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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의 철학자들
사도행전 17:16-21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행 17:16-21 / [아덴에 간 바울]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동안 시내를 구경하다가 사방에 우상이 즐비한 것을 보고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17) 그래서 그는 회당에 가서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을 벌였고 날마다 광장에 나가서 거기 나온 사람들과도 토론을 하였다. 18) 바울은 또 에피큐로스파와 스토아파의 철학자들과도 토론을 하였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와 그분의 부활에 대한 말을 하면 `이 사람이 꿈을 꾸나 보군' 하거나 `다른 나라의 신을 믿으라고 강요할 작정이군' 하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19) 그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 광장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였다. `그 새 교훈에 대해 말해 보시오. 20) 당신의 놀라운 이야기를 어디 한번 우리도 자세히 들어 봅시다.' 21) 아덴 사람들이나 그곳에 사는 외국인들은 모두가 늘 새로운 것을 찾아서 듣고 토론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 3대 도시 중에 하나인 아덴은 헬라의 수도로서 정치, 문화의 중심지 일뿐만 아니라 철학, 문학, 예술의 중심지로서 유명한 자유 도시입니다.
아덴에 도착한 바울(16)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신전이 많은 아덴의 온 성에 우상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였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겨야 할 사람들이 각종 우상 숭배에 빠져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역지에서 동역자들을 기다리는 바울의 모습에서 사역은 독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함께 선교적 전략을 세우며 동역해야 하는 것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바울의 부름을 받은 실라와 디모데는 아덴으로 왔고(살전 3:1), 아덴에 도착한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살전 3:2), 실라는 빌립보(빌 4:15)로 가게 됩니다. 그 후 바울은 혼자서 고린도로 가지만(행 18:1)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행 18:5). 이런 과정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동역자들을 만나게도 하시고, 또 헤어지게도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변론(17-18) 전도는 듣는 대상에 따라 전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지만, 최종 목적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재림이어야 합니다. 지금 바울은 바로 헬라문화의 심장부인 아골라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때 아골라 사람들은 전도자들을 “말쟁이”와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 이해를 합니다. “말쟁이”란 ‘곡식 낱알을 줍는 사람’이란 뜻으로 당시 헬라사회에서 여러 지식의 단편들을 주워 모아서 나열시키는 말쟁이들을 비웃는 말입니다. 또한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란 당시 바울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재림에 관한 복음을 전하였기에 헬라사회에서는 새로운 신을 소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새로운 가르침에 궁금해 하는 아덴 사람들(19-21) 처음으로 복음을 접한 아덴 사람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그들이 갖고 있는 이상세계에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특히 아덴에는 아덴의 향락주의를 추구하는 에피쿠로스학파와 도덕적 가치관을 추구하는 스토아 학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때 바울의 변론을 들은 철학자들은 새로운 영적세계의 신비함을 깨닫기에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의 도시 아덴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지식을 얻고 싶어 하는 마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관해서도 동일한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적 용 : 복음은 나만이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듣지 못한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야 하는 생명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모습으로 이러한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 하버드대학교의 역사는 1638년 여름에 운동장이 딸린 목조 가옥 한 채에서 단 한 사람의 교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하버드라는 이름은 청교도 교회 목사 “존 하버드”의 이름을 본뜬 것이었습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온 하버드는 “하나님, 이 황무지 같은 땅에 신실한 하나님의 종을 키우는 학교를 세우고 싶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보스톤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대학에 기부금 7백 파운드(전 재산의 절반)와 책 200권을 기증했습니다. 그 후 1년 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존 하버드는 그렇게 엄청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주신 비전을 기억하셨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 설 교 >
철학과 우상숭배, 복음(행 17:16-34)
우리가 선교의 대상을 농촌과 어촌, 아프리카 등과 같은 미개척 지역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그런 곳에도 복음이 필요하지만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대도시 한 가운데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선교학에서는 도시 선교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제기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 또는 한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도시를 복음으로 정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시에는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도시를 복음화하는 것은 한 나라를 복음화 하는 길입니다. 또 우상숭배와 미신이 농촌이나 미개척지에만 성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와 철학, 예술이 발달한 도시 한가운데, 그리고 고도의 과학이 발달한 곳에도 우상숭배와 미신이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상숭배나 미신이 미개한 사람들의 것처럼 생각합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 예술이 있는 대도시나 지식인들에게는 우상숭배나 미신이 없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우상숭배, 미신은 타락한 모든 사람들의 것입니다.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대 도시에도 우상숭배나 미신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혹시 지식이 최고로 발달한 나라 미국에는 우상숭배나 미신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뉴에이지 운동이나 록 음악, 마약, 사단 숭배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실 미국은 청소년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범죄가 많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전자기술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 일본은 어떻습니까? 그 나라는 800만 귀신을 섬기고 있고, 온 나라가 우상문화에 빠져있습니다. 최고의 첨단 과학과 물질문명이 놀랍게도 우상숭배와 미신과 교묘하게 만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일본입니다. 어쩌면 일본은 첨단과학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미신과 우상이 지배하는 사회처럼 보입니다.
