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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신경림 시인이 가려 뽑은 “인간적으로 좋은 글”
이 책의 제목은 『뭉클』이다. ‘가슴이 뭉클하다’고 할 때 그 뭉클을 말한다. ‘인간적으로 좋은 글’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흔히 한 줄의 시나 한 문장의 산문을 읽고도 가슴에 와닿는 감동을 느껴 뭉클할 때가 있다. 그것을 메모해 두고 독후감으로 담아도 좋으련만 그러기는 쉽지 않았다. 그냥 읽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뭉클하게 가슴에 와닿는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하고, “시를 공부하면서 틈틈이 산문을 써보는 것이 내 문학 수업의 주요한 내용이 되었다. 글을 선選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문학적이 아니고 ‘뭉클’임은 말할 것도 없다. 뭉클은 문학적보다 한 자리 위의 개념일 터이다.”라고 했다.
어떤 글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지, 시인이 가려 뽑은 좋은 글은 어떤 것이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것들을 여기에다 모두 옮길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그것을 옮겨오는 것은 차라리 책을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이 가려 뽑은, 좋은 글들의 저자와 제목을 우선 보자.
01 김유정 필승 전前
02 박형준 가을의 저쪽
03 손석희 햇빛에 대한 기억
04 이해인 신발을 신는 것은
05 박민규 우리는 누구나 한 장의 연탄이다
06 이상 여상女像
07 정지용 더 좋은 데 가서
08 법정 잊을 수 없는 사람
09 이어령 골무
10 노자영 사랑하는 사람에게
11 신영복 나막신에 우산 한 자루-계수님께
12 박용구 연가戀歌
13 권구현 팔려 가는 개
14 김기림 길
15 김수환 어머니, 우리 어머니
16 노천명 설야 산책
17 김용택 아, 그리운 집, 그 집
18 채만식 눈 내리는 황혼
19 이광수 꾀꼬리 소리
20 류시화 이상하다, 내 삶을 바라보는 것은
21 강경애 꽃송이 같은 첫눈
22 방정환 4월에 피는 꽃 물망초 이야기
23 최서해 가을의 마음
24 박목월 평생을 나는 서서 살았다
25 김남천 귀로歸路-내 마음의 가을
26 임화 춘래불사춘
27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28 권정생 목생 형님
29 이중섭 서로에게 불행한 결과를 낳을 따름이오
30 나혜석 여인 독거기獨居記
31 김소진 그리운 동방에 가고 싶어라-달원형에게
32 정채봉 스무 살 어머니 1
33 박인환 사랑하는 나의 정숙이에게
34 최인호 나의 소중한 금생今生
35 문익환 마음의 안식처, 보이지 않는 기둥
-37년을 하루같이 살아 온 당신에게
36 박완서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37 정진석 보미사 꼬마와 신부님-어린이날에 생각나는 일
38 유홍준 코스모스를 생각한다
39 이효석 한식일
40 장영희 루시 할머니
제목만 봐서도 어떤 글들인지 대략 짐작되는 바 없지 않으나, 그것을 모두 옮겨적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그중에 몇 구절, 혹은 몇 문장을 선택해 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봄봄』, 『동백꽃』등 주옥같은 단편의 작가 김유정(金裕貞, 1908∼1937)선생이 죽음을 앞두고 평생지기이던 필승이(본명 안회남)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를 보내고 1주일 뒤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그는 죽었다.
“신발을 신는 것은
삶을 신는 것이겠지
나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건너간 내 친구는
얼마나 신발이 신고 싶을까
살아서 다시 신는 나의 신발은
오늘도 희망을 재촉한다”
부산 수영구에 있는 성베네딕토 수녀원 이해인 수녀(1945∼ )님의 시집 《기쁨이 열리는 창》에 수록된 〈신발의 이름〉이란 시다. 이 시에 대해 수녀는 말한다. “이제 신발을 신을 수 없는 그이들이 땅속에 누워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날마다 새롭게 감사하며 사세요. 더 기쁘게 걸어가세요.”라고.
