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Mona Lisa)」그림의 궁금한 것들
1) 모나리자 그림은 얼마나 할까요?
*하루 2만여 명이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해서 「모나리자」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나리자의 비밀을 간직한 신비
의 미소’를 보러 오는 것일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평생에 그린 20여 점의 그림 가운데 ‘최후의 만찬’과 함께 전 세계인이 주목을 받고 있는
「모나리자」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명작「모나리자」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 모나리자의 가격에 대한 여러 자료들이 나름대로 계산해서 나와 있지만, 어떻게 수긍할 수 있을까요? 참고로 적어
둡니다.
*한 자료를 보면 루브르 연간 입장객 수: 830만명(하루 22,000명)
*입장료: 15$
*수익률 또는 환원이률 5%로 계산해서 약 40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온 것이 있습니다.
참고로 2015년 2월에 사상 최고가격에 팔린 그림이 ‘폴 고갱’의 ‘너 언제 결혼하니?’가 약 3억 달러 (3,269억원)에
개인이 산 가격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크게 벗어나지도 않는다.
2) 그림속의 모델은 누구일까?
※오늘날까지 일치된 결론은 나오지 않았으며 여러 설이 있는데 두 가지만 적어 본다.
① 피렌체의 여인이 모델-
*레오나르도의 첫째 전기 작가인 ‘조르지오 바사리’에 의하면 ‘리자 게라르디니’라는 피렌체 여인이 ‘모나리자’의 모델
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피렌체의 비단장사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이며, 상인의 아들 ‘안드레아’의 출산을 기념
하여 이 작품을 의뢰했다는 것이다.
★ 2004년 이태리 학자 쥬세페 팔란티니는 이 모나리자가 1479년생으로 24세 때 레오나르도의 모델이 되었으며, 5명의
자녀를 낳고 1542년 63세로 죽어 상오슬라 수도원에 묻혔음을 밝혀냈다.
②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자신이 모델 ?
*뉴욕의 여류 예술가 ‘릴리인 슈워츠’는 컴퓨터 작업 중에 레오나르도와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컴퓨터로 합성한 결과
두 사람의 얼굴이 거의 일치 한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모나리자의 모델을 레오나르도 자신이었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레오나르도가 수년간 모델 없이 미완성 작품을 계속 그리다보니 자신의 얼굴을 모델로 삼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몇 가지 풍설이 더 있으나 생략한다.
3) 「모나리자」 그림의 재료와 크기는?
* 화판은 포플라 나무로 된 목판이며. 유채(안료에 기름사용)를 사용하였다.
* 작품 크기는 77×53cm이다. (20∼25호 사이정도)
1
4) 제작 연대는?
*재작 연대는 1503-1506(1507)년경이며 피렌체에서 시작하여 두 번째 밀라노 체류 시기에도 그렸으며, 죽기까지 10년
간 가지고 다녔던 그림이다.
5)「모나리자」가 미완성인 까닭은?
★그리던 중 여인(모델)이 남편 따라 외국 여행을 가서 그만 병으로 사망하여 더 이상 못 그렸다고 하는 풍설.
★레오나르도가 「모나리자」를 완성하지 못한 것은 레오나르도의 오른쪽 몸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라고 이탈리아 미술
사학자인 ‘알렉산드로 베초시’가 발표했다.
레오나르도의 오른쪽 팔에 붕대처럼 보이는 천을 감고 있는 초상화가 발견됐고. 레오나르드는 왼손잡이라 그림을
완전히 그릴 수 없게 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로 작업하는데 힘들 것이라며 이런 마비증세는 손가락 마비증세로
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6)「모나리자」는 왜 눈썹이 없을까?
★그 당시에는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 버리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이 여인도 눈썹을 모두 뽑아 버려서-
★학자 파스칼 코트는 미술 복원 중에 부주의로 눈썹이 지워졌을 가능성을 제기함.
★2009년 프링스 미술전문가가 특수카메라를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레오나르도는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유약을
여려 겹으로 특수처리 하였고 가장 바깥에 그러졌던 눈썹이 오랜 세월동안 화학반응의 영향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주장을 하였다.
