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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36회 : 바보 온달 그는 고구려의 전쟁영웅이었다
방송일: 20011124 조회수 : 18439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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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pan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모아놓은
삼국사기 열전 충신편.
10여명의 충신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기록타이트 -그런데 여기에 고구려 평원왕대의 인물인
바보온달이 나온다.
# 온달과 공주 -평강공주와 결혼한 바보온달.
바보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온달이
왜 충신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일까.
#말달리는+지도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그속엔 6세기 고구려 사회의 변화와
온달의 참모습이 숨어 있었다.
# 타이틀 : 바보온달, 그는 고구려의 전쟁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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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
# 기본세트 MC 서서
우리나라 사람이면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고구려 평원왕 시대, 바보로 놀림을 받던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의
온달이 평강공주와 결혼을 해 위대한 장군이 된다는 이야기인데요.
바보라는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 공주와의 결혼을 통해 성공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마치 동화같습니다.
돈많은 여자와 결혼해 출세를 꿈꾸는 남성들의 세태를
풍자하는 말인 '온달 콤플렉스'도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과연 온달도 이처럼 부인인 평강공주덕에 출세한 인물일까요?
온달과 평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편에 기록돼 있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외에는 이렇다할 근거들이
없어 이들의 이야기를 둘러싼 논란이 많습니다.
# 진파리고분 나오고
이것을 한번 보시죠.
평양에 있는 고분인데 진파리고분이라 불립니다.
북한은 이것을 온달과 평강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온달은 고구려 부흥에 이바지한 장군으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 그옆에 단양적석총 나오고
그런데 최근 충청북도 단양 땅에서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더기가 발견됐습니다.
단양에서는 이것을 온달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된일인지 발굴현장으로 가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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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 도로 TR -지난 10월.
단양군의 한 돌무더기에 학계와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 적석총 -온달의 무덤이라는 이 돌무더기의
발굴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 고사 -발굴을 추진한 단양군은 온달의 무덤이
확실하다며 관광자원 개발계획까지 세우고 있다.
# 적석총 FS -온달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돌무더기.
얼핏보면 그냥 돌무더기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돌들이 자연석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다듬은 것이다.
# FS -게다가 일정한 형태와 모양을 지닌 돌들이
규칙적으로 포개져 층을 이루고 있고.
# TD -아랫부분에는 기단의 흔적까지 보인다.
고구려의 계단식 적석총과 비슷한 것이다.
# 숫자쓰여진 돌들 -마을 사람들 또한 옛날부터 이것을
온달의 무덤으로 불렀다고 한다.
# 주민 인터뷰 (장군총이라고 했다. 온달 장군무덤이 맞다.온달산성으로 넘어가는 직선거
리니까 가깝다 속세목 정상에 올라가면 온달산성이 정면으로 보인다.
# 주민 인터뷰 (바보온달이 여기서 전사해가지고 모시고 가다가 급해서 여기다 묘를 썼다고
하더라)
# 적석총 돌내리는 FS -발굴초기 이것이 고구려의 적석총일 가능성은
확인됐지만 누구의 무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 앉아있는 여자 타이트 -보다 정확한 성격을 규명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적석총의 크기와 규모를 확인하는 작업.
# 길이높이 자막 나오는 -측정결과 길이는 22M, 높이는 10M나 됐다.
이렇게 큰 규모를 지닌 고구려의
계단식 적석총은 남한에서는 드문 것이다.
# 발굴단장 인터뷰
(적석총 길이가 22 폭 10m 이런 무덤을 만들려면 트럭으로 100대분의 돌을 날
라야 된다. 이런 정도를 쌓으려면 상당한 세력이다.그런데 고구려 적석총이라
면 상당히 지휘가 높은 사람들의 무덤이 아닌가 생각된다.)
# 기기작동하는 -레이져 기기를 이용한 실측도 이뤄졌다.
규모가 큰 유적에 주로 사용되는 이 기기는
수작업보다 정확하다.
# 모니터 -파악된 수치들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전체 형태까지 쉽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 CG -실측자료를 통해 복원한 단양의 고구려 적석유구.
그 형태와 크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 장군총 -중국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적석총인 장군총.
길이 31M로 단양 것보다는 크지만
그 모양은 같다.
# 돌들어내는 -그렇다면 이 무덤의 주인이 온달일까.
무덤의 내부시설을 확인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 돌 숫자쓰여지 있는 TD -우선 무덤의 4/1을 절개해 쌓여있는 돌들을
걷어내고.
석곽, 석실등의 내부시설과 유물존재여부를
확인해 나갔다.
