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허만 멜빌(Herman Melville)의 대표 소설 ‘모비딕’에서 거대한 ‘힌고래’(白鯨)는 읽는 사람이나 평자에 따라 여러 상징성을 지닌다. 도전을 용납지 않는 절대적 신성(神性) 혹은 거대한 惡, 아니면 근원을 알 수 없는 대자연이거나 아무리 추적해도 그 의미와 존재를 파악 할 수 없는 불가해한 현실 혹은 진리- 그런 것들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인제 감독의 한국 영화 ‘모비딕’은 타이틀 앞에 소설 모비딕 속의 한 구절을 자막으로 내 보내며 시작 된다. ‘누구도 흰고래의 정체를 미리 알고 그것과 맞서 싸우는 건 아니다”. 이어 제목 ’모비딕‘이 나오고 곧장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폭염이 스크린을 메운다.
영화는 1994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그해 11월 20일,경기도의 ‘발암교(橋)’에서 원인 모를 폭발 사건이 일어난다. 검찰 총장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 간첩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명인일보' 사회부 '이방우 기자'는 폭발 사건후 보안사에서 탈영했다며 불현듯 나타난 고향 후배가 두고 사라진 가방에서 방대한 분량의 기밀문서를 찾아내고 사건의 진상이 조작-은폐되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 조직에 맞서 진실을 파헤쳐 가는데...
1990년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영화 모비딕에서 ‘흰 고래’는 멜빌의 소설 속 흰고래의 다양한 상징성과는 달리 그 의미와 정체가 명료하다. 영화의 후반에 이르면 관객은 그 흰고래가 국가 권력임을 알아챈다. 국민에게 안보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정권안보’를 도모하기 위해 교량을 폭파한데 이어 여객기(제주행)폭파까지 획책하는 ‘巨惡’이 바로 정부 공식 기구 뒤에 숨은 또다른 국가 권력임을.... (오해없기 바란다. 영화는 fiction임으로...)
영화를 개봉 첫날에 관람한 이유는 두 가지다. 주인공이 내 평생 직업인 기자이고 영화감독이 박정열 동문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임강호 동문이 이곳 56회 카페에 올린 댓글을 보고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 감상이 거의 유일한 취미라고 할 수 밖에 없는 나는, 그래서 그날 퇴근길에 서둘러 극장을 찾았던 것이다.
좀 허풍을 섞어 과장하면, 기자를 직업으로 하는 자들은 진실을 위해 순(殉)할 각오가 돼 있어야하는 위인들이다. 적어도 수습기자 시절에는 그렇게 배운다. 영화에서도 기자 한명이 취재과정에서 피살된다. 사회부 특별 취재팀에 합류해서 주인공 기자와 함께 발암교 폭파의 진실에 깊숙히 다가갔던 기자를 보이지 않는 권력이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참혹하게 살해한다.
새삼 적시할 필요도 없지만 기자에 대한 여러 부정적 이미지가 있는 게 사실이고 그 책임도 1차적으로 기자에게 돌아가긴 한다. 그렇다하더라도 기자의 기본적 속성이나 대체적인 성향은 어떤 신상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무엇보다 권력의 언어들(공식 발표)에 대해서는 일단 의심하고 집요하게 질문해야 하는 직종이 기자다.(그래서 권력- 강하고 잘난 세력이나 집단은 항상 기자의 대척점에 있다)
영화 모비딕은 무엇보다도 기자의 본질을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좋은 영화’였다. 평점을 매긴다면 ★★★★쯤 일까? (역시 오해없기 바란다.나는 지금 전문적인 평자로서가 아니라 개인적 입장- 바로 단순한 한명의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말할 뿐임으로...)
물론 약간의 아쉬움은 있다. 기자의 추적 취재와 그 결과로서 확인된 巨惡으로서의 권력의 정체와 그 음모의 시말에 대해 신문 지면에 과감하게 보도-폭로하는 것을 영화의 결말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이다. 그러나 스토리 전개의 한계 같은 것도 연출자가 고심했을 것으로 이해 할 수는 있다. 더구나 영화는, 기자의 또 다른 속성이자 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 휴머니즘을 표현한다..
영화의 끝머리에서 주인공 기자는 데스크(부장)에게 항의하듯 말한다. “열 명의 악당들을 응징하지 못할지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는 것을 막는 것이 기자의 본업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영화는, 그의 말처럼 거악의 정체를 완벽하게 취재해서 낱낱히 드러내 보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형식의 보도를 통해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예방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나는 휴머니즘이야말로 최선의 인간적 덕목이라고 생각해온 터라서(물론 실천은 못했지만...) 그같은 결말을 그런대로 수용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흰고래의 행방을 찾아 인도양 대서양 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항해하던 소설 모비딕의 주인공 에이하브 선장은 일본 열도 근해에서 그 정체모를 흰고래를 만나 사흘간 死鬪를 벌이다가 결국 그 흰고래와 함께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삶을 마감한다. 그것으로서 巨惡은 제거되었는가. 결론은 미묘하다.다만 분명한 것은, 거악으로서의 흰고래와의 투쟁에 삶을 걸었던 인간의 집념과 파멸을 소설은 극명하게 묘사할 뿐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기자는 세상을 바꾸기에는 사실상 미력한 업종인지 모른다. 영화 모비딕도 기자의 사회적 역할을 그 정도 수준에서 묘사했다.영화를 보고 난 나의 감상적 결론은 그것이다. 그러나 보다 좋은 세상을 위한 기자의 열정은 상찬받아야 하는 건 아니지.따라서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겠다.언론 일선에서 진실찾기에 땀흘리는 기자들은 요즈음 한국 연예계의 트랜드가 된 "나는 00이다"를 빌려 "나는 기자다"라고 의연하게 말해도 좋을 듯 싶다. 영화 모비딕은 이를 뒷바침한다. 영화을 만든 박인제 감독에게 내가 각별한 격려의 말을 전하고 싶은 이유다.
