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저는 아이였고 아버지는 어른이었죠.
그러다가 저는 어른이 되고 아버지는 아이가 되었어요.
더 늦기 전에 우리 둘 다 어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스웨덴을 대표하는 작가 케미리가 도달한 또 하나의 위대함
웃음과 눈물이 함께 터져 나오는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블랙 코미디
“가족은 그냥 운명이야”라는 체념에 마침표를 찍는 뭉클한 결말
‘가장 노벨 문학상에 가까운 스웨덴 작가’ 요나스 하센 케미리의 장편 소설 『아버지의 원칙』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1978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튀니지인 아버지와 스웨덴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이민 2세인 케미리는 자신의 정체성이 담긴 자전 소설『몬테코어』(2006)로 급부상했다. 이 작품은 스웨덴 이주자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며 20만 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 독일, 프랑스 등 10개국에서 출간되었다. 소설뿐 아니라 희곡으로도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쌓고 있으며 첫 희곡 『침입』(2006)은 스웨덴에서 공연 기간 내내 전석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2010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폭탄 테러를 배경으로 하는 장편 소설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2012)로 주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민자, 소수자의 모습을 조명하며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한층 더 탄탄하게 구축했다. 주목받는 유럽의 젊은 작가에게 수여하는 P. O. 엔퀴스트상. 스웨덴 최고의 문학상인 어거스트상, 미국 연극계 최고의 영예인 오비상, 스웨덴 입센상, 메디치상 등을 수상했다. 2017년 스웨덴 작가 최초로 《뉴요커》에 단편 소설을 게재했으며, 2021년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해 뉴욕 대학교에서 문예 창작을 가르치며 집필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 가족의 고통에 관한 코미디
케미리가 2018년 발표한『아버지의 원칙』은 노인이 된 아버지, 아버지가 된 아들, 어머니가 된 딸이 서로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변화를 인정하고 과거를 받아들이는 십 일간의 과정을 담은 현대 우화다. 아버지는 육 개월에 한 번씩 스톡홀름에 병원 치료와 세금 정리 등의 일을 하기 위해 들른다. 그는 당연한 듯이 장남에게 물려준 사무소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장남에게 모든 행정 처리를 일임한다. 육아 휴직 중인 사십 대 아들은 네 살 딸과 한 살배기 아들을 하루 종일 돌보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아버지가 요구하는 책무가 부담으로 느껴진다. 예전 같지 않고 식어 버린 여자친구, 새롭게 찾는 직업 등 아들이 겪는 삶의 부침은 점차 무거워져 간다. 한편 변호사로 일하는 딸은 고통스러운 결혼을 청산했으나 사춘기를 맞은 아들이 속을 썩이고, 새 남자친구를 만나 원치 않은 임신을 하고 만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의 입장만을 관철하고 상대를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일부 장면은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반복적으로 재연되어 흥미진진한 교차성을 만든다. 불안정한 의사소통은 가족 내에서 이미 굳어진 관행과 같아 쉽게 개선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원천적인 사랑, 본능에 가까운 유대가 이뤄지며 어쨌든 갈등을 봉합해 내는 과정이 답답하기도 하고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가족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단순한 서사의 즐거움을 넘어서는 깊이를 제공한다. 케미리는 이 작품을 통해 어둠과 슬픔을 탐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위대한 유머리스트임을 증명하고, 독자에게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 새롭게 만드는, 혹은 붕괴되는 ‘아버지의 원칙’
작품의 제목인 ‘아버지의 원칙’, 혹은 ‘아버지 조항’은 가족 내에서 모두가 지키는 암묵적인 조항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만들었고 아들이 지키고 있는 이 조항들의 대전제는 장남은 응당 아버지를 돌보고 존경해야 하며 모든 지시에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들은 육 개월에 한 번 오는 아버지의 거처를 청소하고, 은행 서류와 세금 납부 등 모든 세세한 절차를 챙기고, 내색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들은 어릴 적부터 권위를 앞세운 폭력적으로 훈육하고, 내세울 만한 직업을 갖지 않았단 이유로 멸시하고, 결국엔 해외로 이주해 버린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깊은 감정의 골이 쌓인 상황이다. 여동생과 수십 번 대화했던 대로, 아들은 이번에야말로 ‘아버지 조항’을 없애 버릴 것을 다짐한다.