# FS TD -그런데 작업도중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아랫부분으로 갈수록 큰 돌이 나타나는 것이다.
# 편편한 돌 타이트 -이런 돌들은 석실 구조물의 일부거나
무덤 전체를 받치는 기둥일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시설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 발굴단장 인터뷰
큰 돌에 선이 있다. 그 하부에 큰 돌이 있고 요 부분 돌이 사라진 부분도
굉장히 큰돌이다. 상부보다는 하부에 큰 돌을 쓰고 또한가지는 기울어진 돌들
도있다 중심부에는 속으로 기울어져 들어가고 있다. 대개 수평으로 쌓는데 기
울여 졌다는 것은 어쩌면 내부에 구조가 있어 그게 함몰되면서 기울어진게 아
닌가 하는 것을 다음 단계에 확인할 생각이다.
# 주민들 서서얘기하는 -그런데 주민들에 의해 새로운 사실이 확인됐다.
주변에 5기의 소형 적석총이 있었는데
그중 3기가 무덤과 연결돼 있었다는 것이다.
# 주민 인터뷰 원래 여기에 돌 무더기가 길 이쪽으로 3기가 있었고
저쪽에 2기가 있었다. 이 앞에는 사람이 안다녔다고.
# 적석총앞에서 -주민들의 증언은 발굴팀과 학계의 관심을 끄는
중요한 것이었다.
# 지도설명 -발굴은 소형 적석총과 연결된 통로를 찾는
작업으로 확대됐다.
# 돌들SK -주민들은 통로의 입구와 출입문까지 기억했다.
# 주민인터뷰 이쯤 문넓이는 1M위는 아주 넓더라구요. 위는 아주 넓더라 위는 1m짜리
돌을 걸ㄹ쳐놨다. 안에 못들어갔다. 바로 앞쪽으로만 들어가보고
꺽인데는 못들어갔죠.
# pan -무덤과 연결돼 있었다는 2기의 소형 적석총은
새마을운동과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파괴됐고.
지금은 흔적만 남은 상태다.
# CG -2기의 소형 적석총과 연결돼 있는 적석총.
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라면
과연 누구의 무덤일까.
# 내부 발굴하는 -발굴이 진행되면서 내부구조 확인에
관심이 집중됐다.
# 발굴단 인터뷰
이런 적석구조가 한국에서 흔하지 않다. 고구려쪽에 많지만. 일단 단을 가지고
구조물을 쌓았다는 것은 고분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 규모면을 봤을 때
지역 자체가 고구려 문화에서 가지는 위치를 봤을 때 적석총일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TD -수많은 연구과제를 던져주고 있는
단양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적석총.
# 내부 TR -최총발굴이 끝나지 않아 무덤의 정확한
내부구조와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무덤의 주인이 온달인지 아닌지는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이뤄져야 알 수 있는 것이다
# CG -온달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고구려의 적석총,
무덤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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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 적석총 연결된 CG, MC 적석총의 문을 열고 나오며
아, 굉장히 크네요.
남한에서 이렇게 큰 고구려 적석총 형태가
발견된 것은 드물다고 하는데요.
# 적석총 배경으로
단양에서 온달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고구려의 적석총.
발굴작업에서도 이것이 온달의 무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발굴과정에서 얻은 자료를 근거로 이 무덤의 내부구조와
유물의 존재여부를 확인하는 연구가 계속될 예정입니다.
이곳 단양에는 곳곳에 온달과 관련된 유물과 유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 온달산성나오고
온달의 흔적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온달산성입니다.
온달산성은 온달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그옆에 삼국사기 "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 , 阿旦成 커지고
삼국사기 온달열전에는 온달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단성 아래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길에서 죽었다."
온달이 싸우다 죽었다는 아단성이 바로 온달산성이라는 것입니다.
고구려 온달이 정말 단양의 이 온달산성에서 전사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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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 TR -단양에는 온달과 관련된 유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 동굴입구 -그중 가장 유명한 온달동굴.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다.
# 동굴내부 TR -온달과 평강공주가 함께 머물렀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 종류석 -길이가 8km나 되고 수십갈래의 작은 굴이
연결돼 있는 온달동굴.
# 숲으로 가는 -온달이 쉬고 갔다고 휴석동이라 불리는 마을.
이곳에도 온달의 흔적이 남아있다.
# 윷판바위 -마을 뒷산에 놓여있는 윷판 바위.
온달이 군사들과 윷놀이를 했다는 곳이다.
