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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훈족(아틸라) 453/ 동고트 왕국(488-538)/서코트 왕국(554-721)/프랑크 왕국 481-870년/서,중,동프랑크 분리
이장희 추천 0 조회 293 15.12.28 16: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훈족 아틸라 434-453

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한국인과 삼태극 사상

[KBS 역사스페셜] 계림로 14호분 황금보검의 비밀

 1973년에 경주 대능원의 동쪽으로 계림로를 내는 도로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배수로를 파다가 땅속에서 신라시대의 묘가 다수 발견되자, 국립경주박물관은 공사를 중단시키고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발굴된 묘소에는 발굴된 장소인 '계림로'에 덧붙여서 각각 번호를 붙였는데, 이 중 '계림로 14호 적석목곽묘'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이 세계 역사학계에 메가톤급 충격을 주게 되었다.
 
나중에 보물 제635호로 지정된 황금보검의 제작시기는 5세기임을 X선 투사에 의한 연대측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황금보검과 함께 뭍힌 피장자는 2명의 남성으로 신라 지증왕이 집권하던 시기인 6세기 초에 뭍힌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150~160cm의 키에 20~39세의 성년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두사람 중 한 사람은 신라의 대도(大刀)를 차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황금보검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이 황금보검은 그당시 우리나라의 제작방법과 달랐으며, 중앙아시아 지역에 유행했던 단검 형태에 동유럽의 클로아조네(cloisonne) 기법의 금세공 기술이 결합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날의 길이는 18cm이며, 검집은 나무로 제작되었는데, 검집의 앞면에는 순금으로 된 황금판이 덮여있었고, 석류석과 유리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석류석은 우리나라에서는 황금보검 이외에 유물로서 발견된 적이 없고, 카자흐스탄의 보로보에 있는 무덤에서 나온 검의 장식에 사용된 것이 확인된 정도이다.
또한, 함께 발견된 무늬가 있는 비단인 능(綾) 조각으로 미루어 볼 때, 피장자의 지위는 진골 이상의 귀족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5세기 경은 이탈리아 반도 및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였던 고대 서양 최대의 로마 제국(帝國)이 4세기 말기인 395년에 동·서로 분열된 뒤 쇠락의 길을 걷는 시기였다.


서로마제국은 5세기인 476년에 멸망하고 비잔티움제국(동로마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다가 멸망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서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의 공격으로 멸망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흉노(匈奴, 북방 기마 민족을 통칭)의 분파인 훈족(Huns)이었다.
 
훈족은 기원후 155년에 북흉노가 선비와 후한의 연합군에 의한 중앙아시아 정벌 정책으로 멸망된 후 일부 지배계층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우랄산맥을 넘어 정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2세기 이후부터 유럽에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엄청난 돌풍의 원인을 제공한다.

 

발단은 북방의 기마민족인 훈족이 볼가강을 넘어 375년에 게르만 민족의 한 갈래인 동고트(Ostrogoth)족을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그러자 동코트족은 훈족에 쫓겨 같은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 서고트족을 공격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서고트족은 동로마 제국에 도나우 강 남쪽으로 건너와서 로마 영토에 살 수 있도록 요청을 하고, 수락받아 이주하는 등, 훈족의 공격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하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5세기인 410년에 훈 족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아틸라가 탄생하고 432년에 왕이 된 후 453년에 사망할 때까지 동로마 제국(441년, 452년)과 서로마 제국(451년)을 잇따라 공격한다.

이러한 공격을 통해서 훈족이 로마를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전쟁과 협상 과정에서 동서양간 많은 문명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로마는 훈족에 밀려서 남하하여 로마 영토에 정착한 게르만 민족의 수장(首將)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476년에 서로마 최후의 호아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멸망하게 된다.


즉, 훈족이 직접적으로 로마를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훈족에 밀린 게르만 족이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훈족이 로마제국 멸망의 결정적 동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독일TV ZDF는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 이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로 유명한데, 그 중 ‘잃어버린 고리 찾기’ 편을 보면 375년에 게르만 족의 민족적 대이동을 촉발한 원인을 제공한 훈족의 원류가 한민족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나온다.
 
훈족이 한민족의 한 갈래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첫번째, 훈족의 유골에서는 편두(扁頭, 일명 납작머리)의 특징이 발견되는데, 신라와 가야에서도 편두가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법흥왕 등 신라의 왕들도 편두를 가지고 있는 등 공통점이 있다는 점이다. 편두는 중국인과는 구별되는, 동이(東夷)족 사이에 매우 오랫동안 성행했던 풍습이다.


그런데, 훈족에서는 편두가 발견되지만 훈족의 원류인 흉노족에서는 편두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기마민족의 특성상 여러 지역을 이동하는 가운데 혼혈이 생기게 되는데 동이족 중에서 신라계에 속하는 부족이 유럽을 공격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두번째,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반점(꼬리뼈 높이의 엉덩이에 나타나는 색소 변색으로 유전학적으로 몽골계통의 민족에게서 나타나는 신체적 특징)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훈족은 그들 특유의 예맥각궁(濊貊角弓)을 사용하는 등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다는 점이다. 경주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기마인물상 토기와 같은 것은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에서 훈족은 신라인과 정치적, 혈연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신라인 역시 북방 유목민족의 특성을 지녔다.

 

이것만 보더라도 흉노(匈奴)에 속해 있던 우리 한민족의 원류(原流)가 서쪽으로 진출하면서 훈족으로 성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북방 기마민족인 동이족을 포함했던 흉노에서 갈라져 나온 훈족이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서 지배집단 중 일부가 더욱 서쪽으로 이주하여 트라키아(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지역을 비롯한 유럽의 각 지역에 정착하고, 일부는 동쪽으로 이주하여 가야지방과 신라지방에 정착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공통분모를 많이 가진 훈족의 지배계층을 이룬 동이족이 동서양에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당연히 어떠한 형태로든 서로 교류를 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추측이 가능하다.

 

지금도 트라키아(Thracia) 지역에서 발견되는 소용돌이 형태의 삼태극 문양은 동서양에 걸친 훈족과 우리 한민족의 문화적 공통분모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처럼 훈족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서쪽으로만 이주한 것은 아니고, 동서양 전반에 걸쳐서 이주하였다. 일부는 신라 지역에, 일부는 카스피해 북부에, 일부는 러시아 남쪽과 크림 지역에 정착했으며, 또 일부는 프랑스, 스위스, 트라키아(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등지에 자리잡았다.

 

특히, 트라키아(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훈족 아틸라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다.
 
이처럼 몽골계-동이족이 지배계층으로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훈족은 로마 제국과 전쟁 및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교류를 하게 되었고, 한민족의 특성을 살려 보검에 삼태극 문양을 새기도록 트라키아 지역 또는 동로마 제국의 금세공 장인에게 주문하여 제작한 후 신라의 귀족에게 진상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문양은 한민족의 영향을 받은 켈트족의 소용돌이 문양과도 유사하다

옛날 트라키아 지역이었던 불가리아의 국립고고학박물관에서 발견된 삼태극 모양의 소용돌이 문양과 신라의 '계림로 14호 적석목곽묘'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의 삼태극 모양의 소용돌이 문양을 비교해 보면서 한민족의 갈래인 훈족이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말타고 달려나가던 활기찬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한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굳이 한민족을 단일 민족으로 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 민족이 일찌기 우랄 산맥과 알타이 산맥은 물론 바이칼호, 흑해에 많은 영향을 미친 점을 감안해 볼 때, 그곳의 여러 다양한 민족과 혼혈을 이뤘을 것임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을 간과하고, 그들을 우리 민족의 범주에서 제외해 버린다면, 그것은 세계화 시대에 우리를 한반도 내에 고착시켜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는 일임이 자명하다.
 
