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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 반칠환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인는 기어서
굼뱅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 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바람 / 반칠환
저놈은 대단한 독서광 아니면
문맹이 틀림없다
열흘째 넘기지 못한 서적을
돈 세듯 넘겨놓고,
포플러 잎 팔만대장경을
일제히 뒤집어 놓은 채 달아난다
먹은 죄 / 반칠환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은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웃음의 힘 / 반칠환
넝쿨 장미가 담을 넘고 있다
현행범이다
활짝 웃는다
아무도 잡을 생각 않고 따라 웃는다
왜 꽃의 월담은 죄가 아닌가?
목격 / 반칠환
질주하는 바퀴가
청개구리를 터뜨리고 달려갔다
나는 한 생명이 바퀴를 멈추는데
아무런 제동도 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가뭄 / 반칠환
저 소리 없는 불꽃 좀 보아.
감열지처럼 검게 타오르는 들판,
그 위로 날던 새 한 마리
한 점 마침표로 추락한다.
하! 삼도내마저 말라붙어
차안과 피안의 경계가 없어졌다
노랑제비꽃 / 반칠환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어떤 채용 통보 / 반칠환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를 채용 하신다니
삽 자루는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 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 뼈 두개 발목뼈 두 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 넣어
꽃씨 하나 묻어들고 가겠습니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하는
힘으로 다시 걷는다.
장미와 찔레 / 반칠환
경복궁 맞은편 육군 병원엔 울타리로 넝쿨장미를 심어놓았습니다. 조경사의 실수일까요, 장난일까요. 붉고 탐스런 넝쿨장미가 만발한 오월, 그 틈에 수줍게 내민 작고 흰 입술들을 보고서야 그 중 한 포기가 찔레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얼크러설크러졌으면 슬쩍 붉은 듯 흰 듯 잡종 장미를 내밀 법도 하건만 틀림없이 제가 피워야 할 빛깔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꽃잎은 진 지 오래되었지만, 찔레넝쿨 가시가 아프게 살을 파고듭니다. 여럿 중에 너 홀로 빛깔이 달라도 너는 네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구두와 고양이 / 반칠환
마실 나갔던 고양이가
콧등이 긁혀서 왔다
그냥 두었다
전날 밤늦게 귀가한
내 구두코도 긁혀 있었다
정성껏 갈색 약을 발라 주었다
며칠 뒤,
고양이 콧등은 말끔히 나았다
내 구두코는 전혀 낫지 않았다
아무리 두꺼워도
죽은 가죽은 아물지 않는다
얇아도 산 가죽은 아문다
통째로 / 반칠환
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월식 / 반칠환
돼지우리 삼은 큰 궤짝 걷어차며
이놈 팔아 나 중핵교나 보내주지
거듭 걷어차던 시째 성 집 나갔다
대처 나간 성들도 소식 없었다
사진틀 끌어안고 눈물짓던 엄마는
묵판 이고 나가다 빙판에 팔 부러졌다
말 없는 니째 성 더욱 말 없고
말 잘하는 누나도 말이 없었다
겨울바람은 왜 쌀 떨어지고, 옷 떨어지고
땔감 떨어진 집을 더 좋아하나
연기 솟는 방고래, 흙 쏟아지는 베름짝이
무에 문제냐고 하룻밤 묵어 가잰다
마실 갔다온 엄마가 말씀하신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마실 갈 땐 둥실하던 보름달이
슬슬 줄어들어 그믐처럼 깜깜터니
돌아올 때 그짓말처럼 환하지 않더냐
그게 월식인 줄 대처 나간 성들은 알고 있었을까
얼음보다 더 찬, 멍석보다 더 큰 그믐달이
슬슬 가려주던 우리 집 언젠가
그짓말처럼 환해질 줄 알고 있었을까
제주기행 1 / 반칠환
― 주상절리에서
주상절리 입구에서
소라와 해삼을 팔고 있는
해녀 할머니는
주상절리에서 나서
주상절리로 시집와서
이마에 주상절리가 새겨지도록
물질을 해왔다고
젊은 날 당신과 할아버지
두 섬 사이에도
만경창파가 일었지만
이제는 갈수록 잔잔해진다고
오남매 자식들 뭍으로 공부시키고
손주들 용돈 주려고
소라와 해삼을 판다고
팔다가 남으면 도로
바다에 넣었다가 건져온다고
불거진 손매듭이 뿔소라 같은
파도에 지문이 씻겨간 두 손을
꼬옥 잡아드리며 나, 중얼거렸네
오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왜 이리 많을까
여생 / 반칠환
날개가 해진 잠자리가 가을 하루를 더 날고 있다
알을 슨 방아깨비가 한 나절을 더 풀잎에 앉아 있다
무서리 맞은 호박순이 가으내 담장을 놓지 않고 있다
가을 나비도 다 살았는데 다만 심장이 그치지 않아
찬 이슬 맞으며 떨고 있다
넘어진 택배 맨 오토바이가 부릉부릉 엔진이 멎지 않는다
호랑이 잣 까먹는 / 반칠환
한반도에서 은퇴한 시베리아 호랑이는
시호테알린 산맥에서 잣나무 연금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끝없이 펼쳐진 잣나무 순림이
마지막 호랑이들을 먹여 살리고 있단다
호랑이가 잣을 먹는다고?'
'담배 끊은 곰방대로 잣방울을 두들긴다?'
나도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지
잣나무 숲에 고소한 잣이 쏟아지면
멧돼지들이 간다, 사슴 무리가 간다
호랑이가 소리 없이 뒤좇는다
어느 날 / 반칠환
아침 창문을 열지 못할 때가 올 거야
아무도 곁에 없을 때가 올 거야
그리운 이름들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올 거야
살면서 진 빚을 다 갚지 못할 때가 올 거야
벌어서 모은 걸 다 나누지 못할 때가 올 거야
세상이 너를 잊고 찾지 않을 때가 올 거야
내가 세상을 잊고 나가지 못할 때가 올 거야
네가 너 자신마저 까맣게 잊을 때가 올 거야
눈물을 닦으러 네 손이 네 뺨까지 올 수 없을 때가 올 거야
늙어도 한 생의 숙제를 다 풀지 못할 때가 올 거야
울어, 한숨 쉬어, 회한 없으면 영혼도 없어
살은 썩고 뼈는 삭아도 곧 손에 쥐게 될 거야,
한 번도 연기해보지 못한 캄캄하게 새로운 대본을
꽃이 될까 곰이 될까, 걱정 대신 설레어 봐
소금쟁이 / 반칠환
뼈 무른 나이에 지게질 배웠죠
눈물 몇 되 땀 몇 섬 흘렸지만
비칠거릴 때마다 소금 한 줌 집어 먹었죠
몸도 마음도 치우치면 덤벙 빠져요
발가락마다 고루 힘주고
지겟작대기 알구지 옴팡지게 짚어야 해요
