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33
4월20일[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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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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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SGBWbimeMfM
[서울대교구 김남혁 대건안드레아(자양2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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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배반 체험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혹시 그런 체험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게 신뢰를 주었던 사람,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었던 사람, 굳게 믿었던 사람이 내게서 등을 돌리고, 내 뒤에서 험담과 모함을 하고, 나를 떠나가는 그런 체험...
더 이상 내가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더 이상 내게서 얻을 것이 없음을 알게 되었는지, 야멸차게 얼굴을 돌리고 관계를 차단하는 그런 체험... 너나 할 것 없이 부족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지라, 가끔 하게 되는 체험입니다.
그런 체험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내가 열악하고 힘겨운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파악하게 됩니다. 누가 진국인지? 누가 허당인지? 누가 진정한 벗인지? 누가 하이에나 같은 존재인지?
서서히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시던 예수님께서도 그런 쓰라린 체험을 제대로 하셨습니다.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십니다.
더 이상 놀라운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힘과 능력과 권위를 지닌 해결사 모습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분 입에서 나오는 말씀, 사람의 아들은 적대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고난을 겪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잔뜩 기대했던 사람들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한때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하고 지지하며, 목숨까지 바칠 기세로 예수님을 추종했던 제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떠나간 이유는? 그들이 추구했던 지향점과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던 사명 사이의 큰 간극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 탓할 게 아닙니다. 떠나감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우리 안에서도 숱하게 반복됩니다. 그저 육의 이끌림에 따라 살 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 살게 됩니다. 본능에만 따라 살 때,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영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별 의미 없는 말씀, 구름잡는 이야기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논리로만 예수님 말씀을 대할 때, 그 말씀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알쏭달쏭한 문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수님의 말씀 하나를 화두로 붙들고, 묵상하고 또 묵상할 때, 조금씩 우리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영혼이 열릴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단 말씀, 생명수보다 더 값진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늘 위를 생각하시며 아래를 내려다보시는데, 떠나간 제자들은 한사코 아래만 내려다봤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래의 세상만이 전부인 양 뚫어지게 아래만 바라봤습니다.
가끔씩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봐야겠습니다. 물론 아래, 이 세상, 때로 구차스럽게 보이는 일상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나 위와 아래, 영혼과 육신, 하늘과 땅은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죽기살기로 아래만 바라보는 사람들, 자신의 삶 속에 영적인 측면은 초라할 정도로 위축되고, 그저 육에 따라,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최종적인 도착지는 비참이요, 죽음일 것입니다.
한명 한명 떠나가는 제자들의 모습 앞에 마음이 몹시 슬퍼지셨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복음 6장 67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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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내가 육적인 인간인지, 영적인 인간인지 알아보는 법>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에 관한 긴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성체에 관한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이해하면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고,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가면 육적인 사람입니다.
물론 가리옷 유다처럼 남아있다고 해서 다 영적인 것도 아니고, 지금 믿지 못한다고 해서 완전히 육적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은 영적이며 생명에 관한 것인데, 육적인 사람은 이 말씀을 육적으로만 받아들이려 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투덜거리고 다 떠나가지만,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주님 곁에 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수준 때문에 말씀이 곧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당시에 그곳에 있었다면 제자들처럼 예수님 곁에 남았을지, 아니면 떠나갔을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내가 영적 인간인지, 육적 인간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에 한 여자와 남자의 나체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나체 그림이고 매우 야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것은 그 그림을 어린이들은 돌고래들로 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메슬로우는 망치를 손에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나의 시각과 이해력은 나의 욕구에 의해 좌우됩니다.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을 먼저 찾습니다. 따라서 길을 지나가는 여자를 볼 때, 남자들은 나체의 모습을 상상하고 여자는 여자의 모자와 옷, 핸드백이 얼마짜리인지를 스캔합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께서 아무리 영적인 말씀을 하셔도 육체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가리옷 유다를 뽑았습니다.
그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에 도둑이라고 말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더 심하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
사람이 악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 사람이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적 인간에서 영적인 인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의 정체성을 바꿔야 합니다. 나를 육체로 본다면 그 사람은 육체적 행복만을 추구할 것이고, 나를 영혼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영적인 기쁨을 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 앞에 소개하실 때, “나는 나다!”라고 하십니다. 우리 안의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행복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육적인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외줄타기를 하는 한 서커스 단원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다 강철 줄을 걸어 놓고 거기서 줄타기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손에 땀을 쥐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열심히 이리 건너오고 저리 건너가고 하면서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사람들 앞으로 와서 말했습니다. “누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타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어깨에 메고 건너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꼬마 소년이 “저요!”하고 손을 들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겁나지 않든?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지?”