최근, 다문화 융합시대를 맞이하여, 군(軍)에서도 장교 임관선서와 병사 입대선서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이를 '국민'으로 대체하기로 했다고 한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군에 입대하는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로 시작되는 선서를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로 바꿈으로써 다문화사회를 수용하여 배려하기 위한 조치다. 이처럼, '민족'의 범위도 좀 더 시야를 넓혀서 혈연 중심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문화 사상적으로 고대로 부터 한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아 동화되었던 민족을 현재의 '한류(韓流)'라는 큰 틀에서 포괄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다민족을 흡수하여 대국으로 성장했고, 미국도 다양한 이민족을 흡수하여 미합중국으로 발전하였듯이, 우리도 세계화를 위해서는 삼태극 사상과 같은 우리 민족이 고대로 부터 세계 여러나라와 여러 지역과 여러 민족에게 영향을 주었던 강력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보다 넓은 시야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민족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불가리아의 국립고고학박물관에서 발견된 트라키아 시대의 소용돌이 형태의 삼태극 문양의 유물을 보면서, 또한 많은 수의 불가리아 인이 몽골반점을 가지고 있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파일:Huns empire.png

아틸라의 최대 판도 (434-453)

출생일 406년
사망일 453년
배우자 크레카
부친 문트주크
전임자 블레다, 루길라
후임자 엘락

 

[편집] 연도

아틸라(고노르드어: Atle, Atli, 독일어: Etzel, 406년 ~ 453년)는 훈족 최후의 왕이며 유럽 훈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아틸라는 434년부터 죽을 때까지 8년 정도,

유럽에서 최대의 제국을 지배했으며,

의 제국은 중부 유럽부터 흑해, 도나우 강부터 발트 해까지 이어졌다.

 

그는 훈족의 그의 삼촌 루아가 죽자 그의 형 블레다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설과

블레다가 실질적인 왕이고 아틸라는 2인자에 머무르게되었다는 설이있다.

어찌되었건 아틸라와 블레다는 서로 사이가 좋은편은 아니였는데 443년 블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블레다의 죽음에 관해서는 아직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지지않았는데 사냥 도중 사고로인한 죽음이라는 설과 아틸라가 죽였다는 설이 있다.

블레다가 죽은뒤 아틸라는 훈족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동로마 제국 최대의 적이었으며, 발칸 반도를 두 번 침공하고 두 번째 침공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에워쌌다. 현재의 프랑스로까지 진격, 오를레앙까지 나아갔으나 샬롱의 전투에서 뒤로 물러섰다.

아틸라는 452년 서로마의 발렌티아누스 3세 황제를 수도 라벤나에서 몰아내기도 하였다.

 

아틸라의 제국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으며, 의미 있는 유산도 남아있지 않다. 아틸라는 후에 유럽의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생각되어, 역사가들은 아틸라를 위대하고 고귀한 왕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아틸라는 세 편의 노르드 사가(saga)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에서는 중세 그리스도교의 영향으로 아틸라는 잔혹한 야만인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틸라는 453년에 사망하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자신이 사망 직전 새로 맞아들인 피정복민 출신의 후궁 일디코에게 암살 당했다거나, 복상사 했다거나, 과음으로 인한 질식사, 동맥에서 나온 피에 인한 질식사 등 추측이 무성하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무덤은 아직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는데 무덤에는 가치가 높은 물건들이 함께 묻혔다. 그의 무덤을 묻을때 사용되었던 사람들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두 살해당했고, 관에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어 그의 무덤을 찾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인다.

[편집] 같이보기

별칭은 Flagellum Del ?~ 453.

훈족의 왕(434~453년 재위, 445년까지는 형 블레다와 공동 통치).

개요

로마 제국을 침략한 새외(塞外) 민족 최고의 왕이며 남부 발칸 지방과 그리스, 이어서 갈리아와 이탈리아까지 공략했다.

 

아틸라는 중세 독일의 전설적인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에서 에첼, 아이슬란드의 무용담에서는 아틀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동로마 제국 침입

아틸라와 형 블레다이어받은 제국은 서쪽의 알프스 지방과 발트 해 연안에서 동쪽의 카스피 해 근처까지 걸쳐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마르구스(포자레박)에서 동로마 제국과 체결한 평화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공동통치자로서 역사에 나타났다. 이 조약으로 동로마는 지금까지 훈족에 지불해왔던 보조금을 2배로 늘리고 이후 매년 300kg의 황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435~439년의 아틸라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자기 영토의 북부 또는 동부 야만족에 대한 정복사업을 했던 것 같다.

 

동로마 제국은 마르구스 조약에서 약정한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고, 그결과 동로마군이 서부와 동부 국경지대에 머무르고 있던 441년 아틸라는 도나우 강 유역 변경에 대해 강력한 습격을 감행했다.

 

그는 싱기두눔(베모그라드)을 포함한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동로마 제국은 442년에 간신히 1년의 휴전을 맺고 서부에 있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443년 아틸라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도나우 강변의 도시들부터 휩쓸기 시작하여 나이수스(니시)와 세르디카(소피아)를 향해 제국의 내부로 밀고들어가 두 도시를 파괴했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려서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하고, 이후 계속되는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주력부대를 격파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북쪽과 남쪽 해안까지 진출했다.

 

훈족 사수들이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성벽을 뚫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틸라는 갈리폴리 반도로 퇴각해 있던 동로마의 나머지 군대를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곧이은 평화조약에서 아틸라는 동로마에게 황금 2,570㎏에 달하는 연체된 공납금을 지불하도록 했고, 연간 공납금을 3배로 늘려 그후부터 매년 황금 900kg을 강탈했다.

 

443년 가을에 체결된 평화조약 이후 아틸라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445년경 그는 형 블레다를 죽이고 유일한 전제군주로서 훈족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447년에는 동로마 제국에 2번째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 전투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전쟁은 441~443년 때보다 더 큰 규모로 계획되었고, 주공격 방향은 전의 공격지보다 좀더 동쪽인 남동부 유럽의 로어스키티아와 모에시아 지방이었다.

 

그는 우투스(비드) 강에서 동로마 제국 군대를 맞아 격파했으나, 그 자신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어서 아틸라는 발칸 지방을 황폐화시키면서 남쪽으로 내달아 그리스에 이르렀다.

그리스에 들어온 그는 테르모필레에서 저지당했다.

 

이후 3년간의 침략 기간은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외교사절과 아틸라 간의 복잡한 협상과정으로 점철되었다. 이때의 외교적 접촉에 관한 많은 세부 내용은 449년 로마 사절단의 일원으로 왈라키아에 있던 아틸라의 사령부를 방문한 파니움의 프리스쿠스가 쓴 〈역사 History〉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전쟁을 끝맺는 협정 내용은 443년보다 더 가혹했다. 동로마는 도나우 강 남쪽의 광대한 지역에서 철수해야 했고, 금액은 알 수 없지만 동로마의 공납은 계속되었다.