소설에서 아들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아버지, 여동생과 저녁을 먹으러 갈 때는 그 관계에 따라 ‘남매인 아들’로 변화하며, 소설의 장면마다 초점이 달라진다. 자신의 아이들 앞에서는 아버지 역할을 한다. 가족을 떠날 때 아들은 아버지의 역할을 어쩔 수 없이 수행해야 했고, 이제 자신의 자녀들을 돌보면서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그들을 잘 돌볼 수 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한다. 인물들은 서로 다른 정체성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진다. 가정 밖에서 경력을 쌓으려는 여자친구는 아이들이 아버지와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며, 가족 관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케미리는 작품 내내 인물들의 이름을 독자에게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명명되지 않은 인물들은 오직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로 독자에게 인식되고 다른 정체성은 모두 거둬 내고 인물이 가진 가족 내의 역할에 대해 집중하도록 이끈다. 케미리는 소설 속에서 현대 사회의 가족이 한 번씩은 겪었을 매우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듯 세 사람의 일상을 관찰하는 묘사는 독자가 자연스레 감정을 이입하게 돕는다. 『아버지의 원칙』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독자에게 해방감과 위로를 주는 소설이다. 카타르시스적인 비극보다는 블랙 코미디를 통해 독자들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주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문학이 단순한 서사 이상의 것, 즉 깊은 인간적 진실과 복잡한 사회적 질문을 탐구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임을 보여 준다. 그의 소설은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탐색하고,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삶과 가치를 재고하도록 도전하고 있다.
P.119
도대체 언제 사랑하는 아버지보다 커리어와 돈을 우선순위에 두는 로봇으로 변해 버린 걸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은 수치거리였다. 아들은 아들이 아니었다. 아들은 인생을 살면서 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싸울 필요가 전혀 없었던, 버릇없이 자란 아이였다. 자신의 불행을 전부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비난하는, 거북스럽기 짝이 없고 진부한 인간이었다. 그는 평생 나쁜 일들은 모두 자신의 능력 밖의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필터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았다.접기
P.196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버지였다. 세 글자로 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SOS. (...)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이리로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신 아버지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최대한 빨리 오세요.
P.205
이제 그는 실제로 자신의 아파트였지만 지금은 아들이 사는 아파트에서, 실제로는 아들의 침대지만 지금은 자신의 것인 평범한 침대에 누워 있다. TV가 켜져 있었다. 여동생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있었다. 이 무슨 시련이냐! 내가 이 모든 걸 어떻게 관리했는지 알지? 모든 희망을 잃었을 때 무엇이 내 생명을 구했는지 알지?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그의 아들이 미소 지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수년의 기다림 끝에. 그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내 생명을 구한 건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었어.
P.211
“우리가 예전에 살던 아파트 주방에서 아버지가 내 따귀를 때렸던 것 기억하세요?” 아버지는 아들의 따귀를 때린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따귀를 때린 적은 없었다. 반면 아버지는 기름기 많고 여드름투성이에 복부 지방으로 축 늘어져 있던 아들의 십 대 시절이 기억났다. 아들은 엉뚱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깡패처럼 옷을 입고, 해적처럼 빨간 반다나를 머리에 쓰고, 허리케인처럼 펄럭이는 큰 청바지를 입고, 청소년 문화 센터에서 집에 돌아와서는 단지 아버지가 병에 걸렸기 때문에 멸시하는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P.213
저는 아버지와 좀 다른 관계를 갖기를 원할 뿐이에요. 처음에 저는 아이였고 아버지는 어른이었죠. 그러다가 저는 어른이 되고 아버지는 아이가 되었어요. 더 늦기 전에 우리 둘 다 어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P.245
우리를 제외하고 다 바보였다. 우리는 혜성이었다. 우리는 우주의 천사였다. 아버지가 채널을 바꿨다. 그들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서 웃었다. 퀴즈 쇼에서 수도 이름을 잘못 말한 바보를 바보라고 불렀다. 그들은 술을 섞어 마셨고, 건배했고, 춤을 추었다. 소파에서 나란히 잠들었다. 그녀는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방식으로 아버지와 가까워졌다. 그녀는 절대로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밤이 되면 그녀는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의 혈류 속을 윙윙거리며 돌아다녔고, 그의 심장을 작은 새처럼 손에 잡고 있었다.
P.316
문이 열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그는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여기에 왔다. 그가 도착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어쨌든 왔다. 그는 어제 자기에게 아들이 필요했던 것처럼 오늘 저녁 아들에게 자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아버지의 시선이 아들을 용기로 채워 주었다. 아들은 이번엔 잘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그저 달리면 되는 거였다.
P.406~407
제발 제발 제발요. 우리 오늘만이라도 한번 시험해 볼 수 없어요? 공항까지 가는 데 사십오분 정도 걸리거든요. 그동안 아버지가 한 번이라도 저를 비판하지 않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까요? 시험요. 우리 한번 시험해 봐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저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는 말이 있으면 그 어떤 말이라도 하지 않는 거예요. 한번 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