 대표하는 황비홍의 트레이드 마크 변발과 치파오~ 중국의 북방지역은 산세가 험하고 매우 춥다. 이동을 빨리 해야 되기 때문에 만주족은 말을 많이 이용했다. 치파오는 여성만 입는 줄 알고 있는데 말을 탈려니까 남녀 모두 옆트임이 터져있어야 말을 탈 수 있다. 원래 치파오의 치(qi/旗)는 만주족의 고유한 군사-행정조직의 팔기(八旗)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어에서 치(qi)=팔기의 기(旗)이고, 파오(pao)=두루마기 포(袍) 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치파오 하면 만주족의 팔기 사람들이 입는 두루마기 라는 뜻이다. 남녀 구분이 따로 없다.
③ 만주족들은 전쟁이 많았다. 갑옷을 입어야 되고 머리에 투구를 써야 되니까 땀이 난다든지 하면 굉장히 불편하겠다. 그래서 머리 앞 부분을 밀어 버리고 뒤에 머리카락만 남겨두었다. 앞 머리 가 내려오면 거추장스럽다. 만주족들은 머리카락에 사후 영혼이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을 다 못가져오는 경우 그때는 머리를 잘라가지고 돌아와서 장례를 치렀다. 청나라 때 변발 안하면 단발했던 한족들 주장 신체발부 수지부모 (身體髮膚 受之父母) 몸과 머리털,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때 유행했던 이 말 한 마디, 유두불유발(留頭不留髮)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 카락을 남기지 말고, 유발부유두 (留髮不留頭) 머리카락을 남기려면 머리를 남기지 마라. 변발 안 하면 죽으라는 뜻! 머리 카락 안 자르면 목 자른다. 내 명을 어기면 머리가 남아 있을 수 없다. 무시무시했던 청의 슬로건~ 그렇다고 만주족을 너무 잔인하게만 보지 마시라. 만주족은 왜 변발을 강요했을까. 생각을 해보자. 소수의 정복자였던 만주족이 자기의 100배가 넘는 한족들을 통치할려면 아무래도 한 눈에 딱 띄는 표시가 필요했겠다. 한 사람 한 사람 붙잡고 너 만주 좋아해? 우리한테 안 덤벼들꺼야? 이렇게 물어볼 순 없다. 그러니까 가장 안전하고 눈에 확 띄는 확실하고 강렬했던 변발이 우리 편이라는 걸 바로 보여 줄 수 있다. 피아식별 장치였다. 한족을 다스리는 소수 민족 청도 대단하지만 더 중요한 건 중국하면 떠오르는 많은 부분이 청의 문화다.
④ 최근에 중국 한족들이 한푸(漢服)라고 해서 한족 고유의 전통 옷이다 라고 홍보도 많이 하고 있다. 근데 변함없는 사실은 우리가 사극하면 조선시대 사극을 떠올리고 조선시대 복식이 나오는 것처럼 중국 사람들 한테도 가장 익숙한 사극은 前왕조가 청이었기 때문에 변발하고 치파오를 입고 나올 수 밖에 없다. 만주족은 갑자기 나온 민족이 아니라 이전에 있었던 여진족부터 시작한다. 여진(女眞)은 이성계부터 시작해서 혹은 이성계 이전에 12세기에 고려가 있었을 때에도 동북지역에 있었다. 여진과 만주족이 있는 사이에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 민족을 보면 한반도 민족과 만주족 북쪽에 있는 기마민족 두 개가 합친 거다. 청이 고구려 후예일 수도 있다. 발해도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인으로 이루어졌다. 그 말갈인이 바로 女眞의 전신이다. 만주족은 일찍부터 한반도에 있는 한민족과 관계를 맺고 있다. 말갈족->여진족->만주족, 만주족이 가까워졌다. 고구려와 연이 있다. 만주족은 무슨 언어를 쓰는지?
