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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 왕국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
2014년 8월 17일 / 대예배 /
1. 르호보암(931-914 / 17년) ① 솔로몬의 아들. 지혜 부족 때문에 내란 발생(대하 10장). ② 아내 18명과 첩 60명을 둠. 가장 아끼는 아내는 아비살롬의 사악한 딸 마아가였음. ③ 재위 중 애굽 왕 시삭이 수도 예루살렘을 침범함.
2. 아비얌(914-911 / 3년) ① 북왕국의 왕 여로보암을 전장에서 패배시킴(초자연적인 간섭덕택으로, 대하 13장). ② 하나님의 도우심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여 사악한 왕이 됨.
3. 아사(911-870 / 41년) ① 최초로 구원받은 유다 왕. 유다를 중흥시킴. 위대한 건축자(대하 14장). ② 하나님께서 구스의 대규모 공격으로부터 예루살렘을 구해주시는 것으로 그의 기도를 응답하셨음. ③ 우상을 숭배한 마아가에게서 태후의 위를 패함. ④ 후에 타락하여 자신의 죄를 꾸짖은 선지자를 투옥함. ⑤ 발병으로 죽음. 그는 여호와께서 이 병을 낫게 해주기를 구하지 않음.
4. 여호사밧(873-848 / 25년) ① 율법교사를 전국에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게 함. ② 불경한 북왕국의 3왕과 타협함으로써 자신의 증거를 훼손시킴. ③ 종교관리와 민정관리를 각각 임명하여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인정. ④ 모압 족속의 침입으로 예루살렘이 위태로웠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초자연적으로 관여해 주심(대하 20장). ⑤ 인간의 가벼운 생각으로 아합왕과의 사돈 관계를 맺음으로 후대에 엄청난 폐해를 입힘.
5. 여호람(853-845 / 8년) ①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결혼. 왕위에 오른 뒤 여섯 형제 살해. ②선한 아우를 죽이고 포악한 정치를 베푼 까닭에 선지자 엘리야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는 예언을 들음. ③ 블레셋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공격을 받고 패배함. ④ 무서운 병을 얻어 죽었으며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함.
6. 아하시야(841 / 1년) ① 여호람과 아달랴의 아들. 예후에게 피살
7. 아달랴(841-835 / 6년) ①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숨어버린 한 사람(요아스)를 죽이고, 왕위에 오름. 6년간 통치 후에 처형당함.
8. 요아스(835-795 / 40년) ① 아달랴의 유혈숙청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왕족. ② 한 때 하나님을 위하여 살면서 많은 일을 하였으나(대하 24장)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방백들의 꾐에 넘어가 잔인한 독재자로 변신. ③ 대제사장이자 왕의 죄를 백성들에게 담대하게 알린 스가랴를 돌로 쳐 죽이도록 명령. ④ 왕궁 경비병에게 처형당함.
9. 아마샤(796-767 / 29년) ① 부왕 요아스의 살해자들을 처형. ② 대하 25:2 아마샤는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일을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기지는 않았다. ③ 에돔과 싸울 이스라엘 용병을 사들임으로써 선지자의 질책을 받음. ④ 용병을 사들인 것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다 자체의 군대만으로 에돔을 물리침. ⑤ 어리석게도 에돔의 신들을 섬길 목적으로 그것들을 들여왔음. ⑥ 무분별하게도 북왕국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하였다가 무참하게 패함.
10. 웃시야(792-740 / 52년) ① 용맹스런 용사이자 건축자. ② 예언자 스가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웃시야왕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옳은 일들만 하였다. 또 그가 스가랴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모든 일이 다 잘 이루어지게 해주셨다. ③ 그러나 제사장직까지 침해하려 하였다가 문둥병에 걸림.
11. 요담(750-736 / 16년) ①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고 영채와 망대를 세움. ② 원수들을 쳐부수고 매년 엄청난 조공을 거둬들임.
12. 아하스(735-719 / 16년) ① 유다에서 2번째로 악한 왕. 아들을 우상의 제물로 바침. ② 동정녀 탄생에 대해 최초로 들은 사람. ③ 앗수르 신의 제단을 세우도록 명령하고 다글랏 빌레셀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것을 성전에 둠.
13. 히스기야(716-687 / 29년) ① 유다의 2번째 선한 왕. 성전 보수. 솔로몬 이후 가장 성대한 유월절을 지킴. ② 치명적인 병에서 초자연적으로 치유받아 15년 더 살게 됨. ③ 어리석게도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자신의 부를 자랑하였음.
14. 므낫세(697-642 / 55년) ① 남왕국과 북왕국 모두를 합하여 가장 오래 집권한 왕. 가장 사악한 왕. 원수의 감옥에서 새로운 삶을 맞음.
15. 아몬(643-641 / 2년) ① 므낫세처럼 사악했고 회개하지 않음. 신복들에게 피살.
16. 요시야(641-610 / 31년) ① 다윗 이래 가장 경건한 왕. 유다의 마지막 경건한 왕. ② 유다 온 땅에 율법이 읽히도록 하였음. 히스기야 때보다 더 성대한 유월절 행사주관. ③ 3백년 예언 성취. 애굽과의 싸움에서 전사.
17. 여호아하스(609 / 3개월) ① 요시야의 아들. 느고에 의해 패위. 애굽에 잡혀가서 죽음.
