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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요한 19,25-27
돈만 많이 주면 출산율이 높아질까?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받으신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모님 고통을 보답해 주시는 것처럼 요한을 당신 아들로 주십니다.
십자가 신학에서는 예수님은 교회의 신랑이시고 성모님은 신부이시며 요한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기 위해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교회를 낳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라 불림을 받으십니다.
이것은 성모님께서 고통받으신 것의 보답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편하게 지내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여 하느님 자녀들을 낳으셨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당신 자녀들을 보시며 참으로 행복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에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더 큰 행복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를 더 낳으라고 하면 어머니들은 ‘당신이 키워줄 겁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만큼 한 자녀를 더 낳는 것은 큰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출산율은 전세계 최하위입니다.
2020년 우리나라 출산율은 0.84명입니다.
OECD 국가 중 출산율 1.0 이하인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현 속도로 가면 2100년경 총인구는 1650만 명대로 쪼그라들고 2300년경이면 100만 명도 안 돼
사실상 국가의 소멸입니다.
옥스퍼드 인구문제연구소 데이비드 콜먼 박사는 우리나라 저출산 문제를 연구하고 코리아 신드롬이란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지구촌에서 사라지는 최초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극도로 아기를 낳지 않는 이유를 대부분은 돈이 많이 든다는 것에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주택정책과 교육을 위한 재정지원 정책으로 어마어마한 액수가 매년 투자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집값만 더 오르고 사교육비는 더 증가합니다.
그리고 출산율은 계속 곤두박질칩니다.
그런데 유럽 나라들은 이런 정책들을 하지 않을까요? 합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효과가 없고, 외국은 효과가 있다는 그 차이입니다.
오늘 성모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고통이었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아닌 성모님은 이런 고통을 감내하시길 원하셨을까요? 돈을 많이 줘서였을까요?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자녀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고통을 함께할 어머니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고통에서 자녀를 많이 낳게 만드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이나 마더 데레사와 같은 분들은 많은 하느님 자녀를 낳으신 분들입니다.
그들은 왜 그런 고통을 감내하셨을까요? 단순합니다. 하느님을 알아 행복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정글 지역에 있는 개신교 학교에 매우 보기 흉한 소녀가 찾아왔습니다.
흉한 몰골의 그 소녀는 코가 없는 기형아였고 심지어 지적장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학교의 교감은 그를 환대하고 학교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학교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래 몇 마디를 배우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코 없는 소녀가 가진 유일한 소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되지 않아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의 반대로 더는 소녀를 가르칠 수 없었고
그래서 교감은 그 소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녀는 슬퍼하며 다시 정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렇게 소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습니다.
2년 후, 한 선교회에 정글 마을로부터 복음을 전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의 편지가 왔습니다.
선교회는 그 마을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선교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언덕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오자 몇몇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여 주민 가운데로 인도했습니다.
선교사는 먼저 찬양을 하나 가르치기로 하고 간단한 합창을 하나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300여 명의 원주민은 “우리도 아는데요.”라고 말하며 찬양을 함께 불렀습니다.
선교사는 너무나 놀라 다른 찬양을 불렀는데 역시 그 찬양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배우셨나요?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에요.”
선교사는 놀란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고, 그들은 한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습니다.
바로 학교에서 쫓겨난 후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진 그 소녀였습니다.
그녀는 지적장애인이었지만 자신을 받아준 학교에 대한 감사를 느꼈고 자신이 외운 찬송가를 자기 마을에서 매일 부르고 다녔던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든 그날그날의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누구는 그 같은 고통 속에서도 아이를 더 낳고 누구는 낳지 않으려 합니다.
어쩌면 나와 똑같이 불행한 아이를 더는 낳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많이 낳게 하려면 나라가 나서서 내가 낳는 자녀가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될 확신을 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도 자녀를 낳지 않으면 이율배반이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현재 어느 나라가 가장 출산율이 높을까요? 항상 우리나라와 비교되는 이스라엘입니다.
2018년 기준으로 이스라엘이 3.09명이고 그다음이 멕시코 2.13명입니다.
그리고 터키가 1.99명, 프랑스가 1.84명입니다.
꼴찌에서 두 번째가 스페인인데 1.26명이고 한국이 당시 0.98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2위 멕시코와의 격차도 상당합니다.
이렇게 가면 이스라엘은 미국처럼 커지고 한국은 지구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복지가 좋을까요? 당연히 좋습니다. 정년이 68세이고 아기를 더 낳으라고 갖은 장려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와 문화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이라는 자존감이 있습니다.
그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문화 안에서는 자신만 그 행복을 누리고 그래서 또 다른 하느님 백성을 낳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텔아비브에 유학해 23년째 거주하는 한국 여성 정자은 씨(44)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아이가 삶에 중요하다는 종교적 믿음이 있고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은 수치스러워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출처: ‘출산율 이스라엘 1등, 한국 꼴찌 왜?’, 김세형, 매경 칼럼)
내가 낳은 자녀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광스럽게 빛나게 될 것을 믿는다면, 그런 확실한 태몽을 꾸었다면 그 아이를 낳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도 그렇게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자녀 낳는 고통을 거부하는 이유는 고통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보다는 그 고통에 대한 확실한 보답이 있을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봐야 나처럼 고통만 받으며 살 것 같으니, 자녀가 왜 나를 낳았냐고 원망을 할 것 같으니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만이 자신과 같은 행복한 사람을 낳기 위해 고통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자존감’과 비례합니다.
출산율을 높이려고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부어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으로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냐는 정체성으로 높아집니다.
