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32
4월19일[부활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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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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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cWb3CKUvCA
[수원교구 조윤호 윤호요셉(봉담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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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장 우선적이고 본질적인 대상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이 기술되고 있던 당시, 이미 여러 교회에서 성체성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당시 성체성사에 대한 유다인들의 오해와 반감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은유적인 가르침,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라는 말씀을 완전 엉뚱하게 해석했습니다.
‘내 살’, ‘내 피’란 용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유다인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인육제가 벌어지는가 보다 하고 단정 짓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에게 있어 피는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되는, 엄중하게 금지된 것이었기에, 예수님의 피와 관련된 이 말씀은 그들의 귀를 엄청나게 거슬리게 한 것입니다.
여러 구약 성경의 구절에서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베푸신 복에 따라, 너희가 원하는 대로 어느 성에서든지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와 관련된 선언을 통해 성체성사에 대한 정의와 핵심, 본질과 효과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 말씀 안에 깃든 심오한 뜻, 숨은 뜻, 더 중요한 의미를 간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제정하시려는 성체성사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투덜거린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똑똑한 척 했지만 사실 어리석기 짝이 없었습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갖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데, 익숙하다 보니 전체적인 맥락을 읽어나가는 데 실패했습니다. 작은 것에 연연하다 보니 정작 가장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전혀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생명의 말씀, 구원에로의 초대 말씀조차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 다른 모든 이방인들이 행복한 얼굴로 들어가던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향한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요? 너무 지엽적인 것, 부차적인 것에 몰두한 나머지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대상, 언제나 최우선권을 둬야 하는 하느님, 그분과 주고받는 뜨거운 사랑,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상의 선물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관한 일은 뒷전이고, 별 영양가 없는 대상에 혈안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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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모의 살과 피를 먹지 못하면 패륜아가 된다>
명문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간 뒤 실종된 사건이야기입니다. 엘리엇과 친구들은 영혼 구원이라는 한 가지 목적으로 아우카족 선교를 계획하고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실종되었고 가족들은 이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으나 엘리엇과 친구들은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 끔찍한 비극을 미국 언론은 ‘이 무슨 낭비인가!’(What a waist!)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습니다.
20대에 홀로된 아내들은 풀뿌리 캐 먹는 법이나 도마뱀을 잡아먹는 법 등 정글 생존 훈련을 받았고, 짐 엘리어트의 부인인 엘리자벳 엘리어트는 2년 동안 간호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편을 죽인 아우카족 마을로 들어가 정성껏 그들에게 봉사하였습니다. 아우카족은 남자는 죽여도 여자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기 날 때 아기 받아주고, 감염된 상처를 치료해주며 기생충 약을 주고, 그들에게 새로운 농사법도 가르쳐주었습니다.
추장이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존 엘리어트의 부인 엘리자벳이 대답했습니다. “남편들이 다 하지 못한 말을 전해주려고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그 후 와다니 추장은 그 마을 전부와 함께 세례를 받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된 4명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서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이 귀한 복음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음으로 우리는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벳은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쓴 기자에게 남편이 휘튼대학에서 썼던 일기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지 마라.” “이 쓸모없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 주옵소서. 제 삶을 주의 영광을 위해 태워 주옵소서. 저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이야기는 ‘창끝’이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피 흘림 없는 태어남은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요한 19,37)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으신 것은 당신이 주러 오신 것이 당신의 살과 피라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우리 양식이 되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다는 사실을 믿게 하러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당신을 떠나가도 예수님은 이 말씀을 멈추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당신 죽음 덕분으로 살게 되었음을 믿지 않으면 당신 구원이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가끔 제가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 혼자 큰 줄 알아요!” 그러면 저도 장난으로 “아니, 그럼 더 크게 잡아당겨 주던가?”라고 대꾸합니다. 몸은 밥을 먹으면 크지만, 정신은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성장합니다. 만약 부모가 주는 음식만 먹고 그 안에서 부모의 살과 피를 보지 못하면 그 사람은 성장을 멈춥니다. 어른이 되지 못하여 어른으로 살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런 경우 패륜아가 되기도 합니다. 패륜아들은 음식은 먹었지만, 그 음식 안에 섞인 부모의 살과 피는 먹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체를 영한다고 다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 양식이 하느님의 살과 피임을 믿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패륜아가 될 수 있습니다.
TV 드라마 ‘허준’에 스승 유의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의태는 허준을 만나 자신의 모든 의술을 전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유교 사상 때문에 인체 내부를 공부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유의태는 허준에게 얼음골로 급히 오라는 파발을 띄웠습니다. 스승의 부름을 받고 찾아간 허준 앞에는 왕골자리에 반드시 누운 스승의 주검과 유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의 병을 다루는 자가 신체의 내부를 모르고서는 생명을 구할 수 없으니 비록 병든 몸이나마 제자에게 주니 정진의 계기로 삼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유서 앞에 꿇어앉은 허준은 험난한 의원의 길을 가겠다고 맹세를 하고 나서 스승의 시신을 해부하여 오장육부와 인체 내부를 공부하였습니다. 이처럼 스승의 살신성인 덕택으로 명의가 되어 불후의 명작인 ‘동의보감’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꾸며낸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지 않으면 더는 발전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이를 극복하게 만드는 부모와 같은 스승의 희생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도 부모의 그런 희생 없이는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듯,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그분의 살과 피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변합니다.