갈리아 지방 침입

아틸라의 그다음 대원정은 451년의 갈리아 지방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때까지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로마의 아이티우스 장군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 지방의 침략 동기에 대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아직 없다.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에서 자신의 목적은 톨로사(툴루즈)를 본거지로 한 서(西)고트족(동·서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을 정복했던 게르만족)의 왕국이며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는 아무런 불만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450년 봄 황제의 누이 호노리아가 그녀의 반지를 아틸라에게 보내면서 예정된 결혼에서 자기를 구해달라고 간청해왔다. 그러자 아틸라는 호노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선언하고 그녀의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반을 요구했다.

 

아틸라가 갈리아 지방으로 돌아오자 아이티우스는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와 협상을 맺어 훈족에 대항할 연합군을 편성했다. 이 전쟁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이 남아 있지만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틸라 군대가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을 대부분 점령했던 것은 확실하다.

 

아이티우스와 테오도리크의 군대가 훈족을 몰아내려고 했을 때는 훈족이 이미 이 도시 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상태였다. 결정적인 교전은 카탈루냐 평원에서 있었는데, 일부 학자는 마우리카였다고도 한다(두 곳 모두 확인되지 않음).

 

서고트족 왕이 전사하는 등 격렬한 전투 끝에 아틸라는 후퇴했고, 곧이어 갈리아 지방에서 물러났다. 이 싸움은 아틸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였다(→ 색인 : 카탈루냐 평원 전투).

 

452년 훈족은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7개 도시, 즉 아퀼레이아·파타비움(파도바)·베로나·브릭시아(브레시아)·베르고뭄(베르가모)·메디올라눔(밀란)을 약탈했다. 아이티우스는 훈족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해에 이탈리아를 휩쓴 기근과 역병 때문에 훈족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453년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당시 동로마의 새로운 황제 마르키아누스전임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약속한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결혼식 날 밤 급사했다. 그와 그의 보물을 묻은 자들을 살해하여 그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도록 했다. 아틸라를 계승한 그의 아들들은 아틸라의 제국을 분할하여 지배했다.

 

448년 아틸라의 막사를 방문하여 그를 본 프리스쿠스는 아틸라를 작고 땅딸막한 키에 큰 머리, 깊은 눈, 낮은 코, 가는 수염을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아틸라는 성마르고 고함을 잘 치며 사나운 성미였지만 매우 끈질긴 협상자였으며 무자비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여 아틸라가 나무 접시에 담은 고기만 먹고 있는 반면, 그의 부하장수들은 은접시에 맛있는 음식을 담아 먹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장군으로서의 자질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갈리아 침입 이전까지 아틸라가 거둔 성공을 보면 그가 탁월한 전략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A. Thompson 글

 

●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아시아의 역사적 인물

 원문 http://blog.naver.com/alsn76/40205992923

 

서양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아시아의 역사적 인물은 누구일까?

 

1번 석가모니

2번 징기스칸

3번 진시황

4번 아틸라

 

정답은 4번 아틸라.

 

 

유럽인들에게는 악명높은 테러리스트다.

 

그런데 아틸라가 누구인지 동양사람들은

의외로 잘 모른다.

 

누구냐고?

바로 훈족의 대왕이다.

 

5세기 경 혜상같이 나타난 그는 

순식간에 로마의 찬란한 고대 문명을 파괴하는 동시에

유럽인에게 뿌리 깊은 상처와 공포를 심어줬다.

 

흔히 아이가 울면 동서고금 막론하고

가장 무서운 대상을 인용해서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데..

 

한국에서는 호랑이,

 

일본 규슈 지방에서는 무쿠리(몽골군), 고쿠리(고려군) 

▲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하여 이런 학살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의 울음을 그치는데 직빵이다.

 

그런데 중세시대 서양에서는 그 대상이,

바로 아틸라였다.

 

그만큼 아틸라의 명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던 것이다.

 

아틸라의 명성이 워낙 대단했던 만큼

그를 낳은 민족인 훈족 또한 

유럽인에게는 영원한 악몽이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훈족이라고 하면

흔히 흉노족의 후예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훈족(Huns)을 단순하게 흉노로 해석하기에는

아직까지 논란의 여지가 많다.

 

현재로서는 훈족과 

중국 고대 역사에 등장하는 흉노족과의 

관계를 밝혀 줄 확실한 근거가 없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흉노족과 별개로 취급하면서

그래도 가능성을 열어 두기 위해 훈족을, 

흉인(匈人)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 헝가리인들의 가짜 족보 만들기

 

서양인에게 훈족은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극단적인 공포와 극단적인 경멸이다.

 

아틸라가 죽은 지 1,500년이 지났지만

훈족과 그의 이름은 여전히 유럽인들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9~10세기경 동유럽 평원에 

금발과 파란 눈의 유목민족이 침입했을 때,

 

유럽인들은, 

 

"500년 전에 왔던 훈족이 또 쳐들어왔다!"

 

하고 소리치며 혼비백산했다.

 

이들의 생김새는 그 옛날 아틸라 부족과 전혀 달랐지만

놀란 유럽인들의 눈에는 영락없는 훈족이었다.

 

▲ 마자르족 기병

 

이들은 동유럽 판노니아 평원에 뿌리내렸고,

유럽 사람들은 이 지역을 

곧 '헝가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헝가리란 바로 '훈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헝가리는 

엄청난 오해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이름이었다.

 

 

사실 오늘날의 헝가리 분지에 정착한 유목민족은 

핀란드인과 뿌리가 같은 마자르족이다.

 

이들은 유전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훈족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침입에 너무 놀란 

중세 유럽인의 오해 때문에 

마자르족에게는 오랫동안 '훈족'이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그런데 한때 헝가리인은 이 오해의 꼬리표를

스스로 즐겨 쓴 적이 있었다.

 

다른 민족에게 호전성을 상징하기 위해서

이보다 좋은 것도 없었다.

 

18~19세기에 헝가리인들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족 자결을 부르짖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에서는 

정치가, 일반인, 역사학자, 문학가 할 것 없이 모두가 

 

훈족이 자신들의 조상이며

아틸라가 헝가리의 아버지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 헝가리의 아틸라 석상


헝가리의 위대한 애국 시인 페퇴피는

아틸라를 찬양하는 수많은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헝가리가 독립을 쟁취한 뒤

훈족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사라졌고,

헝가리인들은 다시 예전의 마자르족으로 돌아갔다.

 

 

● 1, 2차 대전 중의 훈족, 독일군

 

유럽 사람들이 말하는 훈족이 

반드시 마자르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유럽 사람들은 꼴 보기 싫은 사람을 

경멸의 의미를 담아 훈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히 그 꼴불견이 동쪽에 있으면

더욱 그러했다.

 

1차대전이 발생하자, 서유럽의 연합군 측은

일제히 독일군을 '훈족'으로 묘사했다.

 

한국전쟁 다시 우리가 북쪽의 중공군을 

'오랑캐'라고 비하하면서

 

역사적인 적개심을 불태우고, 

스스로 정당성을 높였던 것처럼

 

유럽인들 역시 동쪽의 동맹군을 

'훈족'이라 비하하는 것은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런 멸칭은 2차대전 때도 이어졌다.

 

당시 영국 사람들 대부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독일인을 훈족이라고 불렀다.

