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코스코(COSTCO) 가는 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성경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구절이 있었습니다. ‘For if anyone thinks he is something when he is nothing, he deceives himself’(갈6:3). 이 말씀을 언뜻 이해한 바로는, ‘(누가) 사실은 별것도 아닌 존재이면서 혼자 생각에 무엇이나 된 줄로 안다면 착각이다.’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바울은 왜 이런 당연한 말을 하나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when he is nothing”(아무것도 아니면서)이라는 대목이 종일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참으로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다 속고 있다는 말인가? 저녁에 어떤 집회에 가서 이 말씀을 내어놓자, 다양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 자신도 그때까지는 이 말씀이 충분히 소화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산책하면서, ‘오 주님 이 말씀을 제게 열어 주소서! 당신의 긍휼을 구합니다. 제가 스스로를 속이는 상태에 있다면 구원하소서! 오 주님, 빛 비춰주소서’라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바로 앞 절의 “여러분은 서로의 짐들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이룰 것입니다.”(2절)라는 말씀과 함께 묵상해야 하는 문맥입니다. 영어 성경은 3절 처음이 ‘for’(가르, 1063, 원인, 설명, 추정 혹은 계속을 표현하는 접속사)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좀 더 넓게 본다면, 이 부분은 갈라디아5장 1절부터 6장 17절까지에서 다루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상생활’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이룸’(6:2-6)을 말하는 대목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법을 완전히 이루어야 하는데, 그 구체적인 길은 서로의 짐들을 져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무엇이나 된 줄로 스스로 속고 있는 사람은 남의 짐을 지는 일에서 모호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조금 더 추구하고 묵상함으로 얻게 된 도움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여기의 ‘그리스도의 법’은 쉽게 말해 ‘사랑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그 영의 열매’(갈5:22) 중 하나이므로, 결국 이 말씀은 ‘생명의 영의 법’(롬8:2)을 따라 사는지 여부의 문제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해당 각주는 ‘그리스도의 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으로 운행하는 더 높고 더 나은 생명의 법이다(롬8:2, 요13:34). 사랑은 신성한 생명의 결과요 표현이며(비교 고전 13장), 그 영의 열매 중 한 항목이다(갈5:22).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법으로서, 우리가 서로 짐들을 질 수 있도록 생명의 영의 법으로 말미암아 구체화되어야 한다(갈6:2, 각주1).
또한 여기서 말하는 ‘짐들’(burdens)은 빈센트의 <말씀 연구>에 의하면, 어떤 실패한 지체가 느끼는, “도덕적인 결점, 잘못, 슬픔, 부끄러움, 후회(양심의 가책)”이고, 그것을 함께 짊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혹은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어떤 지체가 겪는, “고생, 고난, 책임감, 염려가 몸 혹은 생각을 짓누르는 그 무게감”(It denotes any weight which presses heavily on the body or the mind, as toil, suffering, responsibility, anxiety)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주변의 어느 지체가 도덕적인 실수, 사업실패, 혹은 사고 등으로 온 환경 때문에 괴로워할 때, 주변의 지체들이 그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교회생활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한두 번쯤 이런 위기상황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지체가 주변에 있게 되면, 대략 다음과 같은 반응이 있습니다. 1) 먼저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은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지를 모르거나 그런 상황에 연루되는 것이 번거로워 사실상 방치하는 것입니다. 2) 때로는 어떤 도움을 주지만, 의무감에 마지못해 그리합니다. 3)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자기에게 닥칠 손해나 불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안의 영의 인도를 따라 다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끝난 자(nothing)이고,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살 권리만 있음에도, 옛 자아가 자기 입지를 고려함으로 결과적으로 그 영의 인도를 거부하는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위 해당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참고로 갈라디아서 라이프 스타디는 해당 부분(갈6:2-3)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관상으로는 3절과 2절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사실은 대단히 실제적이고도 의미 깊은 관계가 있다. 자기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짐을 지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짐을 질 것이다. … 바울은 자신의 체험에 따라 이 구절들을 썼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부담을 진다는 것을 바울은 체험을 통해 깨달았다. 우리는 우리의 행함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영 안에서 그 영을 좇아 행하기 때문에 그것을 할 뿐이다.