이는 진화론이 팽배한 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진화론 안에서 우리는 그저 유전자를 나르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낮은 자존감과 행복감 안에서는 나의 생존이 우선이지 나의 불행을 이어받을 자녀를 낳기 위해
고통을 감내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아무리 선교를 강조해도 선교하지 않을까요?
선교를 강조하며 억지로 고통을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행복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이 행복을 느끼게 하려고 시키지 않아도 선교할 것입니다.
더 많이 낳게 하려면 그 낳는 사람이 태어난 자녀가 자신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자신이 느끼고 있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요한 19,25-27
차라리 내가 대신 저 십자가에 매달렸으면!
십자가형이 집행되고 있던 골고타 언덕의 상황은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또 다른 두 명의 사형수들이 흘린 피로 사방이 피비린내로 가득했습니다.
사형수들이 극도의 고통으로 인해 내지르는 비명과 신음 소리가 골짜기 전체에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백인대장의 감독 아래 사형을 집행한 로마 군대 소속 병사들은 총 4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형수들의 목숨이 떨어질 때 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사형수들이 빨리 죽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겠지요.
그래야 사형 집행에 대한 수고비조로 죄수들이 입고 있던 옷을 일당으로 받아들고 퇴근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는 무심한 얼굴로 옷의 분배에만 골몰하고 있던 네 명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또 다른 네 명의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병사들과는 대조적으로 슬픔으로 가득한 네 명의 여인,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애제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이 사람들, 특히 성모님께서는, 극심한 내적인 고통을 겨우겨우 참아내며 끝까지, 용감하게 십자가 아래 서 있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대신 저 십자가에 매달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지금 겪고 계시는 고통에 영적으로 긴밀히 참여하며,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을 겪는 순간, 숨이 떨어져가는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남겨질 교회와 양떼인 우리를 걱정하십니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 감당하기도 힘겨우실텐데, 자신에게 휘몰아쳐오는 광풍과도 같은 괴로움에 대해서는 일말의 표현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자신이 떠나신 후 남겨질 사랑하는 사람들을 염려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복음 19장 26~27절)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를 새로운 모자 관계로 연결시켜주셨습니다.
남겨질 신앙 공동체를 위해 성모님은 중개자 역할, 즉 교회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지속해나가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 교회 공동체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그분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성모님의 존재로 인해 모두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신앙 안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어머니 안에서
새로운 영적 가족으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9월 15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모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 ...가 서 있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낸 바로 다음날에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 머물러 계신 성모님을 만납니다. 교회가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으신 예수님의 성심을 경배하는 "예수 성심 대축일" 바로 다음날에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인류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의 순종과 성모님의 믿음의 순종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찔리리라."(입당송)
마리아의 고통은 이미 시메온에 의해 예견된 것이었습니다. 영혼이 칼에 찔리는 고통은 대부분 이스라엘에서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된 아들로 인한 것이었지요. 출산 후 이집트 피난이나 베들레헴의 아기들 학살은 물론이고, 공생할 초기 나자렛 회당에서의 위기,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 유다인들의 배척, 종교 기득권자들과의 갈등 등등 마리아는 예수님 생애 내내 크나큰 심적 고통을 안고 사셨을 것 같습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그런데 그 고통이 절정에 달한 순간에, 아드님께서 어머니를 "여인"이라 부르시면서 인류를 어머니의 아들로 맡기십니다. 어쩌면 또 다른 고통의 씨앗들을 어머니께 왕창 안기신 것이지요.
우리 인간을 고통의 씨앗이라 표현하다니 좀 심하게 들리나요? 이는 인간의 존엄함과 소중함을 부정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좀 강하다 싶은 표현을 통해, 영적 육적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품고 양육하는 모든 여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아는 육으로 아들 예수를 잉태해 낳아 기르셨고, 죄에 오염되어 갈곳 몰라 하는 모든 인류를 영으로 잉태해 품고 기르십니다. 마리아의 모성은 이천 년 전 어느 한 시기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이가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을 얻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이 세상에 현존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9)
고난과 순종, 인내와 기도, 경외심과 의탁... 예수님의 삶은 마리아의 그것과 놀랄만큼 닮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리아를 그리스도인의 탁월한 모범이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건, 그분이 신이라고 우기는 게 아니라, 하느님 구원 계획에 순종하여 아드님 생애의 희로애락을 온전히 당신 것으로 받아안으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주님을 따라야 하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주님을 투명하게 보여 주는 본보기시니까요.
"당신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죽음 없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셨나이다."(복음 환호송)
가슴이 아리도록 아픈 고백이지요. 사실, 사형수로 몰려 무죄하게 죽임을 당하는 아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목숨이 어찌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리적 죽음만이 순교가 아님을 마리아께서 가장 먼저 증언하신 것입니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십자가 아래서 담대히 아들을 지키신 마리아께서 지금 우리 곁에서 우리의 고통에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우리를 맺어 주신 순간부터 마리아의 관심사는 이 세상의 모든 자녀들, 바로 우리가 되었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이 세상을 살아가느라 지치고 부서지고 깨진 우리의 고통을 모르시지 않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어머니를 내어주십니다. 목숨과 살과 피를 다 내주시더니 어머니까지 주신 겁니다. 당신이 어머니의 사랑과 지혜로 양육되었듯 우리도 담대하고 믿음 깊은 어머니 품에서 생명과 힘과 용기를 얻길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어머니는 '그것도 못 견디느냐'고 채근하시지 않고 깊이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며 위로하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어머니가 우리 곁에서 인내로이 우리의 길을 지켜주고 계시니, 힘 내어 앞으로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괜찮아. 수고했어. 더 나아질 거야." 어머니의 속삭임이 여러분에게도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