# 윤수경 인터뷰 윷을 쳤다. 온달이 말판을 손으로 그렸다고
# 윷판바위 만지는 -그러면 단양에 이렇게 온달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 윤수경 인터뷰 온달이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려 이곳에 왔는데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러다 보니 온달에 대한 전설도 많고 평강전설도 많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지 못한 전설이 이 지역에 많다.
# 산성 ZI -단양이 온달의 고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온달산성에 있다.
# 산올라가는 -온달이 신라군과 싸우다 죽었다는 온달산성은
해발 400m의 낮은 산성이지만 경사가 급하고
험하다.
# 정면 FS -온달산성은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 성벽타이트 -높고 견고한 성벽 또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남한강 ZO -온달산성은 남한강에 둘러싸여 있어
방어가 용이하다. 강을 이용하는 선박의
출입까지 통제가 가능하다.
-또한 성곽이 이렇게 절벽위에 있기 때문에 적의
공격이 어렵다. 방어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천혜의
요새인 것이다.
# 절벽위 성곽 산성은 성곽이 활모양으로 굽어져있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다.
# 성FS
# pan -중요한 성이었기 때문에 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도 치열했다.
온달산성에는 아직도 그 흔적들이 남아있다.
# 돌TR -산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형태의 돌들이
눈에 띈다. 냇물에 의해 마모된 강돌이다.
전투시 성벽 아래에 떨어뜨려 적에게 타격을
주는 고대전투에서 위력적인 무기다.
# 이도학 인터뷰 냇돌이 무기로 사용됐다. 신라에서는 돌팔메질을 전문으로 하는 군대가
있었고 삼국시대 보편적인 무기. 돌이라는 것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자연무기
# 돌SK -곳곳에서 보이는 이런 무기들은
온달산성의 치열한 전투를 짐작케 한다.
# 이도학 인터뷰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게 되면 신라에게 빼앗긴 국원성 충주일원 회복이
가능하고 남한강 상류지역이 모조리 고구려의 땅이 될 수 있는 것이 영춘
일대의 온달성일원이다.계속 남쪽으로가면 죽령로 간다. 풍기쪽으로 장악
한다. 온달성이 떨어지면 그 일대가 무방비 상태에 놓여있게된다. 그 중요한
루트를 지켜주는 것이 온달성이다.
# 전투, 화살날아오는 -온달도 이를 위해 출병하지만 아단성,
즉 온달산성아래에서 전사한다.
# 영춘면 부감 -그러면 아단성이 왜 온달산성인가.
동국여지승람은 단양 영춘면을
고구려의 을아단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 삼국사기 지리지 -삼국사기 지리지도 영춘면을 을아단현으로
표현한다. 단양군 영춘면의 옛지명이 바로
아단현인 것이다.
# 고지도 -조선시대 만들어진 영춘현의 고지도에
나타나는 고성.
온달산성이다.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산성을 쌓고 신라군과
싸운 곳이라는 기록도 보인다.
# 계립현 올라가는 -온달산성이 온달의 전사지라는 것은
계립현의 위치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 계립령 TR -계립현, 즉 계립령은 단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강수로와 낙동강수로를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 삼국사기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은 591년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 땅을 되찾기 위해 출병한다.
# 유허비 -계립령은 고구려가 남진정책으로 확보했다가
551년 한강유역상실후 신라에게 다시 뺴앗긴
곳이었다. 그로부터 40년후 온달이 회복을
시도한 것이다.
# 서영일 인터뷰 신라와 고구려와의 국경은 상징적으로 계립령과 죽령이라는 표현을 써서
고구려가 이해. 적어도 죽령과 계립령 서북지방은 원래 고구려의 영토라는
의식이 7세기까지 계속되고 있었고 그 소유권을 계속 주장한다. 온달이 실지
회복을 주장했으니까 당연히 계립령 죽령 서북지방을 거론한 거다.
# TR -6세기 고구려와 신라는 계립령과 죽령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인다.
# 죽령 -죽령 또한 고구려와 신라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교통로인 것이다.
# 이도학 인터뷰 뒤쪽이 소백산맥 너머 남쪽의 첫 고을인 풍기땅이다. 고구려가 소백산맥
이남 신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죽령을 넘어야 한다. 죽령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 이곳에 대한 방비를 튼튼히 했고 고구려도 죽
령선을 돌파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것이다.
# CG -고구려의 고토인 계립령과 죽령의 서쪽.
온달은 이 땅을 회복하기 위해 출병하지만
단양의 온달산성에서 전사하고 만다.
