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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태복과 행복나누기 원문보기 글쓴이: 혜천
북한에 납북되어 4차례나 탈북시도후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는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살다간 영화감독 신상옥님의 별세와 고교시절 어린나이에 납북된 김영남씨의 기막힌 사연을 보면서, 동토의 땅 북한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큰 다행이며, 대한민국이 북한 정권의 지배를 면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김정일정권의 독재하에 신음하는 북한 인민들이 하루속히 해방되어 자유와 행복을 찾기를 바라며 정리합니다. |
고 신상옥감독님의 극락왕생을 발원합니다.
최은희씨 "남편, 4차례 탈북시도후 정치범수용소에 감금" 4월 11일 밤 80세의 일기로 별세한 고 신상옥 감독은 자신이 감독한 75편의 작품만큼 납치와 탈북을 경험한 극적인 삶을 살았다.
11일 타계한 한국 영화계의 거장 고 신상옥 감독의 부인 최은희씨(80)는 “북한 정권이 시켜 영화제작에 참여하였다”며 “(남편이) 2년3개월 동안 17작품을 만들며 초인적으로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왜 납북됐다고 생각하느냐는 말에 “북에서 영화를 만들 필요성 때문에 우리가 납북 된 것 같다”며 “남편이 탈출 시도를 네 번이나 했는데 죽이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고 밝혔다. 최여사는 이날 고 신상옥 감독의 사망원인이 됐던 C형 간염의 감염경로에 대해서도
"노벨賞을 위해 민족을 판 당신을, (申相玉 감독의 金大中 대통령 앞 마지막 편지 : 2003년3월호 월간조선에 기고 글) |
인륜을 짖밟는 북한의 만행으로 뒤바뀐 기막힌 운명! 일본인 여중생(당시 13살), 한국인 고교생(당시 16살)을 납치하여 북한의 대남(對南)공작 교관(간첩양성소 교관)으로 만들고, 고교생을 납치한 간첩은 전향해 南한의 자영업가 되었다!
1977년 11월 15일 오후 일본 니가타(新潟)현 니가타시.
일본 정부가 요코다 메구미씨의 남편으로 추정한 김영남(사진)씨는 당시 김씨는 16살로 군산기계공고 1학년 학생이었다. 5남매 중 막내인 그는 여름방학 중 친구들과 함께 선유도로 놀러 갔다가 북한으로 귀환하던 남파간첩에 의해 강제로 납북됐다. 실종 처리됐던 그는 97년 11월 북한에서 노동당 작전부 소속 공작원으로 활동하다 자수한 간첩 김광현씨가 본인이 북한으로 귀환하던 중 김씨를 직접 납치했다고 밝혀 납북사실이 확인됐다. 김영남씨는 북한에서 대남공작원 양성기관에 근무하면서 일본인 납치피해자 메구미를 만나 86년 결혼,딸 혜경양을 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전북 전주시에는 김씨의 어머니 최계월(82)씨와 누나(48) 등이 살고 있으며 가족들은 그가 실종된 날을 제삿날로 정해 여태까지 제사를 지내 왔다.
일본인 요코다 메구미(橫田惠)의 남편 김영남(金英男·45)씨를 영화보다 더 극적인 비극의 드라마는 28년 전 시작됐다. 노련한 남한 침투요원, 김광현이 처음부터 이런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인생도 어느 날 갑자기 바뀌었다. 1959년 하사로 제대하고 신의주 방직공장의 전기기사로 근무 중이던 그는 1965년 초(당시 27살) 돌연 노동당 중앙기관의 호출을 받고 불려갔다. 그때부터 동해안의 한 지역에서 ‘해상침투간첩 안내원 훈련소’ 교육이 시작됐다. 교육 후 서해안에 배치받아 간첩들의 안내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4년부터 김씨는 301해상연락소에서 근무했다. 그는 이 기간 중 북한의 간첩을 남파시키고 남쪽의 간첩들을 북으로 귀환시키는 일들을 담당했다. 그의 인생을 다시 바꾼 침투는 1980년 6월 18일 시작됐다. 김광현을 비롯한 조원(組員) 10명이 황해도 해주항에서 승선했고, 19일에는 충남 대천 서쪽 120마일 해상에서 중기관총과 대전차로케트 등으로 무장한 간첩선으로 갈아타고 해안 침투를 시작했다. 20일 오후 5시에는 최종 목적지인 충남 대천 해안으로 저속 이동을 시작했으나 결국 이날 6시쯤 우리 해안경비초소에 적발됐다. 선장인 김광현은 도주를 시도했으나 결국 우리 군에 의해 간첩선은 피격됐다. 그는 당시 “자폭할 기회가 있었지만 죽기가 싫어서 자폭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에서 “지난 날의 어리석음과 죄과를 뉘우친다”며 전향의 뜻을 밝혔다. 김광현은 이후 “지금도 북한주민들은 북괴의 허위선전에 속아 중노동에만 시달리고 있다”며 “앞으로 북괴의 적화 야욕을 분쇄하는데, 한 몫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납북자가족모임 최성용(崔成龍·사진) 대표는 11일 요코다 메구미의 남편이 납북자 김영남이란 사실을 확인하기까지 우리 정부가 보여준 미온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확인 노력에 비해 우리 정부는 뭘 했습니까. 복수의 소식통을 통해 김철준씨가 납북된 한국인일 가능성을 확인하고 여러 차례 확인 요청을 했음에도 정부는 남북관계가 경색될 것을 우려해 일본 정부의 협력 요청에도 난색을 표시할 정도로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일본 정부로부터 김철준이 김영남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 정부에 알렸지만 정부는 극비에 부칠 것만 당부했어요”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고등학생을 끌고 간 거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제라도 북한은 허심탄회하게 납북자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우리 정부도 그렇게 요구하길 바랍니다”라고 최 대표는 말했다. 그는 “우리 가족들이 연좌제로 인한 피해나 아픔이 많았습니다. 2004년 4월에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납북자가족지원특별법을 제정하라는 권고를 받아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습니다”라고도 말했다. “김영남 납치 증거가 드러났으니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도 이 문제를 통 크게 풀어가기 바랍니다. 앞으로 북한에서 어떤 성명을 내는지 지켜보겠습니다.” 최 대표의 북에 대한 마지막 기대이다. (신문기사들 재편집) |
용서는 잘못을 깨닫고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륜을 짖밟고 행복권을 박탈하고도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아직도 대남적화전략의 망상을 못 버린 북한 집단은 몽둥이가 약입니다. 이런 집단에게 동족이라며 혈세를 퍼붓는 행위는 잘 못된 것이며, 이런 집단을 추종하고 비호하는 좌파세력들은 크나 큰 죄악으로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김정일 압제에 시달리는 2,700만 북한동포들이 하루 속히 자유민주대한민국의 품에서 자유와 행복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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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단 그 뿐만 아니라, 100년전... 1000년전... 10000년전에 있었던 천인 공로할 사건에 주목합니다... 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