“구도의 길에서 안다는 것은 행行에 비할 때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사람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지식이나 말에 의해서가 아님을 그는 깨우쳐주었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 그리고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 수연(水然)! 그 이름처럼 그는 자기 둘레를 항상 맑게 씻어주었다. 평상심이 도道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성내는 일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한 말로 해서 자비의 화신이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사람은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로 떠오른다”
법정(1932∼2010)스님이 도반이었던 수연스님을 생각하면서 쓴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수필의 일부다. 좋은 친구를 가졌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한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강철로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대립을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칼과 바늘일 것이다. 칼은 남성의 것이고, 바늘은 여성의 것이다. 칼을 생명을 죽이기 위한 것이고, 바늘은 생명을 감싸기 위해 있다. 칼은 밖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하고 바늘은 안으로 들어오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대립항의 궁극에는 칼의 문화에서 생겨난 남성의 투구와 바늘의 문화에서 생겨난 여성의 골무가 뚜렷하게 대치한다. 투구는 칼을 막기 위해서 머리에 쓰는 것이고 골무는 바늘을 막기 위해서 손가락에 쓴다. 남자가 전쟁터에 나가려면 투구를 써야 하는 것처럼 여자가 바느질을 하려고 일감을 손에 쥘 때는 골무를 껴야 한다.
골무는 가볍고 작은 투구다. 그것은 실오라기와 쓰다 남은 천 조각과 그리고 짝이 맞지 않은 단추들처럼 일상의 생활을 누빈다. 골무 속에 묻힌 손가락 끝 손톱이 가리키는 그 작고 섬세한 세계, 그것을 지키기 위해 여자의 마음속에 입힌 무장이다. 남성의 오만한 명예욕도, 권력의 야망도 없는 조용한 세계, 골무가 지배하는 것은 넓은 영토의 왕국이 아니라, 반짇고리와 같은 작은 상자 안의 평화다. 반달 같은 골무를 보면 무수한 밤들이 다가선다.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민첩하게 손을 놀리던 우리 어머니, 그리고 우리 누님들의 손가락 끝 바늘에서 수 놓아지는 꽃이파리들, 그것은 골무가 만들어낸 마법의 햇살이다.
모든 것을 해지게 하고 넝마처럼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 시간과 싸우기 위해서, 그리움의 시간, 슬픔의 시간, 그리고 기다림의 온갖 시간을 이기기 위해서 손가락에 쓴 여인의 투구 위에서는 작은 꽃들이 피어나기도 하고 색실의 무늬들이 아롱지기도 한다.”
지난 2월 26일 향년 89세로 타개한 이어령(1933.12.29생, 충남 아산 태생)선생의 산문 〈골무〉이야기다. 강철로 만든 대립적 물건 칼과 바늘의 비교에서 그의 예리한 통찰을 보는 것 같다. 그가 그립다.
그리운 사람 중에 한 사람 황진이, 황진이를 다시 보자.
月下庭梧盡(월하정오진) 달빛 아래 오동잎 남김없이 떨어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시들고
樓高天一尺(루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花琴冷(류수화금냉) 흐르는 물은 가야금에 차갑게 와 닿고
梅花人笛香(매화인적향) 매화 향기는 피리에 감도누나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우리 둘 이별 하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은 길고 긴 물결 같겠지
황진이의 시다. 음악평론가인 박용구 선생(1914∼2016)이 연가(戀歌)를 이야기하면서 읊었는데, 경북 풍기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제 식민 지배와 한국전쟁의 참극 속, 20세기 한반도의 척박한 예술적 토양에서도 음악·무용 평론가로서, 뮤지컬 제작자로, 극작가와 연출가 등 르네상스적 문화인으로 활동해 온 인물이다. 해방 후 최초의 음악 교과서 〈임시 중등 음악 교본〉(1945), 근대기 최초의 음악 평론집 〈음악과 현실〉(1948) 등을 썼다. 예그린 악단장일 때 최초의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를 짓고, 88서울올림픽 때는 개·폐막식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도 했다.