# 온달산성 헬기 -온달의 전사지인 온달산성과 유적들은
이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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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 온달산성 배경으로
고구려가 신라에게 빼앗긴 옛땅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다
이곳에서 전사한 온달. 온달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 평양성 배경에서 바보온달 CG + 容貌鐘可笑 , 中心則( )然
常乞食以養母 / 破( )( )履 , 愚溫達 / 遇溫達 글자만 커진다.
삼국사기는 온달의 출신성분과 인물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평원왕대 인물인 온달은 얼굴이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명랑했습니다.
가난해서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떨어진 옷과
해어진 신으로 시정간을 왕래하니 사람들이 그를 바보온달이라
하였다.
우온달이라...
온달전의 내용으로는 온달을 왜 바보라했는지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 공주 CG 그런데 어느날 온달에게 평강공주가 찾아옵니다.
평원왕의 딸인 평강공주는 소문난 울보로
왕이 '너는 어려서부터 울기를 잘하니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16세가 되자 평강은 귀족집안과의 결혼을 거절하고
온달에게 청혼을 합니다.
# 온달과 공주 FS
그러자 놀란 온달은 '이는 어린 여자가 할 행동이 아니고
집이 가난해 귀인을 배필로 맞을 수 없다'며 거절하지만
공주는 '서로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어찌 부귀해야만 함께
지낼 수 있겠냐'며 설득합니다.
# 온달의 집 , 마굿간, 부엌
그후 온달은 공주의 도움으로 전답과 말등을
마련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등의 무예를 익힙니다.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이었던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합.
이것은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당시 고구려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온달의 출신성분과 이들의
결혼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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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 TR -온달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 FS -온달을 시조로 모시고 있는 전북 김제의 한 마을.
봉성 온씨들의 집성촌이다.
# 사당FS -문중에서 세운 온달장군의 사당.
매년 3월 추모제가 열린다.
# 비석다가가는 -온달을 기리는 신도비에는 온달과 관련된
전설이 기록돼 있다.
# 읽는 것 듣고
# 비석 TD -고구려의 장군으로 군 고위지휘관인 대형의
벼슬까지 오른 온달.
# 온영복 인터뷰 이름은 달, 성은 온씨이니 고구려 평원왕 25대 왕의 부마라.
-평원왕의 사위로 전쟁에 출병해 온달산성에서
전사한 것이다.
# FS -그러면 온달의 출신성분과 집안내력은 어떠한가.
온씨의 족보를 확인해 봤다.
# 타이트 -온달의 시조는 중국 주나라의 숙우.
그후 온달의 이름이 이어진다.
# 설명 듣고 처음으로 온달이 나오네.사실상 대한민국 시조는 달자 어른이다.
# 비석->나무 TU -온씨의 국내시조이자 고구려의 장군으로
기억되고 있는 온달.
그러나 그의 출신성분과 집안내력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 공주와 온달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을 초월해
평강공주와 결혼한 온달.
온달은 어떻게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 평원왕 기사 -고구려의 평원왕이 그 실마리를 쥐고 있다.
온달을 사위로 맞은 평원왕은 559년 즉위한다.
평원왕은 장수왕이후 계속된 왕위쟁탈전과
귀족세력간의 갈등 후 혼란속에 즉위한 왕이다.
# 전쟁이미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후 고구려는
극심한 내분을 겪는다.
22대 안장왕이 피살되는가 하면.
# 안원왕기사 -이어지는 안원왕때는 554년 외척간에 대대적인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2천여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평원왕의 아버지인 양원왕 557년에는
고구려 역사상 최초의 반란인
간주리 반란사건까지 벌어진다.
# 임기환 인터뷰 평원왕대 정치적 상황은 복잡하다. 평원왕의 조부인 안원왕대는
귀족세력간의 왕위쟁탈전이 일어나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의 정치적 장악력이
높아진다. 왕들은 이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과정에서 왕권
은 신진정치세력을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세력
이 정계에 진출한 개연성이 높아졌다.
# 평양 -고구려는 장수왕때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평양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 성 FS -평원왕은 아버지 양원왕에 이어 평양성의 내성인
장안성을 축조해 외적의 침입을 막는 한편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왕권강화를 도모한다.
가뭄이 들자 장안성 공사를 중단하고
스스로 끼니를 줄이기도 했다.
# 성벽 pan -또한 전통적인 고구려 귀족대신
신진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해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는다.
# 왕산악 -장수왕이후 등장한 신진세력은
거문고를 발명한 양원왕대 인물인 왕산악과
왕고덕. 영양왕대 을지문덕등이 확인된다.