이제 출렁거리는 냇물비단 위에도
소금짐 지고 거뜬히 서 있게 되었죠
날마다 땀 흘려 일하고
때때로 슬프면 목 놓아 울어요
기쁨은 떠올라 물결이 되고
슬픔은 가라앉아 보석이 되죠
가끔 내가 선 곳이 물인지 하늘인지 모르겠어요
진흙탕인 줄 알았는데 흰구름 둥실 떠다니죠
낮은 신 신고 있지만 높은 신 함께 걸어요
킬리만자로의 표범 / 반칠환
사냥도 잘하는 하이에나가 왜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겠는가
어떤 표범이 나라 잃은 선비처럼
산정 높이 올라가 굶어서 죽겠는가
하이에나가 갖지 않은 하이에나
표범이 갖지 않은 표범 정신아
만년 설산이 제 김에 녹겠는가
셰르파의 주검과 플라스틱아
자고 나면 위대해지고, 자고 나면
초라해진다면 운동이나 명상을 하라
진실로 귀뚜라미를 사랑한다면
네가 산 흔적을 남기지 마라
정말로 라일락을 사랑한다면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져라
네가 살고 있는 걸 이십일 세기가
간절히 원했다고 생각해도 좋으나
80억 과대망상과 함께 사는 생명들은
간절히도 생각이 다른 것 같다
외국꽃 / 반칠환
서양금혼초가 봄볕에
앉은걸음으로 노역하고 있다
마이크를 든 정치가가 말한다
외국꽃은 기여한 바가 없다
최저임금을 깎아야 한다
울 밑에 선 봉숭아와
담장 옆 맨드라미와 공원길 코스모스가
깔깔깔 웃고 있다
알고 보면 인도 봉씨,
인도네시아 맨씨,
멕시코 코씨 들이다
한걸음
-속도에 대한 명상 11
반칠환
드물게 나무 아래 내려온 늘보가
땅이 꺼질세라 뒷발을 들어 앞으로 떼놓는다
나뭇잎에 앉아 있던 자벌레가 활처럼 굽은 허릴 펴
삐죽 앞으로 나앉는다
맹수에 쫓긴 토끼가 깡총 뛰어오른다
버섯조각을 입에 문 개미가 쏜살같이 내닫는다
첫돌 지난 아기가 뒤뚱거린다
보폭은 다르지만 모두 한 걸음이다
감 / 반칠환
머리 위에 흰서리를 이고 북풍을 생각한다 살아낸 봄날과 여름 비바람 없던 날 몇 날이던가 벌떼가 날아와 귓가에 닝닝거리는 영화로운 날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감꽃 지듯 어제는 형제가 죽고 풋감 듣듯 오늘은 친구의 부음을 듣는다 만고풍상 겪었지만 세상은 아직도 낯설어라 형제들도 옛날 칠순 노모의 뺨이 나리꽃처럼 붉은 까닭을
생각해보았을까 까치밥처럼 남아 경로당 담벼락에 볕바라기하는 친구들아, 주름골마다 저승꽃 만발하지만 한나절 살아있음은 아직 설렘이다 북풍은 어서 가지
끝을 놓아라 재촉하지만 한 의잠자리가 늙은 벗잎에 매달리는 저녁 나는 평생을 깨우쳐 홍조紅潮를 알았다
무 / 반칠환
깍뚝썰기를 해도
날 상하게 할 뼈가 없다
착, 착, 착,
채썰기를 해도
손 물들일 피한점 없다
칼로 무 베다 보면 속 부끄럽다
이렇게 속 깊이 놈이 사는구나
난도질하고 남은 목
던져놓으면 수채 속일망정
파랗게 웃으며 되살아난다
숙취를 지우는 무국을 뜨며
속없이 속 깊는 법을 생각한다
시간을 뒤적이다 /반칠환
시간을 뒤적이지 말걸 그랬다. 신학자가 시간을 뒤적이는 그 아까운 시간을 기도하는데 쓸걸 그랬다. 저 통계는 마치 느닷없이 들이닥친 손님 앞에 너절한 살림을 들킨 것처럼 당혹스럽다. 저 모든 시간을 더하니 66년1개월이다. 나머지 8년11개월은 개별적인 자유시간인가? 그 시간을 쪼개어 사랑을 하고, 싸움을 하고, 눈물도 흘리고, 웃음도 지었을 것이다. 우리는 저 평균치로부터 각각 얼마나 다른 자기만의 편차를 지니고 있는가?시간의 다소가 중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순간 달게 자고,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보고, 맛있게 먹고, 설레며 줄 섰다면 저 통계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신에게 기도한 시간이 5개월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반대로 74년7개월을 신에게 기도해야만 하고 나머지 5개월 동안 저 모든 일을 해야 한다면 진심으로 신을 경배할 자신이 당신에게 있는가? 신은 당신보다 우리의 삶에 경배할 시간을 더 많이 배려해 놓았으니 얼마나 자비로운가?
확인 못한 이야기들 / 반칠환
누나, 누나, 여기 누가 참외 따갔네? 꼭지만 남았어.
아, 그거! 아마 고슴도치가 따갔나보다. 너, 고슴도치가 왜
밤송이처럼 가시가 돋쳤는지 모르지? 이빨로 참외꼭질 갉아서
똑 뗀 담에 등가시로 콕 찍어서 짊어지고 엉금엉금 기어간단다.
증말이야?
뒤란에 다람쥐
성, 니째 성, 나 다람쥐 한 마리만 잡아 주면 얽으미에 넣고 키우지.
임마, 다람쥐를 어뜨케 잡냐. 아, 한 가지 방법이 있긴 있다.
장독대 뒤에, 밤나무 밑에 다람쥐 많지? 다람쥐가 밤 줏어 먹느라
정신 없을 때 갑자기 바람 불면 알밤이 떨어져 가끔 다람쥐들이
뒤통수 맞고 기절한다더라. 알밤 맞은 다람쥐 보면
내 주워서 너 주지. 너도 바람 불 때 잘 봐라?
..............알았어!
꿩동산
꿔어꿔꿔 - 엉 -
아부지, 꿩괴기가 닭고기보다 맛있나?
그으럼, 열이 먹다 아홉이 죽어도 모른단다.
아부지 그러면 꿩 좀 잡아오지.
니가 좀 잡아서 아부지 꿩괴기 맛좀 보여주거라.
에이, 내가 어떻게 잡아.
꿩 잡는 건 어렵잖다. 장끼 두 마리가 싸우기 시작하면
한 놈이 죽어야 끝나거든. 넌 가만히 쌈 구경하고 있다가
죽은 놈 한 마리 줏어오면 아부지가 구워주지.
으응............ 근데 어디서 싸워?
바퀴
ㅡ속도에 대한 명상5
반칠환
우리는 너 나 없이 세상을 굴러먹고 다닌다
아버님, 오늘은 어디서 굴러먹다 오셨나요
아들아, 너는 어디서 굴러먹다 이리 늦었느냐
여보, 요즘은 굴러먹기도 예전 같지 않아요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야
바퀴를 타자 우리 모두 후레자식이 되어 버렸다
자벌레 / 반칠환
한심하고 무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아무도 저이로부터 뚜렷한 수치를 얻어 안심하고 말뚝을 꽝꽝 박거나, 울타리를 치거나, 경지 정리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딴에는 무던히 애를 썼다고도 한다. 뛰어도 한 자, 걸어도 한 자, 슬퍼도 한 자, 기뻐도 한 자가 되기 위해 평생 걸음의 간격을 흩트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따뜻하고 유능한 측량사였다고도 전한다. 저이가 지나가면 나무뿌리는 제가 닿지 못하는 꽃망울까지의 거리를 알게 되고, 삭정이는 까맣게 잊었던 새순까지의 거리를 기억해냈다고 한다. 저이는 너와 그와 그가 닿지 못하는 거리를 재려 했다고 한다. 재면 잴수록 거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측량을 했다고 한다. 나무 밑둥에서 우듬지까지, 꽃에서 영매까지 모두가 같아졌다고 한다. 새들이 앉았던 나뭇가지의 온기를, 이파리 떨어진 상처의 진물을 온 나무가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저이의 줄자엔 눈금조차 없었다고 한다.