그 소년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분이 제 아버지거든요!”
어떤 사람의 말을 믿으려거든 나와 그 사람과의 관계가 먼저 정립되어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을 믿을 수 없고, 그러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먼저 믿지 말을 먼저 믿지 않습니다. 관계가 먼저이고 말이 그 다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분과의 관계를 정립해야 합니다. 오늘 남은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믿을만한 분임은 믿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요?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 자신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육체적인 행복은 추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육적 욕망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되고 더욱 영적인 인간이 되면 그렇게 될 때 말씀을 더 믿게 되고 더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믿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육적인 인간이기 때문임을 명심합시다. 육적인 인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육체, 즉 자아가 아니라 내가 주인이라 여기는 것에 의해 규정됨을 명심합시다.
우리 안에는 성체로 들어오시는 “너는 나다!”라는 분이 계심을 명심합시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을 수 있으면 이미 영적인 인간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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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적인 길과 육적인 길은 반대 방향이다>
우리는 14세기 교황이 약 70여 년 동안 프랑스 아비뇽에 죄수처럼 갇혀 살았던 ‘아비뇽 유배’를 기억합니다. 이 발단은 ‘돈’이었습니다. 영적인 종교에 육적인 욕구가 개입된 것입니다.
프랑스 필립 4세는 교황청으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싫어하였고 결국 힘을 이용해 교황을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머물게 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십자군 전쟁을 하며 지나치게 돈을 많이 쓴 영향도 있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군인들이 다시 돌아갈 가정이 없어져 그들이 약탈해온 재물로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성전 기사단’입니다.
필립 4세는 ‘성전 기사단’이 소유한 막대한 재산과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필립 4세는 교황을 잡아놓고 성전 기사단을 해체해 재산을 몰수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그가 교회를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적인 것을 찾았기에 영적인 소리를 하는 이의 입을 막은 것뿐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믿었는지는 주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덕분으로 교회는 이후 로마파와 프랑스파, 그리고 공의회 파가 정한 3명의 교황이 생기는 분열과 혼란까지 겪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현대에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전에 한국 교회 주교단이 4대강 사업을 반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것에 대해 교회를 비판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신자들도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주교들보고 옷을 벗어야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집회가 끝나고 나면 주일미사를 하고 경건하게 성체를 영하고 해산하였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종교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말하면 거북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머무신다면 주교단이 결정한 것은 영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적인 것을 추구하면서도 교회에 머무는 것은 어쩌면 가리옷 유다와 같을 수 있습니다. 유다는 머물기는 하되 언제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거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 교회에 스며든 세속적 사상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영과 육을 하나로 보는 일원론입니다. 5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유다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영 거북해서 듣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을 듣고는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떠나갑니다.
왜 거북할까요? 자신들이 원하는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갤럭시 스마트폰만 쓰는데, 아이폰이 좋다고 말한다면 그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말이 듣기에 거북한 이유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듣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영화였습니다. 그들의 뜻과 반대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던 것일까요? 누구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때나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지만, 그것도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께 머물렀습니다. 그분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예수님 말씀이 거북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리고, 영이며 생명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예수님께 머물 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고 하십니다. 결코, 육을 추구하는 방향과 영을 추구하는 방향이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빛과 어둠은 반대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는 저를 ‘극단적 이원론자’로 비평합니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영과 육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요한복음의 핵심이요 가톨릭교회 교리의 핵심입니다.
일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하느님은 태양과 비를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내려주신다고 말하며 하느님은 이렇게 자비하시므로 결국 지옥도 없을 것이고 어둠도 빛에 속하게 될 것이며 육체도 영과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은 그럴싸하지만, 영과 육에 섞이게 만들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주 많이 잘못된 신앙을 심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의 교회에 육이 섞이면 교회까지도 자신의 육에 속하게 만들어 이용하게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하려면 영을 선택할 것인지 육을 선택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사람이 두 반대되는 길을 갈 수 없고, 두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없습니다. 돈도 좋고 예수님도 좋을 수 없습니다. 세상도 좋고 하느님 나라도 좋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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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은 1980년에 ‘코스모스’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코스모스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코스모스’에서 해설을 맡았습니다. 칼 세이건은 우주의 나이를 1년으로 줄여서 우리들의 시대를 생각하였습니다. 우주의 나이는 138억년이기 때문에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주의 나이가 1년이라고 할 때, 우리가 속한 갤럭시 은하는 5월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태양은 8월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9월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공룡의 시대는 12월 25일쯤이라고 합니다. 현생 인류가 태어난 것은 12월 31일 11시 52분이라고 합니다. 인류가 쌓아온 문화와 문명은 12월 31일 11시 59분 마지막 1분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11시 59분 55초에 석가모니 탄생, 56초에 예수님, 그리고 57초에 마호메트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인류의 영적인 깨달음을 이끌었던 분들이 모두 쌍둥이처럼 1초 간격으로 탄생했다고 합니다.
