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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현 [1855~1910] 독립장 서훈년도: 19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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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 「언사소」를 올려 국정개혁을 주장 ○ 1905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애국시 발표 ○ 1910 「한일합방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
<< 공훈선양학술강연회 >>
◆ 일시 : 2005. 11. 25(금) 14:00 ◆ 장소 : 서대문 독립관 ◆ 주최 :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 후원 :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 독립유공자유지계승유족회, 민족대표33인유족회, 3·1여성동지회, 3·1운동기념사업회, 한민회,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강연회 - 주제 : 「매천 황현의 생애와 역사인식」 - 연사 : 박걸순 연구원/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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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 선생의 절명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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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독립운동가 홍보자료
황 현(黃玹) 선생
(1855. 12. 11 ~ 1910. 9. 10)
1. 선정배경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히고 상경하여 한말 대문장가인 이건창·김택영 등과 교유하며 문명을 날리고, 시골출신 선비를 차별하는 관료사회의 풍토에 실망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낙향하여 전남 구례 월곡마을에 은거하며 「매천야록」·「오하기문」·「동비기략」등의 사서를 저술하고, 1899년 나라와 겨레를 걱정하는 우국의 심정에서 조정에 「언사소」라는 상소를 올려 부정부패의 척결과 국정쇄신을 주장하고,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를 애도하는 시와 을사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고 시를 지어 우국충정의 뜻을 표출하고, 1910년 8월 「한일합방조약」의 강제 체결로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선비로서 책임을 통감하여,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긴 채 자결, 순국하신 선생의 숭고한 애국충정의 뜻과 공훈을 기리어 선정
2. 주요공적
○ 1899 「언사소」를 올려 국정개혁을 주장
○ 1905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애국시 발표
○ 1910 「한일합방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
기념 행사 계획
1. 기념행사
ㅇ 11월의 독립운동가 기념사진전
- 기 간 : 2005. 11. 1∼11. 30
- 장 소 : 서대문 역사관, 독립기념관
- 주 관 : 광복회(☎02-780-9662), 독립기념관(☎041-560-0114)
- 내 용 : 황현 선생의 인물사진과 공적관련 사진 전시
ㅇ 11월의 독립운동가 황현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
- 기 간 : 2005. 11월중
- 주 관 : 순국선열유족회(☎02-365-4387)
- 내 용 : 황현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2. 언론홍보 기타
ㅇ 국가보훈처 인터넷 서비스
- 명 칭 : 이달의 독립운동가
- 주 소 : http://www.mpva.go.kr
ㅇ 포스터 제작·배부
- 발 간 처 : 국가보훈처
- 배포내용 : 포스터(1만5천매)
ㅇ 일간지, 정기간행물 특집기사 게재 홍보
- 중앙일간지, 정기간행물 등 보도자료 배포
- 전국 시·군·구 소식지 게재
「11월의 독립운동가」공적개요
매천(梅泉) 황 현(黃玹) 선생
(1855. 12. 11 ~ 1910. 9. 10)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황현 선생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55년 전남 광양에서 부친 황시묵과 모친 풍천 노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재주가 뛰어났으며, 왕석보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1878년 처음 상경하여 이건창·김택영 등과 교유하며 장안에 문명을 날렸다. 1883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시골출신을 차별하는 당시 관료사회의 풍토에 실망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낙향한 후 전남 구례 월곡마을에 은거하며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동비기략(東匪紀略)」등의 저술에 힘썼다.
초야에 묻힌 선비였지만 선생은 항상 나라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는 우국의 심정을 갖고 살았다. 그리하여 1899년 「언사소」를 조정에 올려 부정부패를 해소하고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이는 당시 철도부설권·금광채굴권 등 각종 이권이 부패한 황실과 관리들에 의해 남의 나라에 넘어가고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진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선생은 선비로서 행동하는 양심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문변삼수(聞變三首)」라는 시를 지어 을사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민영환·조병세 등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를 애도하고 우국충정을 기렸다.
나아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나라를 섬 오랑캐에게 빼앗기고 겨레는 그들의 노예가 된 것이었다. 이에 선생은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선비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긴 채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관련자료와 사진을 11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에서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 학술강연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매천(梅泉) 황 현(黃玹) 선생
(1855. 12. 11 ~ 1910. 9. 10)
조 재 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연구과장)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 선생의 절명시 중에서.
1. 출생과 성장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 황현은 장수 황씨 황시묵을 아버지로 풍천 노씨를 어머니로 하여 세도 정치기가 한창인 1855년(철종 6) 12월 11일 전라도 광양현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자는 운경(雲卿)이다.