저이가 재고 간 것은 제가 이륙할 열 뼘 생애였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늘그막엔 몇 개의 눈금이 주름살처럼 생겨났다고도 한다. 저이의 꿈은 고단한 측량이 끝나고 잠시 땅의 감옥에 들었다가, 화려한 별박이자나방으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한다. 별과 별 사이를 재고 거리를 지울 것이었다고 전한다.
키요롯 키요롯- 느닷없이 날아온 노랑지빠귀가 저 측량사를 꿀꺽 삼켰다 한다. 저이는 지금 지빠귀의 온몸을 감도는 핏줄을 잴 것이라 한다. 다 재고 나면 지빠귀의 목울대를 박차고 나가 앞산에 가 닿는 메아리를 잴 것이라 한다. 아득한 절벽까지 지빠귀의 체온을 전할 것이라고 한다.
평상 / 반칠환
얘들아, 저녁 먹자 등잔불 끄고
평상으로 나오너라
허기진 나는 꿩에병아리처럼
튀어나가고
암탉같은 엄마는 양푼 그득
수제빌 안고 온다
니째 성, 모깃불에 풀 한 뭇
더 얹고
다담바른 누나가 숟가락
쥐어줄 새도 없이
아이 내구어ㅡ 아이 내궈 식구들
둥글게 모여 수제빌 먹는다
하아, 개복상낭구에 걸렸던
애호박이 맛있구나
식구들 모두 부른 배 내어놓고
평상에 누우면
나도 볼록한 조롱박 배를 두드리며 누나 팔베개 고쳐 벤다
소 없는 외양간 우에 박꽃이
환하구나
으음, 박꽃!
박꽃? 꽃밭!
밭두렁!
렁? 렁?
나는 말꼬릴 잇지 못해 발을
구르고 누나는 깔깔대며
내 코를 비튼다
누가 밤 하늘에 옥수수알을
뿌려놨으까
까막새가 다 줘 먹는 걸 보지
못하고 나는 잠이 든다
봄꽃의 주소 / 반칠환
숨어 핀 외진 산골 얼레지 꽃 대궁 하나
양지꽃 하나
냉이 꽃 하나에도
나비가 찾아드는 건
봄꽃 앉은 바로 그 자리에도
번지수가 있기 때문
때로
현호색이 보낸 꽃가루를
제비꽃이 받는 배달사고도 있지만
금년 온 천지 붉고
내년은 또 노오랄 것은
봄꽃 앉은 바로 그 자리에도
번지수가 있기 때문
가방도 아니 멘 나비 때가 너울너울
모자도 아니 쓴 꿀벌 떼가 닝닝닝
자전거도 아니 탄 봄바람이 돌돌돌
금년 온 천지 붉고
내년 또 노오랄 것은
바로 저 우체부들 때문
다국적 똥/ 반칠환
또 배탈이군. 한때 돌조차 삭이던 위장이었는데. 그렇지, 장모가 전라도 배추를 경상도 고춧가루로 버무린 탓일 거야. 아냐, 맥도널드 햄버거에 우리밀 빵을 함께 먹은 탓인지도 몰라. 아니, 방부제와 잔류 농약이 십이지장, 소장, 대장을 방제하는 날일까? 쯔쯧, 세계화 시대에 이렇게 편협한 국수주의자의 내장을 가지고서야. 신토불이? 우린 모두 지구촌 읍민이니 지구에서 나는 모든 음식이 신토불이인 거야. 저녁엔 다시 캘리포니아 쌀에 중국산 콩을 놔 먹어보자. 끄억-, 미제 트림에 중국산 방귀를 뀌어볼까나. 비록 제3세계의 셋방에 살지만 오늘도 난 다국적 똥을 눈다.
물결 / 반칠환
그랬구나! 가슴의 통증이 가시고 눈앞이 환해진다. 어리석고 아둔한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의 굽은 어깨와 허리가 매화 등걸처럼 휘영청 내걸리고 가슴마다 꽃이 핀다
내 눈의 들보와 남의 눈의 티끌마저 모두 꽃핀다
가장 아프고, 가장 못난 곳에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 걸려 있다니, 가슴에 박힌 대못은 상처인가 훈장인가
언제나 벗어던지고, 달아나고 싶은 통증과 치욕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으며, 가슴 속 잉걸불에 묻어둔 뜨거운 열망 하나쯤 없는 이 어디 있을 것인가
봄날 새순은 제 가슴을 찢고 나와 피며, 손가락 잘린 솔가지는 관솔이 되고, 샘물은 바위의 상처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여, 내 근심이 키우는 것이 진주였구나, 네 통증이 피우는 것이 꽃잎이었구나
김밥천국, 라면지옥 /
시속 물정 모르는 스님 하나
김밥천국 들어오신다.
원 야 김 치 참 누 모 ? 이 뭣고 ?
조 채 치 즈 치 드 듬 ? 이 뭣고 ?
김 김 김 김 김 김 김 ? 이 뭣고 ?
밥 밥 밥 밥 밥 밥 밥 밥 ? 이 뭣고 ?
1 1 2 2 2 2 2 ? 이 뭣고 ?
0 5 0 0 0 0 8 ? 이 뭣고 ?
0 0 0 0 0 0 0 ? 이 뭣고 ?
0 0 0 0 0 0 0 ? 이 뭣고 ?
어려운 천칠백 공안 다 풀어봤지만
저잣거리 분식집 이 난해한
칠언절구와 난수표, 다 뭣고?
세로쓰기를 가로로 읽으며
이 뭣고? 거듭하다 몰록 깨달아
법열에 겨워 소리친다.
‘보살님? 떡 라면 에 원조김밥 추가!’
터진 옆구리
라면 가닥 같은 골목길
김밥천국 유리창에 나부낀다.
‘삶은 계란’ 도 있어요
갈치조림을 먹으며 / 반칠환
얼마나 아팠을까?
이 뾰족한 가시가 모두 살 속에 박혀 있었다니
전쟁광 보호구역 / 반칠환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종일 전쟁놀음에 미쳐 진흙으로 대포를 만들고
도토리로 대포알을 만드는 전쟁광들이 사는 마을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흙인형 포로들을
자동콩소총으로 쏘아 진흙밭에 빠트리면 무참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그 흙으로 빚은 전투기들이
우타타타 해바라기씨 폭탄을 투하하고
민들레, 박주가리 낙하산 부대를 침투시키면 온 마을이
어쩔 수 없이 노랗게 꽃 피는 전쟁터
논두렁 밭두렁마다 줄맞춰 매설한 콩깍지 지뢰들이 픽픽 터지고
철모르는 아이들이 콩알을 줍다가 미끄러지는 곳
아서라, 맨발로 달려간 할미꽃들이 백기를 들면
흐뭇한 얼굴로 흙전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하는
무서운 전쟁광들이 서너 너댓 명 사는,
작은 전쟁광 보호구역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
눈물의 국경일 / 반칠환
세상 모든 생명들이 한날 한시 일제히 울어버리는
국경일 하나 갖고 싶다 뎅뎅- 종소리 울리면
토끼를 잡아채던 범도 구슬 같은 눈물 뚝뚝 흘리고,
가슴 철렁하던 토끼도 범의 앞가슴을 두드리며 울고,
포탄을 쏘던 병사의 눈물에 화약이 젖고, 겁먹은
난민도 맘 놓고 울어 버리고, 부자는 돈 세다 울고
빈자는 밥 먹다 울고, 가로수들도 잔잔히 이파리 뒤채며
눈물 떨구는, 세상 생명들 다시 노여워지려면
꼭 일 년이 걸리는 그런 슬픈 국경일 하나 갖고 싶다
두엄, 화엄 / 반칠환
모든 꽃은 제 가슴을 찢고 나와 핀다
꽃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절벽이다
온 산에 참꽃 핀다
여리디여린 두엄 잎이 참 달다
출렁, 저 황홀한 꽃 쿠린내
모든 존재가 아름다운 건
꽃잎의 날보다 두엄의 날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사마귀/ 반칠환
직업은 망나니지만
모태신앙이다
방금 여치의 목을 딴
두 팔로 경건히
기도 올린다
경건히 기도해도
하는 일로 심판 받기에
먹이를 삼킬 때
악어는 눈물을 흘린다
한평생
ㅡ속도에 대한 명상 11
반칠환
드물게 나무 아래 내려온 늘보가
땅이 꺼질세라 뒷발을 들어 앞으로 떼놓는다
나뭇잎에 앉아 있던 자벌레가 활처럼 굽은 허릴 펴
삐죽 앞으로 나앉는다
맹수에 쫓긴 토끼가 깡총 뛰어오른다
버섯조각을 입에 문 개미가 쏜살같이 내닫는다
첫돌 지난 아기가 뒤뚱거린다
보폭은 다르지만 모두 한 걸음이다
한평생
ㅡ속도에 대한 명상 12
반칠환
요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칠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었고 지음이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칠십을 산 노인이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도 미뤄 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도 미뤄 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 오면 하마고 미뤘더니 가쁜 숨만
남았구나.