칼 세이건은 아등바등하고 쉼 없이 다투기만 하는 인류에게 서로 싸우지 말고 공존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우주력’을 통해 인간이 하찮기 그지없는 존재임을 자각시켜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태양계의 끝을 향해 여행을 떠난 보이저 1호는 1990년 태양계를 떠나면서 64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구의 사진 찍어서 보내왔습니다. 그 사진이 유명한 ‘창백한 푸는 점’입니다. 땅 위를 기어다니는 애벌레와 하늘을 나는 나비가 보는 세상은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우주라는 차원에서 지구를 보면 우리는 정말 한 없이, 작고 초라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점과 같은 지구에서 우리가 서로 싸우고, 죽이고, 죽는다는 것은 정말 의미 없는 일입니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마지막 한 점을 파괴하고, 병들게 하는 인간의 행위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위대한 것은 장대하고, 광대한 우주의 역사를 인식하는 유일한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두 별에서 왔다고 합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원소는 우주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간이라면 138억 년이라는 우주의 역사로 충분합니다. 공간이라면 장대하고 광대한 우주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차원의 문제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성공, 명예, 권력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공, 명예, 권력을 빼앗기리라 생각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 그리고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내어놓는 ‘비움’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을 섬기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나눔’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온전히 내어놓은 비움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섬기는 겸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오른 것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나눔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가까이하기에는 또 너무나 먼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망과 탐욕을 비울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섬길 수 있다면, 우리가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는 장대하고, 광대한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138억 년을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중심은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주의 중심은 의미와 생각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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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60ㄴ-68: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힘들어한다. 결국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떠나 물러갔고 더는 따라다니지 않았다.(66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3절)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투덜거리는 것을 아시고 구원을 주는 것은 성령이시라고 “영은 생명을 준다.” 하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영은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며, 그분의 가르침이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 살이라고 하셨다. 말씀은 영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 육은 그들이 이해했던 살점이었기 때문에 쓸모가 없다는 것이며, 그 육도 영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영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변덕스러운 쭉정이 같은 믿음은 유혹이라는 돌풍이 불 때마다 날아가 버리고 만다. 주님의 말씀을 거북하게 느낀 제자 일부는 그분께 등을 돌렸다. 그러나 많은 제자는 그 때문에 그분을 따르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쉽게 신앙을 버리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67절) 이 말씀은 그들이 꼭 필요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확실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신다. 주님께서는 강요하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태 16,24)이라 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시기 위해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신 것이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8절) 이 말은 떠나간 제자들처럼 듣기 거북한 말씀이 아니라, 끝없는 생명으로 데려다줄 말씀이 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발아래 앉아 그분을 유일한 스승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9절) 우리는 알기 위해 믿는다. 먼저 알고 난 다음 믿으려 했다면 우리는 결코 믿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믿고 알게 되었는가?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이시며 당신 살과 피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신 분이다.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남겨주신 성체를 열심히 영하여야 한다. 성체성사는 교회의 심장이며, 우리 인간을 당신으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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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내용으로 이해한 사람들은 지독한 거부감과 불편함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느끼는 혼란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덧붙여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곧 당신의 말씀은 살과 피를 실제로 먹으라는 강요가 아니고, ‘영적’이고 ‘진정한 생명’에 대한 내용이었음을 풀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은 길게 이어졌던 ‘생명의 빵’ 담화의 결론이며, 요한 복음서 6장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복음에서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한 베드로가 어떻게 성숙하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약속대로 예수님 곁에 남아 있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계속하며 그분을 닮아 가는 여정을 걷습니다. 남아 있고 머물러 있었기에 점차 스승님을 닮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핵심은 ‘먹음’이 아니라 ‘닮아 감’입니다. 살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예수님과 일치하고 그분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이 성체성사의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아 불편하여도 그대로 머무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복음적 선택이고 최선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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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영원한 생명의 말씀>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요한 6,60-65)
