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를 개업하고 삼십년이 넘게 감옥을 드나들었다. 백은 흑과의 대비를 통해 더욱 하얗듯 죄수들의 감옥생활을 지켜보면서 일상의 평범한 생활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기도 했다.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로 유명한 도종환씨는 감옥에 있을 때 그렇게 시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의 감옥은 집필이 금지되어 있었다. 당연히 필기도구도 없었다. 어느 날 시인은 감옥안의 운동장에서 누군가 슬쩍 던져주는 볼펜심 한 토막을 받았다. 그에게 그 물건은 환희였다. 그는 다음날부터 책장들의 여백에 시를 썼다. 그가 시를 쓴다는 것은 감옥 안에서도 살아있음이라고 내게 말했었다. 나는 산책을 하면서 커피숍이나 도서실에서 노트북을 앞에 놓고 글을 쓰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그들은 일상의 작은행복을 알까?
집필이 금지되던 감옥도 요즈음은 그 안에서 공책을 팔고 볼펜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변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경전을 필사해 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감옥과 죄수는 내게 행복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기도 했다. 어느 날 이십여년 감옥생활 중인 사람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감옥 철창으로 새벽 여명이 물들고 저녁노을이 지고 별이 뜨는 걸 볼 수 있어요. 더러 새가 날아와 앉았다 가기도 하죠.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이면 교도소 담 밑을 잡초라도 보면서 걷고 싶어져요. 바로 앞에 비가 촉촉한 흙을 보면서도 걸을 수 없는 게 이 감옥생활인 걸 알았어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산책을 하다가 은은한 향기가 흐르는 오후의 커피점에서 즐기는 휴식이 행복임을 깨달았다. 감옥 안에서 조폭 두목을 만난 적이 있다. 세상에 있을 때 밤의 대통령인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는 호텔과 룸쌀롱과 오락실을 경영하면서 수많은 조직원들을 부리고 있었다. 그가 최고급 외제승용차를 타고 나타나면 검은 양복을 입은 부하들이 허리를 굽히고 인사를 했었다. 그러나 감옥안에 있는 그의 모습은 달랐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예전에 내가 소년범으로 갇혔을 때는 없었는데 이제는 감방에도 텔레비전이 있어요. 채널이 하나밖에 없는데 엊그제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드라마를 보니까 정말 재미있더라구요. 내 아이도 잘 키워야겠더라구요. 그리고 추미애 장관이 잘한 게 있어요. 감방마다 싱크대 한토막을 놔주었는데 우리는 그걸 추미애싱크대라고 해요. 전에는 화장실 변기에서 식판을 닦았거든요.”
드라마를 통해 가정의 잔잔한 행복이 그의 마음에 스며든 것 같았다. 그리고 싱크대 한 토막이 그렇게 위력이 발휘하는지 몰랐다. 박근혜 대통령의 구속과 함께 내가 아는 국정원장이 구속됐다. 감옥에서 만난 나이 팔십이 넘은 국정원장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딱딱한 바닥에 누웠다가 일어나거나 앉아있을 때 나 같은 노인은 정말 힘들어요. 녹슨 부품 같은 온몸의 뼈마디가 튀어 나가는 것 같아요. 의자가 있으면 정말 좋겠어요”
커다란 방에서 회전의자에 앉아있던 그는 딱딱한 의자가 소원으로 바뀌었다. 나이 칠십이 넘은 박근혜 대통령도 의자를 소망했다. 박근혜대통령 밑에 있던 황교안 총리는 규칙상 의자를 줄 수 없다고 답변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백담사에 유배되어 있을 때였다. 그는 네달 만에 얻은 의자를 절간 방의 벽 앞에 놓고 찾아간 변호사에게 자랑했었다. 의자가 그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고. 변호사를 시작하고 지난 삼십여년 동안 감옥이 조금씩 개량되는 모습을 보아왔다. 나는 그 안에서 사람들의 영혼도 바뀌면 좋을텐데 하는 마음이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감옥을 자조적으로 ‘범죄대학’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국립호텔이라고도 했다. 그 안에서 내가 만났던 한 구급 교도관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교도소에서 교정교화라고 말은 하지만 웃겨요. 제 부모나 선생님 말도 판검사 말도 듣지 않는 놈들이 우리 교도관들 말을 듣겠어요? 범죄자의 기본속성은 지독한 이기주의자예요. 자기 애인 선물 주려고 남을 죽이니까요. 여기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이기주의적일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교도관을 매수해서 자기 혼자만 편하게 지내려고 해요.”
그의 말에 나는 동감한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제가 있는 서울구치소는 많이 배웠다는 높은 사람들이 수시로 들어와요. 그분들 보면 감옥에 와서도 계속 높아요. 나보고 ‘어이 친구’라고도 하고 ‘어이 간수 이리와 봐’하기도 해요. 그럴 때면 정말 기분이 나쁘죠.”
현대의 감옥은 수도원의 한 기도실을 상정하고 만들었다고 들었다. 나는 그곳이 수도원같이 경건한 곳으로 개량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변호비가 없다는 재소자들에게 나는 돈 대신 공책에 성경 속의 시편 23장을 천번써서 보내라고 하기도 했다. 그걸 쓰면서 그의 영혼에 성령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내게 말한 구급교도관이 덧붙인 이런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교도관이 전국에 일만이천명인데 한 사람이 재소자 한 명만 따뜻하게 해 줘도 어마어마한 결과가 나올 것 같기는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