어떤 마을은 개구리 신을 섬기는데 마을 축제가 있는 날에는 모든 사람이 개구리 복장을 하고 거리를 행진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우상숭배로 가득 찬 나라입니다. 100만에 가까운 역술인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아예 무당을 만드는 학원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점을 치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인생을 맡깁니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귀신점을 보고 있고, 컴퓨터에서는 부적을 팝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역술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에겐 두 가지 힘이 작용합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우상이나 미신의 힘입니다. 자기를 믿든지, 미신을 섬기든지 합니다. 무식하면 무식한 방법으로 유식하면 유식한 방법으로 미신에 빠져들어 갑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지식이 뛰어나도 미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발달하면 천국이 올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든 말이 ‘테크노피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지식이나 과학의 발달이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질병을 완전히 정복해 본 적이 없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진정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경찰서를 많이 만들고 경찰 병력을 늘려서 죄인들을 잡아 가둘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경찰의 힘으로 인간 속에 있는 죄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죄인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인간의 죄가 없을 질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지식이나 과학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먹는 것, 빵으로 사는 존재도 아닙니다. 과학의 발달과 관계없이 인간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예술과 문화활동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한 화려한 도시에 살더라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만나야 행복합니다.
철학의 도시 아덴과 우상숭배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를 거쳐 아덴이라는 도시로 오게 됩니다. 아덴은 로마시대 당시 알렉산드리아, 다소와 함께 3대 도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아덴은 철학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세계적으로 위대한 철학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아덴은 철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성지요, 중심지요, 수도였습니다.
당시 이 도시에는 철학의 두 학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에피큐리어스 학파와 스토아학파가 바로 그들입니다. 스토아 학자들은 인생을 매우 경건하게 살고자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인생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을 통제하고 강한 훈련을 통해서만 참된 기쁨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들에게는 금욕생활이 중요한 훈련 수단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에피큐리어스 학파는 일종의 비종교적인 유물론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좋은 삶이란 쾌락, 그것도 감각적인 쾌락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것이 바로 좋은 삶이다" 이들은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철학자들이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누리는 길이라고 이런 저런 방법들을 제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 사람들은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철학의 도시요, 문화의 도시였던 아덴이 우상으로 가득했다고 말합니다. 철학이나 지식, 문화활동으로 인간은 만족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16절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 라고 말합니다. 당시 모든 문화와 지식이 중심지였던 아덴에 우상이 가득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아덴 사람의 숫자보다 우상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파르테논 신전만 해도 삼 만개의 우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많은 우상을 섬겼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흥미 있는 사실은 바울이 본 우상들 중에 유독 바울의 눈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이름 붙여진 우상이었습니다.
23절에 보면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라고 말합니다.