평원왕대에 활동한 온달도 이때 등장한
신진세력인 것이다.
# 임기완 인터뷰 고대사회에서 신분질서는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낮은 신분이
정계에 진출하기는 쉽지 않다 온달의 진출도 평원왕대의 대외적 위기속에서
무인들이 활성화 할 수 있는 계기가 열려져 있고 온달도 무를 통해서 성장
한 것은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개연성은 어느정도 열려져 있다
# 벽화 -전통적인 고구려귀족인 상부고씨 집안과의
결혼을 거부한 평강공주와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이었던 온달의 결혼은
이런 정치적인 상황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 김용만 인터뷰 바보였던 평민이었던 온달이 왕의 딸과 결혼한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후대에 윤색이 가해진 것으로 생각.이것은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왕권강화를
위해 측근이 필요했던 평원왕과 새롭게 등장해 정치적기반을 가지려고 하는
신진무장세력의 결합이 온달과 평원왕의 딸과의 결혼이 아닌가
# 활쏘기 벽화 -그러면 온달은 어떻게 신진세력이 될 수 있었나,
당시 고구려사회는 무예를 중시했다.
뛰어난 무예실력과 전쟁에 출정해 공을 세우는
것은 출세의 중요한 통로였다.
# 기사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은 매년 3월 3일 낙랑의
언덕에서 벌어지는 사냥대회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온달은 가장 많이 사냥하고 남보다
뛰어나 주목받기 시작한다.
사냥대회가 인재등용의 장이었던 것이다.
# 벽화 무사온달 -사냥대회를 통해 신진세력으로 떠오른 온달.
그러나 그는 중국 후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후에야 비로소 왕의 사위로 인정받게 된다.
# 기사 -삼국사기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내어 요동에 쳐들어오자
온달이 선봉이 되어 크게 공을 세우니 여러군사가
기세를 타고 맹렬히 싸워 크게 이겼다.
# 김용만 인터뷰 평원왕시대 고구려는 여러 나라와 전쟁을 벌인다. 돌궐과 후주와의 전쟁등.
이런 전쟁을 통해 신진무장세력들이 성장을 하는데 후주와의 전쟁은 고구려가
전력을 기울인 큰 전쟁.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온달은 신진무장세력의 대
표로 떠오르면서 사위로 인정을 받는다. 온달이 전쟁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인
무장세력이 될 것이다.
# 무사온달벽화 -신진세력으로 부상한 온달.
무예실력과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신분의 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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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 무사온달 나오고 , MC 옆에서 무사온달 창들고 움직이는 CG
(또는 평민온달에서 무사로 옷바뀌는)
당시 고구려사회에서는 뛰어난 무예실력과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은 출세의 필수조건이었습니다.
이를 갖춘 온달은 신진귀족을 통한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배경속에서 왕의 사위로 인정받고 중앙정치세력의 중심에
나서게 됐습니다.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인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은
이런 정치적 상황떄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 삼국사기 글자나오고 ( )立峴 竹嶺以西 / 不歸於我 則不返也
->()立峴 竹嶺以西 글자 커지고
평원왕 사후 온달은 신라와의 대대적인 전쟁에 총사령관으로 나섭니다.
온달은 출병전에
'계립령과 죽령이서를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밝힙니다.
# 무사온달 온달산성위에 서서 창으로 건너편 가리킨다.
온달이 회복하고자 했던 계립령과 죽령이서 10군.
과연 이 땅은 어떤 땅이길래 온달이 목숨을 건 출사표를 던졌을까요?
중원지역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흔적들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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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 TR -경상도일대에도 고구려의 흔적들이 나타난다.
# 적석총으로 pan -경북 의성에 있는 고구려 적석유구.
일정한 돌을 규칙적으로 쌓아놓은
계단식 적석총의 형태를 띄고 있다.
# pan -고구려의 적석총에는 일반적으로
감실이 한군데인데 이것은 감실이 4개나 존재한다.
# 이도학 인터뷰 외형상으로 볼 때 5단이 나와있는데 7단이 나오는 장군총이나 태왕릉과 같은
계단식 적석총을 그대로 재현해놓고 있다. 형태가 똑같은 것이다.
# 기와확인하는 -그런데 취재도중 적석유구 주변에서
뜻밖에 기와조각들이 발견됐다.
# 유구위에 놓여있는 기와->틈새기와들 -기와조각들은 곳곳에서 쉽게 확인된다.
이곳에 어떤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적석유구에서 발견된 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조각.
