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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 10.26 사건,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시해 -
오늘의 역사 이 시간에는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시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알아보겠습니다. 바로 박정희대통령 시해 사건입니다.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 주장이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했습니다. 그럼 사건의 배경과 사건의 순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0·26 사건(十二六事件) 또는 박정희 암살사건(朴正煕暗殺事件)은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살해한 사건이다. 십이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염동진의 아지트가 있던 자리)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의 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사건의 개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전했다.
사건의 진행
김재규는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총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에게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등과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 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저녁 7시 10분경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앞에서 총 점검을 하는 순간 차지철이 나타났으나, 김재규는 총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 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이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갔다가 연회장에 다시 들어온 시점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가 나가 저녁 7시30분에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아래와 같이 말했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다시 돌아와보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사건의 순간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총을 쏘아 차지철의 오른손목을 맞혔고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였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에게 조준했고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계속 저항하는 가운데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되지 않았다. 그때 정전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총을 박선호의 총과 맞바꾸었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심수봉과 신재순이 총에 맞아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 다시 나와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다시 김재규가 들어왔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이를 피한 후 차지철의 폐와 복부를 향해 총을 쏘아 차지철이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어디엔가 숨었다. 김재규는 쓰러져 있는 박정희의 후두부에 총을 쏘았다. 오른쪽 귀 윗부분에 들어간 총알은 지주막을 꿰뚫은 후 박정희의 왼쪽 콧잔등 밑에서 멈추었다. 머리의 총격이 치명상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소리를 듣고 의아하게 여겼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를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 라고 말했다. 박선호의 명령을 받은 경비과장 이기주는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 사살하였고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차지철 역시 확인 사살했다.
김재규의 체포와 사형 집행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김재규를 인계받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이후 김재규는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는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 라는 말을 들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김재규는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에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 당했다.
10.26 사건의 원인
김재규는 10월 유신으로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거사를 7년간 준비해 왔다는 설이 있다. 재판 중 '내 뒤에 미국이 있다'는 말도 했다.
1심 최후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 -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 -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세번째 -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 -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다섯째 -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
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 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대응
한미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류병현 장군은 10월 26일 자정 무렵에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을 찾아와 "박대통령에게 사고가 발생했다" 고 보고했다.
당시 류병현 역시 사태 파악이 안 된 상태였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불가능했다.
글라이스틴은 통신보안이 철저한 전화선을 이용하기 위해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가 워싱턴에 있는 브레진스키와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렸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 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건의 여파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에 가수로서 활동을 금지당해야했고,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갔다.
▶ 2009년 강동림, 동부전선 3중 철책선 절단 후 월북
▶ 2006년 오늘,
박치기왕 김일 선수 사망.
▶ 2005년 고 박정희 전 대통령 제26주기 추도식(국립현충원)
▶ 2005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월드시리즈 우승
▶ 2005년 10.26 국회의원 재선거
▶ 2005년 안중근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서울시교육원 강당)
▶ 2004년 강원도 철원 최전방 철책선 절단 사건 발생
▶ 2002년 살인용의자 조모씨 검찰조사받다 사망
▶ 2001년 마이크로소프트(MS), 새로운 운영체제 `윈도XP` 출시
▶ 2001년 미국, 차세대 전투기에 록히드 마틴의 'X-35' 선정
▶ 2001년 경복궁 흥례문 복원
2001년 10월 26일 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리고 홍례문(가운데)이 복원됨으로써 조선 시대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성큼 제 모습에 대가갔다. 근정전(맨 앞)과 광화문(맨 뒤)의 모습.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으로 1916년 경복궁에서 철거된 흥례문(興禮門)이 2001년 10월 26일 오후 2시30분 낙성식(落成式·건축물이 완공됐음을 기념하는 의식)을 통해 만 85년 만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경복궁 복원 사업의 하나로, 지난 1996년 흥례문 권역 복원 설계 용역을 시작한 지 6년 만의 일이었다.
총예산 233억원, 대목수 신응수씨를 비롯해 연인원 2만9093명이 참여한 대역사(大役事)인 흥례문 권역 복원 공사를 통해 흥례문 뿐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유화문(維和門·경복궁 서쪽의 관청 건물로 통하는 문), 기별청(奇別廳·승림원 등에서 처리한 일을 아침에 적어서 반포하는 일을 맡던 관청), 그리고 궁궐 서북쪽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만든 금천(禁川)과 그 위의 영제교(永濟橋)도 다시 세워졌다.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지 3년 만인 1394년 창건을 시작, 이듬해 완성됐다.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칸으로 크지 않았고, 조선왕조실록은 정도전이 `경복궁`이란 명칭을 지었다고 기록한다.