황현의 선조 중에는 세종대왕 시절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황희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황진과 병자호란 때 의병장을 지낸 황위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몰락한 황씨 가문은 그가 태어난 시절에 이르면 정계에 유력한 인사를 배출하지 못하여 그는 시골의 유생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현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고, 11세가 되는 해에 서당에서 천사(川社) 왕석보(王錫輔)를 스승으로 하여 시와 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20대가 되어서부터 많은 시를 짓기 시작하였다. 왕석보는 1816년에 태어나 1868년 사망한 학자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황현을 비롯하여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 대한제국 시기 계몽운동가 해학 이기 등이 유명하다. 황현은 후일 스승에 대하여 평하기를, “호남 동쪽에 봉성현이 있는데 전 성 중에 탄환만한 작은 고을이다. 천사 왕선생이 나온 이후로 전 성이 봉성을 시향(詩鄕)으로 추켜 올렸다. 지금 선생이 돌아가신지 이십여 년에 선생을 추종하는 시파(詩派)의 흐름이 점점 넓어져 차차 작가의 대열에 오르게 되었다. 천사같은 분이야말로 한 지방의 풍기(風氣)에 관계되는 분이라고 할 만하다”라 하였다.
2. 상경과 낙향, 그리고 당대사 집필
황현은 서울로 올라와 과거를 보았다. 1888년 34세로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당시 과거장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그는 낙향하여 더 이상 관직에 연연하지 않았다. 정부관리가 되기를 포기한 황현은 이후 처사형 선비로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비판적 지식인의 모습으로 황현은 거듭 태어났다.
그는 서울에서는 추금(秋琴) 강위(姜瑋)를 스승으로 하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창강(滄江) 김택영(金擇榮)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이들과 정신적인 교류를 지속적으로 가졌다. 황현의 동생 황원은 “평생 문학적인 사귐은 영재, 창강 두 분이 제일이었지만 영재에게 더욱 쏠리어 꿈에도 1년에 늘 수십 번을 만났다. 늙어서는 조금 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현은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을 학문적으로 흠모하였다. 그는 “내 평소에 선생의 문장을 좋아하였다”고 하면서 “아! 조선조의 문장은 선생에 이르러 볼 만한 것이 그쳤다”라 하여 ‘경세치용’의 연암 학문이 당대까지 이어지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였다. 한편 다산 정약용의 서적도 탐독하였다. 그는 다산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방례초본, 전제고 등을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1886년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곳에서 16년 여 살면서 황현은 많은 시와 매천야록 등을 저술하는데 몰두하였다.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은 그가 저술한 대표적인 역사서로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되기까지 47년 간의 정치,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서술한 근대사 관련 중요 자료이다. 이 책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료총서로 발간하였고, 최근에는 완역되었다. 매천야록은 당시의 역사전반을 서술한 것이라면 오하기문은 특히 자신이 보고 들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중점을 두어 기술한 것이다.
3. 서정과 우국이 깃든 시
우리에게는 우국시인으로만 잘 알려진 황현의 시 중에는 시골의 서정이 깃든 낭만적인 내용도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사우(飼牛)>라는 소먹이는 노래에서 다음과 같은 농촌의 목가적 풍경을 묘사하였다.
석자 키에 쌀겨가 두터운데
어린 여종이 외양간으로 들고 가네
한 머리엔 흰밥 한 머리엔 나물
미숫가루 같은 목화씨 한줌
늙은 소머리 들어 밥 냄새 맡고
혀 내밀고 코를 햝으며 바삐 뛰어 일어나
아교같은 침 흘리며 물끄러미 바라볼 뿐
의심스레 사방으로 냄새만 맡고 맛보지 않더니
갑자기 긴 혀 내밀어 비로 쓸 듯 다 먹었네
입술로 휘둘러 키를 넘어뜨렸네
어린 여종이 깔깔대며 소를 향해 웃으니
소의 성미 좋아서가 아니네
금년은 정녕 비할 바 없는 풍년들어서
목화는 눈처럼 쌓이고 벼는 구름처럼 너울대리
온 밭의 배추는 쑥보다 흔하고
나물국은 주발에 넘치고 서리농어 맛 좋으리
내년 이 날은 콩밥을 지어서
소에게 바치기를 늦지 않으리
풍년을 맞이하는 해에 즐거운 농촌생활을 시적 감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몰락양반이자 남의 땅을 빌려 경작해서 먹고사는 소작농으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학문활동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기에 현실적 체험을 바탕으로 이러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나 또한 농군으로
십년을 남의 땅 부쳐
모 심을 때 모 심고 보리 갈 때 보리 갈고
나도 남들처럼 농사를 지었거니
추수라 하고 보면
구실이야 도조야
빈집만 휑뎅그렁
풍년도 풍년이 아니더라오
산비탈 일구어서
담배를 심고부터
늙은 개 사립문 앞에서
꼬리를 살래살래
이제 다만 바라노니
해마다 해마다 담뱃값이 오르기를
남의 곳집에 쌓인 전곡
부러워할 것 무엇 있나
우리같은 백성이야
주림을 면하는 게 상팔자지
논농사 짓는 이들
산비탈 농사라 비웃지들 마소
그는 논농사도 짓기 어려운 열악한 처지의 몰락한 농부에 불과하였다. 그는 자신의 추체험적 생활을 통해 어려운 농촌현실을 사회모순과 결부시켜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농촌의 수척해져가는 비참한 상황을 다음의 <직녀원(織女怨)>이라는 시에서 적나라하게 묘사하였다.