이는 고구려 적석총과의 연관성을 밝혀주는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 헬기 -3세기초에서 427년까지 고구려의 수도였던
중국의 길림성 집안.
수많은 고구려의 무덤들이 떼를 이루고 있다.
# 장군총 -그중 가장 큰 무덤인 장군총.
길이 31m , 높이는 12m가 넘는다.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천여개의 돌로 기단을 7개나 쌓았다.
# 기와편 -장군총에서도 기와조각들이 발견됐다.
주변에 기와로 지은 건물이 있었던 것이다.
# 구멍 -무덤의 꼭대기에 기둥을 박은 흔적들도
밝혀졌다.
# 이형구 인터뷰 고구려에서는 4,5세기 경에 적석총, 지도자급의 왕릉이라든가 고구려식 피라
미드에서 이런 기와들이 많이 나오고 어떤때는 추춧돌도 나오는데 그런경우는
고분위에 사당을 지은 것을 추정되고 있다.
# CG -고분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얹은 이런 건물을 향당이라 부른다.
향당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추정된다.
# 이형구 인터뷰 고분에 향당을 올리는 제도들이 동북아시아 쪽에서는 중국 은나라
고구려 백제쪽에서 분포되고 있는데 이러한 향당이 신라북부지역에 미쳤다고
하다면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의성적석유구 -기와조각이 발견된 의성의 고구려 적석유구.
건물 존재여부는 유구의 정확한 성격이
밝혀져야 가능하다.
# 안동TR -경북 안동에도 고구려의 적석유구가 있다.
# pan -근처에 사찰이 있어 탑으로 불리지만
그 형태는 고구려의 계단식 적석총 그대로다.
# ZO -경상도일대에 나타나는 고구려의 흔적들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곳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지도CG -고구려의 적석유구가 어떻게
경상도에 나타나는 것일까.
# 사기 -온달은 출병전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신라가 한수 이북을 침탈해 자기 땅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통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한번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 광개토대왕 -온달은 이 땅에 왜 이렇게 집착했을까.
그 해답은 4세기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대대적인 남진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396년에 백제로부터
남한강 상류의 58성 700촌을 획득한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기록돼 있는 58성중에는
온달산성인 아단성도 포함돼 있다.
# 충주 헬기 -이때 고구려는 신라땅 깊숙히 침투해 100년이상
영향을 미친다.
남한강상류를 점령한 고구려는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하는 관문인 충주를
남진경영의 중심으로 삼는다.
# 이도학 인터뷰 국원성이라는 것은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과 동일한 지명, 고구려의 별도가
부소가 충주가 되는데 충주에서 단양쪽으로 죽령을 넘어 고구려 군대가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남진경영을 관장하는
총 본영이 충주이고 충주의 날개역할을 하는 전초기지가 단양이다.
# 전쟁이미지 -그런데 6세기 중반 신라의 반격이 시작된다.
고구려가 귀족간의 갈등과 중국 북방민족과의
전쟁에 휘말려 있는 사이 한강유역을
공격한 것이다.
# 10군 -551년 고구려는 결국 신라의 거칠부에게
죽령이북의 10군을 빼앗긴다.
# 진흥왕순수비 -그후 고구려는 실지회복을 염원하지만
이뤄지지 않는다.
내부의 정치적 혼란이 계속됐고
신라가 한강유역을 철저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서영일 인터뷰 고구려가 격퇴될 때 사정이 있었지만 수복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이 삼국
사기에는 여러군데 보인다. 그 숙원사업을 온달이 마감하고자 했다. 그래서
온달이 죽령과 계립령 이북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출정을 결심하게 되고
그런 여망을 수행하려다 전사했다고 볼 수 있다.
# 장군온달 -실지회복을 위한 시도가 10군을 빼앗긴지
40여년만인 591년,온달에 의해 비로소
이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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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 지도에서 단양, 의성, 문경 적석총 그림 차례로 튀어나오고
온달이 회복하고자 했던 지역은 이처럼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확보했던 옛 고구려의
땅이었습니다.
단양과 의성, 문경등 경상도 일대에 남아있는 적석유구들은
당시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 지역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적석총 그림 사라지고
그러나 6세기 중반 왕위쟁탈전과 귀족세력간의 치열한 내분을
겪던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깁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590년, 평원왕대 정치적인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온달에 의해 실지회복에 나서게된 것입니다.
# 온달산성 아래 MC 서있고 화살들 날아온다.
고구려의 고토를 되찾기 위해 출병한 온달.
그러나 신라군과 격전을 벌이던 온달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온달산성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합니다.