18. 여호야김(609-598 / 11년) ① 요시야의 맏아들. 바로에 의해 왕위에 오름. 바벨론이 애굽을 이긴 후 느부갓네살의 신하가 됨. ② 하나님 말씀의 일부를 불 태움. 죽어서 시체가 마치 나귀처럼 취급받음.
19. 여호야긴(598 / 3개월) ① 여호야김의 아들. 에스겔과 예레미야는 그가 바벨론으로 잡혀 가리라고 예언. ②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2번째로 방문시 잡혀감. 바벨론에서 죽음.
20. 시드기야(597-586 / 11년) ① 요시야의 막내 아들. 애굽과 바벨론에 대항. 느부갓네살에 잡혀감.② 예루살렘은 남김없이 불에 타고 성전도 파괴됨.
역대기 왕들의 평가에 대한 연구 (26-29장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글
역대기상하는 왕국의 분열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둘로 나누어집니다. 역대기상에서 역대기하 9장까지가 다윗과 솔로몬까지의 통일왕국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10-36장까지는 남유다의 분열왕국의 20명의 왕들의 행적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역대기에 나오는 이들 왕들에 대한 평가를 보면 역대기 저자의 다분히 주관적인 의도가 엿보입니다. 그것은 동일한 왕에 대해 서술한 열왕기의 평가와 비교해 볼 때 그러한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왕이라도 행적에 대한 서술의 길이가 길거나 혹은 짧은 부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부분은 첨가 혹은 삭제됨으로 인해 그 왕의 업적을 더 높이 평가하던가 혹은 축소해서 평가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여기에서는 역대기하 26-29장에 열거된 4명의 왕의 기술에 대한 구조와 내용을 열왕기와 비교함으로써 역대기저자의 선함과 악함의 평가기준은 무엇이며 또 그 표현은 어떻게 다른지 알아봄으로써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들을 살펴봅니다.
2. 착한 왕, 악한 왕?
● 열왕기서에는 다윗 이후 솔로몬의 행적부터 시작해서 남유다 20명의 왕들의 통치행적과 북이스라엘 19명의 왕들의 행적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남북의 모든 왕들을 평가할 때 기준이 되는 두 왕을 제시합니다. 이 두 왕을 기준으로 하여 종교적인 면, 윤리적인 면에서 비교 평가하고 있습니다.
1. 좋은 왕의 기준 다윗
좋은 왕의 비교 모델로는 다윗이 기준이 됩니다. 왕국의 번영은 왕의 정치적 행정력이나 군사력, 사법적인 판단력, 성전과 같은 종교적인 제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왕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 기자는 다른 왕들을 평가하는 숨겨진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다윗이 여호와를 향한 종교적인 면이라는 것입니다.
2. 나쁜 왕의 기준 여로보암
이와는 달리 나쁜 왕의 모델로서는 여로보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죄' 또는 '여로보암의 길'로 표현된 여로보암의 행위는 그의 종교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가 왕이 된 후에 가장 염려했던 것은 북이스라엘 왕국에는 유다와 같은 성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없다는 것은 그의 정치생명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항하는 가짜 성소를 벧엘과 단에 세우고 거기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민심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으며, 정치적 생존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의 라이벌 가짜 성소로서 벧엘과 단을 지은 잘못된 사상과 종교정책으로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했습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역사는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이유는 왕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순수하게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17:1-23, 23:26-27). 왕들이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기자가 왕들을 평가하는 가장 큰 잣대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마음과 그의 순수한 여호와 신앙이었음을 오늘 우리도 주목해야 합니다.
● 역대기에서 보여주는 대조는 극명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착한 왕과 악한 왕이 구분됩니다. 얼마나 국민의 복지를 향상했는지, 나라를 부강하게 했는지는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악한 왕은 우상 숭배를 장려한 왕이고, 선한 왕은 종교적 폐단과 우상숭배를 척결하고자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입니다. 닫혀있던 성전의 문을 열고 퇴락한 성전을 수리하고 산마다 골짜기마다 있는 산당을 폐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을 것을 천명하고 지도하는 것이 선한 왕입니다.
그리고 선한 왕은 치세 후기에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이 아니라 즉위부터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들이 여호와를 구하는가? 그 앞에서 겸손한가, 혹은 여호와를 저버리는가? 의 여부에 따라 축복과 심판으로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십니다. 세상의 기준과 판이하게 다른 성경의 가치구조입니다. 선한 왕과 악한 왕의 선정과 악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유다의 역사 또한 축복 혹은 저주의 역사가 반복됩니다.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를 통해 바알의 세력이 왕궁 깊이까지 들어오게 된 유다는 혈통까지 끊어질 위기에 놓이다가 겨우 빠져나옵니다. 이때 극적으로 살아남은 요아스가 바알 종교세력을 척결하는 혁명적인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9대)를 거쳐 웃시야(10대), 요담(11대)으로 이어지는 왕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한 선한 왕으로 일컬어집니다. 폭풍이 지나간 후에 하나님을 순종하는 세력이 형성된 것입니다.
● 역대기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또 하나는 지도자의 중요성입니다. 우상숭배를 장려하는 왕 아래에서 백성들은 여지없이 우상숭배와 타락에 빠졌습니다.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이 통치하는 동안에는 일반적으로 대적의 침입을 볼 수 없습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을지라도 선한 왕들이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게 한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이 이렇게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이스라엘의 경우만은 아닙니다.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이 지도자를 반영합니다.
3. 싸움은 여호와께 속한 것.