우리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나를 위해 나에게 찔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성체를 마치 비타민으로 여기면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나를 살리시기 위해 주신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서, 그리고 모든 성사 안에서 들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나는 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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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책 중에 ‘빙하’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지구에 있는 물을 양의 순서로 보았을 때, 가장 양이 적은 곳은 ‘강’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곳은 ‘호수’라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곳은 ‘지하수’라고 합니다. 가장 많은 양의 물이 있는 곳은 ‘빙하’라고 합니다. 빙하에 있는 물은 지구 전체에 있는 물의 100배가 된다고 합니다. 유고슬라비아의 과학자 밀란코비치는 천체의 관측을 통해서 빙하기를 예측했다고 합니다. 빙하의 원인은 3가지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하나는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궤도가 타원형이라고 합니다. 타원형의 궤도에는 가장 가까운 점과 가장 먼 점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심률이라고 하는데 그 주기가 10만년 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서 태양을 공전한다고 합니다. 지구가 기울어져있지 않고 똑바로 태양을 공전한다면 계절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23.5도로 기울어져있는 지구 자체가 팽이가 회전을 하듯이 자전을 하는데 그 기울기가 4만년을 주기로 1도씩 바뀐다고 합니다. 22도의 기울기가 되었다가, 24.5도의 기울기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세차운동이라고 합니다. 타원형의 궤도, 23.5도 기울어진 지구, 기울어진 지구의 세차운동이 10만년을 주기로 빙하기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지구가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지구는 태양이 없으면 아름다운 별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사악도 죽었고, 야곱도 죽었는데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요?’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도, 살아있는 이도 모두 보살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 자신이 시편에서 말한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이렇게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생물학적인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물리학적인 시간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구라는 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태양이 있기 때문이듯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3걸음 만에 천국으로 갈 수 있었다. 첫 걸음은 좋은 생각, 두 번째 걸음은 좋은 말, 세 번째 걸음은 좋은 행동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좋은 생각’입니다. 백인대장은 좋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오지 않으셔도, 그저 한 말씀만 하면 부하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좋은 생각을 칭찬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좋은 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한 강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좋은 행동’입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여라.’ 율법학자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율법학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생물학적이고, 물리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할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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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52-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다인들은 불쾌하게 여기고 멀리하려 한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당신이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을 알아듣지 못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53절)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함께 모여, 일치된 마음으로 한 덩이의 빵을 나눈다. 이 빵은 불사의 약이다. 이 빵은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예수님께서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0,26) 하신 빵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거룩한 살을 먹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분의 살은 생명인 말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주님의 몸과 피를 받는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다. 참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분의 빵이 주어졌다. 이 빵은 땅에서 생산되는 빵이지만 축성되면 평범한 빵이 아니다. 이는 지상의 것인 동시에 천상의 것인 성체이다. 성체를 영하는 우리의 몸도 썩는 몸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으로 가게 되는 희망을 지닌 몸이 된다.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55절) 참된 양식은 우리를 구원하신 당신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어야 함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다. 말씀이 살이 되시고, 살이 된 말씀을 우리가 받는다면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당연히 머무르신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56절) 하신다. 성체는 참된 살이요 참된 피다. 그것을 먹고 마시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57절) 아드님은 살아 계신 분의 살아 있는 모습이시다. 파견되신 그분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다. 이처럼 우리는 그분의 살로 말미암아 산다. 이분을 우리가 먹으면 생명을 먹는 것이다. 그분이 먹힌다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사십 년간 유지할 수 있게 하였지만, 그분은 끝없는 생명을 약속하신다. 이 생명의 빵을 열심히 영해야 한다. 성체를 통해 하나가 되고 생명을 얻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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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어제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내용이 제시되었다면 오늘은 성찬 전례와 관련된 내용이 제시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두 가지 방식, 곧 말씀과 성체에 대한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생명의 빵’에 대한 담화(복음)와 함께 ‘바오로의 회심’(독서)이 함께 연계됨으로써 ‘만남’에 대한 내용이 부각됩니다.