그 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 년째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 한평생이다.
꽃뱀이 목에 꽃무늬를 두르는 시간 / 반칠환
구불구불 길 위로 길 하나 가는 걸 보았느냐. 아무리 곧은 길도 굽어가는 천형을 보았느냐. 평생을 달아나도 제 몸의 길 벗어날 수 없어 서럽게 울며 흰 길 위로 달아나는 한 발 초록길을 보았느냐. 지팡이 하나 봇짐 하나 미투리도 없이 온몸이 나그네인 발바닥을 보았느냐. 가시덤불 헤치고 사금파리 넘어 가까스로 신작로 오르면, 우르르 쏟아지는 죄 없는 햇살이여 돌팔매여, 머里 지나, 허里 지나, 꼬里 이르도록 마디마디 고통의 눈금 새겨지는 가늘고 긴 줄자를 보았느냐. 아픔에서 아픔으로 가는 삼거리, 눈물에서 눈물로 가는 네거리를 재고 또 재는 슬픔의 측량사를 보았느냐. 문득 네 앞에 서린 무서운 한 모퉁이, 꼿꼿이 목을 세운 한 타래를 보았느냐. 꽃이 될까, 독이 될까. 꿀꺽, 기쁨에서 슬픔으로 가는 지름길에, 슬픔에서 기쁨으로 가는 벼랑길에 한 움큼 붉은 독 이겨 바르는 꽃뱀을 보았느냐. 이름은 꽃길이라도 온몸의 바탕은 지루한 암록인 우리네 구절양장을 보았느냐.
서울에서 부산까지
ㅡ속도에 대한 명상 10
반칠환
서울에서 부산까지
노란 실선을 긋는 것이 직업인 그 사내는
보았다
길 왼편의 암컷에게 가지 못하고
길 오른편에서 울부짖고 있는
오소리를, 개구리를, 도마뱀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중앙 분리대를 쌓으며 가던 그 사내는
보았다
생명을 심고 달리는 바퀴들이
생명을 밟고 다니거나
생명을 내동댕이치기도 하는 것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아스콘을 새로 깔며 가던 그 사내는
들었다
수십 번의 봄이 지나갔으나
잎이 되지 못하고, 줄기가 되지 못하고
웅크려 앓고 있는 씨앗들의 음성을
그 사내 어느 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둘둘둘 아스팔트를 말며 간다
젖은 흙살 위로 쏟아지는 저 붉은 햇살!
사내는 다시
부산에서 서울까지
나무를 심으며온다
발자욱마다 질경이가 돋고
민들레 다시 핀다
꼭꼭 숨어 있던 동물과 곤충들
멸종 도감의 원색 화보를 밀치며
하나씩 둘씩 달려나온다
장어/ 반칠환
수족관 장어들이 날렵하게
꿈틀거린다
평생 한 일 자 일획만 긋던 놈들이다
이제 일획도 너무 길어
탁, 탁, 탁
점으로 돌아가리라 한다
마침내 붓마저 버려야 얻는
절체절명의 도마필법을 얻으리라
저마다 설레어 웅성꿈틀거린다
저들이 써 온 일필휘지의 서첩은
고스란히 물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강물에 강물을 찍어서 썼다고 한다
새들이 허공에 허공을 찍어
온몸으로 일획을 남기고 가듯
나무서점 방문기/ 반칠환
숲은 신간으로 그득하다. 봄비가 가장 먼저 초록 시집을 읽는다. 전생 과거시험 심사관이었는지 잎눈마다 물방울 방점 찍으며 읽는다. 여름바람은 전직 은행원이었는지 돈 세듯 읽고 다른 서점으로 사라진다. 태양은 제 빛에 눈이 나빠졌는지 돋보기로 읽는다. 오래 읽으면 책이 타들어간다. 자벌레 청년은 고시 공부하던 습관인지 중요한 구절을 우물우물 삼킨다. 거위벌레는 신갈나무 백과를 대놓고 절취하니 곧 가위벌레라 불릴 것이다. 가을서리는 열렬한 독서광이다. 읽는 책마다 노랗게 붉게 형광 빛으로 칠한다. 형편이 어려운지 읽기만 하고 사지는 않는다. 가을바람은 그 해의 신간을 몽땅 사지만 한 장도 읽지 않고 폐지상에 넘긴다. 겨울 눈도 진시황의 후예인지 문자를 지워 백지로 만든다. 그러나 폭설의 분서焚書 속에도 언제나 맵푸른 활자가 눈뜨고 있는 법이다.
은행나무 부부/ 반칠환
십리를 사이에 둔 저 은행나무 부부는 금슬이 좋다
삼백 년 동안 허운 옷자락 한 번 만져보지 못했지만
해마다 두 섬 자식이 열렸다
언제부턴가 까치가 지은 삭정이 우체통 하나씩 가슴에 품으니
가을마다 발치께 쏟아놓는 노란 엽서가 수천 통
편지를 훔쳐 읽던 풋감이 발그레 홍시가 되는 것도 이때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삼백 년 동안 내달려온 신랑의 엄지발가락이 오늘쯤
신부의 종아리에 닿았는지도
바람의 매파가 유명해진 건 이들 때문이라 전한다.
까치집 / 반칠환
망치도 없고 설계도도 없다
접착제 하나 붙이지 않고, 못 하나 박지 않았다
생가지 하나 쓰지 않고 삭정이만 재활용했다
구들장도 없고 텔레비전도 없지만
성근 지붕 새로 별이 보이는 밤이 길다
나무와 까치는 임대차 계약도 없이 행복하다
가정 방문 ---- 반칠환
이 일을 어쩌믄 좋아,
저기 저기 감낭구 아래 담임 선생님 가정 방문 오시네.
오늘 낼 넘기믄 안 오실 줄 알았지.
뒤란에 숨으까 산으로 가까,
콩밭에 숨으까 수수밭에 숨으까.
마음은 동서남북 사방팔방 첫서리하다
들킨 것처럼 뿔뿔이 달아나는데
몸은 왜 이리 고구마자루 같으까,
옴쭉달싹 못 하고 가슴은 벌렁벌렁,
선생님 벌써 사립문 없는 삽짝에 들어서시네...
선생님 오셨어유? 치란아, 어머니 어디 가셨냐,
밭에 가셨나 봐유. 지가 불러올게 잠깐 기다리세유...
엄마, 엄마, 선생님 오셨어.