경복궁은 창건이래 무수한 수난을 겪는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전소돼기도 했고, 단종이 쫓겨난 적도 있었고, 중종 때는 조광조가 사정전 뜰에서 사약을 받기도 했다. 경복궁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된 이후에도 불운이 끊이지 않았다. 1895년 궁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됐고,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 주인없는 궁전으로 내버려졌다.
▶ 1998년 국제지뢰제거회의가 2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개막(~28일)
▶ 1996년 김경호 일가 귀순
▶ 1983년 서울시교육위 외국어고등학교 첫선
▶ 1982년 이승복 기념관 개관
▶ 1982년 유엔총회, 이스라엘 축출안 부결
▶ 1979년 삽교천 방조제 준공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해 배수갑문 스위치를 누르는 모습. 고인의 생애 마지막 공식행사 사진이다.
▶ 1979년 세계보건기구(WHO), 천연두 근절 선언
누구일까요?
일왕히로히토에게 하사받은 군도를 꽉 쥐고!
▶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 1977년 한국-요르단, 문화협정 체결
▶ 1977년 미국-소련, 군사교관 교환
▶ 1975년 사다트 이집트대통령 미국 첫 방문
▶ 1974년 극작가 박진 사망
▶ 1963년 흐루시초프 달 정복경쟁 폐기를 선언
▶ 1962년 인도 대통령, 중공의 국경선 공격으로 비상사태령 공포
▶ 1959년 소련, 달 뒷면사진 공개
▶ 1959년 전국노협(勞協) 창립총회 개최
▶ 1958년 중국군 북한서 철수 완료
▶ 1957년 그리스 작가 카잔차키스 사망
▶ 1955년 베트남공화국 출범 (고 딘 디엠 대통령 취임)
▶ 1955년 오스트리아, 중립법 공포
▶ 1953년 한국정치회담의 예비회담 판문점서 개최
▶ 1951년 영국 총선거, 보수당 승리로 처칠 6년 만에 재집권
▶ 1950년 유엔군, 원산 상륙
▶ 1950년 국군 압록강변 도달
“야, 압록강이다!” 숨가프게 강가로 달려간 국군 장병들은 압록강 물에 손을 담그면서 감회의 환호성을 질렀다. “이겼다, 이제야 통일이 되는 구나!” 국군은 초산 시민과 장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변 높은 곳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목이 터지도록 애국가를 불렀다.
1950년 오늘, 국군 6사단이 한만(韓滿) 국경지대인 초산을 점령하고 압록강가에 태극기를 꽂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개시한 지 41일만의 일이었다. 장병들은 수통에 물을 담아 ‘압록수’(鴨綠水)라고 적은 다음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반격 교두보를 확보한 국군과 유엔군은 전쟁 주도권을 장악하고 거침없이 북진을 거듭했다. 중부전선에서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한 6사단은 화천, 김화를 거쳐 원산까지 진출한 다음 평양 탈환작전에 동원됐다가 압록강 진격에 나섰다.
개천을 거쳐 압록강에서 60km가량 떨어진 희천에 진입한 6사단에 진격명령이 떨어진 것은 10월 24일.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북진 한계선’을 정해놓고 있던 맥아더 사령관은 “모든 작전 제한선을 없애고 국군과 UN군은 신속히 한만 국경선까지 밀고 올라가라”는 총공세 명령을 내렸다. 유엔군은 “성탄절을 고국에서 맞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떴다.
6사단은 초산과 벽동을 목표로 총진격작전을 개시했다. 진격 속도가 너무 빨라 후퇴하던 인민군 부대를 앞지르기는 일도 있었다. 인민군 8사단 패잔병들의 저항을 받기도 했으나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10월 26일 6사단은 마침내 초산읍을 탈환하고 단숨에 6km를 더 내달아 묵묵히 흐르는 압록강을 마주했다.
최선봉으로 한만 국경선에 도달, ‘북진통일’의 꿈을 안겨준 6사단은 그러나 중공군 참전으로 내일을 기약하며 후퇴해야 했다. 육군 청성부대는 해마다 초산진격 기념행사를 개최, 그날의 감격을 기억하고 있다.