모압과 암몬 연합군에 의한 침략에 대항해서 이긴 여호사밧 군대의 싸움은 성경에 길이 남을 전승사입니다. 적들의 침입을 당해 여호사밧 왕과 백성들은 먼저 금식하며 하늘의 하나님께서 환란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구하자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이 싸움은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가르쳐주십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송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과 찬송을 보시고 큰 군대를 예비하셔서 적들을 물리치십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 물을 말리셨다는 것을 듣고 이방 나라들의 간담이 녹았다고 하듯이 하나님이 적군을 치셨으므로 여호사밧의 나라는 태평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먼저 이것이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그것이 영적 싸움이라면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일하시게 해야 할 것입니다.
4. 죄악의 여러 형태들
성경을 보면서 여러 신앙인들의 모습을 봅니다. 신앙인들의 순종과 헌신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붙잡게 되고 어떤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경계와 교훈도 줍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여러 왕들은 외형적으로는 모두 신앙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1.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임전무퇴(臨戰無退)의 믿음이 연약한 자>
아마샤는 즉위 초에 하나님을 제대로 섬겼으나, 그는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는 못 하였습니다. 몸은 하나님 앞에 있었으나 아직도 마음은 세상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도와주시겠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섬기다가 불리한 것 같으면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는 연약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성경에 이르기를 두 마음을 품는 자는 정함이 없는 자라고 했음을 기억하면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2. 잘 될 때, 잘 나갈 때 하나님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아마샤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했었습니다. 한 번 승리를 맛본 후 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 대제사장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었다가 여호야다의 사후 권세에 휘들리면서 하나님을 버리게 됩니다. 사람은 권세를 가지면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선정(善政)으로 끌어간 대제사장인 여호야다는 다윗성 열왕의 묘실에 장사되었으나 하나님을 떠난 요아스 왕은 다윗성에 장사되었으나 열왕의 묘실 중에 장사되지 못했습니다. 요아스는 또한 선을 악으로 갚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시대 마지막 선지자라고 언급하신(마태복음 23:35)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성전 뜰안에서 요아스의 사주(使嗾)로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합니다. 웃시야도 하나님을 구했으나 세력을 얻고 강성하여지면서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떠나 제 멋대로 행하는 큰 잘못을 저지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험에서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어려운 일이 풀리고, 문제가 해결되고, 편안함이 임할 때, 인생이 순탄할 때 그때야말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며 신앙생활에 박차를 가해야 할 터인데 대부분은 그때 인간의 편함을 영적인 평안으로 생각하며 게을러지면서 하나님을 떠나곤 합니다. 내가 잘나서 형통함도 아닌데 교만으로 가득한 자아(自我)는 우리를 가만 놓아두지 않습니다. 그 훌륭한 왕 히스기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시고 건강까지 회복시켜 주시니까 그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바벨론 사신 앞에서 자기를 들어내어 자랑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알고자 우리 인생에 시험이라는 과제를 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셨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마음의 맨 밑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하셔서 시험을 주십니다.
3. 곤고할 때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은 우리 인생의 스승입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그것을 통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 119:71 / 주께서 고난을 주셨으나 오히려 이것에게는 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명령을 배울 기회가 되었습니다.
아하스 왕은 곤고할 때 주시는 기회를 붙잡지 못하고 더욱 범죄했습니다.
대하 28:22-23 / 아하스왕은 나라가 사방에서 침략을 받아 더없이 짓눌리는 때에도 여전히 여호와께 거역하고 더욱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 23) 그는 아람 족속에게 패배를 겪고서도 그 나라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아람의 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보다 더 높기 때문에 아람 군대가 승리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가 말하였다. “아람의 수도 다메섹의 신들이 그 나라의 왕들을 도와주어서 내가 싸움에 졌다. 그러니 이제 다메섹의 신들을 모셔놓고 제물을 바치면, 그 신들이 나를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 신들이 아하스와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져다 준 것은 패망뿐이었다.
▶ 그래서 신앙인은 고난을 겪어보아야 한다. 그 고난을 겪는 모습이 어떠한지에 따라서 정말 신앙인인지 아닌지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대표적 고난의 대명사 욥은 모든 고난에서 잘 감당하려는 신앙인의 치열한 전투를 보여줍니다. 그는 비록 말의 실수, 생각의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하나님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비록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를 취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분을 떠나서 세상을 의지하거나 세상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그 분 안에서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악인들은 곤고할 때 더욱 악을 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곤고함이 올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회임을 깨닫고 그 고난을 기회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삶에서 심각한 고통이 닥쳤을 때,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고민이 일 때, 욥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욥이야말로 고통을 겪으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의 길잡이 혹은 영혼의 맨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겪은 시련과 그 시련을 극복해 가는 과정들을 통해서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욥은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흠 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런 욥을 버려두지 않고 시험합니다. 그를 시험한 자는 사탄이기도 하고, 하나님이기도 하고, 그의 친구들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아내이기도 하고, 욥 자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를 시험한 자가 뒤얽혀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이 그 모든 것들로부터 총체적으로 시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욥은 모든 시험을 이겨내고 승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시험을 이겨낸 욥이 마지막에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 모든 시험을 이겨낸 사람이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를 하는 것일까요? 그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나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 42:5-6).
귀로만 듣던 주님을 눈으로 보게 되니. 관념으로만 알고 있던 하나님을 체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인생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 알았던 하나님을 세상 만물과 관련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시야를 벗어나 하나님의 시야로 세상과 인생을 새롭게 본 욥입니다. 욥은 지금까지 좁은 소견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믿어왔고, 자기의 믿음으로 고난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 욥이 지독한 시련과 시험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세계와 섭리,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함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주장을 다 거둬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는데, 특히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만(驕慢), 어떻게 다스릴까?