*덧 붙임: 영화 '모비딕'을 빌미삼아 쓴 '기자를 위한 변명'이 너무 장황했나?;그래서 객관적인 글이 되지 못했나? 그렇게 自問하고 반성하면서, 어쨋든 동문 여러분께서도 영화 ‘모비딕’을 꼭 한번 관람해 보시길 삼가 권유합니다. 예술가 아들을 키운 박정열 동문에게 치하의 박수를 보내는 뜻에서도...
첫댓글 서초구에는 어느극장에서 상영하는지 알아 냈으니 자 ~
그영화 해외 사는 사람들은 언제쯤 (인터넷에서) 볼 수 있을까요. 기다려집니다. 뒷메님, "기자의 본업"을 아무리 가르쳐 보아야 무얼 합니까. 윗전에서 기사 짤라 버리면 그만인 것을. 왜 "조.중.동" 이란 단어가 생겨 났을까요? 신문... 기자... 권력 과 거악의 한 축일뿐.....
나도 '윗전'에 앉아 있던 세월이 있긴하지만... 기사를 마구 자르는 것이 요즈음 같은 언론 풍토에서 가능한 일도 아니고...분명한 건, 진실과 현실의 제약이 충돌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그래서 데스크는 수시로 고민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그러니 언론이 거악의 한 축이라는 단정은 좀....ㅠㅠㅠ
뒷메님의 답글이 그리워 헛소리를 좀 했읍니다. 이제는 미국에서 보낸 세월이 서울에서의 그것 보다 길어지기 시작했읍니다. 제가 서울 사정을 무얼 알겠읍니까. ㅠ ㅠ ㅠ 않하셔도 됩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김 소월)- 그래서 또 ㅠ ㅠ ㅠ입니다.
기자, 학자, 법관, 경찰, 목사 등등 이러한 단어에는 그 자체의 의미와 함께 그 위치에 있는 존재의 참된 이유와 함께 사명이 있는 것이 통념이고 그러한 의미로 단어들이 구사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본질보다는 혼탁하고 왜곡된 사회의 현실 속에 그 의미가 굴절된 의미로 받아드려지고 평가되는 현실이 정말 안타깝다. 하루 빨리 이러한 어휘들의 본질에 따른 구사가 가능한 세상이 되돌아 오면 참 좋겠다.
따가운 지적이고 절실한 기대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세상의 온갖 곳이 추악하게 타락해 버린 시대에 그들이라고 온전 할 수 있을까?"
시종 손에 땀을 쥐고 보았습니다. 흥미진진한건 물론이고 ..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 짜임새나 연기 모두 꽉 짜인 .. 멋찐 영화 였습니다
신문에 난 영화평들을 보면 거의 다 기자에 관한 영화라고 했던데...!질근 질근 줄담배나 피우고 생활 태도는 엉망진창이지만 순수하게 개판 권력의 횡포에 분노하는 기자놈, 그놈과 아슬 아슬 위험을 무릎쓰고 치열하게 취재협력하는 여기자,그런대로 볼만했지요? 내가 영화얘기를 빌려 기자에 대한 변명을 쓴 까닭이 짐작되지요?
각자 보는 입장이 있겠군요. 강력해 보이나 실은 허약한 권력.. 권력에 대한 집착이 유난한 부류들.. 그들의 어조에 따른 지방색.. 약간은 젊은 관객층의 호응을 겨냥한듯한 사건사례들 ..이 더 머리에 맴 돕니다. 언론의 약점과 기자의 근성.. 국가라는 복잡다단한 덩치를 잘 끌고 갈 악과 선의 구별.. 어르신들의 식견 지혜부족.. 흐흐 아직도 뭔가 머릿속을 맴 도네요 한번보고 잊어버리는 .. 그런 영화가 아니네요 머리 좋은 분들은 꼭 한번 보셨으면 ..
머리 나쁜 나같은 부류는 안 봐도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아니지요. 영화를 보면 머리가 더 좋아진다는 뜻으로 나는 이해했습니다.ㅋㅋㅋ
ㅎㅎㅎ 머리 나쁘다고 자칭하는 집안주인과 꽤 오래 復棋 했습니다. 근데 그게 또한 큰 재미 였습니다 좌우간 이영화 작가 감독은 치밀하고 좋은 머리를 타고난거 같습니다 오늘 수원모임에 가서도 소감을 풀었습니다
I just bought a new iPad. Sending a simple reply with the iPad is a big task for me now. I should see the movie as you gentlemen are in agreement that once you see the movie, you will get smarter.
It is true that I am getting older.!!!! That's all~~ㅠ 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