# MC 날아오는 화살 하나를 잡는다.
그러면 온달은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하고 전사한 걸까요.
온달의 고구려군과 신라군과의 치열한 전투 흔적 속에서
온달이 이룩한 업적을 찾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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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 pan fs -온달산성에서 1km거리에 있는 한 계곡.
쇠골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 아줌마 돌 골라내는 -밭 곳곳에서 쇠와 흙이 엉켜있는 덩어리들이
발견된다.
# pd 쇠똥파내 깨는 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이 덩어리들이
쇠를 뽑고 남은 지꺼기라는 것이다.
# 두사람서있는->온달산성 -쇠를 다루던 골짜기라고 해서
쇠전부리라고도 불리는 쇠골.
온달산성에서 사용됐던 무기들이 여기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 윤수경 인터뷰 여기서는 쇠골 쇠전부리. 쇠를 빼내서 전쟁장비를 만들던 곳. 대장간
전쟁장비를 만들던 군수공장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 이곳이다
# 챗말 보고
# 앉아서 쪼개는 박교수 -실제로 쇠를 뽑고 남은 흔적들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 기계에 가루넣는 -박장식교수는 고대의 제철,제련방법을
오랫동안 연구해오고 있다.
# 핀셋 -유물의 성분과 특징을 분석해 제철,제련방법,
시기등을 밝혀내는 것이다.
# 현미경내용타이트 -전자현미경을 통해 철광석 지꺼기의
조직이 확인됐다.
# 제련후 성분이 거의 없는 -검은 흔적이 철 성분이다.
철 성분이 적을수록 철을 뽑아내는 제련기술이
높다.
# 쇠골수거 지꺼기 -쇠골에서 수거한 철광석 지꺼기도
철성분이 낮았다.
# 박장식 인터뷰 일단 우리가 여기서 발견되는 슬러그의 양이나 주철을 생산한
다음에 제강과정을 거쳐 만드는 무기나 공구를 만드는 과정은 한두사
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상당한 권력 국가가 상당한 시설과 인력
을 투자해야 이러한 야철지가 운영될 수 있다. 기술적인 측면을 봤을
때 인력과 시설은 상당한 수준에 있지 않았을까.
# pan -쇠골의 높은 제련기술은
단양이 군사적인 요충지임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곳엔 전쟁관련 지명들이 많다.
# 윤수경 설명 빨간거는 군사적 용어로 된 것이고 노란 것은 유래된 지명 빨간 것은 신라쪽
에 많아 방어를 했다는 것. 4km 반경내에 86개 마을이 있는데 모두가 군사
용어로 돼 있어 온달산성을 중심으로 고구려군과 신라군이 싸움을 했다는 것
을 알수가 있고/
# 온달산성 ZI -고구려와 신라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온달산성,
충주, 중원지역을 확보하고 소백산맥이남으로
진출해 신라군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하는 관문이었다.
# TR -그러면 온달은 어디로 내려왔을까.
# 왕검성 ZI -그 단서를 주변의 산성에서 확인 할 수 있다.
# FS -남한강유역에는 이곳 영월 왕검성을
비롯해 태화산성, 단양의 온달산성등
수많은 산성들이 밀집돼 있다.
산성들과 험한 산악지형은 온달이
이곳으로 내려왔을 가능성을 짐작케한다.
# 박효상 인터뷰 위치가 바로 왕검성이다, 강건너가 태화산성이고. 그 산뒤가
영춘. 온달산성이다. 왕검성에서 온달산성까지 40리 길이다.
# 국립지리원외경 -온달이 남한강유역을 이용해 내려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내부 pan -항공사진분석을 통해 남진루트를
추정해보기로 했다.
# 모니터 -온달은 내륙방면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 사진 강 TR -이는 강원도와 영서지방, 충북지역을 통해
소백산맥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한강 하류지역의
신라군을 피해 이를 수 있다.
그중 가장 주목되는 것이 철원 춘천 홍천 원주
단양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다.
# 조한근인터뷰 항공사진을 보면 지형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 강원도 영서지역의 특성은
산이 높고 협곡이 발달돼 있고 협곡과 협곡을 연결하는 지류만 잘 연결해도
남한강 상류와 쉽게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원주 춘천 단양은 남한강 상류
만 잘 이용하면 자연적인 교통로가 형성이 된다.
# 중앙고속도로 -남진루트는 지금의 중앙고속도로와 비슷하다.
쉽고 빠르게 들어올 수 있는 길인 것이다.
# 지도 CG -온달은 철원을 지나 춘천, 원주,제천을
통해 단양으로 진격한다.