2014년 8월 24일 / 대예배 / 열왕기하 5:1-14
지상 낙원인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쫓겨난 것은 사단이 인간의 교만을 자극시켜 그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배신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겠다는 교만의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께만 의존했던 관계를 깨뜨렸습니다. 그리하여 사단의 독약인 교만으로 인하여 인간이 누려야 할 영원한 행복이 무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저주와 불행은 이 교만에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만이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고, 인간의 마음의 평안을 앗아갔습니다.
사단이 심어준 이 교만이 오늘 이 세상 도처에서 인간들을 시기, 질투, 갈등, 파괴, 단절, 적대 등의 문제의 늪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인간을 끊임없이 쓰러뜨리는 그 마음의 핵에는 바로 교만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의 뿌리는 교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단의 교만적 특성에 대해서는 이사야 14:12-15에 잘 묘사되었다.
사 14:12-15 / 너 새벽을 여는 샛별 바벨론아, 네가 그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이게 웬일이냐? 네가 세계 만민을 둘러엎더니 이제는 너 자신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느냐? 13) 너는 일찍이 속으로 이렇게 작정하였다. `내가 하늘까지 높은 곳으로 올라가겠다. 내가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곳에 나의 보좌를 펼쳐 놓고 살리라. 저 북극 산속에 있는 신들의 회의장에 나도 들어가서 앉겠다. 14) 내가 구름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마침내 나도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맞수가 되겠다!' 15) 그러더니 네가 저승의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망령들이 사는 세계의 맨 밑바닥으로 떨어져 내려왔구나.
▶ 성경에서 교만(驕慢)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대개 ‘우쭐대다, 자기를 높이다’는 의미입니다. 또 헬라어로는 ‘부풀다, 자고하다, 연막치다, 우쭐대다, 자랑스럽게 여기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pride(자만), haughtiness(건방짐), elegance, loftiness(자고), boasting(자랑), arrogance(거만),’ 등으로 사용되며, 우리말 번역에서는 대부분 교만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교만(驕慢)은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이 없음. 거만, 젠체하고 뽐내며 방자함’이라고 했는데 ‘방자하다’는 말의 뜻은 우리말 사전에서 보면 ‘주제넘다, 건방지다’ 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교만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부족한 점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높여 대단하고 훌륭한 존재라고 여기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자기를 높인다는 것은 ‘더 구체적으로는 무절제적이고 불합리한 자기 존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지나친 ‘자기애(自己愛, narcism,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욕망에서 생기는 자기에 대한 사랑)’와 같은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 좋지 않은 개념으로서 이에 대하여 교훈을 주는 대표적인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잠 16:18)고 하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거만한 자의 교만을 낮추신다(욥 22:29),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고(잠 15:25),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신다(시 31:23).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롬 12:16)고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주제꼴(변변치 못한 몰골이나 몸치장) 넘음과 자찬(自讚)을 전적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이를 죄로 인식하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곧 자신이 성취할 수 있는 이상의 자랑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왕상 20:11 / “출전하려고 갑옷을 입는 자가 마치 승리하고 돌아와 갑옷을 벗는 자처럼 자랑하면 못쓰는 법이오.” 잠 25:14).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만은 버리고 피하며 물리쳐야 할 심리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성경에서 교만과 자랑은 악한 자의 특징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임하는 은혜를 막아버리며 영적으로 우리를 성장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무서운 적입니다. 그러니 일종의 영적 장애자가 되는 것이며, 영적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 유행어처럼 빈번하게 사용되는 이른바 '성인 아이(adult child)"는 교만으로 인하여 초래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몸은 성인이지만 영적으로는 성장, 성숙하지 못하여 어린아이의 상태에 고착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Thomas A Kempis(토마스 아켐피스)도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자신의 겸손을 고백하기 전에는 당신의 영적 생활에 커다란 진보를 절대로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교만은 사람을 매우 긴장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자신을 어떤 면으로든 내세우지 못해서 못견뎌하는 것은 많은 정신적인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본능적으로 자신을 내세우고자 합니다. 이 본능을 억제하고 겸손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자신이 배운 것,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 자신의 명예 등 자신의 것이 자주 의식되어 표출되려고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머리가 무겁지만 이것이 무겁다고 의식이 된다면 정상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 신체에서 머리는 대단히 무거운 부분이지만 목이 잘 받들고 있기 때문에 무거움을 모르고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목이 느끼기에 머리를 받치는 것이 너무 무겁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목 디스크 증세이거나 잠을 잘못 자서 목의 근육이나 신경이 잘못된 것입니다.