황진이야말로 인간혼의 해방을 외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으로 그녀는 시를 통해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울었고 마음껏 노래했다. 내일이면 한양으로 떠나는 정랑(소세양)과 마주 앉아 파란 달빛에 백옥같은 손으로 어른어른 거문고 줄을 고르며 한숨처럼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연가가 아닐 수 없다.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한겨울 기나긴 밤, 청춘도 가고 월태화용(月態花容)도 시들어 하루아침에 시체로 변하고 보면 임자 없는 화류계 여자로, ‘줄무지’(행상을 메는 일 또는 사람)신세가 될 것을 생각하고 베갯모를 적시며 소리 없이 울었을 그녀를… 그러나 이미 여인들은 인습의 굴레였던 삼단 같은 머리를 깡뚱이 자르고, 남자들은 망건으로 머리를 졸라맬 필요가 없어진 지 오래된 시절, 세레나데여!
“우리 집은 참으로 가난하였다. 늘 초가삼간에서 살았고, 대구에서는 한때 셋방살이도 했다. 그런데 우리 집 방은 언제나 깨끗이 도배한 방이었다. 군위 시골 동네에 살때에도 그러했는데, 그 무렵 동네에서 도배한 방은 극히 드물었다. 우리보다 형편이 몇 갑절 나은 집도 벽에 도배는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는 벽에 도배를 적어도 1년에 두 번씩 하셨고, 우리가 입은 옷도 깨끗한 편이었다. 뿐더러 밥 역시 늘 잡곡이 약간 섞인 쌀밥이었다. 이것도 그 당시 시골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교육에는 엄하셨지만 먹는 것, 입는 것은 마치 부잣집 같았다. 그 대신 사치란 일체 없었고, 심지어 엿이나 과자 등 군것질도 일체 없었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에서는 떡을 한 일이 없었다. 어머니가 처음 떡을 하신 것은 나의 큰 조차 – 어머니의 큰손자 - 의 돌잔치 때였다. 어머니는 남들이 흔히 해 먹는 떡조차 하지 않으셨으나 일상 먹는 음식만은 그 당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일류 음식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런 가난 속에서 어머니가 우리를 어떻게 그렇게 먹이셨을까 하고.”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의 〈어머니, 우리 어머니〉에서 옮겨온 글이다. 김 추기경의 글은 매우 길어서 여기 다 옮기지 못했다. 다만 나의 형편과 같거나, 비슷해 보이는 부분만을 옮겼다.
읽기에 따라서 딱딱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을 수 있을 것 같은 글을 하나 옮겨본다. 네덜란드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가 한 말이다.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면 모두 생각이 다르다. 비록 당신의 의견이 옳아도 무리하게 설득하려고 하지 마라. 사람들은 설득당하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의견이란 못질과 같아서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자꾸 깊이 들어갈 뿐이다. 진리는 인내와 시간에 따라 저절로 밝혀줄 것이다”
“은행나무 가지에 참새가 한 마리…
한 마리 오도카니 앉았다.
갈 곳이 없나? 재작거리지도 아니하고 새촘히 앉았다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호르르 날아 건넛집 지붕 너머로 사라진다.
눈발이 좀 굵어진다…
굵은 놈이 잔 눈발에 섞여 내린다.
황혼은 한 겹 두 겹 더욱 짙어진다.
눈도 더욱 바쁘게 내리고 난로불도 더욱 새빨갛게 달아간다. 사람의 마음도 거침없이 깊이 들어간다.
이 모양이, 이 자태가 변함이 없이 영원으로 이어진다면!
이 비극의 표정을 이대로 영원히 두고 보고 싶다.”