오월 유월 정세를 독려하여
얼굴 깡마르고 누런 머리와 수염으로
중부(中婦)를 바라보며 베 짜기를 재촉하네
몽당치마 허리에 두르고 발은 피로한데
평상 밑에 귀뚜라미 빨리 짜라 재촉하네
벽의 불빛 그림 같은데 촉촉한 이슬이 맺혔고
찬 베를 찰찰 다시 찰찰거리네
애간장 실처럼 끊어지고 배고픔을 견디는데
동쪽 집 어떤 사람 얼굴은 옥 같고
분장한 붉은 뺨 죽을 실컷 먹었네
한 올 한 올 일부러 원망을 짜며
찬 눈물 줄줄 얼굴을 못드네
앞 숲에 까마귀 어지 괴롭게 울어대나
어미를 못 먹여 밤새 슬피 운다네.
그렇지만 황현 문학, 특히 시의 초점은 망해가는 나라를 우려하면서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방향에서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이충무공거북선가>에서,
하늘 개 달을 먹고 바다는 물이 마르고
북두바람은 만리에 불어 부상이 꺾였구나
문경관문은 이미 적에게 무너졌고
수군 10만도 비웃음만 거듭했네
늙은 장수 원균은 한 개 부대자루로
외로운 갑옷은 섬에 사는 하루살이 신세로
온 나라가 한 데 뭉쳐 너와 내가 없으면
작은 배 일지라도 어찌 왜군이 넘볼 것인가
전라좌수영 남문이 활짝 열리니
둥둥 북치며 거북선이 출동하네
거북 같으나 거북이 아니고 배 같으나 배가 아니니
판옥이 높아서 고래가 물 뿜는 것 같은 소리가 나네
...................
누가 능히 바다를 가로질러 싸웠던가
고래를 끊고 악어를 벤 칼날 이지러지지 않았는데
이백년 이래로 이 땅이 봉우리 터지듯 열리니
화륜선 동분서주 불빛이 해를 가렸네
편안한 양떼들 세상에 호랑이가 들어와 땅을 흔들고
화기에 하늘을 찌르며 살기를 발하네
구천에 계신 충무공 모실 수만 있다면
주머니엔 응당 기발한 꾀를 갖추고 있을 텐데
창의적인 지혜가 거북선과 같다면 이기게 될 것이고
왜인들은 살려달라 하고 양인들은 멸했을 것인데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승려들의 애국운동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1896년 황현은 임진왜란 시 승병으로 의병활동에 적극 앞장섰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영규대사를 모신 표충사를 찾아보고 자신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라에선 부처를 섬기지 않았어도
옛적에 없던 사람 얻을 수 있었구나
한방에 모신 세분의 스승과 제자는
불가의 대장부로다
바람부는 처마끝에 흰 박쥐 날고
양 벽에 괴이한 소나무 여위어 있구나
눈물 뿌리며 가을 산 밖을 나서니
참으로 부끄럽구나 썩은 선비여
그는 유자임에도 승려보다 못한 자신의 현실을 자조하였다. 또한 1898년에는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추모하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풍천나루 물은 오히려 향기로와
내 잠깐 눈썹을 씻고 의랑에게 절하노라
아름다운 마음으로 능히 적을 죽임은 어떤 연유인고
거적과 다듬이 돌로 이미 스스로 일을 별렸구나
장계의 노인들은 자기 고을 출신임을 자랑하고
촉석루 단청은 나라의 아까운 죽음 제사하네
목릉(穆陵)시절 더듬어 생각하면 인물이 많던 때라
기적(妓籍)조차도 천추에 한 빛을 발하네
한편 서양 문화가 물밀 듯 들어오는 시점에 생활하던 황현은 학문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즉, “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그 타고난 재주에 따라 자신이 처한 시대의 글을 쓸 뿐이니, 반드시 모두가 옛 것을 본받을 필요는 없다. 비록 옛 것을 본받는 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각자 자기의 재주에 따라 비슷해 질 뿐이니, 굳이 능력도 없는 것을 강요해서는 안될 것이니, 그러다가는 한갓 겉껍질이나 벗기고, 그림자나 모뜨는 것이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즐겨 남의 노예가 될 다름이다”라 하여 기존의 학문을 맹목적으로 모방하여 따를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견지한 그는 40세 전후인 1894년 경부터 서양서적을 사 보기 시작하였다. 