1) 여기서 ‘제자들’은 일반 신자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중간에 모두 떠나버린 것 같은데, 확실한 상황은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남아 있었던 신자들도,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점과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거북하다.’라는 말에는 ‘표현이 거북하다.’는 뜻 외에도, ‘믿을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그들이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가 아니라, 원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에, 즉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몸의 배부름만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체험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내 말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내가 한 말은 나의 살과 피를 실제로 먹으라는 강요가 아니고, ‘영적’이고 ‘진정한 생명’에 대한 내용이었다.”라는 ‘해명’도 아니고, ‘말씀을 쉽게 풀이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해명하시기는커녕 해명하기를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2) 여기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것 같은 말씀이 나오는 것은 전체 흐름과는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도 주고, 너무 갑작스럽다는 느낌도 주는데,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나를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믿음도 없이 몸만 남아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입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이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하지 않으면”이라는 뜻입니다. 뒤의 70절에,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배반을 확실하게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배반자가 유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71절) 아마도 배반자 유다는 그때 이미 마음이 예수님을 떠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몸만’ 예수님 곁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머물러 있어야 진짜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미사 시간 동안 경건하게 성당에 앉아 있었다고 해도 마음과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면, 그것은 미사 참례를 한 것이 아닙니다. ‘몸만’ 성당에 앉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예수님과 함께 하려고 노력할 때, 그때 비로소 미사 참례를 온전히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6-69)
여기서 ‘되돌아가다.’라는 말은, 신자가 되기 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즉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는 말씀은, “너희도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억지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받기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는 것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는 말은, “몸을 배부르게 할 빵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세속의 임금들에게는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주님만 따르겠습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사도들이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믿고 받아들인 이유를 나타낸 말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으니까 예수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항상 ‘이해’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선명하게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1코린 13,12) 그러나 이해부터 먼저 해야겠다고 고집부리면, 영영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 교리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동정잉태, 부활 등 모든 교리가 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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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부산교구 김영훈 미카엘 신부님]
3일 내내 요한복음 6장 생명의 빵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오늘 복음도 그 연장선에서 이해해야겠습니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이뤄집니다. 지금까지 성찬의 전례, 특히 성체성사에 대하여 이야기했다면 오늘 복음은 말씀의 전례에 관한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이다.”
주님의 말씀, 곧 복음은 성령의 감도에 의해 기록된 것이며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말들이 난무합니다. 언론매체, 대중매체에서 쏟아내는 쓰레기 같은 정보가 얼마나 많습니까?
게 중에는 진리를 거역하고 사회를 더욱 혼탁하게 만드는 거짓 말씀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터넷을 통해서, TV와 라디오를 통해서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지요. 물론 평화방송은 예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육적인 지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좀더 편리하게 살고, 삶을 좀더 윤택하게 만드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영혼을 살찌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은연중에 세상의 지식들은 돈이 최고라고, 건강이 최고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육적인 지식에 넘어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수년 전 <다빈치 코드> 같은 반그리스도교 서적들이 유행했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교 역사에 정통하지 못하면서 그리스도교 진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짓종교로 몰아세우는 뉴 에이지 계통의 서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히 많은 부수가 팔렸다고 하는데, 가톨릭 신자들도 접하고 나서 반신반의한다고 하니 그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무튼 우리 신자들은 세상의 거짓된 말씀에 속아 넘어가서도 안 될 뿐만 아니라 그것과 대적하여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거짓 논리에 휘말리지 마십시오. 진리는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복음적 실천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진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을 매일 듣는 사람들입니다. 성서 말씀은 우리 안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믿음으로 듣는 말씀은 용서를 가능하게 하고, 두려움을 없애 주며, 내적 평화와 사랑이 넘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체험하게 이끌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이미 실천까지도 포함한 말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생명력이 충만한데 어찌 말씀이 삶으로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이제 오늘 복음 말미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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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둘로 나뉩니다. 한쪽은 투덜거리며 예수님을 떠나갔고 다른 한쪽은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그분과 함께 머뭅니다. 제자들이 갈라지는 결정적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바로 당신이시라고, 그 빵을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이의 말을 잘 듣는 것은 때로는 힘들지만 때로는 위로가 될 때가 많습니다. 대개 힘든 경우는 상대의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고, 위로가 될 때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애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지니는 일입니다.
빵이 먹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배고파야 빵을 먹고, 배고픈 삶을 살아야 빵에 대한 간절함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위로보다는 불편함으로 다가온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자신들의 배고픔을 채워 주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에 배고파하는지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흔히 돈과 명예, 권력에 비판적인 것이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돈, 명예, 권력에 배고파하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돈을 배고파하되 어떻게 쓸 것인가, 명예를 소중히 여기되 그 명예를 어떻게 도모할 것인가, 그리고 권력을 지향하되 그 권력을 더욱 올바로 힘 있게 사용하려면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가 되물어야 합니다. 신앙적 배고픔은 돈과 명예, 권력을 내려놓는 데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명예, 권력을 하느님 안에서, 이웃들과의 나눔 안에서 제대로 사용하면서 체험합니다.