또 정상적인 사람은 무거운 팔이 몸에 붙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사는데, 팔이 붙어 있다는 것이 인식되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전날 잠잘 때, 팔이 눌려서 잔 것이든지 팔에 어떤 염증이 있다든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의식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슨 일을 했을 때, 그것이 자꾸 의식되어지면 심리적으로 이상이 온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나 돈 많은데.... 나 반장했는데.... 나 계급 높은데.... 나 자랑할 것이 많은데.... 이것은 바로 교만의 증상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교만의 밑바닥에는 열등의식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Afled Adler(알프레드 아들러)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열등감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우월감을 갈망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부름받은 ‘자기’로서 살아가는 것이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도, 그렇다고 교만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정신적,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Reinhold Niebuhr(라인홀드 니버)는 인간은 교만한 존재인데, 인간이 갖는 교만에는 네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① 지적인 교만 / 배운 사람은 배운 것이 교만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모르면 모르기 때문에 겸손하지만 배우면 알기 때문에 가만히 있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② 영적인 교만 / 영적으로 뭔가를 체험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교만해 있습니다. ③ 권력적인 교만 / 권력을 쥔 사람, 권력이 높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교만한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④ 도덕적 교만 / 도덕적으로 비교적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교만한 것이 일반적입니다. 니버는 다섯 번째 교만으로 분류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집단적 교만에 대해서도 진술했습니다. 즉 인간은 어떤 집단에 속했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위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여 집단적 교만을 가지게 됩니다.
▶ 교만의 폐해는 분노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쉽게 분노하게 됩니다. 자신의 교만을 꺾는다든지 받아주지 않을 때는 쉽게 분노하게 되고,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의 저변에는 반드시 교만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만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의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늘 자신만만한 것 같고, 당당한 것 같고, 떳떳한 것 같고, 강한 것 같으나 가장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그 상처가 위장되었을 뿐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치료받기 전의 나아만 장군과 같은 사람입니다. 겉모습은 훈장이 달려있고, 지체 높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겉으로 가려진 옷 속에는 병으로 썩어 냄새나고,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교만은 큰 짐을 짊어진 것과 같아서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밝고 명랑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교만의 노예가 되도록 하여 끌려 다니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 사단은 본질적으로 교만한 존재이며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영(spirit)이므로 우리를 공격하여 교만하여 쓰러뜨리려는 것이 그의 임무입니다.
▶ 잠시 나아만을 예로 들면서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니다.
왕하 5:1-14 / 아람 왕의 군대 총사령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다. 그는 훌륭한 장군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아온 사람이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를 도와주셔서 그가 아람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2) 전에 아람 군인들이 기습공격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한 소녀를 붙잡아 왔는데, 그녀가 나아만의 아내 곁에서 하녀 노릇을 하고 있었다. 3) 한번은 그 소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우리 주인 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사는 예언자를 찾아가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 어른이 문둥병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4) 나아만은 그 말을 듣고 왕궁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소녀에게서 들은 말을 왕에게 그대로 전하였다.(사실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있을 수도 없는 일) 5) 왕이 대답하였다. `그러면 어서 이스라엘로 떠나게. 내가 이스라엘왕에게 친서를 써주겠네' 그는 곧 은 10달란트와 금 6천 개와 예복 열 벌을 예물로 가지고 길을 떠났다. … 9) 나아만은 마차를 타고 사마리아에서 길갈로 내려와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멈추어 섰다. 10) 그러나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기는커녕 다른 사람을 내보내 말을 전하게 하였다. 위풍당당한 장군을 마치 천하고 불쌍한 거지처럼 취급한 것이다. “나아만은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씻어라! 그러면 문둥병이 나아 살이 깨끗해질 것이다.”(사실 엘리사의 말에는 문둥병자 나아만이 원했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었다) 11) 화가 치솟은 나아만은 당장 발길을 되돌리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가 몸소 나와서 나를 영접하면서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고 나의 온갖 상처를 어루만져서 이 문둥병을 고쳐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요단강에 가서 몸이나 씻으라니! 12) 다메섹에는 이스라엘의 어느 강보다 더 좋은 강들이 있지 않느냐? 레바논 산속에서 흘러 나오는 아마나 강물과 헬몬 산속에서 흘러 나오는 바르발 강물은 얼마나 맑고 시원하냐! 강물에 들어가 목욕해서 나을 병이라면 내가 거기서도 충분히 목욕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화를 내면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려고 마차머리를 돌렸다.(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문둥병자 나아만의 행동) 13) 그러나 나아만의 부하들이 다가서며 말하였다. “만일 저 예언자가 이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요구하였더라도 장군님은 틀림없이 그대로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가서 몸을 씻으면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일단은 그대로 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14) 그래서 돈 많고 권세 높은 나아만은 마음을 바꾸어 겸손히 요단강으로 내려가 엘리사가 명령한 대로 그 물에 일곱 번 몸을 씻었다. 그러자 그가 완전히 치료되어 그의 피부가 소년의 살결처럼 깨끗해졌다.
■ 어떤 목사님의 간증에서, 어느 날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그날따라 자신의 설교를 스스로 생각하더라도 은혜로웠다고 합니다. 예배가 마쳐지고 교회 현관에서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여집사님이 “목사님, 오늘 설교 참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대체로 교인들로부터 제일 듣기 좋은 말이 목사님의 설교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은 이렇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설교를 마치니까, 마귀가 ’너 오늘 설교 잘했다.‘고 하더라구요!”
칭찬을 통해서 인간은 교만하게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로 인해서 한 개인의 파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초래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그 교만으로 인하여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피해자들이 주변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사단은 잡식성이라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들어 그들을 쓰러뜨리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교만으로 인한 아픔을 주어 서로의 관계를 깨뜨리며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전략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만이 없는 곳은 아무 곳도 없을 정도로 마귀는 그 대상을 막론하고 우리의 마음 밭에 교만이라는 가라지를 심어놓아 신앙의 농사를 망치게 하는 놈입니다. 그래서 결국 교만으로 우쭐거리다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야 기뻐하는 악의 핵심입니다.