 

1942년 11월 4일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북아프리카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 군단에 반격을 가해 크게 승리를 거두자,

 

다음날 영국 신문의 타이틀은 이랬다.

"롬멜의 훈족 집단은 정신없이 도망가기 바빴다."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로, 

오랫동안 영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 온 

퀸 마더 엘리자베스는 

  

런던 대공습을 겪은 뒤 50년 넘도록

독일인을 훈족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공개 석상에서까지 

독일인을 훈족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영국 왕실과 정부가 곤란을 겪기도 했다.

 

현재 유럽 사람들은 

일탈 행위를 일삼는 펑크족을 '훈족'이라고 부르는 등

아직까지도 '훈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하나 재밌는 것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은 서유럽 사람들에게

훈족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으면서,

 

정작 자신들도 동쪽의 소련군을 두고는

훈족이라고 비아냥질을 했다는 것이다.

 

▲ 독일군에게 훈족이라 불렸던 소련군

 

 

● 흉노족은 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4세기 중반, 혜성처럼 등장해서

100년 간이나 유럽 전역을 헤집고 다니던 훈족은

 

온 유럽을 폐허로 만들더니,

이내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과거 1,000년이 넘도록

수많은 역사학자들은 

이들이 과연 어디에서 온 종족들인지 궁금해 했는데,

 

최근까지도 뾰족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최근의 연구결과는 대략 이렇다.

간단히 설명해본다.

 

① 사료적으로 볼 때 : 훈족은 흉노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삼국지 위서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AD 89년 한나라와 북흉노는 

몽골 초원 중서부 일대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데,

 

이때 북흉노가 패배하여 

북흉노의 부족들은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대거 도망을 치게된다.

 

▲ 장건의 서역 원정

 

이때 이들이 도망을 친 곳은 아랄해 동쪽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부근(강거)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훈족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남러시아의 볼가강 유역에서 

불과 1,500km 떨어진 곳이었다.

 

그 사이에 별다른 지형적 장애물도 없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우랄 구릉지와

카스피해 북쪽의 습지대 뿐.

대부분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지대다.

 

때문에 서쪽으로 이동했다면

200년 뒤에는 충분히 훈족의 발원지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역사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흉노의 '흉'과 훈족의 '훈'의 비슷한 발음이다.

 

이런 발음의 유사성은 고고학적으로 볼때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아시아의 흉노족이

유럽 훈족의 조상격이라고 

문헌을 근거로 강하게 믿어왔던 터이다.

 

 

② 고고학적으로 볼 때 : 흉노와 훈족은 그닥 관련성이 없다.

 

훈족의 발원지로 알려진 

러시아 남부의 볼가강과 돈강 유역 유적지에는

 

중국 북방 유목 민족이 사용한 

흉노 솥과 한나라 구리거울이 발견됐다.

 

 

이것이야말로, 

훈족이 흉노의 후손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흉노 솥과 한나라 구리거울은

중앙아시아와 남러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본시 유목민족은 약탈과 무역이 활발한 민족이므로

이러한 문물들은 초원길을 통해 충분히 전수될 수 있고,

 

▲ 유라시아의 초원길

 

또 유라시아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중국의 선진 문물은 고대시대부터 매우 인기를 끌었다.

 

오히려 최근 고고학적 자료들은 훈족의 발원지에는 

페르시아, 카자흐족의 유물이 다량 출토된 점과

 

흉노족은 천막을 치고 살았지만

훈족은 소가 끄는 수레에서 살았던 점을 들어

 

1~2세기경 볼가강 유역의 유목민족은

북흉노과는 별개라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③ 언어적으로 볼 때 : 흉노의 후손이라는 증거가 불충분하다.

 

언어학 연구로 훈족의 기원을 찾는 일은 

역사 문헌을 토대로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부분인데

 

어쨌든 연구 결과 훈족 언어는 

알타이제어에 속한 투르크어와 유사하다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견해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어와는 관련성이 적고

볼가강 유역의 투르크어와 더 비슷하다고 한다.

 

여기에 우랄 어족의 영향도 다소 섞였다고 하니,

훈족은 이동이 잦은 유목민족의 특성상

다민족 국가였을 가능성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아무튼 언어만으로 봤을 때,

 

중앙아시아 쪽의 언어를 썼던 흉노족과 

볼가강 쪽의 언어를 주류를 이뤘던 훈족과는

크게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는게 사실이다.

 

 

④ DNA 연구 : 몽골리언 계통으로 추정된다.

 

DNA 연구 결과가 

최근 확실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 같았지만,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고 한다.

 

러시아 유적지에서 발굴된 훈족 유골이 

진짜 훈족 유골인지 아닌지

당최 단정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 러시아 남부에만 100여개 

유목민족이 거주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투르크족, 페르시아인, 슬라브족

여러 민족들이 짬뽕되어 있었다.

 

때문에 어떤 유골이 나온다한들

그게 훈족의 후예라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다만 헝가리에서 발굴된 유골의 흔적을 통해

훈족이 몽골리언 계통이라는 강력한 썰이 대두되고 있다.

 

훈족의 유골 : 우리나라의 삼한시대처럼 편두를 한 흔적이 있다.


당시 유럽인들의 역사적 기록도

훈족은 몽골리언의 특징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리언이라고 해서

모두 다 흉노의 후손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당시 남러시아의 평원에는 

여러 몽골리언 계통의 유목민족이 거주했었다는 사실이다.

 

 

● 최근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 : 훈족은 다민족 집단이었을 듯

 

종합해 볼 때 유럽의 훈족은

한나라 북쪽에서 활약하던 흉노의 후예일 수도 있고

 

2~5세기 동유럽 평원에서 활약했던 

100여개 유목민족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당시 유라시아의 스텝 지역에는

수많은 민족이 끊임없이 이동하며 뒤섞였기 때문에

사실 훈족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당시 초원의 유목 민족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강자가 나타날 때마다

너도나도 그 민족 이름을 사칭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사례를 들어 본다.

 

① 선비족 사칭 사례

 

예를 들어 3세기경 선비족(모용선비)이 

요하강 중상류 지역에서 등장하여 중국 북방을 장악하자, 

 

고비 사막 주변에 수많은 부족이 

모두 '선비족'을 자처했다.

 

"요즘 선비족이 먹어준다며?

오늘부터 우리 부족 이름도 선비족이다."

 

이런 식으로 탁발선비족도 생겨나게 된다.

 

이들은 원래 흉노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역사 기록을 봐도,

흉노가 쇠퇴할 무렵 

일부 흉노 부족이 스스로 '선비'라 칭한 내용이 있다.

 

5호 16국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여러 북방민족이 '선비'를 자처하게 된다.

 

선비족의 전신인 모용선비의 경우

원래 수만명 규모의 '부락' 집단이었는데,

 

주변의 다른 유목민족을 통합해서 수십만으로 커지고,

 

세력이 커지니깐 다른 유목민족들이

너도나도 이름을 차용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수백만명을 거느린 

'거대 집단'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② 투르크(돌궐) 사칭 사례

 

7~8세기가 되면 유목민족 중 가장 잘 나가던 세력은

거대 제국을 형성하던 투르크족(돌궐족)이었다.

 

상황이 그리 되니, 중앙아시아의 유목 부족들은 

재빨리 투르크족을 사칭하기 시작했다.

 

"선비족도 한물 갔어. 요즘은 돌궐이 대세임.

