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못 이야기
시티투어로 중국인 한 패가 수성못에 내렸다. 무엇을 보려고 왜 여기에 내렸는지는 몰라도 관광 온 이들은 못가에 설치한 운동기구를 이것저것 만지다가 가이드한테로 몰려들었다. 오늘 따라 못 가운데 설치한 분수대도 쉬고 오리 배들도 선착장에 매여 한척도 뜨지 않았다. 버스는 가버리고, 괜히 내렸다는 표정이 역역하다. 시티투어는 차편만 제공하는지 홍보용 팸플릿을 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가이드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성못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통역할 수 있다 하길 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수성구 주민으로 여러분을 만나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나도 중국북경에서 우루무치까지 이르는 실크로드와 서안에서 호도협까지의 차마고도와 우루무치에서 파미르 고원을 거쳐 타클라마칸사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이어 이 앞에 못은 지역민 대대로 삶의 터전으로 저기 절편하게 늘어선 건물들이 들어선 자리가 50년전 만 하더라도 전부가 농지였다. 그래서 이 저수지가 가뭄과 홍수를 감당했다는 말에 일행들은 뜨악한 표정이다
이 못은 일제 때 일본인 水崎林太郞(미즈사 카린타로)은 대구에 정착하여 화훼농장을 운영하였다. 그때 저 산 밑을 따라 흐르는 냇물(신천)이 상수도로 이용되자 냇물은 말라 그 아래 농토는 가뭄으로 농사를 제대로 지울 수 없게 되자 미즈사카린타로는 수리조합을 신설하고 일본인 경북도지사를 찾아 수성들판에 작은 못을 넓혀 관개용수로 쓰면 가뭄과 홍수를 피할 것이라 충언했지만 경북지사가 거절하자 미즈사카린타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로 밀어붙였다.
또한 그는 총독부를 찾아가서 수차례 설득으로 공사비를 지원 받아 1924년9월27일 착공하여 1927년4월24일 축조 공사를 완공했다. 1939년12월까지 관리하다 임종을 맞자 ‘자신이 죽으면 못이 보이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에 따라 저쪽 산언덕에 안장되었다.
지금도 매년 그 후손들이 묘역을 찾아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이 묘역은 대구 유일의 일본인 묘이다.
묘 옆 현창비에 당시 미즈사카와 친분이 있었던 서수인씨 아들인 서창교씨가 1999년에 헌시한 글은 이러하다
月日は流れ
世は變るこも
永遠に潤えよ
愛しの池よ
짧은 생각으로는 이런 내용이 아니었나 싶다
세월은 흘러
세상은 변해도
영원히 윤택할
사랑스런 못이여
당시 공사비 지원은 짐작 컨데 총독부는 공사 후 수세로 받으면 이익이 창출하리라 생각하고 수판알을 튕겼을 것이고 나중에 곡물 생산은 일본으로 가져 갈 속셈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 된다.
어쨌든 축조 당시의 궁핍한 조선인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한 셈이고 그 후 가뭄이나 홍수에도 걱정 없이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식민지 백성의 입장에서도 고마운 일이고 오늘도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휴식처와 건강한 삶을 제공한 셈이다. 재미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내 이야기에 잠간 쉬고는 다음 일정에서 유익한 관광이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헤어졌다.
언젠가 박정희대통령이 대구를 순시하고 수성호텔로 오면서 이 수성 들에 도시계획으로 들안 길을 내자 저 귀한 논밭에 하고 주위의 사람들을 나무랐다는 일화를 생각해 보면서 저쪽 광장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에 ‘빼앗긴 들’이란 시어는 아마 수성벌이 아닐까 하고 지레 짐작을 해본다. 근래에 민족시인 이상화의 흉상이 제막되어 시비의 담긴 깊숙한 뜻을 샹샹해 봄도 좋을듯하다
수성못은 옛날과 다르게 정비되어 오는 이들에게 맞고 있지만 배롱나무와 연리지는 몰라서 외면하고 있다. 연리지(連理枝)는 한 나무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서 하나로 이어진 가지로 사랑의 잉태를 말한다 하여 청춘남녀들이 연리지를 보면 짝을 이루어 백년해로 한다는 말이다. 못 주위에 연리지 배롱나무가 있지만 찾기가 쉽지 않다.
6월부터 수성못은 북쪽 못둑의 배롱나무 꽃으로 절정을 이룬다. 배롱나무를 백일홍나무라 한다. 붉은 꽃이 100일 동안 핀다는 데서 이른 말이지만 붉은 꽃은 옛날부터 단심(丹心)을 상징한다 해서 예부터 양반 댁이나 유생들이 공부한 서원에서 심어 그 뜻을 숭상도록 하였다. 배롱나무에는 껍질이 약해 속살이 들어나듯 청렴하고 청백하다는 뜻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랑나무 연리지에는 표지판이 있지만 배롱나무 연리지는 알려지지 않아 나 혼자만 오가며 지내다니기가 아깝다.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은 것이 세상이치다. 못둑의 배롱나무연리지는 언제쯤 우리들의 사랑을 가늠하고 알려질까? 관심들을 갖고 찾아들 보았으면 한다.
동쪽 수변 데크 쪽은 잉어 때들이 장관이다. 간혹 심성이 착한 이들이 건빵이나 과자 부스러기를 가져다주어 인기척만 나면 잉어 떼들은 먹이를 줄까하고 수변가로 모여든다. 일본 관광지나 남원 광한루에서처럼 잉어들에게 던져줄 먹이를 파는 무인판매대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텐데,
한 봉지에 1.2백 원 하면 수성못을 찾는 이들에게 또 다른 재미도 즐기고 잉어도 좋을 텐데 말이다.
언제쯤 내 생각이 희망처럼 살아날까 활기찬 잉어들이 부럽다.
언제 적 왕버들가 수변에서 트럼펫을 불고 있는 한 중늙은이에게 어느 산책객이 아침부터 시끄럽다고 짜증을 부리자 그날로부터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못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연주자의 연주소리도 그립다.
이 근처에서 건너편 대덕산 산등성이를 바라보면 녹색 숲 속 사이에서 낙타가 금방이라도 나올 듯 하고, 어찌 보면 공작이 꽁지깃 한 부분을 끌고 숲속을 헤집고 나올 형상처럼 보이기도 하고, 산돼지를 조망할 수 있어 보는 재미가 솔솔 하다.
이참에 산 밑 식당 뒤, 수성못을 축조한 水崎林太郞 미즈사카 린타로 묘역을 찾아 그분의 참뜻을 기리는 여유도 권하고 싶다. 일본인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