주님 앞에서 이 말씀들을 좀 더 묵상할 때, 다음 몇 가지 사례들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계모를 데리고 사는 어떤 사람”(고전5:1)을 다룬 바울의 태도입니다. 보통은 공동체에서 격리하고 나 몰라라 하고 싶을 사례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책망과 격리만 아니라,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여, 그러한 사람이 너무 심한 슬픔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라”고 권면했습니다(고후2:6-8).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바울의 인격을 통해 균형 있게 나타남을 봅니다.
둘째는 죄지은 한 형제를 교회가 치리한 사례입니다(마18:15-17). 즉 교회가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겼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문맥에 의하면, 교회의 말도 듣기를 거부하는 형제(마18:17)를 회복하려는 “두 사람이 땅에서 구하는 기도”가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이 또한 짐을 지는 한 방법입니다.
셋째는. 여행 중에 꼭 필요한 자신의 차비를 남에게 준 후 기적적인 방법으로 자기 필요가 채워진 워치만 니 형제님 이야기. 빵밖에 없는 사람, 버터밖에 없는 사람이 기도와 영의 인도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킨 사례 등등. 오 ! ‘주라 그리하면 주신다’(눅6:38)는 위대한 약속의 말씀이 얼마나 많은 때 우리의 믿음 없음과 자기 과신 때문에 막히고, 지체 사이에 ‘평균케 함’(고후8:14-15)의 원리가 작동하지 못하게 하는지!
오 주님, 많은 때 자신의 판단과 생각을 따라 살고,
곤경에 처한 지체들의 필요를 채우시려는 그 영의 인도를 거절했습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 앞에 자신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님을 더 보게 하소서!
몸의 지체들을 목양하고 때를 따라 도우시려는 당신의 통로로 쓰임 받게 하소서.
기꺼이 서로의 짐을 짊어지게 하사 당신의 교회 안에 형제사랑의 실재가 더 풍성히 나타나게 하옵소서! 아멘.
첫댓글 뭔 말씀을 하실려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영의 인도를 거절 했다고 하는데 그영이 뭔가요?
기꺼이 서로의 짐을 지게 하라 하시는데 그냥 내가 먼저 지면되지 주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면 안됩니다.
먼저 내가 희생하고 손해보고 살면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간단 합니다.
바울이 한 말씀은 뭐좀 안다고 경거망동 하지를 마라~이런 말씀을 하신걸로 압니다.
적어도 바울은 영의세계를 아는 지식이 넘쳤으나 보편적인 사람들은 그 세계를 모른다고
생각한것 같습니다. 사실이 그렇구요~영의 세계를 모르고 성경을 깊이 이해 할려고 하면
엉뚱한데로 간다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칭 하면서 혈연에 매어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이사람은 영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이고
성경을 아무리 읽고 묵상해도 육적인 관계속에서 이해하고 바라볼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자신의 열정과 모든것을 바치며 살아간것은 영의세계와 육의 세계를
확연히 꿰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이분은 이러한 특별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것이고 이러한 교육은
아무나 받는것이 아니랍니다.보편적인 신앙인은 그저 그말씀에 순종하고 살면 되는 것이지 그이상
아는척을 하면 엉뚱한데로 흐르고 맙니다.
작금의 개신교가 이러한 무식한 선생들의 교리로 인하여 망신창이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 영은 갈라디아서 5장 25절이 말하는 'the Spirit'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거듭날 때 영접한 영입니다. 요3:6...
@낫띵 바울은 "우리가 그 영을 따라 산다면, 또한 그 영을 따라 행합시다"라고 말했지요.
@낫띵 제가 지금 갈라디아서 5장 25절을 읽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적혀있습니다만, 낫띵님이 말씀 하시는 그 영이 어찌하여 갈라디아서 5장 25절이라 말할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장 25절의 앞뒤 문장을 연결해보면 성영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열매가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를 영접할때 그 정과욕심을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을 밖고 죽어서 없는 사람들이다.그러므로 격동하고 투기하는자들이
되어서는 안될것이다 라고 부연하고 있습니다.
@낫띵 님 영이란 존재는 수없이 많답니다. 여기서 성령을 그냥 그 영이라 부르면 헷갈린다는 애기입니다.
제가 이미 성령에 대해서 기술한바가 있습니다만, 글자 한자의 잘못 표현으로 인하여 너무 많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작금의 개신교의 상황을 초래 했다고 생각합니다.