▶ 우리의 마음에 교만이 발생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 자신이 교만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문제는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모름지기 자신의 잘못, 실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고백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겸손입니다.
겹겹이 쌓여있는 거짓과 허영과 헛됨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고 애써 부정하고, 감추고 사는 사람에게 무슨 진실이 있고 마음 편함이 있겠습니까? 교만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상처받기가 매우 쉽습니다. 교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겸손하려고 해야 합니다. 스스로 교만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비추어서 자신의 교만을 발견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Bernard(버나드)는 “한 계단만 더 내려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누가 자신을 욕할 때, 그것을 인정하고 오히려 한 계단 더 내려가면 여기서 겸손이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나쁜 ◯아!”라고 누가 내게 욕을 하면 “나쁜 놈이라니요? 아닙니다! 저는 죽일 놈입니다.”라고 하면 더 할 욕이 없게 됩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칭찬할 때, 그것이 사실이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가만히 듣고 있지만 말고 빨리 거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의 마음에 자리 잡으려고 하는 교만을 스스로 거부해야 합니다. 거부하지 않으면 서서히 칭찬을 받아들이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 싹트게 됩니다.
▶ 교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깨달아야 함(시 8:1-9)과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깨달아야 하며(왕상 9:6-14)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빌 2:5-8). 그리고 겸손하게 되려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교만을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교만하게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시지요? 제가 교만하지 않고 늘 겸손하게 주를 섬기기를 원하시지요?” 주님의 뜻을 물으면서 늘 겸손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마음으로 그려야 합니다. 교만에 압도되어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모습이 흐려지고, 그 음성도 점점 작아지게 됩니다. 아울러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는 말씀대로 우리의 마음을 교만하게 하는 악한 영(evil Spirit)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실제적인 것이어서 마귀를 대적할 때에 교만의 마음이 물러가게 됩니다.
■ 영적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겸손히 믿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은총
사람들은 어떤 형태이든 대부분 교만합니다. 돈이 많다고 교만하고, 예쁘다고 교만하고, 공부 좀 했다고 교만합니다. 그런데 영적 교만은 교만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교만은 영적인 암과 같기 때문에 빨리 뿌리를 뽑는 것이 좋습니다.
▶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리암이 모세를 시기하여 비방하면서 영적 교만으로 문제를 일으키자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그녀에게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게 되었고, 그 징표로 구름이 장막에서 떠나갔습니다(민 12:10).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하거나 범죄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떠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면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고 소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다윗도 범죄한 후에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는 것이 얼마나 두렵든지 이렇게 간청하였습니다(시 51:1).
시 51:11 / 주님 계신 곳에서 이 몸 밀어내지 마소서. 주님의 거룩한 숨결, 이 몸에게서 거두어 가지 마소서(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미리암에게서 하나님의 임재가 떠났을 뿐 아니라 문둥병에 걸리는 징계도 당하였습니다(민 12:10). 문둥병에 걸리게 되면 머리털이 빠지고 피부는 하얗게 문드러집니다. 또한 고통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썩어갑니다. 영적 교만은 영적인 문둥병과 같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과 정신과 육체가 썩어가게 되는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전염이 됩니다. 미리암에게 발한 나병은 영적인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줍니다.
아론은 문둥병에 걸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론은 주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론은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성품을 가졌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것은 몰라도 거룩한 일이나 영적인 일에는 줏대가 분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가깝고 친한 가족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아닌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히 해야 합니다. 빌라도 총독처럼 흐리멍덩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아내의 꿈까지 외면하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럼 미리암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어떻게 해결이 되었을까요? 미리암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자 아론은 즉시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는 우리를 회개시키는 도구입니다. 우린 하나님의 사랑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진노와 징계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징계를 받을 때 즉시로 회개해야 합니다. 교만과 죄를 즉시 자백하면 깨끗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요일 1:9; 시 51:1). 아론은 또 모세에게 중보기도를 간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온유한 성품을 볼 수가 있습니다. 중보기도자는 모세처럼 온유해야 합니다. 진실된 중보기도자는 상대방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여기며, 상대방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며 사랑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교만으로 인하여 넘어진 자가 있다면 중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요일 5:16).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만 인간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애 3:23-24).
▶ 미리암의 영적 교만의 징계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또 배우는 교훈은 신앙 공동체의 중요성입니다. 미리암은 진영 밖에서 7일간 근신해야 했습니다. 영적 교만과 문둥병은 전염성이 있는 무서운 것이므로 공동체를 보호하도록 격리시킨 것입니다. 미리암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진행을 막게 하였습니다(민 12:15).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그들의 길을 방해한 것은 광야의 불편함이나 강대한 적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길을 방해한 것은 그들의 교만과 죄였습니다. 교만한 사람 한 사람이 있으면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가 깨지고 고통을 받습니다. 교만은 파벌을 만들고 관계의 벽을 쌓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자기 경험과 지식, 자기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권위가 통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하나님의 손 가운데 보호를 받습니다.
제임스 베리(James Barrie)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Life is a long lesson in humility”(인생은 겸손에 대한 오랜 수업이다). 신앙이란 겸손에 대한 오랜 수업입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인생을 오래 살수록, 하나님을 오래 믿을수록 더욱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속에 새겨들어야 합니다(렘 13:15). 교만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면 빨리 돌이키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 가운데 계속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께로 예로 드신 것을 잠시 보기로 합니다.