황현은 [養英學校記]에서 신학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가 있다면 절로 망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고, 백성이 있다면 절로 없어지도록 버려둘 수도 없다. 오직 마땅히 분발하여 힘을 다해 대적하여 약육강식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뒤라야 가히 사람이라고 천하에 외칠만하다. 그 방법은 진실로 무엇인가? 그들의 부강(富强)을 본받을 수밖에 없고, 부강해지려면 그 학문을 본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민중의 변혁운동인 동학과 농민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또한 개화파들의 서구지향적 입장에 대해서도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시하였다. 먼저 동학에 대해 그는,
“동학의 학문은 사람의 도리를 말했으니 그 명목을 말하자면 도학이지만 그 실상을 캐고 보면 역적이다. 장차 역적의 일을 행하려 하면서 감히 동학의 칭호를 빌려 양민 속에 두세명의 우두머리가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내어, 무지한 사람들을 속여 말하기를 도학이 여기 있다 하니, 선각이 아니면 어찌 여기에 물들지 않겠는가”라 하여 백성들을 속이는 ‘혹세무민’의 궤변으로 평가하였다. 또한 “김옥균, 박영효 등이 서양과 교통하면서 남의 나라의 부강한 것을 사모하고 본국의 제도를 협소하게 여겨 서로가 의논하고 드디어 역모가 싹트기 시작했다”라 하여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도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그는 개화당을 ‘적신(賊臣)’으로 규정하였다.
4.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국지사를 애도하다
황현은 1902년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로 다시 이주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직후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 관리들이 잇달아 자결하자 그는 <팔애시(八哀詩)>를 지어 이들을 추모하였다. 조병세에 관해서는,
대신이 국난에 죽는 것은
여러 벼슬어치들 죽음과는 다르네
큰 소리내며 지축을 흔드니
산악이 무너지는 것 같아라
...................
인생은 늦은 절개를 중히 여기고
수립하는 일은 진실로 어렵고 삼가야 한다
낙락장송은 오래된 돌무더기에서
송진 향기 천년을 가리라
또한 민영환에 대해서는
외척이라 작게 볼 것도 아니네
민씨 집안에서 이 사람이 나왔으니
큰 소리 한번 내어 오랑캐족 뒤흔들더니
부덕한 왕비까지 용서받은 것이네
소년시절 귀하게 자라서
반드시 잘못이 없지 않겠지만
....................
비분강개한 민영환 시종무관장이여
그대 어찌 옛사람만 못 하겠는가
종묘사직 좀 더 지탱했고
그에 의지하여 나라의 운명도 점칠 수 있었네
1906년 작성한 다른 시에서는 일제의 앞잡이가 된 친일인사들이 준동하는 모습을 풍자하였다. 반면 같은 해 민영환을 추모하는 <혈죽(血竹)>이라는 시를 지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민영환의 숭고한 생애와 혈죽으로 환생하는 모습을 표현하면서 후손들에게 나라사랑할 것을 강조하였다.
5. 의병전쟁을 크게 평가하다
황현은 을사조약 이후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에 대해서도 여러 편의 시를 써서 그들의 구국투쟁과 장엄한 순국을 기렸다. 그중 자신의 거주지인 지리산 일대 구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전사한 의병장 고광순에 대해서 쓴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천 봉우리 연곡사 골짜기는 울창한데
이름없는 백성들 나라를 위해 죽어갔네
전마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있고
신오는 가지런히 나무 그늘아래 날개치네
우리들 문자 끝내 무엇에 쓰일까
명망있는 가문의 명성을 당할 수가 없구나
가을바람 향해 홀로 뜨거운 눈물 흘리는데
새 무덤 우뚝한 곁에 들국화 피었구나.