⑤ 송파의 롯데월드 옆에 三田渡碑가 있다, 1639년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후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 이 비석이 세워진 지명의 이름을 따서 三田渡碑 라고도 부른다. 조선이 오랫동안 우리에게 죄를 지었고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일으켜서 너희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받아 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다. 이 비문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비석이 만주어, 몽골어, 한문 3가지 문자로 기록되었다. 마치 고대 이집트 문명의 로제타석이 그리스어를 가지고 이집트의 신성문자 그리고 민중문자를 해독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것처럼 이 三田渡碑는 17세기 초에 만주어 몽골어 한문이 같이 쓰여진 비석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만주어가 한국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주어 학습을 통해서 그 동안 청나라 역사에서 밝혀지지 못했던 부분들을 많이 밝혀내고 있다.
⑥ 중국엔 현대 만주어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지금 남아 있는 만주족이 한 100만 명 정도, 그 중에 만주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수백 명이고 일상대화로 쓰는 사람들은 수십 명에 불과하다. 사멸위기다. 청나라는 300년 이라는 긴 역사와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어 자료가 많았을 텐데 그 언어를 사용했던 사람이 많이 사멸되고 있다. 만주족은 과거 우리처럼 말은 있었는데 글은 없었다. 근데 여진족을 통일한 누루하치가 세종대왕처럼 1599년 만주어를 창제한다. 만주어가 중요한 이유는 쓰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만주어로 쓰인 수많은 역사적인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주어로 쓴 자료는 청나라에서 중요한 문서들이나 특히 대외비였던 문서들이 만주어로만 작성이 되었다. 예를 들어,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은 청과 러시아가 맺은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국경조약이다. 이 때 중국측 조약원본은 오직 만주어로만 작성되었다. 한문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중국 근현대화 청나라 역사를 알려면 만주어가 필수다.
⑦ 1592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조선을 침략했을 때의 명분이 정명가도(征明假道) 또는 정명향도(征明嚮道)였다. 명나라를 치러갈 테니까 조선이 길을 안내하거나 내어 놓아라. 조선 입장에서는 목적은 명나라니까 명나라가 당연히 조선을 도와야지 라고 해서 요청을 한다. 당시에 명은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었다. 정명가도~일본이 명을 친다고, 명의 경제로 보면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미국을 천조국이라고 한다. 국방비로 천조를 쓴다는 얘기다. 미국은 전 세계 국방비의 40% 이상을 쓴다. 엄청난 국방비다. 그때 세계의 중심 아시아의 맹주였던 명도 엄청난 국방비를 쓰고 있었다. 몽골이나 여진이나 북방의 오랑캐로부터 영토를 지키고 거기다 조선파병을 해야 한다. 많은 병력을 수송하고 전투하고 식량을 대고 이런 상황이면 돈 문제가 심각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실제로 처음 원군요청을 받은 명도 조선을 의심했다. 혹시 조선이 일본에게 정명가도 하면서 우리를 유인해서 뒤통수를 치는 게 아닐까. 그만큼 무지했고 신경을 안 썼다. 그래서 피난 길에 올랐던 선조가 조선 임금이 맞는지 가짜인지 실물을 한번 보고오라 해서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⑧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자마자 보름 만에 수도를 함락하고 두 달 만에 평양성이 함락되고 조선이 갑자기 후퇴하니까 명은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이 압록강을 넘으면 명과 만나는 지점이 요동지역이다. 만약에 일본이 요동으로 들어서면 바로 명과의 전쟁이다. 북경이 너무 가깝다. 그래서 명의 판단은 일단 급한 불은 끄자 해서 요동 지역의 5천 군사를 평양까지 진출시킨다. 파죽지세의 일본군을 진압하러 나선 명군, 1592년 7월 17일, 명의 조승훈 부대 평양성 공격, 그러나 조선의 지리와 일본군의 실체에 어두웠던 명나라군 일본의 기습을 받아 대패, 이쯤 되니까 명나라가 깜짝 놀란다. 일본이 변방 오랑캐가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칼을 갖고 명을 치는구나. 이 대로는 안되겠다 해가지고 그해(1592년) 12월 명나라 장군 이여송의 부대 4만 3천명을 조선에 파병한다.