바오로가 “살기를 내뿜으며” 다마스쿠스에 이르렀을 때 ‘빛 속에서 땅에 엎어진 상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복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살과 피’라는 표현이 절마다 되풀이되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 만남을 불편해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독서에서는 하나니아스가 바오로에 대한 부정적 평판을 언급하며 그를 도와주기를 주저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이 불편해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라고 합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성체를 모시면서 그것이 살아 계신 예수님의 살과 피임을 냄새나 촉감으로 느끼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만나러 오시고 그 만남으로 새로운 힘을 얻으며, 그 동행을 우리 일상의 견고한 본질로 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그분을 만나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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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빵>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3-58)
1) 요한복음에,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말씀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이 중요한 말씀이 왜 공관복음에는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공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카 22,19-20)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당신의 몸’을 받아먹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빵이 내 몸은 아니지만 마치 내 몸을 먹는 것처럼 상징적으로 이 빵을 받아먹어라.” 라는 뜻이 아니라...... ‘피’에 관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1서에 ‘살과 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3-29) 여기서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성체모독죄를 짓는 자’입니다.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성체모독죄를 짓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3) 바오로 사도가 성체모독죄를 경고한 것은, 그 당시에 코린토 신자들이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그러므로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1코린 11,33) 당시에 그곳에서는, 부자들이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시면서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이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부자들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들의 식사를 ‘주님의 만찬’, 또는 ‘아가페 식사’라고 불렀는데,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도 없고, 자비도 없으면서 그것을 ‘사랑의 만찬’이라고 말한 것은 위선이었고 죄였습니다. <결국 ‘아가페 식사’는 얼마 못가서 폐지되었고, 지금의 성체성사와 같은 예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성체성사의 정신은 ‘사랑’과 ‘일치’입니다. 예수님을, 또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은, 주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력을 받아먹는다는 뜻이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은, 이웃과 일치를 이루는 일과 하나가 됨으로써 완성됩니다. 만일에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었다고 말하면서도 이웃과는 일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룬 것이 아니고,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1요한 4,20)
4) “믿는다. 먹는다.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라는 말은 모두 뜻이 같은 말인데, 점점 더 강하게 실생활에 연결해서 표현한 말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지 않고, “나를 믿어라. 나를 먹어라.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라는 말씀만 하셨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상징적인 가르침으로만 생각했을 것이고, 그 가르침은 실제 생활과는 아주 상관없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상징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일이고,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고 ‘삶’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실제로 예수님과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고, 예수님의 생명력을 실제로 받아먹고, 실제로 그 힘으로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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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 만남 등의 단어들은 요한 복음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아냅니다. 생명을 얻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모든 신앙인의 지고지순한 바람이겠지요. 문제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인데, 오늘 복음은 너무나도 쉽게 그 방법에 관하여 이야기해 줍니다.
초대 교회는 성찬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머물 수 있다는 믿음을 다듬어 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 믿음을 미사성제를 통하여 이어 나가고 있지요. 성찬례는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매우 단순한 전례입니다. 그저 먹고 마시는 일이 중심이 된, 너무나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지요. 거창하거나 세련된 예식으로 치장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손쉬운 몸짓들이 성찬례에 녹아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줄곧 예수님의 정체성,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먹고 마시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입니다. 먹을 것을 주면 먹으면 되고, 마실 것을 주면 마시면 될 일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때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느님을 만나고자 신앙생활을 하지만, 무엇을 추구하기에 앞서 우리는 무엇을 배고파하는지, 무엇을 목말라하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찾아 헤매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갑니다. 자신에게 굳이 필요 없는 것조차 끝까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더욱더 많이 채우려 덤비는 오늘의 세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배고픔을 묵상하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배고플 때 모든 음식이 맛있어 보이듯, 우리가 무엇에 정말 배고픈 것인지 살펴보는 일이 그리스도인이 맛볼 참된 양식을 찾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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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사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는데 혹시 못 보셨는지요? 흔히 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해가 서쪽에서 떴다고 이야기하지요. 바로 오늘 독서에서 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자였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몸담은 유다교에서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후 세례를 받고 ‘예수는 주님’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사울 본인으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울의 회개는 세계사를 바꾼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의미심장한 사건이지요.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두 기둥을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망설임 없이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뽑을 것입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는 27권의 신약성경 중에 약 14(13)권이나 되는 책을 집필한 저자이기도 하지요.
그 중에서도 초대 교회를 전 세계로 확장한 일등 공신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바오로 사도를 두고 ‘그리스도교의 발명가’라고 까지 부를 정도였으니 바오로 사도를 초대 교회의 근간을 이룩한 사도라고 보아도 틀림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부르짖은 니체는 사울을 이렇게 변화시킨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몰랐음이 분명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름은 그래서 두 개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다교 신자였던 때 ‘사울’로 불렸고 회심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와서는 ‘바오로’로 불리었지요.
역사를 바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이야기가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 되풀이되어 묘사되고 있습니다. 같은 성경에 세 번씩이나 반복되어 다루어진 것을 보면 이 일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바오로 사도는 너무나 열렬한 유다교 신자였기 때문에 유다교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스테파노가 죽을 때에도 옆에서 찬동하였고, 스테파노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다마스쿠스 쪽으로 도망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잡으러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그의 박해는 유명하여 심지어는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오로의 회심을 옆에서 도왔던 하나니아스라는 사람까지도 바오로의 악명을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사도 9,13)
사울을 찾아가라는 주님의 요청에 하나니아스가 한 대답입니다. 그곳까지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지요.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마스쿠스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수석사제들과 원로들로부터 아주 특별한 위임장을 받고 혈기왕성하게 그들을 잡으러 갑니다.