나를 위한 배고픔을 ‘우리’를 위한 배고픔으로, 하나의 빵이라도 함께 먹는 만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들이 예수님 곁을 지키는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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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은 그동안 우리가 들어오던 <요한복음> 6장의 끝부분입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을 “생명의 빵”(35절, 48절), “하늘에서 내려온 빵”(41절)이라 밝히시며,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고 선포하시자, ‘유대인들’은 서로 수군거리고(41절) 말다툼(52절)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순명으로 실행하는 사람, 곧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그들 안에 머무를 것”(54절, 56절)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고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1-63)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이 생명의 빵’일 뿐만 아니라, 이제 당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말씀”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영”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은 말씀을 발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발설한 말씀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이를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씀은 읽는 이 안에서 자란다.”고 표현합니다.
이토록, 성령께서는 <에제케엘서>(37,1-14)에서 보여주듯이, 죽은 문자인 마른 뼈들에 생기를 돋게 하고 뼈와 살이 붙게 하고, 문자를 성체가 되게 하여 우리가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은 “생명을 주는 영”(로마 8,2)이라는 합니다.
이처럼, 참으로 신비롭고 놀랍게도, 참 생명이 영으로 말씀이 되시어 육화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의 대담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육화를 활성화시키시는 분이시다.” 바로 여기에, ‘성령의 도유된 독서’(lectio untionis), “성령으로 기름칠 된 독서”인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의 동반자이며 해석자”가 되시어 성경을 읽는 이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계시헌장>(12항)과 <가톨릭교회 교리서>(111항)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건네주는 것이므로, 말씀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속내를 꿰뚫어 읽어야 한다. 그러기에, 성령을 통해서 쓰려진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믿고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남은 열 두 제자들에게 자유로운 응답을 요청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계시한 바에 따라,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으며, 하느님의 거룩한 분임을 믿어 왔고 또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예수님을 ‘떠난 제자’와 ‘남는 제자’가 분리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어왔고 그래서 아는 자들’은 남은 제자가 되었는데, 알고 믿고자 한 제자들은 떠나갔음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는 ‘알고 믿는 것’보다 ‘믿어서 알게 되는 삶’이 먼저임을 깨우쳐줍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을 먹는 ‘말씀의 영성체’를 알아듣게 됩니다. 곧 먼저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먹는 일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에제키엘서(3,1-3), 예레미아서(15,16), 요한묵시록(10,8-10)에는 명령에 따라 말씀을 ‘먹은’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쪼개진 말씀을 먹는 것”으로,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우스는 “파스카의 어린 양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고, 히에로니무스는 “복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성찬례에서뿐 아니라, 성경 독서 중에도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생명이신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먹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저희가 무엇을 하더라도 언제나 당신 말씀과 함께 하고, 말씀 속에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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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주님!
제가 떠나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제 자신이오니, 저 자신을 떠나게 하소서.
떠나온 자신마저 떠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고 흔들리면서도 당신 장막에 머물게 하소서!
흔들릴수록 더욱더 뿌리 깊게 내리는 믿음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흔들림 속에서도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 희망에 제가 달려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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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
사람은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목요일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51)라는 말씀을 계기로,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6,52) 하고 어제 복음은 연속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6,60) 하고 전해 줍니다. 한 마디로 유다인은 물론 제자들마저 투덜거렸다고 그 분위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유다인들과 제자들에겐 귀에 거슬릴 뿐만 아니라 믿기는커녕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씀이었기에 이런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고 봅니다.