7)「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까지 간 경로는?
(역사적 경로에 정확을 기하기 어려움)
*레오나르도가 미완성인 「모나리자」를 보관하다가 말년에 프랑수아 1세의 프랑스 왕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이사
하여 프랑스 왕에게 「모나리자」를 팔았다. 1500년대 초로 4천 에퀴에 사들인 왕은 그림을 퐁텐블로 성의 욕실에
걸려 두었다고 함. 그 후 여러 곳을 거쳐서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자신의 거실에 한 3년간 걸어두고 ‘마담 리자’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1804년 생-클루성(城)에 들렸다가 루브르 박물관으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8) 모나리자의 수수께끼 같은 미소라는 의미는 ?
모나리자의 표정이 웃고 있는 건지, 우울한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표정 때문이지요.
9) 모델의 기분전환을 위해 악단초빙-
모나리자가 모델을 하고 있을 때 안타깝게도 자식을 잃고 슬픔에 젖어 있을 때여서 네오 라르도는 광대와 악사를 불러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서 그녀를 웃기려 해를 썼지만 그 때 억지로 웃는 웃음이 바로 모나리자의 웃음이 된 것이라
는 설도 있다.
10) 모델의 질환
이탈리아 팔레르 모대 비토 프랑코 교수는 모나리자 지오콘도 부인의 건강이 좋지 않는 것으로 작품 속에서 나타
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모나리자가 왼쪽 눈꺼풀에 노랗게 지방이 축척돼 형성된 안검황색증이 보인다‘ 고 설명한 다. 그러면 원인은 지오콘도
부인의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동시대 내과의 들의 <모나리자>에 대한 병명 진단
모나리자에 대한 병명은 ‘갑상선 비대중’, ‘사시,’ ‘안면 마비증세’, ‘습관적인 이갈기’ 와 ‘근육의 비대중’, ‘기능저하증’
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11)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중에 스푸마토 기법의 작품,
*최후의 만찬. *그리스토의 세례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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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
그리스토의 세례 |
12) 레오날드 다빈치의 성격, 병력과 동성연애
*다빈치는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밑에서 자랐다. 그는 주의력이 산만한 예술가로 언제나 산만하고 빨리
싫증을 내는 일이 많다.
* 1515년 뇌졸증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의 집중력 장애(ADD)>
*그는 완성된 그림이 겨우 20여점에 불과하다. 조각도 미완성으로 손상되고 파괴된 것이다,.
*반면에 가장 많이 남은 것이 노트인데 악 1만30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분실된 것이 더 많을 것으로
본다,
*다빈치는 다른 네명의 청년들과 공식적으로 남색행위를 하여 고소당했다.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던 시절,
동성연애는 용인되었지만 남색행위는 불법이었다. 사형으로 다스려야 했으나 정치적관계로 혼방되었다.
13) 「모나리자」의 수난사건에 대하여-
①<모나리자> 도난과정
*100년 넘게 루브르 미술관에서 전시되어 있던 「모나리자」가 1911년 8월 22일에 사라 졌다. 그림이 사라
지자 박물관은 물론 휴관하고 프랑스 국경까지 폐쇄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범인은 전직 루브르직원인 빈센츠 페루자가 모나리자를 팔겠다고 프랑스 그림 상인에게 연락을 했다. 알고
보니 페루자가 그림을 청소함에 하룻밤 숨겨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코드속에 숨겨서 몰래 빼내간 것이었다.
② 범행 동기
페루자는 그림을 훔친 동기가범행 동기는「모나리자」를 조국의 품으로 돌려주고 싶다. 이탈리아의 문화재와
미술품을 약탈해 간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애국이라 여겨 2년 동안 조용히 보내다가 피렌
체 미술상에게 그림을 팔려다가 진품임을 확인받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후 1914년 「모나리자」는
루브르로 돌아가게 되었다
.( 도난 과중과 범인에 대한 기록도 조금 다른 것도 있다)
③모나리자그림이 도난당한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경위
모나리자의 도난사건1911년 8월 22일 화요일 아침 문을 열자마자 한 프랑스화가가 모나리자를 스케치하러
루불 박물관에 입장,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데로 갔었는데, 모나리자는 없고 빈 벽만 보였다. 화가는 경비에게
모나리자가 없는데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경비는 잘 몰라 박물관 담당에게 물어 보았다
④‘모나리자의 도난사건’에 연류 된 피카소
1911년 8월 22일에 일어났던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모나리자 그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 모나리자 절도 사건에 피카소가 연루되어 감옥까지 갈 번한 사연을 알아보자..