열무밭 매던 엄마, 허겁지겁 달려 나오시는데,
펭소에 들어오지 않던 우리 엄마 입성이
왜 저리 선연할까. 치마 저고리 그만두고,
나무꾼이 감춘 선녀옷 그만두고,
감물 든 큰성 난닝구에, 고무줄 헐건 몸뻬바지
넥타이허리띠로 동여매고,
동방위 받는 시째 성 깜장색
훈련화 고쳐 신고 달려나오시는데,
조자룡이 헌창 쓰듯 흙 묻은 손에
호멩이는 왜 들고 나오시나.
양푼에 조선오이 삐져놓고,
찬물 한 대접 곁들여놓고,
엄마 옆에 붙어 앉았지만
선생님 말씀 듣기지 않고,
기름때 묻은 사기등잔이,
구멍 난 창호지가, 흙 쏟아지는 베름짝이,
쥐오줌에 쳐진 안방 천장이,
잡풀 돋는 헛간 지붕이 용용 죽겠지 눈 꿈쩍이며
선상님 나 여깄수 소릴 치네.
주고개 이정골 통틀어 제일 외딴집,
전기도 안 들어오는 산지기 집에 담임 선생님 오신 날,
나 이날 잊을 수 없었네. 잊을 수 없어서
선생님 오신 다음 다음날 일요일 날,
나 뒷산에 올라 대낭구 장대로 참낭구
시퍼런 누에고치를 두들겨 털었다네.
이놈 따다가 우리 엄마 참낭구
새순처럼 은은히 푸른 비단 치마 저고리 해드려야지.
털고 또 털어 대소쿠리 그득 고치 찼지만,
그러나 엄마는 그 고치 내다 팔았고,
나 울면서 그 돈 타다 공책 샀다네.
해일/ 반칠환
달의 인력이 아니라
물고기들이 울어서 넘치는 것이다
발목이 젖는 게 두려운 사람들아
제 눈물에 저를 담그고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라
조석간만이 아니라
바다가 울엉서 넘치는 것이다
세상의 눈물 콧물 다 훔쳐주던 억척어멈도
한 번쯤 제 슬픔에 겨워 넘치는 것이다
뭇 생명들이 처음 태어난 곳도 저 눈물 속이었다
외딴유치원/ 반칠환
아랫목에 밥 묻어 놨다----
어머니, 품 팔러 새벽 이슬 차며 나가시고
막내야, 집 잘 봐라
형, 누나 학교 가고 나면 어린 나 아버지와 집 지키네
산지기 외딴집 여름해 길고,
놀아줄 친구조차 없었지만 나 하나도 심심하지 않았다네
외양간엔 무섭지만 형아 같은 중송아지,
마루 밑에 양은냄빈 왈칵 물어도 내 손은 잘근 씹는 검줄이,
타작 끝난 콩섶으로 들락거리던 복실꼬리 줄다람쥐,
엄마처럼 엉덩이 푸짐한 암탉도 한 마리 있었다네
아아 낯설고 낯설어라, 세상은 한눈 팔 수 없는 곳----
원생은 나 하나뿐인 외딴 유치원, 솔뫼 고개 우리 집
아니 아니, 나 말고도 봄에 한배 내린 병아리 떼가 있었네
그렇지만 다섯살배기 나보다 훨씬 재빠르고 약았다네
병아리 쫓아, 다람쥐 쫓아 텃밭 빠대다보면,
아버지 부르시네
풍으로 떨던 아버지,
마당에 비친 처마 그림자 내다보고 점심 먹자 하시네
해가 높아졌네, 저 해 기울면 엄마가 오시겠지
주산지 왕버들 / 반칠환
누군들 젖지 않은 생이 있으랴마는
150년동안 무릎 밑이 말라본 적이 없습니다
피안은 바로 몇 걸음 밑에서 손짓하는데
나는 평생을 건너도 내 슬픔을
다 건널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은 왜 낙타로 하여금
평생 마른 사막을 걷도록 하시고,
저로 하여금 물의 감옥에 들게 하신 걸까요
젊은 날, 분노는 나의 우듬지를 썩게 했고
슬픔은 발가락이 문드러지게 했지만,
이제 겨우 사막과 물이 둘이 아님을 압니다
이곳에도 봄이 오면 나는 꽃을 피우고
물새들이 내 어깨에 날아와 앉습니다
이제 피안을 지척에 두고도 오르지 않는 것은
나의 슬픔이 나의 꽃인걸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슴의 뿔에 대한 전설 / 반칠환
나뭇가지처럼 우거진 뿔에 새들이 앉았다 가기도 한다는 거야. 바람이 불 때 조각배처럼 흔들리던 초승달이 쉬었다 가기도 한다는 거야. 처음부터 뿔이 있던 건 아니라는 거야. 사슴들은 나무가 좋아서 여름엔 나뭇잎을 먹고 겨울엔 나무껍질을 먹었다는 거야. 엄마 사슴이 먹고, 아빠 사슴이 먹고 아기 사슴을 자꾸 낳았다는 거야. 사슴들이 몽실몽실 늘어나자 나무들이 점점 사라져 갔다는 거야. 나무 대표가 사슴들에게 항의했다는 거야. 사슴들은 몹시 미안했다는 거야. 나무와 숲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한 뼘 이마를 내어주기로 했다는 거야. 멋들어진 나무 한 쌍씩 자라게 했다는 거야. 사슴이 나무를이고 쏜살같이 달리게 되었다는 거야. 나무가 사슴을 타고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었다는 거야. 숲을 다 벤 벌목꾼들이 톱을 들고 그 나무마저 베러 온다는 거야.
즐거운 동티
- 멸종의 기쁨
반칠환
당산나무를 베고 마을길을 넓혔어. 산을 깎아 산신의 거처를 헐고, 바다를 메워 해신의 궁전을 없었어.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리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걸 알았어. 별처럼 꽃처럼 많던 신들이 실업자가 되었어. 사람의 땅에는 백년 만에 처음이라는 축제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어. 얼음 땡! 수만 년 술래였던 빙하가 풀리고, 낮은 자존의 바다가 높아져 뭍으로 넘치고 있어. 투발루 총리가 연설하며 두 발로 힘을 주니 섬 행세 하던 작은 섬이 가라앉고 있어. 목마른 아라비아 사막에 눈이 내리고, 불모의 시베리아 영구동토에 꽃이 피고 있어.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야. 최후의 한 생명까지 피안으로 건네주는 뗏군 호모 니르바나스여, 건배!