눅 18:9-14 / [바리새파 사람과 세관원의 기도]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자기가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뽐내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는 세관원이었다. 11)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죄인이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 있는 세관원과 같은 죄인이 아닌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요! 나는 절대로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일도 없고 간음한 일도 없습니다. 12) 나는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13) 그러나 세관원은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생각도 못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고 눈물로 기도를 드렸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용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그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관원이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제대로 믿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믿은 것도 아닌 바리새인은 자기네들만이 인정하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왜 그들이 믿지 못하였을까요? 이에 성경은 이렇게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요 1:10-11 /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는데도 그분이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 곧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요 3:18-21 / 그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어둠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인으로 판단을 받은 것이다. 19) 죄인으로 판단받았다는 것은 곧 빛이 하늘로부터 세상에 들어왔는데도 그들이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 20) 그들은 어둠 속에서 죄짓기를 즐기고 하늘의 빛을 싫어한다.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서 수치를 당할까봐 빛을 멀리한다. 21) 그러나 올바른 행실을 하는 사람들은 즐겨 빛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 이에 비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우리도 본받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요 3:1-16 / 어느 날 밤이 이슥할 무렵 바리새파에 속한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지도자 한 사람이 예수께 회견을 청해 왔다. “선생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려고 선생님을 보내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이신 표적이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말하였다. “무슨 뜻입니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태에 들어가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 9) 니고데모가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10)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나는 내가 아는 것과 본 것을 네게 말하고 있는데 너는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 12) 내가 여기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해도 믿지 않으면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다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14)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사람들 위에 쳐든 것 같이 인자도 나무 위에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조차 인정하신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선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예수님께 무시당하는 듯한 발언에 반발은커녕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에게 이 땅에 오신 영생에 대한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의 후일의 일을 보면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많은 깨달음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 7:45-53 / 예수를 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고 갔던 성전 경비병들이 그냥 돌아오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왜 그를 잡아 오지 않았느냐?” 하고 호통을 쳤다. 46)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훌륭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그 같은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새파 사람들이 조롱하는 투로 말하였다. “그래서 너희들도 꾐에 빠져 버렸단 말이냐? 48) 우리 유대인 의회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 중에는 그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49) 그 어리석은 군중들이 무엇을 안단 말이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50) 그때 전에 남몰래 예수를 찾아가 회견을 한 일이 있는 유대인 지도자 니고데모가 입을 열었다. 51) “사람을 심문해 보기도 전에 죄인으로 처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지 않소?” 52) 그러자 그들이 빈정거렸다. “당신도 그 무식한 갈릴리 사람과 한패요? 성경을 자세히 조사해 보시오. 갈릴리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한군데도 없소.”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께 대해서 음모를 꾸미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산헤드린에서 예수님께 대하여 공개적으로 호의적인 발언을 한 니고데모는 의회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 공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앞장서 장례를 치려드렸습니다.
요 19:38-40 / 그 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대담하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모셔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였으면서도 유대의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그것을 감추어 오던 사람이었다. 빌라도가 허락을 하자 그는 가서 예수의 시체를 모셔 내렸다. 39) 예수를 밤중에 찾아온 일이 있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어 만든 방부제를 100근(33kg) 가량 가져 왔다. 40) 그 두 사람은 함께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대인들의 장례 풍속대로 방부제를 바르고 길고 고운 베로 감았다.
이 두 사람이 골고다 언덕에 나타난 시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직 후였습니다.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을 시신을 자기에게 내 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 때 상황이 보다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을 받고 “그 사람이 벌써 죽었을 리가 있나?” 하면서 백부장을 불러서 예수가 죽었는지 물어 봅니다. 빌라도는 백부장을 통해서 예수가 확실히 죽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백부장의 보고를 받은 빌라도는 선뜻 예수님의 시신을 니고데모에게 내 줍니다.
다른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한 집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요 20:19).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요셉과 니고데모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요셉은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숨겨왔던 사람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께 대한 호감은 있었지만, 자기 혼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산헤드린의 의회원들로 사람들의 여론과 이목(耳目)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을 때, 도망을 가도 제일 먼저 도망을 가야 했고, 숨어도 제일 먼저 숨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빌라도를 찾아 갑니다. 마가복음 15:43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당돌히”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국어사전에 보니까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올차고 다부지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 왔을 때 이미 그 마음에 예수님을 위해서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제는 밤중이 아니라 “대낮에도(in broad daylight)” 유대인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다른 이유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고, 비난이 두려웠던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떤 위험도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믿음이 담대한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겸손한 자에게 주어진 축복이었습니다.
♬ 536장 1. 주님 찾아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가시관을 쓰셨네 모시어 들이세 우리 죄를 속하려 십자가를 지셨네 받은 고난 크셔라 모시어 들이세 2. 보라 성자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영광중에 계신 주 모시어 들이세 헛된 교만 버리고 우리 구주 모시어 영원 복락 누리세 모시어 들이세 3. 겸손한 자 찾도다 모시어 들이세 하늘에서 부르네 모시어 들이세 좋은 자리 드리고 주실 은혜 구하세 하늘나라 세우세 모시어 들이세 4. 주여 내가 믿으니 오소서 오소서 주여 환영하오니 오소서 오소서 생명길로 이끄사 슬픔 위로 하시고 진리 알게 하소서 오소서 오소서 아멘
■ 영적 교만을 조심하라!