피카소의 친구인 시인 기욤 아플리네르가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벨기에 출신 친구 게리 피에르란 사람으로
1911년 루브르에 갔다가 허술한 경비의 눈을 피해 작은 돌에 새겨 만든 리베리아 조각상 두 점을 코드속에
감추어 나왔다. 이것도 두 번이나 훔쳤다고 한다. 게리 피에르는 훔친 조각상을 친구 시인 기욤 아플리네르
에게 주었고 아플리네르는 다시 피카소에에 선물하였다.
그 후 1914년 피에레가 경마에서 많은 돈을 잃자, 친구 기욤 아플리네르가 그를 구해 주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게리 피에르가 또 루불어 박물관에 가서 작은 조각상을 훔쳐서 감사의 표현으로 시인 기욤 아풀리네르
에게 주었다고 한다.
얼마 후 잃어버린 모나리자에 관한 소식이 신문에 대서특필로 나자, 게리 피에르는 그 상황을 이용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갖고 자신이 훔친 예술품을 신문사에 가져가서 훔친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자,
이 소식을 들은 경찰은 피카소와 기욤 아풀리네르를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나중에 이들의 적극적인 해명으로
모나리자 사건과는 관련이 전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석방하였다.<,옮긴 글>
14) 그 외 각종 사건
①산을 뿌린 사건
+1956년 신원미상의 사람이 산을 모나리자에 뿌려 그림 하단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②돌맹이를 던진 사건
*1956년 12월 30일에 「모나리자」의 팔굼치에 돌맹이가 날아 왔댜. 범인은 볼리비아 ‘빌레 가라’라는 남자가
돌을 던진 것이다. 범행 동기는 비록 경찰서 유치장일망정 따뜻한 곳에 서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는 것이 간절
한 소망이라고 했다.
③찻잔을 던진 사건
*2009년 8월 2일 한 러시아 여성이 찻잔을 모나리자를 향해 던졌다. 방탄유리 상자에 들 어 있어 해를 입지
않았지만 이 여성은 체포되어 정신질환 유무와 동기를 알아보았다.-5-
동기는 프랑스 국적을 못 받아 화가 나서 그랬다고 했다. 정신질환은 이상이 없고 그 후 석방되었다.
15) 「모나리자」의 해외 나들이(전시)는 딱 두 번.
①1963년 미국 워싱턴과 뉴욕에서 순회전시.
해외 전시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1961년 케네디의 프랑스 방문 때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가 재클린의 매력에 빠져, 미국 전시 약속을 해버렸기 때문에 이 전시
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미국 순회전시를 위한 보험에 1억불로 감정하였다.(현가 약 6 억 7천만 달러)
②1974년 4월에 일본 도쿄에서 전시.
당시에 이번 일본전시가 해외전시로 마지막이라고 프랑스 정부가 선언했으며, 일본 전시 때 4천3백만 달러의
보험에 들었고. 1974년 4월 17일 일본에 도착하자 국빈대우로 30여명의 무장경호를 받으며 장갑차로 박물관
까지 수송하였다.
19일부터 관람시에 3명이 한 줄로 서서 16초씩 관람하도록 제한하였다고 한다.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과 각종 재해방지를 위해 방탄유리로 씌워진
신세가 되었지만, 하루에도 2만여 명의 방문객이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와서 모나리자를
보는 것이다. 이 그림은 미완의 명작, 표정의 수수께끼, 배경의 언발런스, 보는 이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준 스푸마토 기법, 긴장과 감정이 함축된 작품으로 인류 역사상 제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불후의 명작으로 온갖 명예를 독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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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날드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에 대한 여러가지 궁금한 것들?
崔相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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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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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우회(대구교대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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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두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