일제강점기 「탁류」등 단편소설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채만식(1902∼1950)선생의 수필 〈눈 내리는 황혼〉의 일부다. 그가 영원히 두고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음은 아동문학가 방정환(1899∼1931) 선생의 수필, 〈4월에 피는 꽃 물망초 이야기〉다.
- 꽃 속에 젖어 있는 불쌍한 유언 -
“4월에 피는 꽃에 물망초라는 풀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 꽃이 널따란 들에 조그맣게 피어 있지마는, 이름조차 아는 이도 없어 보아주는 이도 없고, 위해주는 이도 없이 가엽게 그냥그냥 잡초처럼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물망초! 물망초! 잊지 말라는 풀! 그 이름부터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연연한 이름입니까? 화려한 색깔도 없고, 그렇다고 좋은 향기도 없는 꽃이지마는 물망초라는 애련한 이름을 가진 하늘빛같이 파르스름한 조그만 그 꽃은 마치 두 손을 가슴에 안고, 무언가 홀로 깊은 생각 속에 들어 있는 소녀와 같이 보드랍고 연연한 귀여운 꽃입니다.”
“여름 사람의 마음 위에 샘물같이 흘러드는 것은 매미 소리이다. 매미 소리는 불같은 볕발이 이글이글하는 여름 한낮에 듣더라도 새벽에 마신 맑은 이슬을 뿜어놓는 것같이 울린다.
그러나 매미는 소리의 세계만이 늘 있지 않다. 그 소리도 때時의 힘은 어쩔 수 없다. 가을철을 접어들면서부터는 듣는 사람에게 그처럼 신기한 맛을 주지 못하게 된다. 여기저기서 기식(氣息)이 미미하던 온갖 벌레가 선들거리는 바람에 기세를 올리게 되면 그들의 요란한 교향악은 한여름에 기세를 펴던 매미의 소리까지 싸고 남음이 있다.
가을은 실로 온갖 벌레의 천지다.
어느 귀퉁이에 틀어박혀서 존재조차 알릴락 말락 하던 벌레 소리도 가을바람 앞에는 여물어서 소리소리 듣는 사람의 청각을 분명히 울린다.”
그동안 잘 몰랐던 소설가 최서해(1901∼1932)선생의 〈가을의 마음〉이라는 글의 일부다. 계절의 변화를 이렇듯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을 나는 아직 보지 못한 것 같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최서해 선생은 이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제각각 소리를 지르는 것일 것이다. 그 모든 소리가 얼크러져 씨가 되고 날이 되어서 듣는 사람에게는 한 덩어리의 복잡한 자연의 음악을 이룬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무상한 생명의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오래지 않아 내리는 서리에 입이 닫혀질 것은 벌레만이 아니다. 길고 짧은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소리를 지르는 그들의 생명이나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의 생명이나 스러지기는 마찬가지다. 그 길고 짧다는 시간의 차이도 우주의 끝없는 데 견주어 보면, 길다면 얼마나 더 길고, 짧다면 얼마나 더 짧으랴. 모두 석화전광에서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거기서 길고 짧은 것을 말한다는 것이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면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운명을 슬퍼하게 된다. 운명을 슬퍼하므로 현재 목전에 보이는 벌레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느끼게 된다. 젊은 사람의 가슴을 그처럼 울리는 벌레 소리니 늙은이의 가슴에는 더할 것이다. 숲속에서 흘러나오는 그 온갖 벌레소리를 타고 더 없이 보낸 옛날의 청춘 시절을 더듬어 오르는 늙은이의 마음이여! 얼마나 애달프랴? 서리친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숙석청운지(宿昔靑雲志)* 탄嘆을 뇌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 거울에 비친 백발을 보다
숙석청운지(宿昔靑雲志) 젊은 시절 청운의 꿈을
차타백발년(蹉跎白髮年) 이루지도 못하고 백발이 되었구나
수지명경리(誰知明鏡裏) 누가 알리오 거울 속 바라보며
형영자상린(形影自相憐) 서로 가엾다 할 줄을
당나라 현종 때 재상 자리에 오르기도 한 장구령(張九齡)의 시다. 간신 이임보(李林甫)의 계략으로 뜻을 펴지 못하자, 낙향하여 신세를 한탄하며 지은 시로 여기에 숙석청운지가 나온다.