오래 아주 오래 / 반칠환
나비는 날개가 무거워 바위에 쉬어 앉았다
평생 꿀 따던 꽃대궁처럼 어지럽지 않았다
등판에 밴 땀내도 싫지 않았다
달팽이 껍질에 무서리 솟던 날
마지막 빈 꽃 듣던 바로 그다음날
바람은 낙엽인 줄 알고 나비의 어깨를 걷어 갔다
나비의 몸은 삭은 부엽에 떨어져
제 주위의 지층을 오래 아주 오래 굳혀갔고
바위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제 몸을 헐어 가벼워졌다
지금 저 바위는 그 나비다
지금 저 나비는 그 바위다
봐라, 나비 위에 갓 깬 바위가 앉아 쉬고 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별 / 반칠환
한때 이 별은 소리의 창고였지
곳간 그득 쟁쟁한 소리들이 넘쳐흐르던
소리의 왕국이었네
살아있는 모두가 악기였던 이곳 백성들이 왜
소리를 잃고 사라졌는지 몰라
쉰 목소리로 불러보지만
아무도 대답 없네
뻘흙에 묻힌 피리처럼, 물속에 잠긴 나팔처럼
잠깐, 이 별을 망태에 담기 전에
귀를 기울여야 해
혹시라도 작은 풀무치 하나, 휘파람새 하나
풀잎 하나의 떨림이라도 남아 있으면
큰일이니까
그렇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네
연인을 부르던 떨리는 음성
짝짓기철 들씨근한 수소의 콧김
아이를 재우는 자장가 소리
봄나무들 팔뚝 그득한 물소리
아무것도 이제는 없네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메아리는
누구의 울음이었을까
나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람
두드려 봐도 소리가 나지 않는 이 별을 건지려네
이제 누군가 이 별로 오는 이정표를 지워야 하리
우리들의 타이타닉
ㅡ속도에 대한 명상 7
반칠환
침몰해가는 배에서 침몰하는 배에 관한 영화를 보는
스릴을 아느냐
불치의 병상에 누워 불치의 아이가 죽어가는 다큐멘터리
를 보았느냐
침몰하고 있는 배를 구명정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으면서
철썩, 안심하고 가라앉는 종교를 보았느냐
새순 같은, 고갱이 같은, 눈사람 같은 아가들아
네가 타고 있는 별이 숯이 되어 식고 있는 걸 아느냐
토룡부인傳 / 반칠환
'며늘아, 눈을 가리니 부러운 것 없고 귀를 막으니 두려움
이 없고 코를 낮추니 욕심이 없더라 손을 버리니 사치가 없고 발을 버리니 조급함이 없고 뼈를 버리니 골다공이 없더라 삐뚤어도 한 일자로 살아왔다
바닥을 하늘로 섬기고 어둠을 꽃으로 삼고, 흙을 떡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나는 평생 이 땅을 삼켜 여의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순간 두엄을 뒷발로 헤친 어미닭이 늙은 시어미를탁 찍어올리니 올봄 한배 내린 열두 노란 병아리 떼가 쫑쫑쫑 ~
주인공과 들러리 / 반칠환
내가 세상에 나오기 46억 년 전에 지구를 만들어놓으셨더군요. 저렇게 많은 별들을 놔두고도 말이죠. 내가 다칠까봐 다섯 번이나 대멸종이라는 대본 수정이 있었더군요. 무서운 공룡들을 귀여운 도마뱀으로 바꾸어 놓았더군요. 내가 맨발로 다닐까봐 수렵채취에서 신석기 혁명에서 산업혁명까지 차례차례 진행해 놓았더군요. 내가 가난한 여인의 자궁에서 갓 나왔을 때 따뜻한 아랫목과 형제들을 준비해놓으셨더군요. 붉은 알몸 속에 든 건 두려움과 울음뿐이었는데 말이죠. 내가 낡은 오두막에서 유년을 보낼 적에도 내가 다 가보지 못할 산 너머들을 첩첩이 준비해 두셨더군요. 내가 거니는 것은 겨우 옷 솔기 같은 몇몇 바닷가일 텐데 깊디깊은 심해와 기이한 어족들까지 노닐게 해두셨더군요. 나는 올해 내내 여행한 적이 없는데 지난 봄 꽃들이 북으로 달려가더니 올 가을 단풍이 남으로 내려오는군요. 아아, 내가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와 형제와 아내와 몇몇 친구들뿐인데 곳곳에 70억이나 살고 있도록 해두셨더군요. 별이 죽은 다음에도 수백억 광년 동안 도달한 빛과,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흙 한 줌 속의 미생물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준비해 두셨더군요. 그런데, 나 또한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준비물 가운데 하나였더군요. 주인공이어서 행복하고, 들러리라서 홀가분하도록 말이죠.
참새와 홍매 / 반칠환
어린 날, 신열에 들떠
무서운 곳 헤매다
떴을 때
작은 이마에 없혀 있던
따뜻한 무게 알고말고
저 꽃나무들, 삼동을
언 꿈꾸다 문득 눈 떴을 때
가지마다 얹혀 있던
작은 무게 알고말고
겨우내 맥 짚어준 것밖에 없다고
포릉포릉 날아가니
붉은 목젖 다 드러나도록
출렁출렁 되부르네
감꽃 / 반칠환
장독대 위에 감꽃이 지네
투욱-
이승에서 저승으로
장맛이 익는 사이
박꽃 / 반칠환
가슴 속에 시인과 도둑이 함께 살아
담을 넘다가도
달빛 시나 짓고 온다
탈탈 털어봐야
이슬 장물 몇 점
노랑제비꽃 / 반칠환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노랑제비꽃 화분이다
삶/ 반칠환
벙어리의 웅변처럼
장님의 무지개처럼
귀머거리의 천둥처럼
윤회/ 반칠화
나, 백만 번이나 죽었지만
왜 이리 죽음이 낯설으냐
어떤기구 祈求 / 반칠환
제단에 돼지머리를 바치며 빈다
아무도 나무를 해치지 않는 세상 되게 하옵소서
바람상조 / 반칠환
여보, 전화할 것도 없다니까. 보람상조 말고, 바람상조. 금
파리 승무원들이 올 거야, 국빈급으로 자욱하게. 섬세한
손길로 다루어줄 거야. 간질간질 깔깔~ 스멀스멀 낄낄~
아무리 슬픈 기억을 떠올려 봐도 한 생이 터질 듯 부풀 거
야. 마침내 빵 터지겠지, 뭐 안 웃는 해골 있으랴만. 좀비
처럼 관 뚜껑 못질 당하기 싫다니까. 하얗게 불태워져 새
들의 폐를 더럽히기도 싫어. 외딴섬 풀밭에 바람 봉분으
로 덮어줘. 한평생 밥과 빵을 태워 모은 칠천오백 그램, 1
18개 원소로 환전될 거야. 가난한 풀잎의 계좌로 입금할
거야. 모자와 신발 사이에 낀 호모 사피엔스를 벗고 꽃이
될 거야. 사슴이든 염소든 찾아오라고 해. 한들한들 송이
째 맞아줄 테니까. 마음껏 뜯으라고 해. 콧등을 간질이며
퐁퐁퐁 씨앗을 퍼트릴 테니까.
공범 / 반칠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아름다워
사람이 노래하자
제초제가 씨익 웃는다
식물의 사생활 / 반칠환
화야산 어린 아가씨들은 눈뜨자마자 스타가 된다. 얼음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전국의 카메라맨들이 들이닥친
다. 눈썹에 붙은 봄서리 훔칠 새도 없이 렌즈를 들이댄다.
목덜미에 솜털이 보일수록 열광한다. 공주의 사위라도 되
려는 듯 고화질 대포를 겨누어 고지전을 펼친다. 병역필
자랑하듯 앉아서 쏘고, 엎드려 쏘고, 누워서 쏜다. 낮은 포
복 높은 포복, 작가 정신과 군인 정신으로 거친 산비탈을
내무반 마룻바닥처럼 만든다. 노루귀와 들바람꽃 아가씨
들이 '이것은 내밀에 대한 침해예요. 당신들을 고소하겠어
요.' 외친 적이 있었으나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전에 짓밟
히고 말았다. 화야산 어린 아가씨들은 해마다 산정으로
올라간다. 그녀들이 귀해질수록 환호성이 따라간다. 마침
내 공주들은 성채 같은 멸종도감으로 이주한다. 미인을
내준 산은 비로소 고요하다. 카메라 대신 과도를 든 아주
머니들이 쑥을 캐며 웃는다.