교만은 무지에서도 오지만 남들보다 더 많이 아는 것에서도 올 수 있습니다. 많이 배울수록 교만이 커져 간다. 많이 알 수록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게 될 수 있고, 배운 사람일수록 배우지 못한 자를 멸시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체험을 많이 하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사랑해서 영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내세의 능력을 체험하고,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영적 교만이 찾아옵니다. 그것 또한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최고라는 우월감이 생겨나고 다른 주의 종이나 성도들, 교회보다 내가 더 낫다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분명 성령이 주는 생각이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정욕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불법입니다. 왜냐하면 은사를 주신 분도, 영계를 체험하게 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한 줄로 착각하는데서 영적 교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 교만은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적인 지식을 많이 가진들 예수님을 무시하는데 그가 어찌 제대로 된 사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은사와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지옥에 떨어지기 쉬운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교만할 가능성이 그만큼 낮습니다. 뭐가 있어야 교만할 것이 아닙니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누구 앞에서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많은 체험을 가졌다 해서, 수많은 능력이 나타났다 해서 좋아할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체험을 하고, 간증도 많이 한다 해서 좋아할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다가 교만해지고, 사단의 전략에 걸려 들고, 넘어집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 영적으로 알면 알수록 더 두려워하며 더 낮아지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만이 살 길입니다. 내가 낮아지는 동시에 예수님을 높여야 합니다. 예수님만 높여야 내가 교만해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사단이 공격하고 싶어도 공격할 수 없습니다. 너무 자신을 낮추어 버리기 때문에 아예 공격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 모두가 사단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은사를 주고 싶어도 주면 넘어지기 때문에 줄 수가 없으실 것이다. 주면 교만해져 버리고, 예수님 머리 꼭대기로 올라가 버리니까 그 영혼을 위해서도 더 큰 은사와 능력이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절대로 교만하지 마십시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예수님 자리에 내가 앉겠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예수님을 대적하려 했던 루시퍼의 전철을 되밟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그리 잘 났겠습니까?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인데, 내가 한 것이 무엇이 있다고 그리 교만할 것인지요? 하나님께서 영계를 열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국과 지옥을 알 것이며,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병이 낫고, 신비한 영계를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을 진정으로 안다면 절대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경외한다면, 교만해지려 하다가도 또 낮추고 낮출 것입니다.
우리 속엔 교만이 잠재해 있습니다. 교만은 기회가 주어지면 일어날 것입니다. 그 기회가 남들이 가지지 못한 신비한 것을 가질 때입니다. 그 기회는 내가 남들보다 더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많은 사역을 한 사람이라도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기회를 엿봅니다. 은혜 실컷 받게 놔둡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마음껏 주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게 놔둡니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네가 최고야!’하는 생각을 집어넣어 줄 것입니다. 한 순간에 교만해지고, 한 순간에 넘어집니다. 교만해서 넘어지면 사단의 올무에 걸립니다. 교만해지면 빨리 깨닫고 회개하십시오! 회개하며 낮아지면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될 것입니다.
▶ 영적 질병인 교만이 치료되기 전에는 다른 질병 역시 어떤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습니다. 교만은 어떤 타락보다도 구별해 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교만함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러한지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생각하는 그 잣대가 이미 생각의 기반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하는 행동과 생각은 정당하다고 여깁니다. 결과적으로 교만보다 더 자가당착에 빠지고 찾아내기 힘든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암적 존재입니다.
교만함은 많은 모양과 형태로 나타나 양파껍질처럼 여러 층을 마음에 이룹니다 - 한 겹을 벗기면 바로 다른 껍질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마음속을 가장 최선의 노력을 통해 살펴보아야 하며 모든 힘을 다해 마음의 탐사자(성령)에게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시 26:2; 139:23; 계 2:23). 자신의 마음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잠 28:26).
▶ 영적 교만은 그 자체가 비밀스럽기 때문에 직관적인 판단으로는 구별해 내기 어렵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열매와 결과를 보고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열매란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열매와 좋은 대조를 이루기에 함께 다루어 봅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가르침도 필요치 않다고 느낍니다. 그렇기에 그는 충고들에 대해 항상 우습게 생각합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쉽게 충고를 받아들입니다. 그는 자신을 평가하는 데 매우 주의 깊으며, 자신이 얼마나 빗나가기 쉬운 존재인가를 민감하게 생각합니다. 만일 자신이 빗나간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되면 그 문제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엎드려 회개할 것입니다.
▶ 교만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위선자의 불행한 망상과 죽은 경건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비꼬는 태도입니다.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이와 달라서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잠잠하거나, 그들을 긍휼과 안타까움으로 얘기하며 기도합니다. 교만한 자들은 경건한 자들에 대해 은혜 안에서 진보가 적다고 헐뜯으나, 겸손한 크리스천은 자신 안의 죄를 바라보며 그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남의 마음에 대해 왈가왈부할 여유(餘裕)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며 남들의 장점을 본받기 위해 애를 씁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타인들의 단점을 바라보면서 가장 거친 말로 그것을 표현합니다. 종종 그들의 비난은 악한 자들뿐 아니라 자신들보다 월등한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들까지도 향합니다. 겸손한 자들은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비상한 발견을 하였을 때에라도 자신의 죄악됨과 천함에 대해 생각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자기와 같이 은혜에 동참하기를 간구합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의 또 다른 유형은 늘 주목받는 존재가 되고자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존경을 받고자 자긍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존경을 표할 때, 그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며 마음껏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사실 그들은 그러한 처사를 기대하고 자신에게 표해야 할 마땅한 바를 행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악한 감정을 가집니다(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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