우리 부족도 앞으로 돌궐(투르크)이다."


이렇게 사칭을 하는 통에

심지어 인도-유럽어족인 샤카족과 토하라족까지

투르크족을 자칭하기에 이른다.

 

몽골리언이던 투르크족이

난데 없이 코카시언 계통까지 투르크족이 되어버린 것은

이런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20세기 초 '동 투르키스탄'이라 불리우는

중국의 신장성의 여러 민족들이


오늘날 위구르라는 '투르크인'들로 통일 된 것도

따지고보면 이와같은 이유에서였다.

▲ 스스로 투르크인(돌궐인)임을 자처하고 있는 위구르족

 

 

③ 여진족 사칭 사례

 

17세기 중국 동북 지역에서 흥성했던 만주족은

500년 전 흥했던 여진족의 후예라고

스스로 자처했는데,

 

엄밀히 따지면 이들은 같은 민족이라 보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

 

만주족과 여진족은 언어학적으로는 관련이 있지만

유전적으로 볼 때 약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진족은 실은 몽골계 + 퉁구스계의 혼혈집단으로

퉁구스계였던 만주족과는 민족적으로 달랐다.

 

하지만 새롭게 흥기한 만주족에게 

그딴 거는 상관 없었다.

 

정통성을 부여하고 자긍심을 심어주는데

과거의 잘나가던 국가와 민족을 들먹거리는 것만큼

효과가 좋은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으로 유목 민족들은 

중국 왕조를 사칭하기도 했으니..


선비족은 연나라, 위나라를 자처하고 (전연, 후연, 북위)

티벳족은 진나라, 한나라를 자처하기도 했다. (전진, 성한)

 

④ 훈족은 흉노의 사칭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훈족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훈족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다양한 피가 뒤섞인 혼혈집단으로 추측된다.

 

 

아마도 이런 훈족은

과거 중앙아시아 초원을 누비던 흉노를 닮고 싶은 마음에

그들의 이름을 빌렸을지도 모른다.

(주의 : 중국 학계의 견해임)


 

● 훈족의 유럽 침략 


동유럽의 장악


360년경 훈족은 볼가강을 건너 

최초로 유럽 땅에 등장한다.


강을 건너니 그곳에는 페르시아계 유목민인

알란족이 살고 있었다.



훈족은 알란족을 가볍게 제압하고

375년에는 드네프르강 유역까지 진출한다.


그곳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동고트족이 살고 있었다.

 

당시 동고트족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역에 해당되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훈족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무너지고 지배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후 훈족은 서고트족까지 몰아내며

405년 경엔 우랄산맥 ~ 헝가리에 이르는 

동서 3,000km의 거대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자 쫓겨난 서고트족은 

로마제국 영토로 들어와서

 

로마제국 곳곳을 약탈하고, 

제국 여기저기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게 된다.


 

결국 명동에 뺨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제대로 한 것이었다.

 

이렇듯 훈족에게 쫓겨 로마제국으로 들어온

게르만족의 일파, 고트족 때문에

서로마는 결정적으로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다.


 

 

로마제국으로의 침투

 

한편 헝가리 초원까지 영역을 넓힌 훈족은

434년 새황제 아틸라가 즉위하더니

로마제국 내부로 진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제일 먼저 쳐들어간 곳은

로마제국에서도 가장 발달된 곳인, 동로마였다.

이때 아틸라가 지휘하는 훈족의 군대는

로마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지나가는 마을마다 약탈과 학살을 일삼고

철저히 파괴했다.

유럽인들에게는 전례 없던 잔인함이었다.

 

결국 동로마 황제는 사신을 보내

강화 협상을 맺게 되는데,

 

이때 조건으로 

동로마는 막대한 공물을 훈족에게 바치게 된다.

 

그리고 훈족은 돌아갔고 

다음에는 서로마(이탈리아)로 쳐들어 갔다.

 

이번에도 잔인한 약탈과 학살로

유럽인들을 공포로 떨게했고

 

결국 서로마에게도 공물을 상납받고

덤으로 아리따운 공주를 헌사받았다.

 

아틸라의 새 부인이 될 여인이었다.

 

'일디코'라는 여인이었는데,

당시 아틸라의 나이가 53세가 되던 해였다.

 

그런데 첫날밤에 

아틸라는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 아틸라의 죽음과 일디코

 

당시로서 고령이라 할 수 있는 50세를 넘긴 나이에

폭음을 하고 첫날밤을 치뤘으니

복상사를 당했다는게 역사학자들의 추측이다.

 

그리고 영웅 아틸라가 죽자

유럽에 진출했던 훈족은 

 

이후 썰물 빠지듯이 힘을 잃고

종적을 감추게 된다.

 

 

● 흉악한 야만인, 훈족의 일상

 

역사에 기록된 훈족의 일면은 이렇다.

 

훈족의 모습과 일상

 

훈족은 매우 흉악하고 야만적이었는데,

 

어른이 되면 수염이 자라지 않도록 

사내 아이의 뺨에 일부로 깊은 상처를 냈다.

 

음식은 익히지 않고 

맛을 내지도 않았다.

 

나무뿌리와 고기 부스러기를 

말안장에 넣어 두고 먹으며

1년 내내 떠돌아다녔다.

 

어려서부터 추위, 배고품, 갈증을 견디며 자랐다.

 

이들은 마로 짠 속옷과 

동물 가죽으로 만든 겉옷을 

하나로 붙인 옷을 입었는데

 

보통 속옷은 짙은색으로 만들었으며

한 번 입으면 떨어져 버릴 때까지 갈아입지 않았다.

 

두건이나 모자를 뒤로 늘어뜨려 쓰고

다리는 양가죽으로 감쌌다.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싸맸지만

유독 신발은 형편 없었다.

 

신발은 형태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신고 다니기에 여간 불편하지 않았는데,

 

애초에 말 위에서만 주로 생활하는지라

도통 걸어다닐 일이 없었기에 그러했다.

 

때문에 훈족은 그들의 작고 못생긴 말과 

마치 한몸과도 같았다.

 

 

훈족의 전투력

 

훈족의 말은 쉽게 지치지 않았고

언제나 번개처럼 질주했다.

 

일생을 말 위에서 보내는 훈족 기병들은

심지어 말 위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이들은 

천둥 같은 고함을 지르며 적진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다 전투에서 밀리는 조짐이 들면

뿔뿔이 흩어져 빠르게 후퇴했다.

 

이들은 전진할 때도, 후퇴할 때도

눈에 보이는 것을 닥치는대로 파괴했다.

 

이런 훈족의 최대 약점은 

요새나 성, 특히 해자가 놓인 성을 

어떻게 공략하는지 몰랐다는 점이다.

 

하지만 훈족은 활 쏘는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놀라울만큼 먼 거리까지 화살을 날렸다.

 

화살 끝에는 쇠붙이처럼 단단한 것이 붙어 있어

살상력이 매우 컸다.


 

 

아틸라에 대한 기록

 

한편 훈족의 대왕 아틸라에 대한 기록은 이러했다.

 

아틸라는 키가 작고 뚱뚱했으며,

머리가 크고 눈은 눈두덩 속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피부색은 아주 짙고 코는 납작하고

수염은 듬성듬성 났으며

어깨는 특별히 넓었다.

 

단단한 체격이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몸매는 아니었다.