신라의 주력군을 피해 강원도 내륙지방으로
우회한 것이다.
# 서영일 인터뷰 서울 한강하류를 거쳐 충주에 이르는 길은 신라의 주력군이 방어하고 많은
방어시실이 있고 한강넓은 지역을 도강해야하는 어려움이 있고. 반면 강원도
내륙으로 우회하는 그런 위험이 덜할 뿐 아니라 신라의 주력을 피해 신라의
후방을 공격 허점을 노릿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죽령과 계립령을 통과해서 한
강하류로 연결되는 신라의 보급로를 차단해서 한강하류의 신라군을 무력화 시
킬 수 있다.
# 지도 CG -온달이 이길을 선택한 것은
경주에서 남천주로 이어지는 신라의
방어체계를 갈라놓고.
한강유역을 지키는 신라를 배후에서
압박 고립시키겠다는 의도였다.
# 말달리는 온달은 계속해서 신라군과 전투를 치르며
단양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 이도학 인터뷰 고구려 군대가 남한강 상류지역에 진출하면 한강하류지역에 신라이 최정예부
대가 있기 때문에 이동해서 온달의 고구려 군대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는
것이다.이것을 차단하기 위해 고구려 군대가 한강하류를 공격해 신라군단의
발을 묶어놓게 되고 이것이 결국 온달이 이끄는 고구려 군대의 남하는 용이
하게 했다.
# 지도 CG -온달이 남진하는 동안 또다른 고구려군이
한강하류에 있는신라군의 발목을 묶어놓는다.
양동작전은 고구려의 전형적인 전술인 것이다.
# 부감->산성 -그러나 온달은 온달산성에서 최대의 고비를
맞게되고.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고구려의 염원을 안고 출정한 온달.
온달은 고토회복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일까.
# 사기 -온달이 상당한 영역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의 사신인
현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할 당시 신라가
우리땅 500여리를 빼앗았다.
수의 침입전에 누군가가 500여리를
확보한 것이다. .
# 말달리는 -수의 침입기는 598년과
612년에서 614년.
그런데 온달이 590년에 출병한다.
# CD롬
-수의 침입기전에 고구려와 신라사이에
전쟁이 없다면 500여리는 온달이 확보한 것이
된다.
# 컴퓨터보는 -삼국사기를 확인했지만 대규모 전쟁과 실지회복
기사는 없었고 온달이 출병한 것이 유일했다.
500여리를 확보한 것은 온달이 분명한 것이다.
# 서영일 인터뷰
일반적으로 고구려가 한강상류를 상실한 것은 553년으로 얘기된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 500여리를 뺏아간 시기를 수의 침입기라고 말
한다. 수의 1차 침입은 598년에 있었고 2차침입은 612부터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러
니까 598년 이전에 누군가가 잃었던 한강유역의 땅을 다시 회복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
러면 그 사람이 누구냐. 삼국사기 본기 고구전이나 신라본기는 전투기사가 없다. 다만
온달전에 보면 온달이 590년 초반에 출정한 것으로 돼 있다.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온달
이 590년에 출정해서 상당한 영역을 회복했고 그 이후에 다시 고구려가 신라에게 재상
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헬기S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리라는 염원을 안고
온달산성에서 최후를 맞은 온달.
그는 계립령과 죽령이서의 500여리를
회복했던 것이다.
# 관앞에 공주 온달이 죽자 시신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죽고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그만갑시다라는 말을 듣자 관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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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
# 관앞에 울고 있는 공주 , MC 다가가고
"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그만 갑시다. 장군."
사랑하는 평강공주의 간절한 호소에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는
이야기속에서 죽어서라도 고구려의 땅을 지키겠다는 온달의
강렬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옛땅를 회복하자는
원대한 목표를 함께 나누고 이를 위해 희생과 고통을 감내한
온달과 평강의 고귀한 사랑.
이속엔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물론 당시 고구려 사회의
정치적인 상황이 담겨 있습니다.
외적의 침입과 귀족사회의 내분을 수습하고
마침내 빼앗긴 영토 회복에 나서는 6세기 고구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온달과 공주 CG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가난과 신분을 뛰어넘은 온달.
그는 신분상승에 대한 고구려 민중들의 열망을 대변하는 인물이었고
북방민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대제국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나선 고구려인들의 국민영웅이었습니다.
당대 고구려의 꿈이자 희망이었던 바보온달.
평강공주와의 사랑이야기와 그의 비장한 최후는
지금까지도 그를 사랑받는 설화의 주인공으로 기억하게
만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