▶ 1948년 국부군, 만주 철수 개시
▶ 1947년 캐시미르분쟁 시작
▶ 1916년 프랑스 정치가 미테랑 출생
▶ 1909년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 전세계 제국주의자들에게 경종 울린 민족독립투사, 안중근
대한국민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치다! 1909년 가을,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합병한 뒤 중국 땅인 만주까지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으로 보내 러시아의 재무대신 추코프와 협상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나라와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고 한국의 초대통감을 지낸 뒤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의장이 된 침략의 우두머리였다. 안중근은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를 없애고 일본의 침략 정책을 세계에 알릴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안중근의사는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대동공보사사무실에서 독립투사 정재관, 김성무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없앨 계획을 세운 뒤 1909년 10월 21일 동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동청 철도의 종착지인 동시에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다. 우덕순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에 러시아 말을 잘하는 유동화를 통역으로 삼았다. 하얼빈에 도착한 뒤에는 교포 김성배의 집에 머무르며 다시
조도선을 동지로 맞았다. 안중근은 동지들과 함께 밤새 여러신문을 모아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도착하는 시간과 환영행사등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이때 안중근은 일본의 남만주철도와 러시아의 동청철도가 엇갈리는 '채가구'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를 갈아탄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채가구에서도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안중근의사는 그리고 전날 밤 자신의 굳은 뜻을 담은 시 '장부가'를 지었다.
"장부가 세상에 남에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드는구나. 천하를 굽어보니 어느 날에 뜻을 이룰고 동풍이 점점 차가우나 장사의 뜻이 뜨겁다 분함은 한 번 갔으니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쥐'도적 이토여 어찌 목숨을 비길고
어찌 이에 이을 줄을 헤아렸으리오
모든 일은 본디부터 그러하도다
동포 동포여 속히 큰 뜻을 이룰지어다
만세 만세 대한 독립이로다
만세 만만세여 대한 동포로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채가구역에서 열차를 갈아탈 때 그를 해치우려고" 유동화를 하얼빈의 남겨둔 채 우덕순, 조도상과 함께 채가구로 갔다.
채 가구에서 여관을 잡은 안중근일행은 정거장 사무원에게서 모레 새벽 6시에
이토 히로부미가 그곳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안중근은 새벽 6시쯤이면 아직
날이 밝기전이라 이토 히로부미가 정거장에 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신은 다시 하얼빈으로 갔다. 채가구에서 우덕순, 조도선이 실패할 경우 자신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없애려는 것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드디어 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중근은 오전7시 경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는 9시에 하얼빈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하얼빈역 플랫폼에는 벌써부터 러시아군인들과 환영 객들이 많이 나와서 이토 히로부미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역 안에 있는 찻집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오전 9시쯤이 되자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역에 들어와 멎었다. 얼마 후 러시아재무대신 코코프체프 와 일본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렸다.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일을 반드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 한 뒤 찻집에서 나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군의장대를 사열한 뒤 환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러시아군대 뒤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쏠기회를 노렸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10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 왔을 때 재빨리 권총을 꺼내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을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순간 안중근은 자기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일행 중 의젓해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세발을 더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뒤따르던 하얼빈 일본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비서관 모리 야스지로,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그때 러시아헌병들이 안중근을 덮쳤다. 안중근은 '꼬레아우라' 대한만세라고 외친
뒤 순순히 체포됐다. 안중근의사의 총에 맞아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는 곧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처치를 했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국에 이어 만주를 집어삼키려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손에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곧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동경 일일신문과 대한매일신보등의
호외가 쏟아져 나왔고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안중근의사에게 환호를 보냈으나.
한국 ,중국의 친일파들은 매우 당황했다.
중국사람들은 안중근의사가 마치 자기들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기뻐했다.
당시 중국의 국가주석이었던 원세개는
안중근의사의 의거을 듣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찬양하였다.
안중근의사 만,
'평생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 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세계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년을 가오리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 안중근의사를 존경 하는 것은 단순히 하얼빈의거 때문만은 아니었다.
썩어가는 중국이 일본,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의 침략을 막을 길이 없어 막막해 하고 있을 때 잠자고 있는 중국인들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사는 일제의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사형을 선고받고 거사가 있은지 몇 달 뒤인 1910년 3월 26일 31살의 나이로 순국했다.
안중근의사가 검찰의 질문에 밝힌 저격이유는
1. 명성황후 시해죄!
2. 고종황제 폐위죄!
3. 5조약과 7조약 강제체결죄!
4.무고한 한국인들 학살죄
5. 정권 빼앗은 죄!
6. 군대해산죄!
7. 교육방해죄!
8. 한인들 외국유학 금지죄!
9. 교과서 압수하여 태운 죄!
10. 제일은행권 지폐 강제사용죄!
11.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한다고 세계에 거짓말 퍼뜨린 죄!
12. 한일간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 처럼 위로 천황속인 죄!
13. 철도, 광산, 산림, 천택 강제로 뺏은 죄!
14. 동양평화 깬 죄!
15. 일본 천황 아버지 태황제 죽인 죄!
안중근 의거 100주년 ‘불멸의 민족혼을 기리다’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식이 26일 서울과 중국 하얼빈 현지에서 동시에 거행됐다.