靑雲은 젊은 시절 白髮은 나이듬을 이르는 것이고, 形影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젊은 시절은 간 곳이 없고 흰머리 노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탄自歎하면서 참담慘憺한 마음을 노래한 시가 아닐 수 없다.
한때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민주주의 봄이 왔느냐는 물음에 답한 말로 회자되기도 했던 ‘춘래불사춘’은 중국의 4대 미인 중 하나인 왕소군이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한데 유래한다. 새 옷 입고 꽃피고 강물이 맑아도 열한두 살 새색시에게 봄이 왔느냐고 물으니 봄이 왔으되 봄은 오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물어서 무엇하리.
우리 형제 죽거들랑
앞밭에다 묻지 말고
뒷밭에도 묻지 말아
꽃밭에다 묻었다가
우리 우리 매꽃 피어
나무 함쌍 나거들랑
나 벗인가 알아다오 [제주민요]
“간밤부터 시름없이 내리던 비가 소리쳐 내린다.
이 비에 피리 나무가 물이 오르고 보리싹이 피어 오를게다. 생각하면 불현듯 들로 나가고 싶다. 작년 가을부터 이불 속에 눌러붙어 아직 산, 바다, 들, 하늘 다 본 지가 아득하다.
그러나 이맘때면 살림 떠업소. 북만으로 가는 이민떼를 싫도록 본 나다. 보따리 위에 바가지를 들고 업혀 가는 어린아이들의 얼굴을 또 볼 터인가? 차라리 나는 이불 속에 누었는게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다. 겨울이 오면 봄이 머지않았어라”
잘 이해되지 않지만, 이글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한 임화(1908∼1953)선생의 〈춘래불사춘〉이란 수필에서 떠왔다. 암울하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읽을 수 있겠다.
이 책에 쓰인 ‘뭉클’한 글들을 선정한 신경림 선생에 대해 알아본다. 그는1935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출생했다. 동국대학교 영어영문과를 졸업하고, 『문학예술』에 시 <낮달>, <갈대> 등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1956년)했으며, 민요기행을 통해 민중적 정서를 되살려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농무』, 『새재』, 『길』, 『쓰러진 자의 꿈』등과 장시집 『남한강』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문학과 민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산문집으로 『바람의 풍경』, 『민요기행』, 『시인을 찾아서』등이 있다.
만해문학상(1974년), 한국문학작가상(1981년), 이산문학상(1990년), 단재문학상(1994년) 등을 수상하였고, 민족문학작가회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2017년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황소〉,〈흰소〉등 추상적이고 환상적인 이중섭(1916∼1956)의 그림은 민중의 애환을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대표작 황소는 이미 2006년 45억원에 낙찰되어 故이건희 회장이 기증해 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진품은 아니더라도 이중섭의 그림은 많이 보았지만, 그의 글은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옮긴다.
“아고라(이중섭의 별명)도 남자라오. 육체노동이라도 열심히 할 테요. 처음에는 페인트 가게 시다바리라도 괜찮소. 예술과 가족과의 아름다운 생활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소. 처음 반년 정도는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괜찮으니 내 혼자서 바깥에 방을 한 칸 빌려 혼자 힘으로 벌어서 밥을 먹고, 제작할 생각이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면 족하오. 어떻게든 반년 또는 1년 정도 혼자서 헝클어진 마음을 조용히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소. 내가 가더라도 그대가 정양하는데 조금도 방해되지 않겠다는 나의 결의를 말해두고 싶소.