의기양양하게 길을 가고 있는 바오로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바오로는 너무 놀라서 땅에 엎드러지고 말지요. 그때 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9,4)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 9,5) 깜짝 놀란 바오로가 묻자 그 음성이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이 순간 사울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단 한 번 예수님과 만남으로 유다인으로서 사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 바오로로 탄생이 되지요.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떠날 때의 혈기왕성한 유다인 사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너무나도 놀라서 모든 것을 뉘우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교를 전 세계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회심이 이루어지고 나서 바오로 사도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사울의 변화는 그의 판단력이나 의지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뽑은 이유가 오늘 독서에 나와 있지요.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 9,15-16)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는 데에 가담하고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출발할 때부터 벌써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당신의 일꾼으로 뽑아 놓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충격으로 땅에 엎드려졌던 사울은 즉시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못했지요. 마치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 밤낮을 돌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것 같은 과정을 겪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만나면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사도 9,18) 되지요.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울이 주님께로부터 큰 은총을 받는 장면을 보고 우리는 이제 그가 당장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큰 일을 하고 승승장구하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공동체는 바오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뛰어난 선교사 스테파노를 죽이는 데 찬동하고 조직적으로 자신들을 박해하는데 힘을 쏟던 유다의 열혈 청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면초가에 빠진 바오로사도는 45년경 1차 전도여행을 하기까지 많은 시련과 실패를 체험하면서 성과없는 10여 년을 보내고 고향 타르수스에서 은둔생활을 하기까지 합니다.
실의에 빠져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바오로를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기 위해 파견된 바르나바가 사목자로 부릅니다. 그때야 하느님의 사람으로 쓰기 위해 부르셨지요.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있는 법입니다. 사울의 사람됨과 그 행위를 낱낱이 아시고 그를 바오로로 변화시킨 후에도 주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묵묵히 지켜보시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다른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바오로가 회심하자마자 자신의 경험과 의지만을 믿고 마구 행동했다면 분명히 얼마 안 가서 실패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기의 의지만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힘이 빠져 성령 안에 자신을 도구로 내어 맡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 또한 혈기 왕성하게 자기 민족을 박해하는 이집트 사람을 쳐죽이지만 그의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지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모세는 사십 년 동안을 양치기로 보내야 했습니다. 힘이 다 빠진 모세가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탈출 3,11) 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 하고 끌어내시지요.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나 지식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도구로 내어 맡길 때 풍요로운 결실을 보게 되지요. 또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어 맡긴다고 해서 시련이나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도, 부활을 체험한 열 한 사도에게도, 또 갑작스럽게 회심한 사도 바오로에게도 분명하게 주어진 소명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 복음을 전하는 길은 험난하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주는 길이지요.
복음을 전함으로써 누구보다도 강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던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전하는 일을 사도의 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이 복음 선포의 사명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사명입니다. 이곳에 성당에 세워진 이유도 바로 그것이지요.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며 감사와 찬미로써 모든 봉헌을 마치고 파견될 때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촉구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또다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복음 선포가 바로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고 그것이 가장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독서에서 계속해서 보고 있다시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제일 처음 한 일이 무엇입니까? 목숨을 바쳐가며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부활 대축일을 지내고 부활 시기를 지내는 우리의 첫 번째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는 깨달을 수 있지요.
계속해서 사도들의 발자취를 들려주고 바오로 사도의 회심에 이르기까지 동참하게 한 그 이유는 바로 복음 선포 사명의 중대함을 전해주고, 그 소명의 실천을 우리에게 강조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일은 전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나 막막하고 어려운 일만도 아닙니다. 나 자신을 그리스도의 도구로써 내어드리고 성령께서 나를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도구로 내어놓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인식시키고 파견을 하는데 과연 신자들은 그 사명을 깨닫고 자신을 도구로 내어놓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결실에 연연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신자로서 사명은 수행해야 하지요.
오늘 나가면 아직 주님을 모르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고 말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는 나가자마자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직무유기인 셈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들, 그리고 하느님의 부활 체험을 더 깊이 성장시키는 방법은 복음 선포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고 우리 공동체가 복음적인 공동체로 거듭 성장하려면 복음 선포의 사도로서 내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여 놓아야 합니다. 그때 개인의 부활 체험은 더욱 깊어져 성화되고 공동체는 복음적인 공동체로 한 걸음 더 성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
오늘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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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우리가 식인종이란 말인가?>
사실상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예수님의 폭탄선언이 있었다. 그 구절을 한번 더 읽어보자.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51절) 생명의 빵이 곧 사람이신 예수님의 자기 살이라는 엽기적인 선언이다. 이 선언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 또한 만만치 않다. 이 대목에서 지금까지 유다인들의 반응과 예수께 대한 호칭을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호칭을 보자. 빵의 기적이 있은 다음 날 가파르나움에서 예수를 만난 군중은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25절)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기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으라고 했을 때 그들은 "선생님은 무슨 일(기적)을 하시겠습니까?"(30절)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을 운운하셨을 때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하고 청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다."는 말씀에 못마땅해하며 웅성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서 유다인들의 불만은 '생명의 빵'보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42절) 하며 돌연 예수께 대한 호칭을 바꿨다. 선생님에서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물론 예수께 대한 직접적인 호칭은 아니다.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며 하는 말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서로 따졌다.