 

이런 아틸라는 

언제나 살기등등한 눈동자를 번뜩였는데,

 

그런 자신의 눈빛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사람들을 보며 쾌감을 느꼈다 한다.

 

 

기록에 의하면 아틸라는 

필시 몽골리언의 외모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유럽의 훈족, 무엇을 남겼는가?

 

오늘날 훈족의 진짜 후예는 누구인가?

 

아틸라가 죽은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유럽의 훈족은

아조프해 연안으로 숨어들어갔다.


 

여기서 토착 유목민 

불가르족과 융합되게 되는데

 

7세기 이후가 되면, 

이러한 불가르족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을 하여

발칸반도 남쪽에 국가를 세우게 된다.

 

이게 바로 오늘날 불가리아의 전신이다.

▲ 불가르족

 

이후 불가리아에는 슬라브족이 유입되어 

피가 섞기게 된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현재 불가리아인이 

훈족 최후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오랫동안 훈족의 후예 행세를 했던

헝가리인(마자르족)은 역사적으로 볼 때

훈족과 접촉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훈족의 역사적 의의

 

훈족은 오직 약탈과 파괴를 일삼아 온 민족이다.

 

그들이 인류 문명 발전에 이바지한 것이라곤

강력한 군사력뿐이었다.

 

다른 부분에서는 

그닥 언급할 만한 것이 없다.

 

훈족의 서진으로 시작된 대혼란 때문에

로마 문명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훈족의 활약상은 훗날 

수많은 야만 행위의 본보기가 되었다.

(어쩌면 유럽인들의 관점이다.)

 

일찍이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을 공격할 때

병사들이 도시를 마음껏 약탈하도록 내버려뒀다.

 

당시 아틸라는 말했다.

 

아틸라

"앞으로 로마인들이 훈족의 이름을 1000년 동안 잊지 않도록

다시는 훈족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라며 자신들의 야만적인 행동을 

당당하게 변호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500년 뒤에 1900년,

 

중국에서 8개국 연합군(미영불러독오이일)

의화단 운동을 무참히 진압하며 

온갖 만행을 저질렀을 때의 일이다.

▲ 의화단 운동 (1899년)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아틸라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독일 병사들에게 전했다.

 

 빌헬름 2세

"앞으로 중국인들이 독일의 이름을 1000년 동안 잊지 않도록

다시는 독일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즉 아틸라가 시작한 야만 행위가

일종의 문화유산이 된 셈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한 야구선수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치로

 "앞으로 한국이 30년 동안 일본을 이길 수 없구나

라고 느낄 정도로 이겨버리고 싶다."

 

참고 문헌 : 유라시아 유목제국사(르네 그루쎄),

 

역사를 뒤흔든 7가지 대이동(중국 북경대륙문화 미디어)

 

 

  

<2>동고트족(488-538)

 

라틴어: Ostrogothi 또는 Austrogothi)은

동부 게르만족 중 하나인 고트족(다른 일파는 서고트족이다)의 일파(一派)로서, 로마 제국의 마지막 시기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민족이다.

 

이들은 타키투스 시대에 비스와 강 하류(下流)지방에 단일 부족 국가를 형성하고, 3세기까지 동남방으로 이동한 고트족 가운데 흑해 서북안(西北岸)에 정착한 게르만족의 일파이다.

4세기 후반 헤르만리크 밑에서 전성기를 이루고 370년경 동방으로부터 이동한 훈족의 지배하에 들어가지만, 아틸라의 죽음에 의하여 훈 제국이 와해되자 독립하여 457년 판노니아로 이주했다.

 

이어서 483년 테오도리쿠스 대왕 아래서 다키아, 모에시아로 옮기고, 488년 이탈리아에 들어가 전(全)반도를 정복, 동고트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동고트 왕국은 538년 동로마에 의해 멸망당했다

 

 

 

<3> 서고트 (554-721)

(고트족의 이동)

 

 고트족의 중요한 두 분파 중의 하나로 동고트족과 함께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이다.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 후기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고트족은 알라리크의 지도아래 410년 로마침공해 함락시켰으며 갈리아히스파니아에 이르는 거대한 왕국을 세웠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는 서고트 왕국은 약 2세기 반에 걸쳐 서유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편집] 역사

[편집] 기원과 이동

500년경 서고트 왕국의 세력도

서고트족은 원래 게르만족의 분파로 로마 제국의 변방에서 살고 있었다.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고트족의 일파중 서쪽으로 진출한 부족을 서고트족으로 부르는데 동고트족이 통일을 이루고 왕국으로 발전하는 중이었지만 서고트족은 상대적으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여러족장들이 지배하는 형태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이미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상당부분 문명화되어 있었다.

 

서고트족은 376년까지 다키아에 살았다. 하지만 376년 서고트족장 프르티게른 (376-380)은 훈족의 공격을 받고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제국으로 이주를 요청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발렌스는 이들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이주를 허락했지만 트라키아 속주 총독은 이들을 착취하고 괴롭혔다.

 

서고트족은 일부 동고트족과 함께 로마에 반란을 일으켜 발칸 반도로마 속주들을 약탈했고 급기야 378년 8월 9일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발렌스의 군대에 대승을 거두고 발렌스를 죽였다.

 

그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서고트족과 동맹부족 협정을 맺고 모이시아에 정착시키고 이들을 대거 로마군에 편입시켰다.

 

테오도시우스 1세 또는 테오도시우스 대제(라틴어: Flavius Theodosius, (347년 1월 11일~395년 1월 17일)은 379년부터 395년 죽을 때까지 로마 황제였다.

그라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동로마 제국을 다스릴 것을 임명받은 이후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죽은 후, 동로마와 서로마 모두를 통치한 마지막 황제였다. 그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동부와 서부로 완전히 분리가 고착화 되어 다시는 합쳐지지 않았다

[편집] 왕국으로 발전

테오도시우스가 죽은 이후 395년 족장인 25살의 알라리크 (395-410)는 부족을 이끌고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고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유린하였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알라리크에게 로마군 지휘관의 직책을 부여하여 이들을 무마하고 반달족 출신 로마 장군 스틸리코의 활약에 힘입어 고트족을 안정화시켰으나 그것도 잠시 알라리크401년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약탈했다.

 

아르카디우스와 스틸리코가 죽자 서고트족은 거침없이 이탈리아를 유린하고 410년에는 로마 제국의 심장부인 로마까지 점령하고 약탈했다. 로마 약탈을 피해 라벤나에 거주하던 호노리우스는 이때 서로마제국의 수도를 라벤나로 옮겼다. 같은 해 알라리크가 죽고 뒤를 이은 아타울푸스는 서고트족을 이끌고 갈리아 남부에 정착했다가 히스파니아로 옮겼다.

 

반달족이베리아 반도몰려오자 서고트족은 다시 갈리아 아퀴타이아로 밀려났고 418년 서방 황제 호노리우스는 이들을 그곳에 정착하게 하고 푀데라티를 맺었다.

 

이들은 451훈족의 영웅 아틸라가 침입하자 로마의 갈리아 총독 아에티우스, 프랑크 족과 함께 아틸라와 맞서 오를레앙 평원(살롱 전투)에서 싸웠고 453년 테오도리크 1세이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자신의 영토를 지켜냈다.

 

475년 유리크왕에 이르러 서고트족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왕국으로 선포했고 그 무렵 이 서고트 왕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다.

