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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Luxembourg, 룩셈부르크 대공국, Grand Duchy of Luxembourg)
유럽 대륙 북서부에 있으며, 유럽에서 작은 나라 중의 하나이자, 북해 연안 저지대 국가들 중의 하나.
정식 명칭은 룩셈부르크 대공국(Grand Duchy of Luxembourg)이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하며, 면적은 2,586㎢, 인구는 57만 252명(2015년 기준), 수도는 룩셈부르크(Luxembourg) 시이다. 남북 최대 길이는 82km이며, 동서 최대 길이는 56km이다. 화폐는 유로이다. 대체로 중공업·국제무역·은행업에 기반을 둔 선진시장경제이며,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높다. 문맹률은 아주 낮고, 15세까지의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북쪽과 서쪽으로 벨기에, 남쪽으로 프랑스, 동쪽으로 독일과 접한다. 독일과의 동쪽 국경은 우르 쉬르, 모젤 강들에 의해 형성된다.
-자연환경
지형적으로 뚜렷이 구별되는 2개 지역으로 나뉜다. 이 두 지역은 이 나라의 1/3을 차지하는 북쪽의 외슬링(Oesling)과 남쪽의 봉페이 혹은 구트란트(Gutland)이다.
프랑스어 봉페이와 독일어 구트란트는 모두 '좋은 땅'을 뜻한다. 외슬링은 빽빽하게 삼림이 들어찬 평균고도 400∼490m인 아르덴(Ardennes) 산맥의 동쪽으로 뻗은 연장부인데, 깊은 강이 흐르는 계곡들로 팬 높은 고원을 형성하고 있다. 최북단에 있는 높이 559m의 부르크플라츠(Burgplatz)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다. 비교적 얕고 척박한 토양이지만 염기성 슬래그 비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개발했고, 보리·귀리·호밀·감자 등을 생산한다. 언덕 비탈의 풍부한 목초지에서는 육우가 사육되며, 숨은 듯한 골짜기에서는 약간의 낙농업이 이루어진다.
평균고도 274m의 기복이 있는 봉페이 고원은 파리 분지의 북동쪽 연장부이며, 20∼35%의 철을 내포하고 있어 유럽에서 가장 풍부한 철광석층의 하나인 사암 준령이 특징이다. 발달한 철강공업에 의해 풍요한 생활을 누리고 있고, 총수출의 90%를 철강제품이 점하고 있다. 농경지는 북쪽보다 이곳이 더 비옥하며, 밀·과일·포도들을 고도의 기계화된 농법으로 재배한다. 전체 토지 면적의 1/3에 못미치는 수림지는 약간의 침엽수·관목덤불숲·잡목림과 함께 거의 낙엽수이다.
기후는 습도가 높은 해양성과 대륙성기후 사이의 과도기적인 온대의 온화한 기후이다. 연평균 기온은 8℃이며 평균 강우량은 810㎜이고, 아르덴 산맥의 높은 곳에서는 눈이 내린다.
-역사
BC 57∼50년의 로마 정복 시기에 벨기에 종족인 트레베리족이 거주했다. AD 400년 이후 게르만족이 이 지방에 침입하여, 이곳은 프랑크족의 아우스트라시아 왕국과 나중에는 샤를마뉴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843년 이 지역은 3부분으로 분할되었고, 963년에는 아르덴 백작 지그프리트(Siegfried) 밑에서 독립체가 되었다. 지그프리트의 후손인 콘라트가 1060년 룩셈부르크의 백작 칭호를 얻었고, 그의 후계자들은 결혼을 통해 소유령을 확대했다.
룩셈부르크 백작인 하인리히 4세는 1312년 하인리히 7세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후 보헤미아를 덧붙인 세습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1443년까지 백작령 및 공작령으로 존속되어 오다가 1443년 부르군디(Burgundy) 공작에 의해 점령당한 뒤, 이 지역은 부르고뉴가에 넘어갔다. 16세기초에는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았고, 16세기 후반에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일부가 되었다.