이 반응으로 유다인들은 예수로부터 거의 등을 돌렸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전반적으로 어려운 데도 이유가 있지만, 이젠 생명의 빵이 자기 살이라는 말에 유다인들은 거의 구역질이 날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내어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하고 노골적인 반응을 보였다. 성서의 기록에는 없지만 이 구절 다음에 "우리가 무슨 식인종이란 말인가?"라는 한 마디를 덧붙여 우리의 사고 지평을 넓혀보자.
식인종이란 사람을 잡아먹는 풍습이 있는 미개인종을 일컫는 말로서 카니발리즘(cannibalism)을 뜻한다. 우리는 통상 인육을 음식으로 먹는 개화가 덜된 인종들을 식인종이라고 알고 있다. 왜 식인종들은 인육을 음식으로 먹었을까? 일용할 양식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적대자나 원수를 잡아죽인 다음 인육을 취하여 먹음으로써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했던 것일까? 카니발리즘(cannibalism)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인류문화사 계통의 학자들은 오랜 옛날부터 세계 각지에서 이런 풍습이 행해진 것으로 추정한다. 미개한 인종들 사이에서 굶주림이나 복수, 종교의례나 효행 등의 이유에서였다고 하나, 비교적 높은 문화수준을 가진 종족에서도 가끔 제례의식과 관련하여 행해진 흔적이 있다.
카니발리즘은 대략 뉴기니 내륙지방, 서부 및 중앙아프리카,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수마트라의 바타쿠족, 남북아메리카의 여러 부족, 북극지방의 에스키모 등지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지역에 따라서 인육은 굶주림 때문에 실제로 음식이 되기도 하였고(북극지방 에스키모), 식품의 일종으로 간주되어 시장에서 매매되기도 하였으며(바타쿠족), 멜라네시아에서는 동물의 고기와 같이 취급되기도 하였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의례적 살인과 식인은 종종 사술(邪術)이나 요술의 관행과 결부되었고, 병자가 그의 친족에 의하여 잡아먹히는 수도 있었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경우에는 승자가 싸움에서 죽인 자의 살을 베어 승리의 축하잔치에 썼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일부에서는 영혼을 배당받기 위해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고, 그 뼈를 보존하는 풍습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종교· 의례적인 의미에서 사자의 특정 부분 또는 내장 부분을 먹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먹은 사람은 사자의 영혼과 힘을 얻을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 학자들의 통설이다.
결국 카니발리즘은 사자의 영혼(정신)과 힘을 이어받고자 자민(子民) 보호적 차원에서 행해진 종교적 관행이라는 말이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밀림 한 가운데서 맹수나 적대자로부터 부족을 지키던 한 용사가 목숨을 바쳐 죽었을 때, 그의 시체를 둘러싸고 부족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종교적 의례를 거행하였을 것은 매우 있을법한 이야기다.
이 자리에서 다음 용사가 죽은 용사의 인육을 취하여 먹음으로써 그의 부족을 위한 정신과 힘을 이어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이 우리 육신을 위한 양식이 되든, 영혼을 위한 양식이 되든 간에 예수께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주시는 행위는 카니발리즘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다인들의 불평에도 아랑곳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강행된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믿음을 요구하실 뿐 아니라, 더욱 더 강하게 당신 몸을 먹고, 당신 피를 마실 것을 강조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양식이 되는 살뿐 아니라 음료로 자신의 피까지도 내어 주신다.(55절) 이로써 예수께서는 자신의 전부를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예수를(나를) 먹는 사람도 예수의 힘으로 살 것이다.(56절)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사가가 제시하는 성체성사의 설정이다. 공관복음이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 반면(마태 26,26-30; 마르 14,22-25; 루카 22,15-20; 1코린 11,23-26),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자신의 공생활 한 가운데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있어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내어줄 수 있겠는가? 그것도 단순한 육체를 위한 한 끼의 식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영원의 양식으로 말이다.