[편집] 이베리아 반도 장악

서고트 왕국은 반달족북아프리카로 몰아내고 곧 이베리아 반도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유리크의 뒤를 이은 아들, 알라리크 2세 프랑크 왕국클로비스 1세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서고트 왕국은 갈리아 남부의 영토의 상당부분을 빼앗겼다.

 

이후 서고트 왕국은 몇 개로 쪼개지고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밀려났고 511년에는 동고트 왕국테오도릭섭정 통치를 받기도 했다.

 

서고트 왕국은 톨레도를 수도로 삼아 셉티마니아와 히스파니아 대부분 지역을 다스리고 711년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입할 때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주도적인 왕국으로 지배했다.

[편집] 서고트족의 왕

[편집] 족장 시대

[편집] 톨레도의 아리우스 기독교 왕조

[편집] 톨레도의 가톨릭 왕조

 

<프랑크 왕국>

파일:Frankish Empire 481 to 814-en.svg

481년부터 814년까지의 프랑크 왕국 지도

 

프랑크 왕국(라틴어: Regnum Francorum. 이태리어: Regno franco. 독어: Fr?nkisches Reich. 영어: Francia, Frankland 또는 Frankia. 불어: Royaume des Francs)은 5세기 말 게르만족의 한 부족인 프랑크족이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지역에 세운 왕국이다. 이 왕국은 현재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형성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프랑크 왕국은 비잔티움 제국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의 동고트족과 아프리카의 반달족을 격멸하고, 아랍인이 에스파냐서고트왕국을 제거한 와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존속·확장한 게르만족의 정치체제였다.

 

[편집] 건국 배경

부르군트족의 왕녀 클로틸드와 함께 클로비스 1세의 네 아들 사이에서 프랑크 왕국을 분할하는 모습.

프랑크 왕국이 수립된 5세기 말은 서로마 제국476년에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고, 걸림돌이 사라진 서유럽으로 게르만족이 대거 이동하면서 국가를 수립하던 혼란의 시기였다.

 

게르만족이 갈리아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부족 단위로 대규모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 게르만족의 대이동은 동쪽으로부터 훈족이 압박해온 것이 이유였지만, 로마 제국이 더 이상 이들을 막을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게르만족들은 이동 후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등은 멸망하였고, 부르군트족부르군트 왕국백년 전쟁 후에 프랑스로 통합되었다.

게르만족의 그 흔적을 남긴 것은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과 앵글로-색슨족잉글랜드 정도이다.

 

한편,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은 5세기 중엽에 가장 세력을 떨쳐 아틸라의 지휘 아래 서쪽은 라인강에서 동쪽은 카스피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지만, 453년 아틸라가 죽은 후 왕자들의 분열과 게르만 여러 부족의 반란으로 훈 제국은 무너지고, 다른 민족에 동화됨으로써 전통이 사라져 버렸다.

 

반면에 프랑크족은 기존의 근거지였던 라인강 하류 지역을 계속 유지하면서 부족의 세력권을 근접한 지역에 자신들을 이동이 아니라 복사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기존 게르만계 중소부족을 통합하고, 갈리아의 원주민인 로만-갈리아인들을 통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훈족의 쇠퇴 이후, 프랑크족은 클로비스 1세메로빙거 왕조를 개창하면서 481년에 왕국을 수립하게 된다.

[편집] 역사

[편집]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영토 변화.

 

프랑크 왕국의 첫 번째 왕조인 메로빙거 왕조481년에 시작되었다. 훈족이 쇠퇴하고 기존에 강력한 경쟁자들이 스스로 멀리 머나먼 땅으로 이동한 공백기를 이용하여 수립한 것이다.

 

클로비스 1세는 왕국 수립 후 갈리아를 침략하였다. 이전에 게르만족의 침략은 단순한 약탈이 위주였지만, 클로비스는 정복을 목표로 했다. 수아송 전투에서 로마 제국의 마지막 남은 세력을 분쇄하여 갈리아를 장악하게 된다. 이후 방향을 돌려 라인강 동쪽 지역을 침략하여 알레마니족(에스파냐어에서는 독일을 알레만이라고 부른다) 정복하던 중인 506년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이로써 기존에 정복했고, 지금은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해야 할 갈리아의 협조를 손쉽게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클로비스는 일련의 군사적인 승리를 통해 기존 로마 세력, 경쟁적인 게르만계 왕국, 중소 게르만부족의 통합을 통해 갈리아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후 메로빙거 왕조의 국왕들은 별 볼일이 없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게르만족의 관습인 분할 상속이었다. 나중에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중프랑크로 갈리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한 이 분할상속 원칙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똑같이 분할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의 왕국을 개인의 재산 내지는 사유물 정도로 생각하여 똑같이 이 원칙을 적용한 결과, 왕국은 왕의 아들들과 그 아들들 사이에 계속 분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국왕의 권력과 권위는 점점 떨어졌고, 모든 실권은 궁재대신이 차지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751년 궁재대신 피핀이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국왕 힐데리히 3세를 몰아내고 그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서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게 된다(로마 제국처럼 국가는 그대로이고, 왕조만 교체된 것이다. 왕조 교체가 곧 국가의 교체였던 동양과 다른 점이다).

[편집] 궁재

왕으로서의 실권을 행사한 최후의 메로빙왕 Dagobert(629년 - 639년)이후 왕권은 유명무실해지고, 분할된 프랑크 왕국의 각 지역에서 우세한 실력을 장악한 귀족가문의 대표가 궁재(宮宰, Major domus, Mayor of Palace)로서 사실상 왕권을 대행했다.

 

이들 중 프랑크 왕국의 동북부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가문이 비약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 가문은 한 때 그 출신으로서 두드러진 인물이었던 메츠의 주교 아르눌프(Arnulf)의 이름에 따라, "아프눌핑거(Arnulfings)" (아르눌프의 집안이라는 뜻)로 불렸으나, 나중에 이 가문출신의 인물 중 가장 걸출한 카롤루스 마그누스(Carolus Magnus, 프랑스어- L., Charlemagne, 독일어-Karl der Große)의 이름에 따라 "카롤링거 가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가문은 일찍이 아우스트리아(Austria)의 궁재직을 세습하였고, 게르만족의 방식대로 comitatus에 의거하여 자신만의 무장 세력을 보유했다. 나아가 헤리스탈의 피핀687년 네우스트리아지방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부르군트를 포함하여 사실상 프랑크 왕국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아들인 카를 마르텔 (프랑스어:Charles Martel, 독일어:Karl Martel, 714년 - 741년)은 732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서유럽으로 쳐들어온 이슬람의 침입을 저지했다. (투르-프와티에 전투를 보라). 특히 그가 이슬람의 기병에 맞서 단행한 일련의 군제 개혁은 서유럽에서 기사 제도와 봉건 제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한 계기를 이루는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카롤링거 가문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들의 대교회정책이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고위급 성직(주교 등)으로 보상받았으며, 카를 마르텔은 스스로가 로마 교황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점은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 이후 서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우선 그 첫 번째가 단신왕 피핀메로빙거 왕가의 유명무실한 왕 대신에 프랑크의 왕으로 추대하는 쿠데타를 승인한 일이다. 이로서 왕의 정통성은 "교회의 허가"(santification)에 근거를 두는 선례가 마련되었다.