⑨ 명의 이여송 부대는 최정예 부대였다. 일본군 역시 전투경험이 많다. 일본군은 센코쿠 시대 통일전쟁을 100여년간 내전을 치르고 온 군인들이었다. 당시 임진왜란 발발하기 두 달 전인 1592년 2월에 몽골에서 귀순했던 보바이(哱拜)라는 사람이 영하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명은 요동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이여송 부대를 영하로 파견한다. 이여송(李如松) 부대는 1592년 9월 몽골족의 근거지를 불태우고 영하성을 물에 잠기게 하여 진압한다. 이여송 부대의 다음 행선지가 바로 조선이다. 당시 이여송 부대의 경로는 영하-요동-조선, 몇 천 킬로미터는 훌쩍 넘었다. 병력만 그냥 걸어가지만은 않았다. 무기-전쟁물자도 다 가지고 왔을테니까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 많은 변수가 있다. 기후 변화도 중요하다. 기후가 병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또 하나의 문제는 기동력인데 조선 땅은 산이 많다. 말들이 힘들어진다. 말이 쭉 달릴 수 있는 길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 게다가 비가 왔다면 땅이 진창이 된다. 말들은 죽어나간다. 굉장히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구원병이라고 내려 왔지만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⑩ 그런데 이여송 부대가 결정적인 착오를 하나 한다. 먼 거리를 무기 외에도 식량이나 생필품을 이고지고 가는게 불가능 하다. 그래서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됐던 화폐 즉 은을 지고 간 갔다. 은으로 보급품을 사서 대군을 먹이고 재우면 된다 했는데 조선은 은을 받아주지 안았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경략 송응찬이 답답한 심경을 기록했다. “조선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무역도 통하지 않아 비록 은전(銀錢)이 있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많은 병사가 (압록)강을 건넌 이래 지금까지 채소와 고기, 장(醬) 같은 것을 입에 대보지도 못했다, 은을 싣고 왔는데 조선에서 은을 안 받아 우리가 먹을 쌀이나 반찬도 못사고 병사들이 입을 솜옷이나 신발도 못산다. 함경도 단천에 은광이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연은 분리법이라고 하는 은을 제련하는 기술을 우리가 먼저 개발을 해서 일본에 전해줬다. 일본은 조선에서 배웠던 은 제련법 때문에 은 광산이 엄청 늘어났다. 16세기 은광개발 열풍이 분 일본, 세계 2위 은 생산국에 등극, 은을 통해 축적된 엄청난 부,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조총 무기를 조달, 조선침략의 발판이 된 은광개발, 그러나 조선은 오히려 은광을 폐쇄시켜 버렸다. 명 나라와 조선은 조공관계에 의해서 외교관계가 움직이고 있다. 조선이 명한테 뭔가를 주면 명도 조선에 뭔가를 주는 일종의 교환관계에 있었는데 조선이 명한테 대표적으로 주는 물품은 인삼이었다. 중국에서 인삼을 가져오라고 얼마나 다그치는지 모른다. 그런데 명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은이 조선에서 많이 난다 그러면 조공 물품에 당연히 은이 추가 되겠다. 조선은 수탈에 대비한 전락으로 은이 없다고 하였다.
