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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당신은 택함 받은 한 사람입니다.
열왕기상17:8-16
오늘 본문 말씀은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엘리야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심판을 내리십니다.
풍요의 신이라고 믿었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결과가 결코 풍요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선언으로 비가 오지 않자 이스라엘에는 큰 혼란이 일어납니다.
가뭄의 어려움은 가뭄을 선포한 엘리야에게도 직접적으로 다가오게 되는데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보호하십니다.
먼저,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으라고 말씀하시고 까마귀들을 통하여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가져오게 합니다.
얼마 후 그 시내가 마르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지내라고 말씀합니다.
그곳에 사는 한 과부를 통하여 너를 먹이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 말씀을 따라 사르밧으로 가서 과부를 만나 그 집에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굶주림 없이 생활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가루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루나 기름은 먹으면 먹을수록 양이 줄어들어야 합니다.
먹은 만큼 채우지 않으면 점차로 적어지고 나중에는 없어져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먹어도 줄어들지 않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채웠기 때문입니다.
누가 채웠을까요? 하나님이 채우셨습니다.
매일 매일 세 사람이 먹은 만큼만 채우셔서 다음날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매일같이 그 가정을 살피셨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사렛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영접하지 않자 주님께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한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지 않고 이방 사람에게 보내서 엘리야를 공궤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치욕적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보다 이방 사람을 더 사랑했다는 뜻이니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뭄에 고생하고 있는 그 많은 사람 중에 사르밧 과부를 택하였을까?
왜 이스라엘 백성도 아닌 이방사람을 택하여 엘리야를 공궤하게 하시고 가뭄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게 하셨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하신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과부와 고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과부를 선택하셨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러나 그 때에 과부가 이 사람밖에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수많은 과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부로서 어렵게 살아가기 때문에 선택받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그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셨습니다.”(엡1:4, 표준새번역)
사르밧 과부가 택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녀도 알지 못합니다.
과부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섬기며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자칫 이 은혜를 가볍게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이 택함 받은 은혜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놀라운 은혜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까? 우리보다 더 훌륭하고 잘 나고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 한 사람이 택함 받아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기고 구원받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은혜는 어떤 것으로도 손상되거나 비하되거나 가볍게 여겨질 수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택함 받고 구원받은 은혜를 가볍게 생각하고 이것은 누구나 다 받은 것이 아니냐? 당연한 것 아니냐? 이것도 물론 고맙지만
이것 외에 세상의 것을 더 주셔야 그것이 축복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세상의 것이 부족해도 이 은혜만 있으면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바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이 은혜가 손상당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찬송과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그 사랑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엘리야는 말씀대로 160킬로미터나 떨어져있는 사르밧으로 갑니다.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르자 나뭇가지를 줍는 한 여인을 보게 되는데 그 여인을 불러 물을 조금 달라고 합니다.
나그네에게 물을 주는 것은 당연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뭄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물을 달라는 것조차 조금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기꺼이 물을 가지러 갑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용기를 내어 떡도 조금 갖다 달라는 한 가지 부탁을 더 합니다.
처음 보는 나그네가 이런 요구를 하자 여인도 기가 막혔는지 자신의 사정을 솔직하게 얘기합니다.
‘우리 집에는 가루 조금과 떡을 만들 기름 조금밖에 없습니다.’
‘이제 나뭇가지를 주어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을 날만 기다리려고 합니다.’
‘그 마지막 남은 음식을 당신이 지금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얼마든지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이것이 가당키나 한 말이냐? 고 따질 수 있었지만 그 대신에 솔직하게 자신의 형편을 이야기합니다.
그 말을 듣고 엘리야는 ‘당신의 말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떡을 구워서 먼저 나에게 가져오시고 그 후에 당신이 드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지면에 비를 내리실 때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입니다.’ 합니다.
물론 그 여인은 그 말을 믿고 엘리야의 말에 순종합니다.
그 순종으로 여인과 아들은 가뭄이 끝날 때까지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엘리야는 비가 내리지 않게 하시는 분도, 비를 내리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시돈은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고국입니다.
그곳에서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를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에게 전파하였습니다.
그 신은 풍요의 신으로 그들이 비를 내려야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바알과 아세라 신의 본거지에 깊숙이 들어와 바알과 아세리가 비를 내리고 풍요를 주는 신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다른 곳은 몰라도 시돈 지역은 가뭄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땅도 지배하지 못하고 자기 백성도 지키지 못하는 그 신은 진짜 신이 아닙니다. 가짜신이요 우상에 불과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생사를 주관하시는 참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에 공감을 했는지 이 여인은 엘리야의 말에 순종을 합니다.
떡을 만들어 먼저 엘리야를 대접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들 녀석이 어떤 표정을 했을까? 굉장히 궁금합니다.
저 떡은 내가 먹어야 할 마지막 떡인데 저 떡을 유대 사람에게 주다니 엄마가 너무 굶더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가?
그런데 여러분 엘리야에게 떡을 구워주고 가루 통을 보니 가루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기름병에 기름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엄마와 아들이 떡을 만들어 먹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이런 일은 계속됩니다.
이 여인이 이런 일을 하기까지는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마지막 떡을 어떻게 이방 나그네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은 혹 굶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아들은 어떻게 굶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여인은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1. 엘리야 선지자는 그 여인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믿음의 행동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는 두려움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하다가 큰일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야곱이 형을 피하여 외삼촌 집으로 가는 동안 광야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그 때 상황을 한 마디로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잤다고 표현합니다.
딱딱한 돌베개 그것은 야곱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이 밤을 무사히 잘 지낼 수 있을까? 머나 먼 외삼촌 집에 잘 도착할 수 있을까?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돌베개를 베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야곱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지키고 이곳에 돌아오기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설령 한다고 해도 그 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실 뿐 아니라 그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고 그런 능력을 갖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용기를 갖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2. 엘리야는 또한 먼저 나에게 떡을 가져오라고 말씀합니다.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 말은 엘리야의 입장에서도 정말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벼룩의 간을 빼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 여인에게 마지막 남은 음식을 나에게 달라고 하는 말이 차마 어떻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굶으면 굶었지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엘리야는 기꺼이 이 어려운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외에도 성경은 온통 먼저 나를 위하여 살고, 나에게 먼저 드리고, 나를 우선하여 살고, 나를 위하여 충성하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때로는 이런 말씀이 불합리하게 보이기도 하고 이런 말씀에 화가 치밀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아들을 나에게 바치라고 하느냐? 도저히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말씀은 한결같이 그 말씀을 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의 형편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죽이고 자신만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어려운 말을 꺼낸 이유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방법이요 법칙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것보다 우선하실 분이시고 그 분을 위해서라면 다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 삶에 최고가 되어야 하고 목적이 되어야 하고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희생시키고 손해보고 망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를 잘 되고 건강하게 하고 복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고 사르밧 과부가 복을 받았고 수많은 성도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3. 그러면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주십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먼저 엘리야를 공궤한 이 여인은 그 험한 가뭄의 여정을 잘 이기며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어떻게 살까? 걱정하지 마시고 드리시기 바랍니다.
물질이나 시간이나 재능이나 먼저 하나님께 드리시고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못사는 게 아니라 잘 살게 됩니다.
이웃을 위해 특별히 연약한 자를 위해 나눔의 삶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나눔의 삶을 산다고 부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게 나누는 삶은 끊어지지 않는 축복, 다함이 없는 축복, 더 풍요로운 축복을 가져다 줄 줄 믿습니다.
(2024.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