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form)이란 영어 단어는 ‘사람이 어떤 동작을 할 때에
취하는 몸의 형태’ 또는 ‘겉으로 드러내는 멋이나 형태’로 풀이되는데 국어학계에서는 ‘폼’보다는 ‘자세’, ‘모양’ 또는 ‘자태’로 사용하기를 권장하는 듯하다.
‘폼’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억지로 만든 것 같은 ‘폼생폼사[폼生폼死]’란 말은 한자성어도 아닌 일시적으로 만든 언어라고 할 수 있는데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뜻이다. 배가 고파도 음식을 사 먹지
않고 예쁜 옷을 산다거나, 제대로 사용할 실력도 없으면서 좋은 도구만 사는 경우에 잘 쓰는 말이다. 유행어를 넘어 일상어에 가까워지고 있는 단어이다.
오래전에 나의 상관이었던
어떤 분이 바로 폼에 살고 폼에 죽는 분이었다. 작은 키에 경상도 억양이 강한
분으로서 그다지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는 최고급이거나 특이한 음식을 고집했다. 그분 덕분에 나도 프랑스 식당에서 그 귀하다는
푸아그라도 먹어보고, 개구리 뒷다리 요리도 먹어보고, 이태리 식당에서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특이한 요리를 여러 차례 먹어 보았다. 그런 음식이
맛있었느냐고? 아니다. 집에 돌아와서 라면에 김치 먹고 입가심을 해야 속이 덜 니글거렸으니 나 같은 사람은 폼생폼사를 흉내 내기도 어려웠다.
그분 덕분에 나도 한 병에 $300짜리 와인을 얻어 마셔본 적이 있었지만, 가게에서 파는 $5짜리보다 더 맛이 뛰어난 것 같지 않았고 남의
돈으로 마시기는 했어도 돈이 아까웠다. 맨하탄의 어느 호텔 바에서 몇 방울 찔끔 따라주고 거의 $100 가까이 받던 ‘루이 13세’라는 꼬냑은
그분만 마시고 나는 옆에서 냄새만 맡았지만, 그게 폼나는 일이기는커녕 미친 짓이라는 생각만 들었으니 나는 애당초 폼생폼사할 인물이 못되나 보았다.
그 무렵 어느 날이었다. 한국 기술부서에서 출장 온 사람에게 저녁 대접하기 위해 찾아간 이태리 식당에서였다. 함께 간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보지
않고 이름도 모를 음식을 시키고 나서 와인 리스트를 뒤적거리던 그분이 말했다.
“난, 오랜만에 와인이나 한잔 할까.”
그리고 레드 와인 한 잔을 시켰는데 아마도 제일 비싼 것이었을 게다. 그리고는 출장 온 C 부장에게 말했다.
“C 부장은 위스키나 한잔 하지.”
“아니, 저도 와인 하겠습니다. 같은 걸로요.” 그분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맛도 모르면서 무슨 와인을 시키노? 위스키 시키소.” 공돌이답게
고지식한 C 부장이 다시 말했다.
“아니, 와인 하겠습니다.” 그분은 노골적으로 언짢은 표정을 지었고,
그날의 식사는 썰렁한 분위기에서 끝났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위스키나 맥주를 시켰다. 폼생폼사하는 고상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흉내를 내는
게 못마땅한가 보았다. 그러나 저녁 내내 “니들이 이태리 음식을 알아? 니들이 와인을 알아?”라는 표정을 지으며 꼴값(죄송?)을 떨던 그분에게
한 방 먹인 C 부장 덕분에 나는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얼마 전에 이원복 교수가 쓴 “와인의 세계”라는 두 권으로 된 만화책을 빌려 보았다. 만화라고 하지만 내용에 깊이와 재미가 있어서 열심히
보았는데 저자는 시종일관 ‘와인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적당한 가격대의 와인이 가장 좋다.’를 강조했다. 비싼 게 좋고,
음식에 맞춰서 골라야 하고…등등의 속설에 신경 쓰지 마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요컨대 와인을 즐기려면 폼생폼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나는 $10이 넘는 와인은 절대로 사서 마시지 않는다. 무슨
와인이든 달착 시큼 뜰뜨름한 맛도 입에 맞지 않고 마시고 나면 온몸이 느른하게 취하는 게 별로 기분 좋지 않아서 그리 즐기지는 않지만, 잊지 않을
정도로 마시는 편이다. 부담없는 가격에 살 수 있는 와인이 꽤 많기 때문이다.
미국에 30년 이상 살았어도 아직도 위스키와는 별로 친한 편이
아니다. 마시면 가슴부터 취해 오는 것 같은 위스키는 대체로 향이 지나치게 강하고 빨리 취해서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술이란 취하기 위해서
마시는 게 아니고 즐기는 건데. 그래도 누가 선물로 주면 잊지 않을 정도로 마신다. 공짜로 생긴 술이기 때문이다.