⑪ 명군 사령부도 고심 끝에 두 가지 보급 해결책을 내놓았다. 한가지는 조선과 가장 가까운 요동-산동 지역에서 명나라산 쌀과 보급품을 매입해서 이걸 육지로 바다로 조선으로 배송시킨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보급로가 굉장히 길고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은 갖고 가면 됐지 했는데 이제는 사람, 말, 수레도 보내야지 그러니까 명나라 장군들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이것도 전쟁 비용의 관점에서 보면 굉장한 인플레이션인 거다. 두번째 방법은 바로 조선에 손을 벌리는 거다.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이니까 조선이 책임져라. 그 당시 명군의 약탈이 심각했다. 일본군의 약탈 때문이 아니라 명군의 약탈 때문에 조선은 너무 힘들었다. 명군의 약탈이 너무 심해 가지고 살림살이 쌀을 땅에 묻고 도망 다니는 일이 있었는데 이런 말이 있었다. “왜적은 얼레빗(梳子) 같고 명나라 군사는 참빗(蓖子) 같다. 어쨌든 현실은 보급로가 길어지다 보니까 돈이 많이 들어갔다.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 이었다. 명군이 7년 전쟁 동안 쓴 비용은 당시의 은 기준으로 780만 냥을 썼다. 은1냥=쌀 2석을 살 수 있었는데 쌀 2석을 현재 한화 가치로 72만원 정도다. 계산을 해보면 무려 약5조6천억 원이다. 그래서 쩐의 전쟁이라고 한다. 명나라는 밑 빠진 독에 계속 돈을 붓고 있었다. 명나라는 그 안에서 또 다른 쩐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⑫ 명나라 시대에 유럽은 16세기 대항해 시대였다.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에서 은채굴 열풍이 불었다. 아메리카에서 채굴한 은의 최종 목적지는 명나라였다. 유럽은 은으로 명에서 나는 도자기를 구매 했다. 명나라는 연간 1톤에서 200톤 이상의 무역흑자를 냈다. 은이 풍부하게 유입되면서 명나라에서는 은으로 결재를 했다. 세금은 은으로 납부했다. 당시 유행한 말이 중국(明)은 세계 銀의 무덤이다. 세계 銀의 블랙홀이다 라는 말이 생겼다. 명 중기 이후부터 상품경제가 발전하고 유통망도 발전해서 거금을 벌어들이는 상인들이 많았다. 특히 강남의 양저우에 있는 소금 상인들은 사치 행각이 엽기적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은 만냥을 쓰고 싶은데 뭐가 없을까 뭐를 멋있게 보일까 고민을 한다. 탕진을 하고 싶어서 얇은 금박을 산다. 얇은 금박을 사서 탑 위에 올라가서 바람에 날린다. 근데 잘 나가는 명에게 변수가 발생했다. 은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시대에서 얼마 못 가서 은이 없어서 살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아메리카에서 건너온 은의 유입에 차질이 생겼다. 당시 아메리카에서 은을 채굴하던 유럽의 잘 나가던 나라들,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등이 유럽 패권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전쟁 비용을 은으로 충당했다. 명으로 가는 은의 양이 확 줄어 들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일본에서 나는 은도 명나라로 많이 들어갔는데 일제 은도 명나라로 가는 양이 급격하게 줄었다. 상거래를 할려면 그 결재 수단인 돈이 있어야 되는데 돈이 부족한 상태가 되면서 상거래가 위축되었다. 거기다가 이 때 당시 은이 잘 안 들어온다는데, 그런 소문이 나거나 징후가 발견이 되면 그걸 내가 갖고 있고 싶지, 상행위를 통해서 교환하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하고 싶지 않은 생각도 있다. 사실 이렇게 되면 전반적으로 경제가 위축이 될 가능성이 있고 디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난다 디플레이션(deflation)는 경제가 전반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 인플레이션의 반대다. 그렇게 되면 1929년대에 경험했던 대공황 같은 경제위기로 들어갈 수 있다. 명나라는 바로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시달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저 멀리 변방에서 조용히 세력을 키우고 있던 오랑캐가 있었다.
⑬ 임진왜란이 국제 흐름을 바꿔놓고 있었다. 명나라는 서북쪽에서는 보바이의 반란, 남동쪽에서는 임진왜란, 국가재정이 말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저 멀리 서남쪽 파주 지역에서 양응룡의 난이 발생했다. 양응룡의 난은 1597년 명의 파주지역 토사 양응룡이 일으킨 묘족의 반란, 은 200만 냥을 탕진한다. 당시 명 조정의 일년 세입이 400만 냥이었다. 서북쪽에 180만 냥, 동남쪽에 780만 냥, 서남쪽에 200만 냥 해서 거의 1000만 냥이 사용되었다. 조선에다가 뿌린 돈은 명의 2년치 재정이었다. 이 세 개가 언제 일어났느냐 명 황제 만력제 시기에 발생하였다. 이것을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 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팍스 아메리카나 라고 말한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평화, 미국에 의한 평화, 그럴려면 미국은 많은 주둔지에 미군들을 보내고 그 주둔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막대한 비용을 쓴다. 유럽도 그렇고 아시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내부적으로 경제가 어려워지면 분란이 일어난다.