많은 우상을 섬기던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도 제사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도 제사를 해야 했을까요? 아마 그들은 세상의 온갖 신들은 다 생각해서 명부를 만들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지울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모든 신들의 이름 뒤에는 또 다른 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모든 신들보다 더 힘 있는 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들은 그 신비한 존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능력에 걸 맞는 이름을 지어 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알 수 없는 신’이라고 불렀고 그 신에게도 제사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아덴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 가지 더 흥미 있는 사실은 2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늘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듣는 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철학에는 그리 큰 만족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화적인 혜택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은 늘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섭니다. "어디 새로운 것은 없나?" "뭐 재미있는 것, 자극적인 것이 없나?" "이게 도움이 될까 모르겠어"
이런 모습은 소위 말하는 메트로 폴리탄의 성격중의 하나입니다. 아테네든 뉴욕이든 서울이든, 심지어 부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유행입니다. 항상 새로운 유행을 찾아다닙니다. 머리 모양도 그렇고 화장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의 디자인도 늘 새 것을 찾습니다. 도대체 만족이 없습니다.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패션이 며칠만 지나면 온 거리를 매웁니다. 요즘에는 겨울연가에 나오는 두 주인공의 헤어스타일, 옷의 디자인이 유행한다고 하지요. 그렇게 유행에 따라 움직여도 만족이 없습니다. 또 바꾸어야 합니다. 늘 새로운 유행만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마음이 분한 바울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 가득한 우상을 어떤 마음으로 보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의 가슴은 아덴에 가득 찬 우상들을 보면서 분한 마음으로 가득 찼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아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들을 보면서 예술적인 가치나 건축물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분노했습니다. 우상으로 가득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바울은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분노는 죄에 대한 분노요 우상에 대한 분노요 사단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래서 그는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회당이든 시장이든, 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상이 답이 아니다. 하나님 만나야 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바울의 분한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삶의 해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에 그에게 그리스도를 말하고 싶은 갈급함이 있습니까? 믿지 않는 남편, 믿지 않는 자녀를 보면서 영혼을 찌르는 아픔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보십시오. 오늘 한국교회가 영적인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보다 훨씬 실력 있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좋은 건물과 좋은 시설을 갖춘 교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영적인 영향력을 잃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과 같은 ‘분한 마음’의 상실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갈급함이 한국교회에서 사라졌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요즘 교회가 힘을 잃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닌 것처럼 복음증거의 힘을 잃었습니다. 마치 천국과 지옥이 없는 것처럼 소망을 잃었습니다. 보십시오! 왜 이 땅에 죄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것은 죄를 보면서도 악한 영의 역사를 보면서도 영적 분노를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적당하게 ‘문화의 한 현상이니, 전통이니’ 하면서 그냥 지나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얼마나 교활한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이런 미지근한 태도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합니다. 1900년 전 바울처럼 누군가가 말해야 합니다. 아덴 거리와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분노한 마음으로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비느하스’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민수기 25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싯딤 지역에 머물게 되었을 때 모압의 왕이 바알신에게 제사하는 자리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게 됩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여 음식을 먹고 바알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진에는 염병이 임하여 이만 4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에 참석한 이스라엘 두령들을 죽이고, 이 일 때문에 이스라엘 온 회중이 회막문에서 울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었는데 한 어리석은 사람이 모든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미디안의 한 여인 데리고 자기 장막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 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이것을 보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지요. 지금 우상숭배와 이방 여인과의 음행 때문에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방여인을 데리고 들어왔으니... 분노한 비느하스가 그 사람을 따라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창으로 꿰뚫어 죽였습니다.