꼬냑은 내가 싫어하는 유일한 주류인가 보다. 달착지근한 맛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걸 마시면 혓바닥부터 취하는 게 좀 간사한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래도 그것밖에 없으면 그거라도 마신다. 그것도 술이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맥주를 좋아해서 언젠가 앉은 자리에서 찬 맥주 반 다스를 단숨에 마셔서 같이 마시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맥주를
마시면 목구멍 가득히 넘어가는 느낌이 좋다. 그래서 그런지 맥주를 마시면 목구멍부터 취한다. 나이 드니 맥주를 마시면 속이 더부룩해져서 멀리하는
편이지만 날씨가 더울 때 맥주를 보면 잊었던 옛 친구 만난 듯 반갑다.
대학교 다닐 땐 술 마실 일이 있으면 대개 신촌 시장 대폿집에서
막걸리만 마셨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우니 공짜로 주는 깍두기를 안주 삼아 마셨는데 식사를 하지 않고 막걸리만 마셔도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술값이
모자라면 시계나 학생증을 끌러놓고 외상으로 마시기도 했다. 그 당시 막걸리는 한 되쯤 마시고 나면 머리가 깨어지는 것처럼 아팠지만, 맛은 괜찮았다.
그런데 요즈음 미국에서 팔리는 수입품 막걸리는 달기도 하지만 맛이 무슨 청량음료 같아서 그리 즐기지 않는다. 요즘 막걸리는 공짜로 생긴 건 마셔도
사서 마시기에는 돈이 아깝다.
그리고 정종, 우유 섞어서 마시는 술, 보드카, 럼…..등등,
세상에는 술도 많지만 이 술 저 술 다 마셔봐도 소주만한 게 없다. 왜냐고? 이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줄 바꿔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첫째, 소주는 마시는 양에 정확히 비례해서 취하니 정직한 술이다.
한 잔 마셨는데 확 오르거나 마실 때는 멀쩡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날 때 갑자기 취기가 오르는 그런 요상한 술과는 거리가 멀다.
둘째, 소주는 술 자체의 향이 유난스럽지 않아서 어떤 음식과
함께 마셔도 어울린다. 내가 좋아하는 맵고 짠 음식과 마시면 술맛이 더욱 좋다.
셋째, 소주는 고급 안주가 아니더라도 오이와 고추장만 있어도
마실 수 있는 서민주다. 그렇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지만 비싸서 자주 대하지 못하는 생선회와 가장 잘 맞는 술이다.
넷째, 혼자 마시면 쓴맛이지만, 여럿이 함께 마시면 단맛으로 변하는 신통한 화합주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회식자리에 가든지 소주를 만나면 반갑다. 소주를 즐기는 사람이 어떻게 술 마시는 걸로 폼생폼사할 수 있을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라면이다. 하루에 라면만 너덧 개씩 먹으며 살 수 있다면 나는 늘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에 별로 좋지 않다는 무시할 수 없는 제법 근거가 있어 보이는 속설이 마음에 걸려서 그 맛있는 음식을 주일 아침에만 겨우 한 개씩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늘 아쉽다. 어릴 적에 바닷가에 살아서 늘 먹던 생선 종류, 특히 회는 너무 비싸서 어쩌다 드물게 대하는 귀한 음식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나는 음식으로 폼생폼사하기는 글렀다.
나는 집에서 입는 허름한 옷은 일주일 내내 갈아입지 않고 한 가지로 버티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 외출할 때는 손에 잡히는 아무 잠바
때기나 걸치고 집을 나서다가 아내에게 잡혀서 제발 다른 걸로 갈아입으라느니, 싫다느니 하고 옥신각신할 때가 잦다. 남편 옷차림이 시원치 않으면
사람들이 그의 아내를 흉보니 제발 좀 갈아입으라고 통사정하면 하는 수 없이 아내 말에 따르기도 한다. 넥타이를 걸쳐야 하는 정장 차림을 하는 경우는
장례식이나 결혼식이 있을 때뿐이니 내가 생각해도 제대로 된 사람 꼴을 갖추는 건 일 년에 열 번도 채 안 되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은 의식주(衣食酒) 어느 것에서도 폼생폼사할 줄 모르는 멋대가리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우리 딸들이 그런 아비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누가 뭐라던 사람은 다 생긴 대로 사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오늘 아침에도 라면이 땡긴다. 눈 딱 감고 아내 눈치를
보면서 하나 끓여 먹어? 아니다. 아내가 차려줄 맛없는 음식, 삶은 고구마와 빵 한 조각으로 때워야지. 커피까지 끓여주면 그런대로 먹을 만한 아침
식사다. 그런데 나이 들어갈수록 라면 끓일 때마다 아내 눈치를 보게 되는 이 증세는 어떻게 치료할까?
(2013년 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