그는 의병들의 항쟁을 크게 평가하여 자신의 매천야록에 ‘의보(義報)’란을 따로 설정하여 그 활동을 상세히 기재하였다.
6. 죽음으로 ‘한일합방’에 반대하다
이와 함께 황현은 신학문을 배워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향리의 뜻있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하여 1907년부터 1908년에 걸쳐 의연금을 모집하여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설립한 적도 있었다. 이후 중국에 망명했던 친구 김택영이 잠시 서울에 돌아오자 그를 만나기 위해 1909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입도(入都)>라는 시에서 망해가는 나라의 현실을 표현하였다.
남산에 올라 한 번 굽어 본 서울 땅
보는 것마다 더욱 처량하고 혼미해라
큰 거리는 수레바퀴로 가을 먼지만 그득하고
두 대궐은 침침해서 대낮도 짧은 듯하다
폐백으로 맹세했던 벼슬아치들 잘 못 되어가고
서울거리 탈이 없지만 판국이 벌써 글렀구나
예전에 망한 나라가 다 이 모양이었던가
망한 것이 분명하니 슬플 수도 없구나.
시골에서 올라온 촌부의 입장에서는 화려한 서울로 보이겠지만 그 뒷모습에는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는 과정이 보였기에, 황현은 이에 대한 두려움을 표시하였다. 그는 죽음으로서 시대의 아픔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동생 황원(黃瑗)에게 한 말>에서 “세상 꼴이 이와 같으니 선비라면 진실로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만일 오늘 안 죽는다면 장차 반드시 날로 새록새록 들리는 소리마다 비위에 거슬려 못 견뎌서 말라빠지게 될 것이니 말라빠져서 죽느니보다는 죽음을 앞당겨 편안함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라 하여 이미 자신이 순국을 결심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그는 더 이상 국권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그가 우려한 바대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맞게 되었다. 그는 9월 8일 절명시와 유서를 쓰기 시작하였고, 9일 소주에 아편을 타서 마시고 다음날인 10일 사망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황현은 <자식들에서 남기는 글>에서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나는 위로는 황천(皇天)이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아름다움을 저 바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 바리지 않는다”라 하였다. 결국 황현은 다음과 같은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난리 통에 어느새 머리만 희어졌구나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하였건만 그러질 못하였네
하지만 오늘만은 진정 어쩔 수가 없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득한 하늘을 비추는구나.
요사한 기운 뒤덮어 천제성(天帝星)도 자리를 옮기니
구중궁궐 침침해라 낮 누수(漏水)소리만 길고나
상감 조서(詔書) 이제부턴 다시 없을 테지
아름다운 한 장 글에 눈물만 하염없구나.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악 해수 다 찡기는 듯
무궁화 삼천리가 이미 영락되다니
가을 밤 등불아래 책을 덮고서 옛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승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정히 어렵구나.
일찍이 조정을 버틸만한 하찮은 공도 없었으니
그저 내 마음 차마 말 수 없어 죽을 뿐 충성하려는 건 아니라
기껏 겨우 윤곡(尹穀)을 뒤따름에 그칠 뿐
당시 진동(陳東)의 뒤를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황현의 시에서 언급한 윤곡은 몽고 침입 때 자결한 사람이고, 진동은 참형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무장투쟁 내지 항거 등 적극적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자결일하는 소극적인 형태로 스스로 죽어감을 아쉬어 하였던 것이다.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은 다음과 같은 시로서 황현의 자결을 애도하였다.
의를 이룸이 예로부터 전공보다 높거니와
이 시(詩)야말로 겨레의 충성심을 깨우쳤다네
과연 벌족들은 너무도 잠잠한데
한 포의(布衣) 마침내 해동(海東) 이름 드높였네
창강 김택영은 황현을 평하기를 “생김새는 못났어도 그 기상은 항직(抗直)하고 그 시력은 흐릿해도 그 속마음은 통랑(通朗)하다”고 하였고, 동생 황원은 “생김새가 깔끔하고 매서워 가을 매가 솟구칠 듯 서 있는 것 같고, 이마는 훤칠 윤기가 돌고, 눈썹은 성글며 목소리는 맑고도 쩌렁쩌렁하고, 시력은 근시에 오른 쪽은 사팔이고 콧마루는 오뚝하고 귓불은 쳐졌고, 이는 쥐이요 입술은 검푸르고 수염의 길이는 두어 치다”고 그를 묘사하였다.
황 현
서 찰
절명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