하느님의 사랑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더라도 육의 식인종이 아니라 사랑의 식인종일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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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6,53~54)
몇 년 전 저는 독일의 유명한 코메디언인 ‘하페 케르켈링’이 쓴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라는 책을 읽고 난 뒤, 한동안 산티아고 순례를 가고 싶은 열망이 강했지만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독서의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사도 바오로의 체험과 겹치면서 ‘길’에 대한 이미지가 아주 강렬하게 제게 다시 다가옵니다. 지금도 하페처럼 수없이 많은 순례객이 의심과 불안 속에 홀로 800km의 고독한 산티아고 길에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이며, 하느님은 참으로 존재하는가? 존재하신다면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라고 질문하면서 길을 걷고 마침내 그 해답을 찾으리라 믿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의 길에서, 인격적인 예수를 만났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윤리적인 회심이나 개종이라는 피상적인 결과보다 개종의 본질적인 주체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생명의 빛이신 그분의 비추심과 아빠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되고,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귀의해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2,20) 하고 고백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성 아오스딩은 “너희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를 찾지 않았을 것이다.”하고 표현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은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51)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6,52) 하고 그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최후 만찬 그리고 부활 이후에 성령을 받고서야 예수님의 이 말씀의 진의를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성령의 도움 없이 어느 누가 이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사람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부활의 시선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6,53~54)라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잖아요.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십자가에 봉헌하심으로써 당신의 몸과 피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음식과 음료로 온전히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부활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단지 먹고 마심으로 끝나지 않고 그 몸과 피를 마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존재와 생명 안에 머물게 하고 동참하도록 하여 당신과 하나가 되도록 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6,57)하고 확약해 주십니다. 여기서 ‘말미암다.’는 것은 ‘원인이나 근거가 되다.’는 뜻이며, 이로써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바로 하느님이시며,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게 당신 파견의 목적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예수님의 참된 생명의 양식이며 음료인 당신의 몸과 피를 모심으로써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통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 또한 우리의 존재 이유이며 존재의 근거가 되는 아빠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고 완성하는 삶과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부활의 삶입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 살지 아니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6,55~57) 하고 말씀하십니다.
다마스커스 여정에서 사울은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9,5)라고 묻자, 주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는 말씀과 그 주님의 이끄심으로 새로운 빛으로. 부활로 인도됩니다. 마침내 진리에 눈멀었던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9,18)라는 기록은, 바로 바오로가 체험한 부활을 암시합니다. 이 만남 체험으로 물과 성령의 세례를 받고 ‘사울’에서 ‘바오로’로 거듭났으며, ‘가던 길을 바꿔 새로운 길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으며, “곧바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9,20) 하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사도 바오로는 한 생을 주님의 증인으로 선택된 삶을 충실히 사셨던 것입니다. 이 체험은 그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고 가르치신 명령을 실행하면서 부활의 증거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주님, 주님은 바로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심을 당신 부활로 확인해 주셨으니 저희 또한 사도 바오로처럼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저희 삶으로 증거하도록 무엇보다 먼저 저희 눈을 가리고 있는 이기심과 교만과 거짓의 비늘을 제거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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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 차에는 스마트폰 자동 충전 장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연결 잭을 꽂지 않아도 충전할 수 있는 위치에 놓아두면 자동으로 충전이 됩니다. 그런데 얼마 전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습니다.
지방에 갈 일이 있었고, 습관적으로 자동 충전 장치에 스마트폰을 위치시켜서 운전 중에 충전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고 스마트폰을 꺼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충전이 하나도 되지 않았고 오히려 거의 방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왜 충전이 안 되었나를 살펴보니, 자동 충전 장치에 이물질이 들어 있었고 이로 인해 접속이 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이 충전 장치의 충전이 시작되면 노란 불이 표시됩니다. 그러나 운전에만 신경 쓰다 보니 이 표시를 확인하지 않았고 또 당연히 충전되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전원과 연결되어야 충전되듯, 우리 역시 주님과 연결되어야 삶 안에서 힘차게 살 수 있음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데 연결을 제대로 하지 않고, 또 막연하게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 미사 빠지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 자기만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 실천에는 인색한 사람,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
신앙인은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입으로만 연결되었다고 말하고 또 막연하게 연결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마트폰도 전원과 연결되지 않으면 방전되어서 사용할 수 없듯이, 자기의 영적인 힘이 모두 빠져나가서 결국 주저앉고 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번 주 복음은 계속해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8)
스스로 빵이 되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었습니다. 방전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충전된 삶을 살면서 힘차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 바로 생명의 빵이신 주님이셨습니다. 문제는 주님과의 연결을 피하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누릴 것에만 신경 쓰면서, 정작 주님께서 원하시고 명령하신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 무거운 십자가라면서 치워달라고 요청해서는 결코 주님과 연결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아마 이런 메시지가 나오지 않을까요?
‘연결 불량.’