비느하스가 살인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이 일이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말합니다. 민25:11에 보면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비느하스의 분노가 거룩한 분노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비느하스가 죄에 대해 분노하여 그 남자와 여자를 죽인 이 일로 인해 오히려 이스라엘에 임하는 심판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 거룩한 분노를 가졌던 비느하스를 축복하여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분한 마음을 가지는 것, 우상숭배와 음란의 죄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 불신자들을 보면서 영혼의 아픔을 경험하는 것,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죄 때문에 분노해 보셨습니까? 우상숭배하는 것을 보고 바울처럼 분노해보셨습니까?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철학과 다른 기독교 복음
바울이 분노하여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말하면서 돌아다니자 18절에 보면 에피규리어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은 바울을 가리켜 말쟁이라고 했습니다. ‘말쟁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보면 이야기꾼이라는 말입니다. 소위 "Sophist"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정보들을 엮어서 말합니다. 요즘에 방송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닌 사실입니다. 어떤 생각이나 사상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를 몰랐던 그들은 말쟁이 바울을 데리고 아레오바고로 데려갑니다.
19절을 한번 볼까요?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지금도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이 지역을 아레오바고 라고 한다고 하지요. ‘아레오 언덕’이라는 이 말은 원래는 재판과 입법을 주관했던 의회의 모임 장소였습니다. 차츰 이 지역이 종교 도덕, 철학에 대해 논쟁했던 장소가 되어졌습니다. 말하자면 자유토론을 할 수 있었던 곳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꽃피운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이곳으로 데리고 가서 새로운 교에 대해 네가 말한 이상한 것에 대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복음에 대해 ‘새로운 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은 세상의 철학이나 세상의 종교와 견해를 전혀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철학은 기독교 복음을 자기들과 비슷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종교는 다 똑같은 것이 아니냐 너희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지 말고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있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 그래야 서로 비슷하지 않느냐?" 세상은 서로 비슷해지자고 말합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하자, 좋은 일을 하자고 말합니다. 기독교 복음을 자기들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 이것이 세상의 요구이고 사단의 전략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기독교가 휴머니즘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는 종교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세상의 요구는 여러 종교중의 하나가 되라고 말하지만 세상의 요구와 기독교 복음은 엄연히 다릅니다. 기독교 복음은 생명입니다. 사람이 만든 철학과 종교, 윤리를 가지고는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내가 잘해서 구원받는다면 하나님도 필요 없고 예수 그리스도도 필요 없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의 메세지
그렇다면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증거 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두 가지 중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 즉 신관은 모든 인생관과 세계관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의 목적이 다르고 방향이 다릅니다. 하나님 모르면 지식과 관계없이 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인생 최대의 과제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하나님을 세 가지 주제로 설명합니다.
❶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고 온 인류와 우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창조론적인 신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을 부인하더라고 하나님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70억 세계인구가 다 하나님은 없다고 해도 그래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니체가 하나님은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니체는 죽었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온 땅과 세계역사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❷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고, 무엇이 부족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은 우상과 대조되는 성격이지요.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어서 한 곳에 세워둡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못질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절을 하고 복을 달라고 합니다. 우상은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어떤 공간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 속에 들어가 앉아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나무나 돌을 깎아 이상한 모양을 만들었다고 그것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뭔가 부족해서 사람들의 헌금이나 사람들의 제물을 받아먹고 사는 그런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들 수 없습니다. 여기저기로 하나님을 옮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분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❸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며 인간의 모든 것을 친히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 만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28-29절은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힙입어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하나님 안에 있을 때입니다.
바울의 두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에 대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요1:14) 그리고 예수님이 인간들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세 가지 선포는 당시 아테네 사람들에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이 아닌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습니까? 또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비참하게 죽으실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그들이 즐겨들은 옛날 이야기나 전설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깁니다. 어떤 종교나 철학도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기롱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네 말을 다시 듣겠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저와 여러분들은 이 말이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것이 믿어지고 삼 일만에 부활하신 것이 믿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역사는 지식이나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사실이 내 안에 믿어지면서 놀랍게도 우리 안에 있는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 안에 임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믿어지면서 우리는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하셨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31절을 보면 바울은 긴 설교를 마치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렇습니다. 이제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과거에는 허물하지 않았지만 이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이상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 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히9:27에 의하면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말합니다.
보십시오! 하나님 만나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죄와 죽음과 심판에서 우리를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신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흑암을 권세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혹시 아직까지 방황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