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백사송림의 절경 송도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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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포항 송도의 모습. 일제강점기부터 본격적으로 심은 송림과 곱고 흰 모래로 유명했던 백사장이 길게 뻗어 있다. 해수욕장으로 유명했던 송도는 지금은 옛 모습을 많이 잃었지만, 여전히 포항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 송도해수욕장(작은 사진)은 해마다 10만명이 넘는 피서객이 몰리는 동해안 최고의 휴양지였다. 백사송림의 절경과 맑고 투명한 물은 해수욕장으로서 최적의 조건이었다. |
포항운하의 물길은 동빈내항을 지나면서 송도를 휘감는다. 송도는 형산강 물줄기의 끝이자 영일만 바다의 시작이다. 동빈내항이 포항의 모태라면 송도는 산소를 공급하는 허파나 다름없다. 심은 지 100년이 넘은 송도 소나무 숲은 거센 바닷바람을 막아주면서, 삭막한 도심에 숨을 불어넣는다. 강은 송도에서 끝나 바다에 이르고, 바다는 송도에서 강물을 품는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아가며 자연과 공존한다. 사람살이의 옛 추억과 이야기는 물길과 송림 사이에서 피어나서 뻗어나간다. 그곳이 바로 포항 송도다.
#1. 송도 소나무 숲, 언제 조성됐나
송도는 지금의 모습과는 달리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기다란 사구(沙丘)였다. 조선 후기인 1832년 무렵까지는 영일현에 속해 있던 무인도였다. 바람이 몰아치면 모래가 거세게 일었고, 풍랑이 불고 홍수가 지면 물이 넘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포항에서 가장 늦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곳이 송도다.
무인도나 다름없었던 송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로 알려져 있다. 인근 송정동 주민들이 한두 집씩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에는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영일군 대송면 송정2동으로 등기된다. 이후 이주민이 꾸준히 늘어 1920년대는 20여호, 1931년에는 70여호가 송도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제법 규모를 갖춘 마을이 형성됐다.
초창기 이주민들은 영일정씨, 김해김씨, 순흥안씨 등이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고기와 조개잡이 그리고 밭농사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지대가 낮은 곳에는 참외와 수박 등을 재배했고,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호밀, 보리농사를 짓고 살았다.
1935년 형산강 제방축조가 완료되고, 1938년 형산강의 물길이 지금처럼 바뀌면서 강을 경계로 송정리와 분리됐다. 이때부터 포항읍 향도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동 명칭이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지금의 이름인 송도동으로 바뀌게 된다. 송도라는 이름은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송도는 예부터 길게 뻗은 소나무 숲으로 유명했다. 모래벌판이었던 송도에 소나무가 처음 심긴 것은 1910년경이다. 당시 김씨 성을 가진 한 주민이 소를 방목하기 위해 방풍림을 조성하면서부터다. 당시 해풍을 막을 수 있는 측백나무와 해송을 조금씩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소나무 조림 사업에 나선 사람은 일본인 대지주 오우치 지로였다. 한일병합 이후 포항에 이주해 정착한 그는 포항에서 부농으로 승승장구했고, 지역에서 가장 많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양묘나 조림 등의 임업분야에도 해박했다고 한다.
1911년 오우치 지로는 송도 일대 국유지 53여정보(町步, 1정보는 3천평으로 약 9천900㎡)를 총독부로부터 불하받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센 해풍이 문제였다. 씨앗을 뿌리고 작물을 거두기 전에 강한 바닷바람에 뿌리째 뽑히기 일쑤였다. 이때부터 오우치 지로는 송도 일대에 어린 해송을 심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림사업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어린 해송은 거센 바람을 버텨내지 못했고, 가뭄이 들면 말라죽는 나무가 속출했다. 이웃 주민들은 무모한 일이라며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뽑혀나가고 말라죽은 묘목 자리에 나무를 새로 심고 육지에서 직접 물을 길어 날았다. 묘목 주위에는 찰흙을 넣고 해초를 깔아 물이 쉽게 빠지지 못하도록 정성을 쏟았다. 바람은 울타리를 만들어 막았다. 소나무가 비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도둑이 들끓을 때는 경비견을 풀어 지키기도 했다. 그렇게 10여년 정성을 쏟으면서 송도는 울창한 송림을 이루었다. 그제서야 이웃주민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1929년 송도 소나무 숲은 어부보안림(魚付保安林)으로 지정되면서 해풍이 심한 해안가의 방풍림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한때 소나무 숲에는 고아원이 있었는데, 아이를 잃어버리면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송림은 울창하고 깊었다. 포항 8경 중 하나로 꼽히며 이 지역의 명소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당시 함께 심었던 은백양나무도 송도의 명물이었다. 송도다리를 건너면 길 양쪽으로 은백양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송도 해수욕장까지 터널처럼 길게 뻗어나갔다.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당시 은백양나무 터널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당시의 기억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남아있다.
송도 송림을 가꾼 오우치 지로는 광복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송도와 송림을 잊을 수 없었다. 실제 그는 죽기 전 유언처럼 “송도 소나무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2. 염전과 송도다리의 추억
송도의 또 다른 볼거리는 염전이었다. 염전은 송도다리 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을 소금 굽는 마을이라고 해서 ‘염둥골’로 부르기도 했다. 그중 딴봉마을 일대에는 6만6천116㎡(2만여평) 정도의 큰 염전이 있었다. 딴봉은 형산강 하구에 있었던 마을로 송도에서 둑으로 연결된 ‘또 다른 섬’이었다. 포스코 건설을 위해 형산강의 물 흐름을 바꾸고 직강화공사를 하면서 지금은 수몰됐지만 당시에는 100여호가 살던 꽤 큰 마을이었다. 딴봉 외에도 청어등택 공장과 정어리 공장이 폐쇄된 자리에 약 4만9천587㎡(1만5천여평), 그리고 큰 길 북쪽 곳곳에도 소규모의 염전이 있었다.