사실 진리를 한순간에 깨닫거나 깨치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많은 사람은 삶을 깨어 살아가면서, 체험들이 마치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가면서 차츰 진리를 깨닫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산과 이 산에 피어나는 꽃들과 날마다 신록으로 옷을 바꿔 입어가는 나뭇잎은 그냥 그렇게 변한 것 같지만 사실 오랜 세월 동안 죽음과도 같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또 이겨내 피어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찬란한 것이라 봅니다. 예수님의 계속되는 빵에 관한 말씀 역시도 한순간에 알아들을 수 있다고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자들 역시 당신의 말씀을 지금 당장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언제가 당신의 죽음과 묻힘 그리고 부활하심을 겪고 난 뒤 성령을 받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어떤 것에 집착하는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가 거북했고 불편했기에 군중은 물론 많은 제자가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던 것입니다. 어차피 떠날 사람은 떠나기 마련이고 오직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들만이 당신 곁에 머물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에게 “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67)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 하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한 다음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과 다시 만나고, 호숫가에서 함께 빵을 먹고 난 뒤 비로소 그는 자신이 고백했던,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68)라는 그 고백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었죠. 부활을 체험한 후 부활의 시선에서 새삼스럽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생명의 빵이신 주님으로 보고 믿게 되었기에, 더 이상 ‘듣기 거북한 말씀이 아니라 이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63)라는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우리 또한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떠나 어떤 누구에게도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남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예수님은 “영은 생명을 준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63)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사도 베드로의 열정과 성령으로 충만한 활동을 통해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과 활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전 저희 어머니는 가정에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한데, 그중 하나는 걸레요 다른 하나는 노인이다, 고 말했습니다. 이는 가장 쓸모없게 보이지만 가정에서 가장 요긴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공동체가 필요한 존재는 어떤 사람일까요? 분명 오늘 독서의 ‘타비타’처럼 우리 역시도 가정이나 공동체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자 잃어버릴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비타가 죽고 난 뒤 과부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울며 그녀를 다시 살려주시도록 애절히 간청합니다. 타비타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시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요6,65참조)이기도 한 타비타를 향해 “타비타, 일어나시오.”(사9,40) 하고 그녀를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다음 과부들에게 돌려줍니다. 우리 또한 타비타처럼 주님의 부활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시118,12)라며 감사의 노래를 부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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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밥을 먹다 보면 입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돌 씹히는 소리입니다. 지금이야 돌 씹을 일이 전혀 없지만, 예전에는 돌이 꽤 많아서 쌀을 일어서 밥을 안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밥에 쌀보다 돌이 많지는 않습니다. 만약 돌이 더 많다면 그것은 쌀밥이 아닌 돌밥이겠지요. 그래서 돌이 있어도 밥을 먹습니다. 왜냐하면 돌이 있다고 먹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배를 채우기 위해, 돌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도 밥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밥을 먹을 때 오히려 큰 돌이면 눈에 잘 보이기 때문에 가려내기 쉽습니다. 문제는 모래알처럼 작은 돌입니다. 잘 보이지도 않아서 쌀과 구분하기 힘듭니다.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큰 고통과 시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남들이 보기에 별것 아닌 어려움이 더 힘듭니다. 큰 고통과 시련에는 다른 이의 도움도 받습니다. 그러나 작아 보이는 고통과 시련에 대해서는 “그런 걸 가지고 뭐가 힘들다고~~”하면서 핀잔만 듣기 때문입니다.
어떤 삶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의 위로가 힘들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더 큰 위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의 위로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 그 자체이신 분께서 내게 그런 아픔을 주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커다란 착각입니다. 세상 안에 고통과 시련을 겪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요즘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벌일까요?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계속 겪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이때 주님의 손을 잡고 함께 하는 사람은 고통을 오히려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주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고통을 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고통과 시련이 있다고 해서 주님을 떠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역시 은총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 안에서 위로받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음에 길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 옛날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 역시 어리석음에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과 다르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주님을 보고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그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면서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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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혀 새로운 사실을 얘기하면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외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기대하고 귀를 기울이는데 전혀 다른 소리를 하면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대놓고 뭐라 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불만을 지니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기대하고 바라는 쪽으로 얘기하면 신이 나고 기분 좋아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못마땅해 담을 쌓게 됩니다. 그러나 큰 사람은 자기의 기대를 뛰어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줄도 알고 거기서 깨우침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듣기에 거북해하였습니다. 모르면 스승의 가르침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인데 그렇지 못하고 속으로 투덜대고 있었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무엇인들 비위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어른 신부님들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본당의 책임을 맡으면 적극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3분의 1이라도 되면 성공이라네. 3분의 1은 관망하는 사람이고 또 3분의 1은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그러니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용기를 가지고 추진하게.”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인간적 나약함을 지니고 사는 신부야 오죽 하겠습니까?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힘을 낭비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식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이 말씀은 결국 ‘떠날 테면 떠나라. 잡지 않겠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제자 중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너도 떠나겠느냐?’ 아닙니다. 당신에 대해 아직 잘 모르지만,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따르다 보면 당신을 알게 되리라 확신하며 그저 따르겠습니다. 훗날 당신을 등질지 모르지만 지금 순간은 당신이 저의 전부입니다.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느끼기까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니 도와주세요.