기적 1 / 반칠환
여름 장마가 휩쓸고 갔어도
계곡에 버들치 한 마리 떠내려 보내지 못했구나
기적 3 / 반칠화
강풍에 먹구름 쓸려가는데
못도 안 친 달이 하늘에 박혀 있다
병원24시 / 반칠환
아가야 아픈, 아가야
오만 가지 병을 다 고친 저 돌은 아프지 않대
쾅쾅 쇠메로 두드려도 울지 않는대
아가야 아픈, 내 아가야
아프면 살리라
입원 / 반칠환
꽃나무로 온 나비 떼는
꽃나무에서 가고
바랭이 끝에 온 이슬은
바랭이 끝에서 간다
아버지는 아랫목으로 왔다가
아랫목에서 가시고
어머니는 아랫목으로 왔다가
병원에서 가셨다
요즘 사람들 죄다 병원으로 와서
병원에서 가니
한 생이 입원이로구나
부재중 전화 / 반칠환
집을 비운 사이 전화가 왔다
재발신 번호를 누르자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세상에, 없는 곳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없는 곳으로 오라는 뜻일까요
어떤기도/ 반칠환
제단 머리에 돼지머리를 바치며 빈다
아무도 아무를 해치지 않는 세상 되게 하옵소서
이기주의 / 반칠환
'나는 너, 너는 나 우리는 한 몸이란다'
설법을 듣고 난 동승이 말했다
알았어요, 하지만 내가 스님일 때 보다
스님이 나일 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문열사 / 반칠환
크게 신문에 날 일은 아니로되
산천초목도 벌벌 떨던 독재자로 하여금
제 뺨을 세 번 되우 치게 하고 죽었으니
아는 사람들은 그 의로운 혈 을 기려
문#열사겠 라 부른다
wing wing
그는 작지만 좌, 우의 날개를 지녔다고 전한다
지퍼와 단추/ 반칠환
지퍼는 오늘도 이 악물고 살자 하고,
단추는 오늘도 목 매러 가자한다
수평선 / 반칠환
멸치 한 마리 솟구쳤을 뿐인데
일순 수평선은 수평을 놓친다
수평선은 언제나 수평이 없는 채로 수평이다
호도과자 /
쭈글쭈글 탱글탱글
한 손에 두 개가 다 잡히네?
수줍은 새댁이 양볼에 불을 지핀다
호도과자는 정말로 호도를 빼닮았다
호도나무 가로수 下 칠십년 기찻길
칙칙폭폭, 덜렁덜렁
호도과자 먹다보면 먼 길도 가까웁다
비밀/ 반칠환
몰래 사과 한 알에
'핼리 혜성'이라고 써놓았다.
올 가을, 지구는 저 혜성과 충돌할 것이다.
쿵' 하기 전에
까치들이 핼리 혜성을 다 파먹었다.
어휴! 지구는 영문도 모른 채 안전하다.
냄비보살 마하살/ 반칠환
허름한 시골 함바집 식탁위
처억 이름 모를 냄비가 앉았다 간
검은 궁둥이 자국을 본다
손으로 쓸어보지만
검댕은 묻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바쁘고 속이 타도
궁둥 걸음밖에 할 수 없었을
어떤 아낙의 모습 선연하다
눈물 나게 뜨거워 달아났다가도
가슴 시리면 다시 그 불판 그리워
엉덩이부터 들이댔을 서러운 조강지처
평생 끓이느니 제 속이요
쏟느니 제 창자였을
저 아낙의 팔자는 어느 사주에
적혀 있던 걸까
팔만사천 번 찌개를 끓였어도
죄다 남의 입에 떠 넣고
빈 입만 덩그라니 웃었으리라
누나야 / 반칠환
누나야
다섯살 어린 동생을 업고 마실 갔다가
땀 뻘뻘흘리며 비탈길 산지기 오두막 찾아오던 참대처럼 야무진,
그러나 나와 더불어 산지기 딸인 누나야
국민학교 때
'코스모스 꽃잎에 톱날 박혀 있네
톱질하시던 아버지 모습 아련히 떠오르네'
동시를 지어 백일장에 장원한 누나야
나이팅게일이 되겠다고, 백의 천사가 되겠다고
간호대학에 간 누나야
졸업한 다음 시내 병원 다 뿌리치고 오지마을
무의촌 진료소장이 된 누나야
부임 첫날 다급한 소식 듣고 찾아간 곳 다름 아닌
냄새나는 축사, 난산의 돼지 몸 푸는 날이었다고
다섯 마린지 여섯 마린지 돼지 새끼 받아내느라
혼났다던 스물 두 살 누나야
못난 동생 시인 됐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머리 쓰다듬던 누나야
병든 엄마 병들었다고 누구보다 먼저 친정 달려와
링거병 꽂고 가는 양념딸 누나야
이제 곧 큰 길이 나고 사라진다는 고향마을 중고개에
아직도 나를 업고 가느라 깍지 낀 손에
파란 힘줄 돋는 누나야
세상의 모든 누나들을 따뜻한 별로 만든
나의 누나야
팔자 / 반칠환
나비는 날개가 젤루 무겁고
공룡은 다리가 젤루 무겁고
시인은 펜이 젤루 무겁고
건달은 빈 등이 젤루 무겁다
젓국가게/ 반칠환
굴젓
갈치젓
명란젓
오징어젓
비린내 가득한 그 옆에 쭈그려
상한 내 마음 한종지
헐값에 팔고 싶네
무인도 / 반칠환
오직 사람 하나 없어
무,인,도
경전도 사원도 없으니
죄도 없다고
끼루룩 끼루룩
고요/ 반칠환
메밀묵 팔러 시내 가신 엄마, 앞들에 땅거미 지도록 돌아오지 않아
섬돌에 앉아 목 빼어 고갯길 바라보노라면
외딴집 외딴 마당은 아득히 고요해
건너 마을 저녁 연기도, 개 짖는 소리도 그치면
빈 묵판 달각이는 엄마 발자욱 소리 들려오도록
세상은 너무나 고요해
집 나간 강아지 검줄이 집도 고요해
빚 대신 팔려간 중송아지 없는 외양간도 고요해
장작불 사위어든 쇠죽솥 고래도 고요해
이태 전 돌아가신 아버지 기침소리도 나지 않는,
학교 간 누나도 돌아오지 않는 두 칸 방도 고요해
달이 먼저 뜰라나, 엄마 먼너 오실라나
토옥---- 톡!
가으내 바싹 마른 달맞이꽃 씨앗 터지는 소리
사라진동화 마을/ 반칠환
더 이상 불순한 상상을 금하겠다
달에는 이제 토끼가 살지 않는다. 알겠느냐
물 없는 계곡에 눈먼 선녀가 목욕을 해도
지게꾼에게 옷을 물어다 줄 사슴은 없느니라
아무도 호랑이에게 쫓겨 나무 위로 올라갈 일이 없을 것이며
나무 위에 오른들 더 이상 삭은 동아줄도 내려오지 않느니라
흥부전 이후, 또다시 빈민가에 박씨를 물고 오는 제비가 있을 것이며
소녀 가장이 밑 없는 독에 물을 부은들 어디 두꺼비 한 마리가 있더냐
이 땅엔 더 이상 여의주 없음을 알 턱이 없는 너희들이
삼 급수에서 비닐 봉다리 뒤집어쓴 용이 승천하길 바라느냐
자아, 더 이상 철부지 유아들을 어지럽히는 모든 동화책의 출판을 금한다
아울러, 덧없이 붉은 네온을 깜박이는 자들이여
쓸데없는 기도를 금한다
하느님은 현세의 간빙기 동안 취침중이니
절대 교회 문을 시끄럽게 두들기지 말거라
너희가 부지런히 종말을 완성할 때 눈을 뜨리라
멸치에 대한 예의/ 반칠환
큰 생선은 머리 떼고, 비늘 떼고, 내장 발라내고 지느러미 떼면서 멸치를 통째로 먹는 건 모독이다 어찌 체구가 작다고 염을 생략하랴 멸치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
새2/ 반칠환
새들에게 가장 충격인 것은 날아오를 하늘이 없는 것보다
내려앉을 대지를 발견 못했을 때라고
날개 / 반칠환
저 아름다운 깃털은
오솔오솔 돋던 소름이었다지
창공을 열어 준 것은
가족이 아니라 무서운 야수였다지
천적이 없는 새는 다시
날개가 사라진다지
닭이 되고, 키위가 된다지
호수의 손금/ 반칠환
얼음호수가 쩌엉 쩡 금간
손바닥을 펴보이자
수십 마리 오리들이 와글와글
엉터리 수상을 본다
걱정말우
봄부터는 운수 풀리겠수
쩌억 쩍 어름에 달라붙는
제 물갈퀴 발금의 시린 소망이겠지
하나님보살마하살/ 반칠환
고향 친구가 휴대폰으로 동영상 하나를 보내왔습니다.