(…)
흰색 물감이 없어서 페인트 –제주도 시절- 를 대용으로 슥슥 그리고 있어요. 제주도의 돼지처럼 아고라는 엄청 힘을 내고 있어요. 참기 힘든 괴로움 가운데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욕구가 일어나 작품을 마구 그려내고 자신감이 넘쳐… 넘쳐… 터질 것만 같은 이 아고라! 성실하고 훌륭한 남덕씨를, 나의 유일한 현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 같은 거라오. 새해는 우리 네 가족에게도 멋진 해가 되리라 믿어주시오. 온갖 걱정 –끝없이 솟구치는- 따위는 모두 던져버리고… 싱싱한 생명력이 솟아오를 수 있게 자신만만하게 행동합시다. 건강이 어떤지 바로 알려주세요. 태현이 태성이에 대해서도 적어 보내줘요 –1954년1월7일 중섭”
편지 쓴 날짜로 봐서 몸시 어렵던 시절 아내에게 보낸 편지인 것 같다.
최인호(1945∼2013)는 이문열과 함께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다. 〈유림〉과 〈길없는 길〉〈고래사냥〉등 기억되는 작품도 아주 많다. 또 그는 스스로에 대해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들처럼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군대도 다녀왔다. 남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경험도 해 보고, 아이도 낳고 키웠다. 식성도 까다로운 편이 아니어서 먹을 만한 음식은 웬만하면 다 먹어 보았고, 수많은 친구도 사귀고 술도 많이 마셨다. 외국 여행도 남들보다 많이 해서 안 가본 데가 거의 없고, 신문에도 이름이 많이 났었다. 어찌된 일인지 화제의 중심에서 멀어진 적이 없이 항상 뉴스의 초점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작가 중 나만큼 글을 많이 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책도 많이 팔렸으며, 시쳇말로 돈도 많이 벌었다. 두 아이도 무사히 결혼시켜 부모로서 할 의무도 다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하지 않은 다양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 그는 60을 넘기면서 나처럼, 아니 우리 모두처럼 인생을 돌아보고 회한에 젖기도 한 모양이다. 「나의 소중한 금생」이란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쩌다 밤에 잠이 깨면 나는 껍질을 벗은 애벌레처럼 우주의 나선 별에서 혼자 잠든 어린 왕자와 같은 고독감을 느낀다. 그럴 때면 유령처럼 일어나 거실에 서서 아파트 창문 앞에 펼쳐져 있는 중학교의 운동장을 쳐다보곤 한다. 새벽인데도 운동장에는 젊은이들이 축구를 하기도하고,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산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무인도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처럼 언젠가는 나도 아내와 둘이 운동장을 손잡고 걸어보리라 다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이상 운동장을 바라보기만 할 뿐 걸어본 적이 없다. 인생이란 짧은 기간의 망명이라고 플라톤이 말했던가. 나는 지금 그 망명지에서 손꼽아 유배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다. 내 전생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이제 금생今生에 살고 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9년 전 금생을 떠났다.
아동문학가 정채봉(1946∼2001)선생은 참 독특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열일곱에 시집와 꽃다운 나이 스무 살에 나를 낳고 세상살이를 마치신 우리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머니의 내음은 때때로 떠오른다.”로 시작하는 〈스무 살 어머니〉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학생이 되고 2학기가 시작된 9월 어느 날 내가 들에 나가 토끼풀을 뜯어 가지고 들어오자 이불 홑청을 깁고 있던 할머니가 말했다.
“니 없는 사이 너그 담임 선생님이 다녀가셨다. 작문 시간에 ‘어머니 냄새’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었다면서? 이상하다. 해송 타는 냄새에서 네 에미가 떠오르다니…? 허긴 너거 외가 가는 길이 솔밭길이긴 한데.”
할머니는 그때 처음으로 장롱 위에 있는 부담(반짇고리 닮은 옷상자)을 끌어내려 그 맨 아래 한지에 싸인 어머니 사진을 보여주셨다.