주님과의 정확한 연결을 위해 자기가 해야 할 사랑의 삶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연결 불량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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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양가 있는 음식>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정성이 담긴 음식을 사랑으로 먹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고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내가 네 밥이야!’하는 ‘먹힘’으로써 하늘과 소통을 이루어 주셨으니 우리는 감사히 잘 받아먹음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하늘과 소통을 이루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는 하나 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보다 영양가 있는 영원한 생명이신 성체를 모시길 갈망합니다.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그러므로 더 자주 미사참례를 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고 말하지 않고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 “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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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먹으니 먹히다>
요한 6,52-59 (생명의 빵)
그때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먹으니 먹히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밥을 먹으니
밥이 되어
밥으로 먹히다
영을 먹으니
영이 되어
영으로 먹히다
빛을 먹으니
빛이 되어
빛으로 먹히다
선을 먹으니
선이 되어
선으로 먹히다
믿음을 먹으니
믿음이 되어
믿음으로 먹히다
희망을 먹으니
희망이 되어
희망으로 먹히다
사랑을 먹으니
사랑이 되어
사랑으로 먹히다
정의를 먹으니
정의가 되어
정의로 먹히다
진리를 먹으니
진리가 되어
진리로 먹히다
자유를 먹으니
자유가 되어
자유로 먹히다
생명을 먹으니
생명이 되어
생명으로 먹히다
영원을 먹으니
영원이 되어
영원으로 먹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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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 은총 뿐이다-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 117,2ㄱㄴ)
매일 일기쓰듯 하는 강론입니다. 사제생활 초기 40대 강론이 격식을 갖춘 비교적 짧은 간결하고 강렬한 강론이었다면 지금은 이런저런 이야기와 시의 인용으로 자유로워진 강론이니 나이탓이기도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회개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저는 언제나 밤 12-01사이에 기상하면, 만세칠창후 01-04시까지는 맑은 정신으로 그날의 강론을 씁니다. 죽으면 영원한 잠인데 때로는 잠시간이 아깝게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제64주년 4.19 혁명 기념일입니다. 1960년 당시 저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다음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군사혁명으로 일컬어졌고 군사정변으로 옳게 바로잡혀 있음을 봅니다. 혁명중의 혁명이 무혈혁명인 선거혁명이요 가장 좋은 최고의 혁명이 끊임없는 영적혁명, 내적혁명이 회개일 것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죽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할 영적혁명, 회개의 여정입니다.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질병인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도 회개의 은총, 회개의 여정뿐입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회개의 은총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으로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시작됩니다. ‘즐거운 아웃사이더’이자 ‘빠리의 택시 운전사’의 저자였고 대표적 진보운동인, 정치인, 언론인이었던 홍세화씨가 18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향년77세로 별세했으니 이런 죽음 또한 우리에게는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어제 친애하는 사제로부터 ‘잠자는 성 요셉’ 상을 선물받았으니 이 또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꿈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책상위에는 잠자는 성요셉상이 있어, 교황님은 어떤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종이에 써서 성요셉상 밑에 넣어두면 꿈중에 해결해 주신다 합니다. 저는 어제 잠잘 때 이불 속에 넣고 단잠을 잤고 매일 그러하려 합니다.
어제 교황님은 갈멜회 수녀님들을 알현하면서, “관상의 길은 원래 사랑의 길이다. 그길은 우리가 받은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만든다. 그러니 하느님 사랑에 사로잡혀 살도록 하자.” 이 또한 우리의 사랑에 신선한 도전이자 회개의 표징이 되는 말씀입니다. 옛 어른이 말씀도 회개와 더불어 우리를 참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부귀해서 삶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만족하기에 부귀해 질 수 있는 것이다.”-다산
“현명한 사람은 재산이 많으면 그 뜻을 상하게 되고, 어리석은 사람이 재산이 많으면 허물만 더하게 된다.”-한서
새삼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을 통한 겸손과 지혜의 열매가 무지에 대한 최선의 처방임을 깨닫게 됩니다. 회개를 통해 겸손과 지혜의 참삶이 실현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사울의 회심을 전해 줍니다. 늘 읽어도 처음 읽는 듯 사울의 신선한 충격의 회심 은총 사건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후 결정적 순간을 기다려온 주님께서 마침내 목적을 달성하십니다. 무지하고 용감하면, 눈먼 열심에는 답이 없으니 신자들을 박해하던 무지몽매하던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원대한 꿈에는 사도 바오로가 이미 예비되어 있었음을 봅니다. 바오로의 회심이 참으로 극적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 극적 회심 은총의 장면을 사울이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새삼 회개는 주님께서 주도하시는 은총이자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이들 안에 늘 현존하심을 깨닫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가까이 만나는 형제자매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회개로 맑아진 영혼들에게는 형제들 하나하나가 주님의 현존이자 얼굴로 보일 것입니다. 사울 역시 예수님께 보낸 하느님의 선물임이 드러납니다.
여기 어제 필리포스처럼 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나니아스라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니아스에게 안수를 받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다시 보게 되었고 이어 일어나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를 받자 곧장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니 회개의 완성과 더불어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회개로 끝난 사울의 삶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었을 회개의 여정임이 분명합니다.
이런 사울처럼 전격적이고 극적인 회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의 소소한 회개도 있고 이런 회개가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이뤄주는 ‘회개의 시스템’같은 나날의 일과표가 정말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바로 날마다 참여하는 성체성사와 시편성무일도가 회개의 일상화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회개 역시 “회개-훈련-습관”의 도식이 성립됩니다.