1701∼14년의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뒤이어 스페인령으로부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지배 밑으로 들어갔다. 1815년 빈회의에서 룩셈부르크의 지위가 종전의 공국에서 대공국으로 승격되는 동시에 독립이 부여되었으나, 네덜란드 국왕이 대공을 겸하게 되고 프로이센(프러시아) 군대가 주둔하게 되어 네덜란드와 프로이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1830년 벨기에인들이 네덜란드 빌렘 1세의 지배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룩셈부르크의 대부분이 합세했다. 이 반란 이후 룩셈부르크는 벨기에와 네덜란드에게 각각 분할되었다. 네덜란드에 속했던 부분은 1867년까지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는 대공국이 되었다.
1867.1.1 독립하고 유럽 강대국들의 런던조약에 의해 영세중립의 지위를 얻고 프로이센 군대가 철수하였으며, 1868.10.17 헌법을 제정하였다.
1890년에 네덜란드 왕 윌리엄(William)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함에 따라 독자적 왕가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공국은 나사우가로 넘어갔다. 1890년 대공국은 나사우-바일부르크의 아돌프 공에게 넘어갔는데, 그의 아들 빌헬름이 그를 계승했다(1905).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는 1914년 독일에 점령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19년 공국의 해방후 빌헬름의 맏딸은 자매인 샤를로트(1919∼64)를 위하여 공의 지위를 포기했다.
1921년 벨기에와 경제동맹을 맺었고,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공국은 다시 독일군에 점령되었고, 대공 가족은 영국으로 도피했다. 1944년 해방된 후 중립노선을 포기하여, 1949년 NATO에 가입하고 나서 유럽경제공동체(EEC)에도 참여했다. 1964년 장 대공은 그의 어머니를 계승했다.
룩셈부르크의 국가권력은 삼권분립에 의해 행사되나 입법과 행정의 분립은 여타 국가에 비해 불분명한 편이다. 대공은 국가원수로 수상 및 각료를 임명할 수 있다. 앙리(Henri) 대공이 2000년 10월 즉위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도좌파를 자처하고 있고, 194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1867년 런던회의에서 영세중립국이 되었으나 1948년 이를 포기하였고, 유럽연합(EU)·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협력을 기조로 하여 유럽의 통합을 가장 중요한 대외정책의 하나로 삼고 있다. 또한 베네룩스동맹을 통해 네덜란드·벨기에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국민
1980년대 초기에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사실상 0%였고, 출국이민 수와 입국이민 수가 대충 비슷했다. 1980년대 초 이후 인구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해 1980년 364,200명이었던 인구는 2000년 436,300명까지 증가했다. 2018년 추산 인구는 590,321명, 인구밀도는 228명/㎢이다. 전체 인구의 90.43%가 도시 지역에 거주하며, 16%가 15세 미만이다.
여러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민족은 룩셈부르크인이 63%, 독일인, 포르투갈인 13%, 프랑스인 4.5%, 이탈리아인 4.3% 등이다. 켈트족·리구리아인·로마인·트레베리족·프랑크족 등이 선조이다.
언어는 룩셈부르크어와 독일어·프랑스어가 사용되며, 게르만계의 레체부르크어가 공용어이다. 종교는 가톨릭교가 , 등이 이다. 로마 가톨릭 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아 87%이며, 대부분 루터 교회 신자인 그리스도교도들이 13%, 그리고 유대교도들이 약간 있다.
1980년대 초 약 6만 명의 외국인이 거주했는데, 이들은 광산업과 철강업체 또는 외국인 회사에서 일했다.
-경제
대체로 중공업·국제무역·은행업에 기반을 둔 선진시장경제이다. 아르베드사(ARBEDSA)가 지배하고 있는 철강업은 정부의 장려로 다변화를 위해 외국 회사들에 의한 투자계약을 했다. 국민총생산(GNP)은 1980년에 52억 달러였고,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하는 1만 4,510달러였다. 농업은 GNP와 노동력의 극히 적은 일부를 차지한다. 농장은 규모가 작고 고도로 기계화되어 있는 편이다. 농산물 생산은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 수요를 충족시킨다. 목초가 전토지의 1/4을 덮고 있으며, 모젤 골짜기에서는 유명한 포도주를 생산한다.