둥근 턱에 솔 순 같은 눈, 바람받이에 있는 해송 같은 낮은 코에 작은 입, 정말 명이 든 데라곤 어디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박속 같은 여인이거기에 있었다.
“네 애미는 너한테서 엄마라는 말도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죽었다”
“세 살이었다면서 내가 그렇게 말이 늦었던가요?”
“아니지. 너희 삼촌들이 형수라고 부르니까 너도 덩달아서 형수라고 했어. 형수 젖, 형수 물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울음보다도 짙은 회한의 무엇이었다.
서른한 살 때 나는 아이 하나를 얻었다. 아이는 우리가 낯선 듯 처음엔 울고 보채기만 하더니 예닐곱 달이 되면서부터는 이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우스운 일이 하나 없는데도 괜히 저 혼자 방글거리곤 했다. 그러나 아이가 귀여워 입을 맞추다 말고 나는 해송 타는 냄새를 느꼈다. 그리고 언젠가 고모가 한 말이 환청처럼 살아났다.
“네 애미처럼 무심한 여자는 드물 것이다. 네가 배고파서 울어도 젖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보다못해 우리가 재촉하면 그때야 일손을 놓고 젖을 한 모금 찔끔 주고 금방 돌아오곤 했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스무 살 우리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짚었다. 아이 우는 소리에 타지 않을 어머니 속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달려오고 싶은 마음보다도 시누이한테 눈치 보일까 봐 자리를 얼른 뜨지 못했을 우리 어머니, 아무리 울보라고 소문난 아이였대도 때로는 어머니 품에서 웃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볼까 봐 내 어린 뺨에 볼 한 번 비비는 것도 우리 어머니는 참 어려웠으리라.
“하얀 박속 같은 스무 살 우리 어머니는 그 앳됨 그대로를 지니고 사진틀 속에서 당신보다 더 늙어가는 아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계신다. 이제는 해송 타는 내음마저도 점점 엷어져 가는 것 같아 나는 참 가슴이 아프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나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는가?’이런 의문을 가진다면, 그의 이야기를 되새겨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채봉 선생에 비하면 어머니, 아버지가 장수하시고 나름 배곯지 않고 살아온 나는 행복한 삶을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절대의 침묵 앞에서는 환상도 하잘것없다. 불귀不歸의 사실을 알면서 추억과 꿈이 무엇 하자는 것이랴. 내게 만약 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있었고,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슬픔을 지울 수 있을 것인가.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사랑이다. 추억은 한층 안타깝고 서글플 뿐이다. 한 가지의 진정제가 있다. 그것은 다시 유기체의 운명을 생각함이다. 현재, 아직도 땅에 남아 있는 누구나를 말할 것 없이 모두 반드시 필경은 작정 된 그 길을 떠나야 됨을 생각함이다.
물론 나도 가야 할 것이다. 모든 인류 세대가 차차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영원히 어두운 그 속에 절대의 침묵을 지키면서 간 사람과 함께 눕게 될 것이다. 총결산의 시간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세금의 슬픔이다. 나는 죽음에 대해 얼마간은 대담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지없이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간 사람을 위로하려면 이것을 생각하는 수밖에는 길이 없는 것이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1907∼1942)선생이 아내를 잃은 지 석 달 뒤 비 오는 날에 쓴 〈한식일〉이라는 제목의 수필이다. 그는 여기서 “한식날 묘를 다스리고 돌아와 목욕재계하고 고요히 앉으니 눈물이 또 새로워진다. 사람은 이 더운 눈물을 가진 까닭에 슬픔을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슬픔을 얼마간 밀어버리는 것인 듯도 하다.”고 하고는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은 귀하고, 아깝기도 하다. 눈물은 슬픔을 맑게 하고 깊게 한다.”고 했다. 2022.7.2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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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