낫띵님이 많은 성경 지식을 갖고 계시고 도움이 되는 글을 많이 쓰시는것은 알지만
영에 관하여는 동양권이 더 압도적이고 영어권 개신교인들은 전혀 개념이 안 잡힌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낫띵 요한복음 3장 6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육으로 난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것은 영이니~ 는 거듭 난다는것을 설명하는 과정에 말씀입니다만,
이부분의 제대로된 풀이를 하는 사람은 아직은 없는듯 합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몸의 상태를 육으로 설명 하시는데 한마디로
하나님은 영이라 하는데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몸이라는 표현으로 보고 있으며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몸(영과 육)은 하나님의 것으로 영이라 말씀 하셨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서도 낫띵님이 말씀 하시는 그영과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입니다.
@조력자 조력자님, 저도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번역상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 가끔씩 영어 혹은 헬라어 원문을 살펴볼 때가 있습니다.
갈5:25는 영어로 If we live in the Spirit, let us also walk in the Spirit.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이라고 할 때는
마태복음 1장 20절처럼, the Holy Spirit이라고 해서 'Holy'가 들어갑니다.
@낫띵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3장 6절도 'the Holy Spirit'이 아닙니다.
그냥 birth from the Spirit is spirit 입니다.
따라서 the Spirit 을 '그 영'이라고 한국어로 직역하여 읽은 것입니다.
정관사 the 가 앞에서 이미 나왔던 영을 받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전후 문맥 어디에도 the Holy Spirit은 언급되지 않았어요.
@조력자 "글자 한자의 잘못 표현으로 인하여 너무 많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작금의 개신교의 상황을 초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이네요.
사실 성경을 임의로 읽고, 또 임의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영'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일단 이 정도로 추가 설명을 드려봅니다.
마찬가지로 갈라디아 5장 그 어디에도 성령을 가리키는 the Holy Spirit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영어 성경은 다 the Spirit입니다.
마1:20에서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할 때는
'성'(Holy)에 해당되는 헬라어 '하기온'(스트롱 번호 40)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당연히 '성령'이라고 번역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요3:6, 갈5:25는 '하기온'(40)이 없습니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 7장 39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믿은 사람들이 과연 누구(어떤 영)을 영접했는지의 문제입니다.
이 구절이 만일 삼위의 제 3격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그 때까지 성령께서 안 계셨다는 결론에 도달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이단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안 계신 ' 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저의 태클은 성령이냐 그냥 영이냐를 논하자는것도 아니고 영어 성경공부 하자는것도 아니랍니다.
타이틀이 바울의 어록을 내 세웠으면 그문장에 집중하자는 것이고
성경의 여기 저기를 짜집기 하여 본말을 흐리게 하지 말자는 뜻이며
본인이 말씀하시기를 원하는 핵심을 내 보이라는것입니다.
제가 영어 성경 운운하며 지식 자랑하는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저의들이 보는 한글 성경이 한문과 한자를 쓰는 중국을 거쳐서 번역되었으며
한자를 한극로 단순히 바꿔 쓰고 있다는것입니다.이를테면 성령이나 영이
한글이나 한자라는 사실이고 영어는 뜻글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가 이미 사람과 교회를 연구 한다고 했습니다만, 물론 성경도 많이 독파하고 모르는것은
주님께 물어 보기도 합니다. 한국교회가 영어권에서 신학 공부한 사람들이 한문이나 한자가
나타내는 뜻을 간과하고 영어적 표현을 한국말로 번역하므로써 많은 문제를 야기 한다고
보는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성경과 주님은 인간을 떠나서는 존재 가치가 없는데
영어권 신학자들이 신에 너무 치중하다보니 인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동양권(중국)이 신과 인간을 적절히 이해하는데 앞서있다는 애기입니다.
저같은 경우는 한극성경(한문이 많음)이 영어성경보다도 더 깊이가 있다는것을
깨달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혹은 영어 성경을 읽더라도 한국인의 관념과 개념으로 번역하여
이해하며 누군가 초기 사람이 이뜻은 이렇게 번역하자는 가르침으로 시작된다는 애기입니다.
차라리 초기 선생의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기 보다는 한글성경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선생이 많아지기를 기대하고 한극 성경에 나타난 한문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서로가 공유할수 있다면 한국교회 발전에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이유는 지금도 한글 성경으로 공부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것이기
때문입니다.
위 글 맨 마지막 부분 기도가 저의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위 저의 꼬리글은 영어 한국어 헬라어...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성령'에 대한 이해 즉 진리인식 문제이지요.
조력자님에게 성령은 어떤 분이신지요?
조력자님은 어떤 분은 영접하여 거듭나셨나요?