⑭ 明과 美國은 한 가지 차이가 있다. 美國은 지금 많은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근데 明은 그때 무기를 수출할 수 있는 통상이 없었다. 美國은 실리를 확실히 챙기고 있다. 美國은 군비를 회수하고 있는데 明은 그 회수가 안됐다. 萬曆三大征 안에서 明이 命을 다하고 있었다. 朝鮮의 壬辰倭亂이 가장 明의 命을 줄이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쓰였던 780만 냥 전비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어떤 신하의 상소문에서 언급된 것이다. 전쟁과 관련된 사료와 숫자는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건 문제가 있다. 왜냐면 자기 성과를 부풀리거나 피해를 축소하거나 당시의 어떤 입장과 의도에 따라서 너무나 조작되고 왜곡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팩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불과 50년 만에 그 대단했던 明 나라가 命을 다 하었다. 明의 壬辰倭亂 참전이 어떤 방식으로든 明의 멸망에 영향을 미쳤다. 明이 銀 때문에 命을 다해갈 즈음 바로 은 때문에 새롭게 등장하는 민족이 있었다. 淸을 일으킨 만주족이었다. 그들은 차곡차곡 은을 모우고 있었다.
⑮ 우리나라도 얼마전 십원 짜리 동전 품귀현상이 있었다. 조사를 해보니까 어르신들이 경로당에서 쩜심을~어르신들 주머니에 들어간 10원 짜리가 유통이 안 되었다. 명 말기 은은 유입이 되는 데 유통이 안 되고 그냥 백성들 사이에 숨어 버렸다. 고로 경제가 시름 시름 약해지고 군사적으로도 어려워지고 청의 공격을 못 막는 상황이 되었다. 명은 세금을 은으로 거두었다. 세금 대부분이 어디에 쓰였냐 바로 북쪽 오랑캐와 남쪽 왜구를 막는 국방비로 사용됐다. 군대를 중앙에서 지방으로 보내는 대신 그 지역의 실력자들한테 관리하게 하였다. 만주(여진)에는 지역마다 독립적인 여러 이름을 가진 부족들이 있었다. 명은 이들을 관리하는데 협조적이고 순종적인 부족들한테는 교역권을 대가로 주었다. 말을 잘 들으면 교역권을 많이 주고 잘 안 들으면 교역권을 줄였다. 이렇게 상호견제와 충성경쟁을 통해서 통제했다. 以夷制夷였다.
@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오랑캐를 쥐락펴락 했던 중국인이 있었다. 그게 이성량이란 사람이다. 이성량은 이여송의 아버지다. 이성량에게 순종하며 교역권을 받고 성장했던 여진가문이 나중에 청나라를 건국한 누루하치 였다. 명 국방비는 누루하치 가문을 키우는데 쓰였다. 돈으로 산 평화는 나라를 망하게 만든다. 누루하치 세력은 하루 아침에 해성처럼 등장한 게 아니다. 예전부터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점점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주변 지역을 통합해 나갔다. 물론 명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명의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변방 오랑캐였다. 나중에 그들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정복할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明나라의 壬辰倭亂 참전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니까 달리 보였다. 明의 멸망을 알고 현재 국제정세를 아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취해야 될 방향들이 어느 정도 눈에 보인다. 2023년 대한민국이 취해야 될 길이 보인다. 明이 은을 매개로 한 국제경제 질서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면 저렇게 소멸해 갔을까. 결국은 그 나라 국가 지도자와 국민들의 지혜의 총량이 시대에 맞는 富國强兵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집안의 가장으로써 명청 교체기에서 교훈을 얻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