송도의 염전은 소금 만드는 법부터 특이했다. 바닷물을 가두고 햇빛에 말리는 서해안의 염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송도염전은 흙을 평평하게 깔아 놓고, 그 위로 바닷물이 드나들게 했다. 바닷물을 어느 정도 머금으면 그 흙을 푹 눌러 짜서 움막을 지었다. 그리고 움막을 지은 흙에서 나오는 바닷물을 큰 솥에 고면 소금이 됐다. 움막의 흙은 다시 평평하게 깔아 바닷물이 드나들기를 기다렸다. 흙을 이용했기 때문에 처음엔 누런색을 띠었지만 일정기간이 지나면 하얀빛을 드러냈다. 송도의 소금은 질이 좋아 전국으로 팔려나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장으로 소금을 실어 나르는 마차가 드나들었고 짐꾼이 북적였다. 아이들은 누렇고 하얀 소금을 손으로 찍어 먹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송도 염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6·25전쟁이 끝나면서 연료비가 크게 상승했고, 이 때문에 생산단가를 맞출 수 없었다. 특히 서해안의 천일염과 가격경쟁에서 크게 뒤처지고 말았다. 결국 제염업자들은 하나둘씩 도산위기에 빠지며 앞일을 걱정해야 했다. 1950년대 후반 정부에서 제염 업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면서 송도염전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염전과 함께 송도의 채소도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부추와 얼갈이배추, 시금치 등은 시장에 내놓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섬이나 마찬가지였던 송도에 도심과 연결하는 다리가 놓인 것은 1934년이었다. 바로 송도다리다. 당시에는 나무 다리였고, 중간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 올라와 ‘꼽추다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숭어와 은어가 회기하는 시기에는 다리 주위로 사람들이 북적였다. 형상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고기가 떼를 지어 송도다리 밑을 지났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미리 가마니를 다리 밑에 쌓아두었다가 숭어와 은어떼가 뛰어 오르면 가마니로 낚아채서 주워 담았다. 가마니를 물 위에 슬쩍 띄워 놓아도 툭툭 떨어지는 놈들이 수북했다. 주워 담기 바쁠 정도였다고 한다.
6·25전쟁 직후에는 도심의 학교가 불타거나 변변치 않아 아이들은 자주 송도에서 야외수업을 했다고 한다. 큰 칠판을 등에 지고 송도다리를 건너 소나무 숲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당시 포항에서 학교를 다녔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송도에서 야외수업을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송도는 해수욕장으로도 유명했다. 백사송림의 절경을 자랑하며 포항을 대표했던 곳이 바로 송도해수욕장이었다. 길이 3.2㎞, 너비 70m의 넓은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은 천혜의 휴양지로 손색이 없었다. 특히 다른 해수욕장과는 달리 모래가 몸에 달라붙지 않을 정도로 희고 고왔다. 속이 훤히 비칠 만큼 물은 맑고 투명했고, 수온이 적당해 여름철이면 전국에서 피서객이 몰려들었다. 간만의 차가 거의 없고 경사도 완만해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송도해수욕장은 포항이 읍으로 승격되던 해인 1931년 정식으로 개장했다. 피서철에는 해마다 1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북한의 원산해수욕장과 함께 동해안 최고의 휴양지로 명성을 떨쳤다.
‘평화의 여인상’도 송도해수욕장의 상징이자 명물이었다. 수영복 차림으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여인상은 당시만 해도 그 ‘야한’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고, 피서객들은 여인상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기에 바빴다. 빛바랜 사진 속 추억으로 남았지만 현재도 송도해수욕장 자리에 가면 이 여인상을 볼 수 있다.
송도해수욕장은 영화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았다. 원로배우 최은희가 1958년에 출연한 영화 ‘형제’의 첫 장면은 송도해수욕장의 송림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김기덕 감독의 1998년 작품 ‘파란대문’ 역시 송도해수욕장에서 촬영됐다. 이 영화는 ‘여대생과 창녀의 역할 바꾸기’라는 소재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신선한 영화적 체험을 안겨준 독창적 영화’라는 평과 함께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전국적인 명소였던 송도해수욕장이 쇠퇴의 길로 들어선 것은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이때부터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소나무 숲은 옛 모습을 점차 잃어갔다. 특히 1970년대 말 두 차례의 큰 해일로 백사장이 유실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해일이 지난간 후 유실되는 백사장을 지키기 위해 방파제를 설치했지만 이마저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송도해수욕장은 해양환경 변화와 도시화로 제 기능을 상실했고, 피서객의 발걸음도 점차 끊겼다. 주변 상가도 하나둘씩 문을 닫았고, 마침내 2007년 해수욕장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사실상 폐장하고 말았다.
다행히 포항시는 송도해수욕장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특히 백사장 복원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미 지난 5월부터 백사장 복원공사에 들어갔다. 포항시에 따르면 복원될 백사장은 길이 약 1.2㎞, 폭 100m로 2016년 잠제 작업을 마무리 하고, 2017년 초부터 모래 이식을 시작해 연말께 공사를 마칠 예정이다. 포항시는 송도해수욕장 복원사업이 마무리되면 해수욕장 인근에 해상공원을 조성해 포항운하와 연계한 해양관광상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사진=포항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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