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청계문학 40집 청탁원고 [폐지 더미 속에서 찾은 로또]
개암 김동출
지난해 가을 어느 일요일 날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그 얼마 전에 무슨 횡재할 꿈을 꾸고 일부러 외출하여 생전 처음 로또 몇 장을 사서 휴대폰 케이스 속에 끼워 놓고 토요일 추첨 방송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날 토요일 밤에 무슨 일이 생겨 TV 시청을 하지 못하고 며칠 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다 그다음 주 중의 아침나절에 서재를 청소하다 갑자기 그 로또 생각이 났다.
하던 일을 팽개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인터넷을 통해 당첨 번호 조회를 하였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아주 조그만 행운도 요행을 바라는 나를 외면하였다. 다소 허망한 마음으로 하던 일로 되돌아가 책장 정리를 마저 끝냈다. 소장 가치가 없는 참고서 책 뭉치와 생활 쓰레기를 카트에 담아 쓰레기 처리장으로 내려와 분리하여 버리고 되돌아서는 찰나였다.
방금 버린 폐지 더미 속에 잘 묶어서 버린 책 뭉치가 눈에 쏙 들어왔다. 얼핏 쳐다보니 책의 제본이 무게감 있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 책 묶음 통째로 내 앞으로 당겨서 살펴보니, 와! 통째로 굴러온 대박. 돈 주고도 못 구할 귀한 책이 내 눈앞에서 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오래전에 鷺山 선생의 고향인 마산에 정착하여 교직에서 은퇴하고 이제는 인생 제2막을 살면서 늦깎이로 詩 공부를 하는 지금, [노산의 시조선집]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내게 내려 주신 은총의 선물인가? 심마니가 깊은 산중에서 귀한 산삼을 캐고 ‘심 봤다’ 외치는 기분이 이럴까? 싶어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책 등에 [가고파-노산 이은상 시조선집] 한 권이 선생의 짓밟힌 명예처럼 버려져 있었지만, 노산 선생의 시조를 좋아하는 내게는 폐지 속에서 찾은 로또와 같았다. 얼른 집어 들고 책 표지를 보니 [경남시조시인협회·화중련]에서 2012년에 펴낸 「노산 이은상 시조 선집이었다. 책은 굵은 명조체로 쓴 ‘가고파’의 이름표를 달고 안경을 낀 노년기의 노산 선생이 표지 속에서 빠꼼이 나를 올려 보았다.
몇 해 전에 노산 선생의 詩碑 건립과 관련하여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이렇게 귀한 책을 내다 버렸다면 필시 무슨 연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표지를 넘기니 속표지에 [ ○○○ 의장님 淸覽(청람) 2013.4.29./김○○ 上 ]. 주고받는 사람이 분명하게 단아한 필체의 친필로 서명이 되어 있었다.
위와 같이 「노산시조」 선집을 엮어서 선물한 분은 필자의 모교 교육대학 선배님이며, 당시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엮은이에 공동참여한 河모 시인은 필자와 교육대학 동기의 인연이 있는 터라 그동안 소원한 사이에 이렇게 큰일을 해낸
河 시인이 너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집으로 올라와 내게 오늘 일어난 기쁘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일을 河 시인(시조 시인)에게 전하기로 했다. 그 시간대에는 아마도 출타 중일 것으로 짐작하고 먼저 카톡으로 사연을 보냈더니 기대한 대로 저녁에 河 시인에게서 답이 왔다.
『 세상에! 정말 뜻이 있는 金 선생에게 노산 선생님의 뜻이 닿았네요. 그 책을 만드느라고 봄부터 여름 가을까지 노심초사하였지요. 올해 95세인 원로 김교한 선생님께서 손수 노구를 이끄시고 부산대 도서관이며, 여러 곳의 자료를 찾아오시고. 경남시조 회장을 맡은 첫해(2012년) 혼신을 다해 만들었지요. 김○○ 선생님이 해적이(年譜)를 정리한 후 출판에 들어갔어요. 그 책을 金 선생이 발견했다는 건 행운이고 복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복 많이 짓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건강하십시오. 시조를 공부하고 쓰시라는 노산 선생님의 뜻 인듯요.
서명(署名)이나 잘라 내고 버리지. 본인이 버린 건지 부인이 버린 것인지. 여하튼 馬山의 대문호이자 애국 시인인 노산(鷺山) 선생을 독재에 부역했다는. 3.15를 폄하(貶下)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계속 반대하는 시민 단체 들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
河 시인에게서 되돌아온 답장은 오랜만에 동기에게 연락이 온 기쁨과 힘들게 함께 엮은 「노산 이은상 시조선집」이 확실한 근거 없이 그 시대를 함께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평가를 받는 데 대한 서운함과 울분이 묻어있었다.
「가고파 시조선집」에는 학창 시절에 우리가 즐겨 불렀던 주옥같은 노랫말 <가고파, 옛동산에 올라, 봄처녀, 장안사, 성불사의 밤, 고향생각, 사랑, 고지가 바로 저긴데> 등의 많은 작품이 실려 있었다. 선생의 다양한 작품을 읽고 나니 노산이 ‘애국시인’, ‘민족시인’, ‘종교시인’으로 다양하게 일컬어지고 있는 그 까닭은 이해할 수 있었다.
선생은「 ‘가고파’ 한 편으로 마산을 詩心이 흐르는 도시, 문학과 낭만, 서정의 도시로 이미지화시켰다. 그가 남긴 2,000여 수의 빼어난 시조는 우리의 심금을 울렸으며, 우리의 정서를 아름답게 가꾸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2022년 9월 16일 미시간대학교 한국 가곡 연구자 매튜 톰슨 교수가 주도한 [K Aat Song] 음악회에서 성악가 잭 모린(Jack Morin)이 불러 청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은 <봄처녀>의 가사가 곧 노산이 1925년 4월 18일에 쓴 시조이다. 지금 K-팝과 K-드라마에 이어 아름다운 노랫말과 아름다운 선율의 K-가곡이 한국문화의 잭팟을 터트릴 조짐을 나타내고 있다.
요즘도 가끔 생각해 본다. <누군가가 보기 싫다고 내팽개쳐버린 ‘노산의 시조선집’이 폐지업자에게 넘어가기 직전에 詩에 목마른 내게 찾아온 깊은 뜻은 무엇인가?
오늘도 봄이 오는 길목. 호수처럼 고요한 가고파 바다가 내다뵈는 창가에 서서 노산의 시 한 수를 골라 읊으며 소망한다. 한국인의 곱고 아름다운 심성을 닮은 노산 선생의 詩語가 지구촌 곳곳으로 나풀나풀 날아가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사랑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희망한다. 2023-02-02
첫댓글 그러게 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보물일진데 또 누군가에게는 쓰래기 취급을 받으니 안타깝습니다.
이은상 선생님을 또 소개 받아 기쁜 아침입니다.
그 자료도 진짜 주인을 찾느라 고생깨나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