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깊은 뜻
백두현
뚝. 딱! 대문도 바꾸고
톡. 툭! 식당도 바꾸고
며칠 전부터 영훈 형네 집수리가 한창이지만
영훈 형 아버지가
왼쪽만 닳아 유난히 얇아진 문고리 하나는
바꾸지 않으셨다.
왼손잡이였던
할머니의 흔적이라며.
살다보면 문득 문득 버리고 싶은 것들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뭐든 낡으면 버리고 싶지 않나. 낡지 않았어도 싫증나면 버리고 싶은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맞지 않는 옷, 기울어진 식탁, 낡은 것은 낡아서 버리고 싶고 싫증난 것은 또 싫증나서 버리고 싶다. 그러나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으로 다시 채운다는 것. 버리고 다시 채우고, 또 버리고 다시 채우고. 버리는 것도 채우는 것도 곱씹어보면 그저 삶의 일부분이다.
그런데 갈등한다. 혹시 다시 쓰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겐 오래됐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처음일 수도 있다. 선뜻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차곡차곡 구석에 가 쌓인다. 쓰임새가 적어지기 시작한 것은 맞지만 하나, 둘 나의 삶을 비켜나게 되는 것이 어느 한 편으로는 또 아쉽기도 하다. 그리고 집도 마찬가지다. 영훈 형네 집처럼 낡으면 바꾸고 싶다. 낡지 않아도 주인이 바뀌면 새 출발을 하고 싶다. 유행을 따라서도 바꾸고 싶다. 더 편리하려고 바꾸고 싶고 더 누리려고 바꾸고 싶다.
정신적인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아버지처럼은 절대 살지 않겠다는 가치관을 가졌다면 그 역시 지난 삶은 지우고 싶은 거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갈구한다. 끊임없이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꾼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거다. 그러나 그 새로움이라는 것은 칙칙한 과거를 버려야 가능한 것들이 많다. 그러므로 마음도 버리고 싶다. 안 좋은 추억은 금세 잊고 싶고 힘들었던 경험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다. 버린다고 있었던 게 없었던 것이 될 수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비우고 싶다. 새롭고 싶다.
그러나 낡았더라도 버리기 힘든 것들이 있다. 구태라면 뭣이라도 다 버리고 싶을 거 같지만 오히려 간직하고 싶은 뜻밖의 소중함도 많다. 대표적인 게 향수다. 지나갔지만 지나가지 않고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결코 보편적이지 않을뿐더러 새로움으로는 대체가 불가하다. 흐르는 냇물처럼 지나가지 않고 계속해서 우러나는 샘물처럼 선명하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되새김질하게 된다. 삶 자체가 버리고 싶은 게 많은 일상이지만 누구라도 각자 품속에서 꺼내보고 싶은 것도 있는 법, 정령 그리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훈 형네 집은 그 집의 할머니가 그립다. 큰 산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셨던 할머니의 굽은 등이 마냥 그립다. 그리움이 마루에도, 대문에도 서려 왼손잡이였던 할머니의 손길을 여전히 기다린다. 내 글에서 내 생각이 빠지면 남의 글이 되는 것처럼 영훈 형네 집에서 할머니가 빠지면 영훈 형네 집 같지가 않다. 다 버리고, 다 고쳐서 새집처럼 바뀌고 있지만 문고리 하나가 제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계간시학 2호 조선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