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안국사' 산사에서
자연이 선사하는 '기다림의 미학'을 음미하다
|
▲ 산사의 시간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간. 삼라만상이 더디 움직이며 서로 어우러지는 시간이다. 사진은 대웅전 앞에서 대안스님과 한담을 나누는 필자. 최원준 시인 제공 |
'부처집'으로 향하는 산길은 백팔계단을 오르는 일과 같다.
한 걸음 한 걸음에 백여덟 가지의 번뇌와 업장소멸의 염원을 담고 가는 길이다.
모든 업장을 하나하나 내려놓고 오르는 일이다.
오르는 길 군데군데 엊그제 태풍을 감당한 나뭇잎의 흔적이 어지럽다.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산사로 닿는 길 또한 속세의 삶처럼 수월하게 문을 열어주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중생은 꾸역꾸역 욕심처럼 그 길을 오르려 한다.
성불하듯 발효되어서일까
산사서 담근 된장·간장 유명
은은한 맛 부드러우면서도 향긋
김치·고사리·호박·상추 겉절이…
소박함이 산을 감싸고 가람을 품어
경내 그윽한 물소리에 마음도 차분
경남 고성 안국사.
시인이자 쪽 염색전문가에 도예가이기도 한 대안 스님이 안거하는 사찰이다.
'단순함 속에 우주의 원리가 담겨 있다'는 생각으로 용맹정진하는 분이다.
산사에서 담근 된장과 간장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산사 입구. 일주문 대신 높이 쌓아 올린 돌담이 일행을 내려다본다.
가람이 한창 푸른 잔디로 싱그럽다.
절에서 키우는 강아지 세 마리가 중생들을 보자 꼬리를 흔들며 콩콩 짖는다.
가람에 들어선다.
돌담 쪽으로 백여 개의 커다란 항아리가 자리하고 있고, 대웅전 앞에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석불이
구름처럼 흐르는 산등성이를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다.
대웅전 앞뜰은 온갖 나비가 제 세상인 양 나풀나풀 날아다니고 있다.
온 산에는 계곡 물소리가 장쾌하다.
경내까지 물소리가 그득하다.
장독대 앞에서 대안스님과 말씀을 나눈다.
"된장에 맛이 드는 일은 사람의 일생과도 비슷합니다. '발효'라는 오랜 정성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죠."
그렇겠다. 장맛은 제대로 된 발효가 결정한다.
'기다림의 미학'이 온전한 음식이 발효음식인 것이다.
'기다림'은 세월을 헤아리는 일이다.
생각을 준비하고(發心), 몸으로 행한(人事) 후, 그 결과를 묵묵히 예감하는 일이다.
그만큼 끝없는 인내와 염원을 요구하는 '구도의 길'이기도 하다.
한 각 한 각의 시간이 첩첩이 쌓이며, 이로운 미생물과 다양한 성분을 생성하고 키워내는 발효의 기다림도,
사람의 기다림만큼 숙연하고 그윽하다.
스님이 항아리에서 5년 묵은 된장을 꺼낸다.
은은한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향긋하다.
된장 특유의 구수함이 오래간다.
간장도 한 입 찍어 맛을 본다.
짜지 않고 신선한 맛이 우물만큼 투명하고 깊다.
"된장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이 만드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자연과 사람이 다독다독 다독여서 만들어내는 음식입니다. 마치 '우주의 법칙'을 따르는 일이기도 하지요."
대안 스님의 말이다.
사람이나 음식이나 오래될수록 깊은 맛이 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담뿍 내어놓을 때 사랑을 받는다.
자신의 몸을 펄펄 끓여내 속 깊게 발효시키고, 그로 인해 사람에게 이롭게 하는 음식.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음식이 바로 '성불하듯 발효되는' 산사의 된장과 간장인 것이다.
이러구러 점심 공양 시간이다.
소소해서 구미가 도는 찬이 알뜰하다.
공양주 보살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음식을 담은 그릇은 모두 대안 스님의 솜씨이다.
분청자기의 넉넉함이 그릇마다 묻어난다.
김치에 된장, 고사리와 호박을 함께 넣고 조리한 나물, 열무 물김치와 상춧잎을 살짝 데쳐 만든 겉절이….
모두 산사의 밭이나 뒷산에서 재배하고 채취한 것들로 만든 소박한 밥상이다.
쌈으로 나뭇잎 데친 것이 보인다.
"스님, 이 이파리는 무슨 나뭇잎입니까?"
"누린대 잎입니다. 속가의 할머님께서 생전에 자주 쌈을 해 드셨어요."
생소한 나무 이름이다.
자세히 알아보니 학명으로 '누리장나무'란다.
누리장나무는 짐승 누린내가 난다.
나무 근처에만 가도 금방 누린내를 맡을 수 있어 누리장나무다.
잎이 커서 오동, 냄새가 나기에 냄새 오동, 그래서 취오동(臭梧桐)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그러나 데치면 냄새 성분이 휘발되어 누린내가 나지 않는다.
한 잎 넓게 펴서 밥 한술에 강된장을 넉넉히 올리고 쌈을 싸먹는다.
약간 식감이 거칠다 싶은데, 곧이어 강된장의 구수한 냄새가 퍼져난다.
스님이 직접 담근 된장은 깊은 맛이 오래가고, 고사리·호박 나물은 사람의 마음을 다독여준다.
열무 물김치는 시원하고, 상추 겉절이는 청량하다.
참으로 이상타! 크게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음식 하나하나가, 서로 어우러져 산을 감싸고 가람을 품어 안는다.
공양을 하고 난 후 스님과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다가, 문화 판의 여러 말씀도 여쭙는다.
그러다 강아지 세 마리를 어르고 달래기도 하고, 산길을 휘적휘적 돌아다니고 한다.
그래도 산사의 시간은 참으로 더디 간다.
그래, 산사의 시간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간.
삼라만상이 더디 움직이며 서로 어우러지는 시간이다.
더디 가기에 물길 나는 소리, 나무숲 사이 바람이 둥지 트는 소리마저도 비로소 들리고,
풀잎 위에 이슬 한 방울 매달리는 순간과 대웅전 현판에 햇빛 내려앉는 찰나를 보게도 된다.
서서히 산사에 밤이 온다.
해가 서산에 가라앉기가 무섭게 저녁 어스름이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일시에 어둠 속으로 정적이 감돈다.
계곡 물소리는 선명해지고 경내는 고즈넉하다.
고요한 시간은 사람 마음을 더욱 가라앉힌다.
|
안국사 사찰음식. 소박하고 따뜻한 손길이 느껴진다 |
스님이 취침하러 간 사이 공양간에는, 산사의 적요함을 못 참는 불학무도의 중생들이 무례한 작당들을 한다.
속세에서 가져간 다양한 곡차(?)로 어줍은 발심을 한 것이다.
스님이 만든 유백색 백자사발이 여러 순배 돌아가고, 식탁에서는 고등어가 펄떡이고 암소가 '음~메' 운다.
곡차의 흥으로 공양간은 호기로움으로 도도하고 거방하다.
산중 호걸들이 따로 없다.
이렇게 산사의 밤은 고소하게 깊어가고, 중생들의 만행은 새벽까지 이어져가며 기고만장하다.
이를 듣는 듯 마는 듯 스님 주무시는 방에는, 가끔 밭은 기침 소리만 날 뿐 아무 기척이 없음이다.
cowejoo@hanmail.net
최원준
시인·동의대 문창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