기적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당신의 살과 피를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당신의 몸을 생명으로 주시지만 합당하게 모시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지금 포기하면 당신을 영원히 차지할 수 없기에 당신께 매달립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6,68). 성체를 모실 때마다 당신과 일치를 이루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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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요한 6,60ㄴ-69 (영원한 생명의 말씀)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당신을 알 수 없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떠나기에
알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당신을 믿을 수 없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떠나기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당신을 닮을 수 없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떠나기에
닮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당신을 떠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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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영의 사람으로 삽시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시편 116,12-13)
영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육의 사람도 있습니다. 영과 육은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어느쪽에 강하느냐에 따라 영적인 사람, 육적인 사람꼴이 형성됩니다.
어제 병원에 다녀오면서 지하철 안에서 감동적인 장면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구(巨軀)의 노년은 아닌 중후반의 몸이 불편한 남성이 자리에 앉다가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버둥대고 있을 때 평범한 형제자매 여러분들이 놀라며 함께 힘겹게 일으켜 세웠습니다. 너무 비대(肥大)하여 혼자라면 도저히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 바로 영적인 측면의 순수한 마음이 발휘된 것이라 봅니다.
어제 타계한 자유인 홍세화는 “누구든 선한 길로 돌아올 것”이란 믿음을 지녔는데 누구나 선한 마음, 영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생각됩니다. 옛 어른의 다음 말씀도 영의 사람이 되라는 충고로 들립니다.
“내가 돈을 지휘하고 있는가, 돈이 나를 지휘하고 있는가? 돈을 붙잡으려하면 할수록 가장 소중한 것을 놓아야 한다.”-다산
“부(富)가 구해서 얻을 만한 것이라면 비록 채찍을 잡는 천한 일이라도 나는 하겠다. 그러나 추구해서 안되는 것이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논어
노령에도 불구하고 영의 사람인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비오10세 교황의 평전 서문을 썻고 그중 일부 내용입니다. “성 비오 10세는 고통중인 사람들에게 가까이 있었던 교황이었다. 그는 부드러웠으나 강했고, 겸손했으나 명석했다.” 성 비오 10세 교황 역시 참 사람의 영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교황들은 전통적으로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에는 강의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몇주에 걸쳐 ‘현명, 인내, 정의, 용기’에 초점을 두고 강의하신후 지난 수요일 마지막 주제는 ‘절제’를 택하여 주옥같은 강의를 하셨습니다. 이 다섯 덕목들은 한결같이 영의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덕목들입니다.
“절제는 우리의 기쁨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행복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절제에 대한 강의 내용을 요약한 말마디입니다. 황창연 신부가 소개하는 영의 사람, 문희종 주교의 사제 당시 모습도 마음 깊이 남아있습니다.
“가나의 잔칫집애서 술떨어진 사실을 걱정하는 성모님처럼 이것저것 꼼꼼하게 챙기고, 본당에 부족한 부분을 남모르게 채우는 맘씨 고운 분들이 주로 성모회장직을 맡는다. 문신부는 로마로 유학나오는 신학생이 있으면, 기숙사 문제부터 입학허가와 언어연수 일정을 하나하나 꼼꼼히 챙겨주고 심지어는 유학나온 신학생들에게 용돈까지 쪼개어 나눠준다. 로마의 성모회장이라는 별명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신학교 교수로 있을 때도 어려운 신학생들 학비와 책값을 도와달라고 내게 전화해서 신학생들 장학금을 챙겨주곤 했던 친구다. 문신부는 나한테 돈맡겨 놓은 것도 아닌데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내돈을 뺏어간다. 그런데 더 신기한 건 돈을 빼앗겨도 한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2015년9월10일 서품된 문희종 요한 세례자 주교의 사목표어는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사랑, 겸손, 순종’이다.”
믿는 이들 모두가 유일무이한 하느님의 일꾼들입니다. 누구나 문주교같은 성모회장처럼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되며, 자기 고유 색깔을 지닌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먹고 당신 피를 마셔야 영원한 삶을 살리라는 성체성사의 진리를 말했을 때 많은 제자들의 어려워 이해할 수 없어 투덜거리자 예수님은 결정적 답이 되는 말씀을 주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예수님 당신처럼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이 되라하십니다. 육의 사람이 되어 성체성사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성체성사의 신비를 제대로 깨달아 알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자들은 떠나고 열두 제자만 남자 예수님은 묻습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동시에 우리를 향한 물음이기도합니다.
“너희도 떠나겠느냐?”