"아이구, 나이가 들어갖고 오늘도 모르고, 내일도 모르고,
시간가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한테 좋은 말씀 들을라구
아무리 정신을 써도 맨날 잊어버린께 명철하신 하나님께
모든 걸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관세음보살"
평생 다니던 절 대신 아들 며느리 따라 교회 나가신다는
친구 어머니였습니다. 장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고 큰소
리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보고 또 보다가, 문득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팔순의 어
머니는 오늘도 모르고 내일도 모르신다지만 하나님과 관
세음보살이 하나이던 믿음의 본디 거처를 알고 계신 듯했
습니다.
나무의 손금 / 반칠환
지긋지긋한 겨울이 지나면
나무들은 저마다 팔자를 고쳐보려고
봄별 속 수상을 본다
부르진 겨울눈 주먹 속
푸른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생명선 주맥, 운명선 측맥
자잘한 감정선 세맥
천 년 수상가인 바람이
이파리를 뒤집고 간다
해마다 손바닥을 바꿔도
손금은 어찌 그리 똑같누
올해도 등나무는 등이 휘고
배나무는 배가 나올 것이야
그래도 당장 봄볕이 좋다고
등꽃 복채 눈 부시다
배꽃 복채 눈 시리다
움켜쥔 주먹을 펴라 / 반칠환
보리 한줌 움켜쥔 이는 쌀가마를 들 수 없고
곳간을 지은 이는 곳간보다 큰 물건을 담을 수 없다
성자가 빈손을 들고, 새들이 곳간을 짓지 않는 건
천하를 다 가지려 함이다
설령 천하에 도둑이 든들
천하를 훔쳐다 숨길 곳간이 따로 있겠는가?
평생 움켜쥔 주먹 펴는 걸 보니
저이는 이제 늙어서 새로 젊어질 때가 되었구나
언시와 근시 / 반칠환
어린애는 추억에 진 빵한 조각을 보고
노인은 제가 온 먼 곳을 본다
냇물이 얼지 않는 이유 / 반칠환
겨울 양재천에 왜가리 한 마리
긴 외다리 담그고 서있다
냇물이 다 얼면 왜가리 다리도
겨우내 갈대처럼 붙잡힐 것이다
어서 떠나라고 냇물이
말미를 주는 것이다
왜가리는 냇물이 다 얼지 말라고
밤새 외다리 담그고 서 있는 것이다
폭포 / 반칠환
저아까운 투신!
두어라
자꾸만 죽어야 산다
야심 / 반칠환
불개미 한 마리가 덥석 내 발가락을 깨문다
온 힘을 다해 나를 잡아당긴다
여름 장마 오기 전에
나를 끌고 개미굴로 가려고••••••
갈 수 없는 그곳 / 반칠환
그렇지요,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상의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다는 그곳은 도대체 얼마나 험준한 것이겠습니까. 새벽이 되기 전 모두 여장을 꾸립니다. 탈것이 발달된 지금 혹은 자가용으로, 전세 버스로, 더러는 자가 헬기로, 여유치 못한 사람들 도보로 나섭니다. 우는 아이 볼기 때리며 병든 부모 손수레에 싣고 길 떠나는 사람들, 오기도 많이 왔지만 아직 그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는 도복을 입은 도사들 그곳에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팔아 돈을 벌기도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그곳, 그러나 바늘귀도 오랜 세월 삭아 부러지고 굳이 더 이상 통과할 바늘귀도 없이 자가용을 가진 많은 사람들 벌써 그곳에 도달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건너가야 할 육교나 지하도도 없는 곳, 도보자들이 몰려 있는 횡단보도엔 연이은 차량, 그들에게 그곳으로 가는 신호등은 언제나 빨간불입니다. 오랜 기간 지친 사람들, 무단 횡단을 하다가 즉심에 넘어가거나 허리를 치어 넘어지곤 합니다. 갈 수 없는 그곳, 그러나 모두 떠나면 누가 이곳에 남아 씨 뿌리고 곡식 거둡니까. 아름다운 사람들 하나 둘 돌아옵니다. 모두 떠나고 나니 내가 살던 이곳이야말로 그리도 가고 싶어 하던 그곳인 줄을 아아 당신도 아시나요.
오천 년의 포옹 / 반칠환
이탈리아 만바토시 부근 신석기 유허에서 두 남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마가 닿을 듯 마주 누워 네 개의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두 사람의 포옹이 오천 년째라고 밝힌다. 부빌 입술도, 두근거리는 심장도 달아났지만, 오천 년을 속삭여도 처음 듣는 말이 있는지 남자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고 있다. 척추에 꽂힌 화살이 흔들리지만 아픔과 원한 따위 잊은 지 오래. 두개골이 반쯤 무너진 여인은 더 크게 웃고 있다. 천국도, 지옥도, 환생도, 윤회도 관심 없다는 듯 서로 뒤섞인 정강이뼈 차르르- 던져 윷놀이를 하고 있다. 아무리 슬픈 인생이라도 살과 근육과 힘줄만 벗어 버리면 웃지 못 할 해골은 없다는 듯, 걱정 말고 미련 말고 맘껏 살고 오라는 듯, 한 쌍의 주검이 오천 년째 죽음을 홍보하고 있다.
언제나 지는 내기 / 반칠환
소나무는 바늘 쌈질를 한 섬이나 지고 섰지만
해진 구름 수건 한 장을 다 깁지 못하고
참나무는 도토리구슬을 한 가지 쥐고 있지만
다람쥐와 홀짝 내기에 언제나 진다
눈 어둔 솔새가 귀 없는 솔잎 바늘에
명주실 다 꿰도록
셈 흐린 참나무가 영악한 다람쥐한테
도토리 한 줌 되찾도록
결 봄여름 없이 달이 뜬다
시치미 / 반칠환
저 해 맑은 거짓말 좀 보게나
치악산 능선마다
새똥, 곰 똥, 달팽이 오줌
다 씻어 내린 계곡물이
맑다
뒷짐을 지고 크게 웃다 / 반칠환
창밖으로 나를 푼다
등 뒤로 묶은 두 손
뒤를 받쳐 앞을 편다
습관적으로 젓던 노를 들어
유유히 흐르는
배, 땡땡
부푼 돛배의
출항이다
낮달 / 반칠환
울 어매 얇게 빗썰어 놓은
무 한 장
목숨 / 반칠환
그럴 분이 아닌데
손가락도 열개
발가락도 열 개
이빨은 젖니한벌
영구치 한 벌
참 꼼꼼하신 분인데
가장 소중한 목숨이
하나뿐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