이 지역의 철광석층은 대부분이 고갈되어, 남부의 주물공장들은 차츰 프랑스에서 수입하는 철광석에 의존하고 있다. 코크스와 석유 역시 수입하고 있다. 제조업은 GNP와 노동력의 약 1/3을 차지한다. 공업생산량은 1974∼81년에 1/5 이상 줄어들었는데, 이 나라 최대의 고용업체인 ARBEDSA의 축소가 생산량 감소의 상당한 원인이 되었다. 코머셜하이드롤릭스사·제너럴모터스사·셸사·뒤퐁사·굿이어사·유니로열사를 포함한 미국의 여러 다국적 기업들이 이 나라에 공장을 열었다.
전력생산량은 1980년에 11억 1,500만㎾h였는데, 주로 수입된 연료에 의해 발전되며 1/4은 수력발전에 의해 얻어진다. 민간소유의 룩셈부르크대공국전력회사가 전기 분배를 조절한다. 1919년에 조직된 노동총연맹이 주된 노동조합이다. 1970년대 후반에 정부·노동조합·고용주들은 파업을 불법화시킴으로써 국가경제 발전을 촉진시키고자 시도했다. 수많은 근로자들이 프랑스·벨기에·독일로 통근한다.
100개 이상의 은행들이 룩셈부르크에 지점을 두고 있으며, 자산은 주로 미국 달러와 독일 마르크로 거래된다. 유럽 공동체(EC)의 유럽투자은행 본점이 있다. 룩셈부르크는 벨기에 중앙은행의 결정에 참여하며, 베네룩스 경제동맹에 가입해 있다. 대외무역은 EC에 의해 지배되는데, EC는 룩셈부르크 수입의 90%까지 공급하며 그중 대부분을 독일과 벨기에가 차지한다. 주요무역상대국은 독일·벨기에·프랑스 등이며, 그 가운데 독일은 1980년대 초반 룩셈부르크에서 수출하는 제품의 거의 1/3을 수입했다.
2014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639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1만 6752달러이다.
-정치와 사회
의회형태의 정부를 갖춘 입헌군주국으로 1868년 채택되어 1956년 수정된 헌법은 단원제 의회에 입법권을 부여한다.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의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직선으로 선출하는 임기 5년의 의원 59명으로 구성된 단원제이다. 주요 정당은 기사당, 사회당, 자유당, 녹색당 등이다.
21명으로 구성되는 국가위원회는 대공에 의해 임명되며, 본질적 기능은 2차적 입법기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나 의회에 비해 권한이 작다. 집행권은 대공에게 부여되어 있으나 총리가 이끄는 정부 위원회에 의해 행사된다. 사법부는 대공이 임명하는 판사들로 구성되는 대법원이 최고기구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며, 비교적 규모가 적고 지원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보유한다.
사실상 전인구에게 해당되는 사회복지제도는 고용인들과 고용주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 반관반민 기구를 통해 실시된다. 사회보장제도에는 의료보험·연금·산업재해보상·가족수당·실직수당 등이 있다.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비교적 높고, 평균수명은 70세를 약간 넘으며, 1인당 식품소비량은 1일 3,500㎈이다. 질병형태는 다른 선진국의 경우와 비슷하여 순환계 질환이 주요사망원인이다.
인구의 거의 대부분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6∼15세까지는 의무교육이다. 초등학교에서는 주요언어로 독일어를 가르치고 중학교에서는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등 전 교육과정을 통하여 어학과정을 매우 강조한다. 중등교육 대신에 3년제와 5년제 직업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4년제 대학이나 대학교는 없다.
1848, 1880년에 각각 창간된 오래된 일간지 2개와 발행부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일간지가 발행된다. 신문들은 일반적으로 정당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서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과는 달리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상업적인 민간회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문화
음악과 연극에서 훌륭한 작품들을 만드는 몇 개의 유럽 국가들 및 그밖의 나라들과 문화교환협정을 맺고 있다. 고유의 주요문화기관은 대공국 연구소로, 예술과 고전어 연구를 촉진하고 언어·민속·예술·문학·자연과학에 관한 전시회를 후원한다.