주님을 선택할지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영의 사람 또는 육의 사람, 어느쪽을 선택할지 묻습니다. 저라면 지체없이 “불암산의 떠나면 떠났지 전 당신 곁을 안떠납니다. 당신 곁에 평생 머무르는 정주를 선택합니다.” 흔쾌히 대답하겠습니다. 역시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한 수제자다운 베드로의 정답이자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요셉수도원 수도자들의 고백은 물론 참으로 주님을 믿는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님곁에서 항구한 사랑과 인내의 믿음으로 정주할 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닮아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바로 그 빛나는 모범이 방금 복음에서 명쾌한 답변으로 주님을 크게 기쁘게 하신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제1독서에서 애네아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에서, 도르카스를 다시 살리는 모습이 그대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 베드로가 이 둘을 치유하고 살리는 모습이 참 통쾌합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타비타, 일어나시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영의 사도, 베드로를 통해 치유하시고 살리신 것입니다. 때로 나태해지고 영적으로 무기력한 느낌이 들 때 벌떡 일어나 하늘 향해 두 팔 활짝 펴고 만세육창을 하시기 바랍니다. 영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느낌일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 은총이, 복음에서 애네아스를 치유하시고 도르카스를 살려주셨듯이 우리를 치유하시고 살려주시고 주님처럼 생명을 주는 영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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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영의 선택>
우리는 한 주간 내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몸과 피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내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넘어 듣기에 거북한 말씀을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당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그래서 주신다고.
이에 사람들은 급기야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말이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과 듣기에 거북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내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기에 그래도 이해하려고 애쓰며 주님 곁에 머물러 있으려 했지만 듣기에 너무 거북한 말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다며 마침내 떠나버립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겠냐고 하시며 당신 말씀은 거북한 말이 아니라 영적인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주님의 말씀이 거북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이고, 영적인 말씀이 거북한 한 이유는 우리가 육적이기 때문이라는 말이며 영적으로 한 말을 육적으로 이해하면 거북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출세하려는 이에게 하느님 나라를 얘기하면 거북할 수밖에 없고, 권좌에 오르려는 이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라면 거북할 수밖에 없음과 같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거나 못 알아듣거나 하는 것, 주님의 말씀이 달콤하거나 거북한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그 사람 안에 주님의 영이 계시냐 육의 영이 있느냐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영적인 말이 거북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몸과 관련한 권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영 안에서가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보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영과 신성으로 보지 않고, 인성으로만 보아 그분이 하느님의 참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보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던 모든 사람은 단죄받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축성되는 성사를 보면서, 영과 신성
에 따라 이것이 참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라는 것을 보지도 않고 믿지
도 않는 모든 사람도 단죄받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이것을 증명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머무르시는 주님의 영이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머무시게 하는 것인데 주님의 영이 자기 안에 머무시게 하는 쪽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그것을 포기하고 떠나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 사람입니까? 주님은 어느 쪽 사람이냐고 오늘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이에 베드로 사도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선택입니다. 내 살던 대로 살겠다며 육의 영을 선택할 수도 있고,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추구하게 하는 성령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며칠 전에 말씀드린 대로 내 안에 어떤 영이 있는지 먼저 식별하고 다음으로는 성령을 선택하고 성령을 모셔 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처럼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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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
<나는?>
오늘 복음(요한6,60ㄴ-69)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부활 제3주간인 이번 주간은 '생명의 빵 주간'이었습니다. 어제 복음을 끝으로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끝났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습니다.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을 들은 많은 제자들이 불편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6,60) 그리고 많은 제자들이 투덜거리면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요한6,61.63-64)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느냐?" 이 물음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6,68-69)
'나는?'
이번 한 주간 동안 전해진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들려왔습니까?
예수님을 떠나간 많은 제자들처럼 거북하게 들려왔습니까?
생명의 빵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적인 양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적인 것, 육의 양식에만 갇혀 있었으면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의미하게, 거북하게 들려왔을 것이고, 몸과 마음으로 예수님을 떠나갔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요한6,68-69)이 필요할 때입니다.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이 필요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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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4.20.토."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 68)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떠남이 많은
우리들 삶입니다.
바라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고
듣고 싶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듣게 됩니다.
사람으로 살고
사람으로
죽는 법을
주님 안에서
다시 배웁니다.
무너진 약속과
어설픈
고백들을
진심으로
반성합니다.
떠난 사람의
이름과
남아있는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우리가
잃어버렸습니다.
만남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만남에
우리가
머무르는
것입니다.
같은
주님 안에서
일어나는
만남과
떠남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입니다.
내어놓는 마음이
나눔의
마음이 되고
머무름의 기쁨이
됩니다.
머무름은
올곧은
현재진행형이
됩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머무름이 있습니다.
머무름의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머무르지
못하면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머무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머무르는 곳에
마음이 있고
그 마음 안에
사랑이 있습니다.
떠남을 치유하는
머무름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머무름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신
주님밖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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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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