[편집] 사회와 문화

메로빙거 왕조는 왕가의 골육상쟁으로 내부적으로 쇠약해졌다. 특히 말기에는 무능한 왕이 귀족의 세력을 제어하지 못하여 왕권은 유명무실한 지경에 이르렀다. 메로빙 가문의 왕권이 쇠퇴하는 데는 분할상속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 즉 국가는 왕, 또는 왕가의 사유재산이었다.

 

프랑크 왕국은 사실상 3개의 단위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그 하나는 파리 시주변, 북서부 프랑스를 포괄하는 네우스트리아, 또 하나는 라인강 중·하류의 이동지방을 포함하여 게르만적 요소가 우세한 북동부 지역의 아우스트라시아, 끝으로 남동부의 부르고뉴였다.

 

실제로 왕권이 주민에 직접적으로 미치는 범위는 대단히 제한되었고, 각 지역에 실재하는 귀족의 세력이 강화되었으며, 국가권력(또는 정부)보다 교회가 주민의 생활에 보다 더 안정적인 질서를 제공하는 지경이었다. 서양 중세의 봉건 제도가 이미 정착되가는 중이었다. 왕권이 다시 강력한 지위를 갖게 되기까지는 약 천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프랑스는 백년 전쟁 이후에 가능했다. 소위 말하는 절대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왕권이 귀족세력을 확실하게 누르고 절대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주민들의 생활양식을 보면, 그렇지 않아도 로마제국말기에도 희박한 밀도로 존재했던 도시가 더욱 쇠퇴하여, 농촌적인 생활양식이 우세했다. 한편 노예를 구사하는 로마제국의 대농장 체제가 소멸되고, 주민의 대다수는 농민이되 이들의 신분적 처지는 노예의 경우보다 다소 상승했다. 한편 게르만 족이 이전에 누렸던 자유로운 신분적 지위 역시 상실하여 예속적인 농민의 신분으로 서서히 변모했다. 일부는 하급 기사 게급으로서 지배세력으로 흡수되었다.

 

약한 왕권과 강력한 귀족 및 지방 지배 세력, 그리고 농노화는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서유럽의 혼란상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게르만족의 이동과 그에 따른 약탈을 로마 제국이 지켜주지 못하자 지방 농민들이 유력한 집안에 땅과 자신들을 제공하고 보호를 위탁하면서 (또는 그 반대로 유력한 집안쪽에서 제안을 했던지) 상호 작용을 일으키며 점차 폐쇄적인 농촌 중심의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 도시와 상공업은 쇠퇴하였다. 치안이 유지되지 않는 상태에서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를 잇는 상업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메로빙거 왕조 치하에서 이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실제로 도시와 상공업은 명맥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다시 발전하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세월을 필요로 했다.

 

사회의 지배층인 귀족 역시 두 개의 계통에서 형성된 이질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었다. 즉 일부의 고(古)게르만 귀족가문로마화된 갈리아의 귀족가문 이 주요 성분이었다. 그 위에 소수의 왕족이 더욱 두드러진 지위를 차지한다. 이들에게는 나중의 귀족에게서 보이는 바와 같은 장자상속의 확고한 관습도 존재하지 않았었고, 남성의 우월한 지위도 확립되지 않았었다. 귀족의 지위는 여게(女係)를 통해서도 계승이 될 수 있었다. 가톨릭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남성의 우월적 지위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일정한 귀족 가문명도 정비되지 않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카롤링거 왕조말까지, 중세초기의 귀족들은 가문명(family name)이 없이 하나의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예: 카를(Karl), 외도(Odo), 우도(Udo) 등등. 귀족들이 일정한 가문명을 갖게된 것은 11~12세기 이후의 경향이었다.).

[편집] 카롤링거 왕조

[편집] 피핀

751년, 카를 마르텔의 지위를 계승한 피핀 3세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새로운 왕이 왕이 되었다. 이 쿠데타는 교황과 제휴하여 무혈로 이루어졌고, 폐위된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은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왕이 되고자 했던 피핀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귀족의 신분으로 전(前) 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면, 다른 대귀족들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란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통성이 없이 힘으로 권력을 장악한 집단에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것이다.

 

고려 무인정권 시대가 그러했으며, 로마 제국의 군인 황제 시대 (1년간 4명의 군인 황제가 등장했다가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이런 상황을 정리했다)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교황과 제휴를 했다지만, 보다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해줄 뭔가가 필요했고, 이탈리아와 서로마교회를 예의주시하였다.

 

이 당시 서로마교회의 수장 교황 스테파노 2세비잔티움 제국과 성상숭배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북쪽에서 롬바르드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피핀은 이 점에 주목했다. 마침 스테파노 2세가 롬바르드족과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군사적 보호를 요청해오자 피핀은 자신이 프랑크 왕국의 국왕임을 인정해달라는 제의를 하였다.

 

로마 교황청의 입장에서야 상관없는 문제였므로 두 권력자의 이해는 합치될 수 있었다. 결국 751년,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국왕을 폐하자 스테파노 3세는 사절을 통해 수아송에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유의식) 그가 국왕임을 선언하였고, 이어 754년에는 교황 자신이 직접 방문하여 생드니수도원에서 그의 두 아들들에게 역시 기름을 부었다. 이 의식은 성경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격퇴하고,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를 교황청에 헌납하였다. 이것이 교황령의 시초이다.

 

이로써 새로운 카롤링거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교회와 야합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국왕은 영토를 기증한 댓가로 주교직에 대한 임명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서임권 분쟁의 원인이 된다.

[편집] 카롤루스 대제

카롤루스 대제피핀의 아들이며, 계승자였다. 그는 중세의 전 시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유럽의 탄생과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후 유럽 통합 운동이 일었을때 이 인물이 언급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이며 비서였던 아인하르트(Einhard)의 전기(Vita Caroli)로 비교적 상세한 프로필이 전해지고 있다. 아인하르트는 그의 전기에서 카롤루스의 외관, 일상생활, 궁정생활을 묘사하고, 기독교 군주이자 학문을 애호하는 군주로서 면모를 드러내려고 애썼다. 이것은 아직도 카롤링거 왕조의 권력이 완전하지 않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괴벨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이름이 여러가지로 불리는 것도 카롤링거 왕조까지는 독일과 프랑스의 공통 역사라는 점을 보여주는 점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생애의 상당기간을 군사 원정으로 보냈다. 그의 치세 초기에 프랑크왕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라인강 하류에서 중상류에 이르는 지역(라인강 서부)을 포괄했다. 이 지역의 동부외곽에는 작센족(Sachsen)이 전혀 별개의 독립 세력으로 존재했었고, 남동부의 바이에른 지방은 느슨한 종속적 유대로 프랑크 왕국과 결합되어 있었다.

[편집] 왕국의 분열

파일:Carolingian Empire map 1895.jpg 

843년베르? 조약 이후 3개로 나눠진 프랑크 왕국.

 

843년, 베르? 조약으로 카를 대제의 손자인 루트비히 경건왕의 세 아들이 카롤링거 제국을 세 왕국을 동 프랑크 왕국, 중 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으로 분할하였다. 이 조약으로 카를 대제가 세운 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했으며, 서유럽의 세 근대국가인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모태가 탄생하였다.

 

870년, 루트비히 2세와 카를 2세는 메르센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크 왕국은 사실상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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