-우리나라와 관계
룩셈부르크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우방국으로 다른 베네룩스 제국과 함께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계속 지지해 왔으며, 6·25전쟁 참전국이기도 하다. 1949년 8월 우리나라를 승인하고, 1961.11.4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였으며, 2008년 현재 주 벨기에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친한단체로는 1973년 10월 발족된 한국·룩셈부르크 친선협회가 있으며,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1977년에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민간경제협력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우리나라와 룩셈부르크는 1970년 6월에 사증면제 협정을 비롯하여 1976년 9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투자보장 협정, 1978년 6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협력 협정, 1984년 11월 한국·룩셈부르크 이중과세방지 협약, 1987년 1월 한국·벨기에·룩셈부르크 해운 협정, 2003년 4월 항공 협정이 체결되었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룩셈부르크 수출액은 1200만 달러로 기타화학공업제품·반도체·제조용장비·타이어코드·센서 등이 주종목이며, 수입액은 5000만 달러로 동조가공품·도금강판·부직포·밸브 등이 주종목이다.
한편, 양국 간에는 1977년 5월 국회 6·25전쟁 참전의원친목회의 룩셈부르크 방문, 1982년 4월 한국·벨기에의원친선협회 우리 측 의원단의 룩셈부르크 방문이 있었고, 제24회 서울올림픽에는 14명의 룩셈부르크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2007년 현재 고려제강 산하 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13명의 한국민 교민과 49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2001.3.5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며, 2006년 현재 주 영국 대사가 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2014년 현재 북한의 대 룩셈부르크 수출액은 7만 8000달러로 의류가 주종목이며, 수입액은 없다.
룩셈부르크(Luxembourg, Letzeburg)
룩셈부르크의 수도.
알제트(프랑스어: Alzette , 룩셈부르크어: Uelzecht , 독일어: Alzig) 강과 지류인 페트루스(Petrusse) 강 위쪽 사암 고원에 있다. 알제트 강 굽이 안에 복이라고 부르는 암석 고대가 천연적 방어위치를 형성하고 있어 그곳에 로마인들과 나중에는 프랑크족이 요새를 세웠고 그 요새를 중심으로 주변에 중세도시가 발달했다.
이 시의 이름은 '작은 성채'라는 뜻이다. 대공 저택(1572), 시청(1830~38), 고딕식 건물인 노트르담 성당(1613~23)이 있는 옛 도시는 고원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후일 이 도시는 서쪽으로 확대되었고 아래쪽 골짜기에 그룬트·클라우센·파펜탈 등의 교외지역이 발달했다.
노트르담 성당에는 1346년 사망한 룩셈부르크 백작이자 보헤미아 왕이었던 맹인왕 요한의 묘가 있다. 이 요새는 점차 스페인·오스트리아·프랑스·네덜란드인들에 의해 더 정교하게 만들어져 지브롤터 요새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강한 요새가 되었고, 독일 연맹(1815~66)의 보루로서 프로이센인들이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이 요새는 1867년 방비가 철거되었다.
룩셈부르크 라디오 방송국이 있는 경치가 아름다운 공원이 옛 도시의 서쪽 가장자리에 전에 있었던 요새를 대신하여 들어섰다. 여러 박물관이 있으며, 클라우젠에는 16세기 때의 만스필트 성 유적지가 있다. 동쪽에 위치한 함에는 군인묘지가 있는데, 그곳에는 조지 S. 패턴 장군의 묘를 포함해 5,000명이 넘는 미국군인의 묘가 있다. 매년 2개의 축제가 벌어진다. 하나는 룩셈부르크의 성모 마리아를 기리기 위해 예수 승천 축일 전의 일요일에, 다른 하나는 1340년 이래 계속되어온 '텐트 시장'으로 늦여름에 열린다.
북부 교외지역인 아이히에는 남부지역에서 얻어지는 원광을 이용한 최초의 제철소(1845)가 있던 자리에 주철공장이 있다. 고도로 다변화된 공업체들이 교외에 집중되어 있다. 오랫동안 중요한 철도와 도로의 중심지이자 금융 요지였던 이곳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총위원회와 유럽 의회, 사법재판소, 유럽투자은행 등을 포함한 유럽공동체 소속의 여러 기관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