서울 행사는 이날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 광장에서 ‘백년의 애국, 천년의 번영’이라는 주제로 정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주요 인사, 광복회원, 시민 등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기념식은 안 의사 약전 낭독, 기념공연, 기념사, 독립군가 제창, 만세삼창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기념식에는 미국에서 거주하는 안연호(손녀·72), 토니안(증손자·한국명 안보영·46), 황은실(외손녀·81)씨와 국내의 황은주씨(외손녀·78) 등 안 의사 유족 17명도 참석했다. 안연호씨와 토니안은 안 의사 유해가 발굴될 경우를 대비해 유전자(DNA) 감식용 혈액을 제공했다.
정 총리는 기념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족혼의 표상이며 세계평화를 일깨우는 등불이 되고 있다”며 "동양 평화와 인류 공영의 정신은 지금도 세계인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안 의사 의거 현장인 중국 하얼빈에서는 독립기념관과 하얼빈시 조선민족예술관 공동 주관으로 광복회원, 동포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다.
▶ 1906년 이갑 등 서우학회 조직
▶ 1895년 역법 개정. 태양력 사용
▶ 1850년 월남 이상재 출생
▶ B.C 202년 오늘,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한니발 패배.
B.C 220년 이베리아반도, 지금의 스페인을 정복한 한니발은 로마를 쳐들어갔다.
동부 지중해 안에있던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에 내분이 일어났는데,이를 기화로 한니발은 8개월동안 포위공격을 함으로써 끝내 사군툼을 함락시켰다.
B.C 218년이었다. '한니발전쟁'이라고 하는 제2차 포에니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한니발은 제2차 포에니전쟁의 모든 국면에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는 보병5만명
기병9천명과 40마리의 코끼리부대를 이끌고 피레네산맥을 넘고 알프스산맥을 넘는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다. 아무도 그가 북쪽의 눈 덮인 알프스산맥을 넘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B.C 216년에는 이탈리아반도 남부의 칸나에(칸네)에서 결사의 로마군을 전멸시킨 한니발의 획기적인전술은 명장으로서의
그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게하였다. 초반부터 대패한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하여 한니발과 싸우게 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에게 싸움을 걸지 않고 카르타고군의 자멸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파비우스의 반대파들은 그를 비겁자라고 욕하였다. 칸나에에서의 참패는 파비우스의 반대파가 무모하게 전쟁을 이끈 탓이었다. 로마군은 8만6천명의 군사 가운데 1만4천 명 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카르타고군의 전사자는 6,000명이었다. 전사자비율은 로마군이 90%, 카르타고군이 12%였다. 칸나에전투는 전쟁의 역사에서 전술연구의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패전을 거듭했지만 로마국민의 조국에대한 충성심은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로마의 동맹시들도 한니발에게 점령된 도시들을 제외하면 로마를 배반한 도시는 없었다. 한니발은 로마가 도시동맹 공동체였기때문에 쉽게 와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B.C 207년 한니발의 동생
하스두르발이 원군을 거느리고 왔다.
그러나 그의 밀서가 아쉽게도 로마군의 손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다. 하스두르발의 군대는 로마군에게 탐지되어 전멸하고 말았다. 명장 한니발도 이로부터 차츰 힘을 잃기 시작하여 점차 이탈리아의 남부로 쫓기게 되었다. 카르타고에게는 경제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이베리아반도의 전선이 오랜 고전끝에 로마에게 제압되었다.
B.C206년의 일로 전쟁이 시작된지 12년이 지나서였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이베리아로부터 계선해 왔다. 그는 여론을 들뜨게하여 스스로 사령관이되어 단숨에 카르타고를 쳐들어갔다. 대승을 거둔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는 화의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급히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최후의 결전을 위해 방비를 튼튼히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해상을 완벽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군은 우티카에 상륙하여 육로로 쳐들어왔다. 한니발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제2차 포에니전쟁에 승패를 가른 B.C202년에 자마전투에서 최후의 승리자는 로마였다.지와 용을 겸비한 명장한니발은 불운한 장군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15년간을 싸웠어도 본국에서는 원군을 보내지않았고 그나마 동생인 하스 두루발이 원군을 이끌고 왔지만 로마군에게 발각되어 전멸당하고말았다.
만일 본국카르타고에서 한니발에게 지속적인 원조를 보냈다면 포에니전쟁에 결말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한니발의 불행은 패배에 그치지 않았다. 한니발은 시칠리아, 소아시아등으로 망명하여 떠돌게 되었다. 후에 로마가 더욱 힘을 불려 소아시아지역에까지 그 세력권을 넓히자 한니발은 스스로 자살하고 말았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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