자비송의 회개로 시작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과 동시 이뤄지는 은총의 회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에 대한 기막힌 절정의 강론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개신교의 결정적 오류는 파스카의 예수님으로부터 말씀만 남기고, 초대교회부터 면면히 계승되어온 성체(성사)를 빼버릭고 극단으로 치달았다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회개는 물론이요,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이니 회개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에, 사랑에 감격하게 됩니다. 영혼의 궁극의 배고픔고 목마름도 성체성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뿐이요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성체성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듯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니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요 이의 결정적 빛나는 본보기가 오늘 사도행전의 회심자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야 말로 회개의 달인, 회개의 대가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줍니다. 사도 바오로의 감동적인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 1,20-21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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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은총주의자>
저는 가끔 언론의 허풍스러운 표현들에 불쾌할 때가 꽤 있습니다. 왜냐면 ‘세기적인 결혼’이니 ‘세기적인 사건’이니 하는데 별것 아닌 것에 엄청난 의미를 갖다 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울의 전도(轉倒)야말로 이런 표현이 어울리고, 그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해야 마땅한 사건일 겁니다. 세기적 사건 정도를 넘어 ‘전 세기적 사건’ 또는 ‘인류사적 사건’이라고.
그러나 제 생각에 이 표현도 부족합니다. 아니 부족하다기보다 적당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전도, 이 사건은 사울에게 일어난 사건 정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이고 구세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불교적으로 바꿔 얘기하면 돈오(頓悟)라고 할 것입니다. 이는 점수(漸修)와 비교되는 것으로서 점수가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데 비해 단박에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런데 사울의 전도 사건은 이런 돈오 사건이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사울이 고꾸라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고꾸라트리신 것이기 때문이고, 사울이 깨닫게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의 회개를 이야기하면서 주님께서 자기에게 회개를 시작하게 해주셨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회개에 있어서 주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회개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입니다. 사실 스스로 변하는 것은 강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힘이 떨어지면 그 동력도 떨어지겠지요. 그러나 주님의 힘에 의한 변화는 그렇지 않지요. 그 동력이 계속 유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사울이 박해자에서 주님의 그릇이 되고 사도가 된 것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개입과 역사하심으로 된 것이기에 바오로는 그 어떤 사도보다도 강력한 은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그렇습니다. 사울은 주님께서 선택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 사람은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하는데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 선택받았을 뿐 아니라 그릇이 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때 그릇이 크다는 것은 인간적인 의미 이상이지요. 인간적으로 그릇이 크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품이 크다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다시 말해서 꿈과 비전이 크다는 뜻이지만 바오로 사도의 경우는 은총의 그릇이 큰 것이고 고난의 잔이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주겠다.”
결국 주님은 당신을 위해 고난을 많이 받아야 하기에 은총도 많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으면 고난이 많다는 것은 은총도 많이 주신 것이 되는 걸까요?
그렇게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을 텐데 전자는 믿음이 깊은 사람이고 후자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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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대변신의 부활!>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6장 52절에서 5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이제와 영원히 살려면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살과 피가 참된 양식이고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세우신 성체성사의 제정을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매일 드리고 있는 미사가 바로 성체성사 제정의 재현이며, 이 재현을 통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날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오늘 독서(사도 9,20)는 '바오로의 회심 사건'입니다. 바오로의 예전 이름은 사울입니다. 바오로의 1차 선교여행이 시작되면서, 그의 이름이 사울에서 바오로로 바뀝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사울을 부르시어 그를 살리십니다. 그리스도교 박해자에서 이방인 지역의 복음 선포자로 회두시키십니다. 박해자 사울이 주님을 믿는 이들을 잡아들이려고 다마스쿠스로 갔을 때, 사울은 그곳에서 주님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그가 바로 '하나니아스'입니다. 하나니아스가 박해자 사울에게 가기를 주저하자,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
사울은 '하느님의 천사인 하나니아스'의 도움을 받아 세례를 받고, 곧바로 박해자에서 복음 선포자로 대변신합니다. "사울은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9,20)
우리도 성체를 정성껏 받아모시고, 성체의 힘으로 바오로처럼 대변신의 부활을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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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wctDD1iY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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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 55)
자연스러운
강물의
흐름입니다.
하느님 사랑처럼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흐릅니다.
참된 삶을
깨우쳐 주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생명의 길을
안내합니다.
가장 영원한 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살과
피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살과 피로
삶의 지향점이
하느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시는
하느님을 통해
영원한 가치를
만납니다.
영원한 가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동경이
아니라
우리 실생활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과제는 우리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사랑입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인
주님의
살과 피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빛이 됩니다.
생명의 빛은
가장 존귀한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가장 존귀한 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입니다.
생명을
깨우쳐 주시는
생명입니다.
생명의
살과 피는
서로 통하는
참된 사랑의
실현입니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로
깨끗한
본 모습을
되찾게 됩니다.
거품처럼
허황된 양식과
음료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영원한 생명의
가치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와 같이
참된 평화
참된 축복으로
흐릅니다.
넘쳐 흐르는
생명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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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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