이런 중요한 진리를 다룬 것입니다.
저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며 예수님을 멘토로 삼고
그의 가르침대로 살아 볼려구 몸부림 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에 대해서는 저가
이미 글을 올린바가 있으므로 참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누구든지 영접하고 대접하고 사랑하고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에 대해서는 잘 모르구요~그저 옛날 나쁜 습관을 버릴려고
노력 합니다만, 잘 안될때가 많습니다.
저가 지적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타이틀은 무엇이 된줄로 생각하지 마라~로 시작하는데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돕고 살아야 한다로
장황하게 설명을 하시네요~처음부터 끝까지 타이틀에 충실한 글을 올려주면 좋을것 같고
@조력자 기도문을 올렸는데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 애매 모호하다는 느낌이 옵니다.
그영의 지시를 받는다하니 저로서는 생소한 느낌이고 주님이나 예수님으로
표현하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평소에 낫띵님의 글을 자주 접하면서 감동도 자주 받고 생각이 같은 부분도
많이 발견했던터라 이번에는 다소 실망 스러워 태클 좀 걸었습니다만,
낫띵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오니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력자 조력자님,
아마 제가 글 솜씨가 없어서 의사전달이 좀 부족한 가 봅니다.
위 글의 취지는... 어려운 사람 돕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살라(갈2:20)는 말입니다.
바울이 도덕과 선행을 가르쳤다면 성경은 윤리학 교과서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를 살라는 것입니다.
그 나타난 표현은 남을 돕는 것일지라도요.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사는 것과 선한 내가 남을 돕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지요.
@조력자 그리고 '그영을 따라 살라'는 말은 성경 본문이지요.
Walk by the Spirit(갈5:25).
그리고 조력자님이 말씀하신 아래와 같은 표현은 의외입니다.
진리를 찾아 거의 안 가본 단체가 없다는 조력자님이
거듭남에 대해서 잘 모르신다니요.
아무리 겸손의 표현이라고 하셔도 진리는 진리인데
어떻게 거듭남을 모르는데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거듭남에 대해서는 잘 모르구요~그저 옛날 나쁜 습관을 버릴려고
노력 합니다만, 잘 안될 때가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조력자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아니면 아직은 아니고...앞으로 거듭나려고 노력하는 중에 계십니까?
뭔가 아주 잘못 이해를 하시는군요~
저는 진리의 말씀을 찾아 여러 교회나 단체를 기웃거린게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은 성경에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 나타나 있구요~
뭔 헛소리들을 해대는지 알아보려 다닌적은 있고 회개 시키려 다닌적도 있지요~
거듭남에 대해서는 이미 저가 거듭남과 부활에 대해서 기술한바가 있습니다만,
저자신의 거듭남에 대해서는 자랑거리가 아니기에 그렇게 답변 하는겁니다.
@조력자 그러시군요....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h이y spirit 과 the sprit 를 어찌 구분 하시나요
한글 성경에서는 똑같이 성령으로 번역하여 부르고 있습니다만,
이부분의 이해가 없으면 바울 서신서를 함부로 인용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조력자 "이부분의 이해가 없으면 바울 서신서를 함부로 인용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공감합니다.
@조력자 "h이y spirit 과 the sprit 를 어찌 구분 하시나요?"---
간단히 한 두 마디로 설명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고, 쉽지 않은 주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질문을 하셨으니 이렇게 답변을 드려보겠습니다.
1. 우선 영어로 에스(S, s)가 하나님에 관련된 것일 때는 대문자로 쓰고, 사람의 영은 소문자로 구분하면 좋습니다.
2. 성령은 일반적으로 삼위 중 제 3격을 가리키나, 그 영은 삼위 전체가 포함된 개념입니다.
3. 거기에다가 주 예수님의 부활하신 인성이 추가된 영입니다.
4. 이 방면에 대한 진리는,
1) 구약 출애굽기 30장에 나오는 '관유'
2) 요7:39의 '예수께서 영광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라는 말씀
3) 빌1:19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란 말씀 속에 녹아 있습니다.
4) 신학자(및 목회자) 중에는 앤드류 머레이가 <그리스도의 영>(기독교 문서선교회)이란 책에서 이 주제를 좀 다뤘지요.
5) 국내 신학자 중에 고신교단 변종길 박사님이 쓰신 <성령과 구속사)(개혁주의신행협회)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6) 참고로 출애굽기 30장의 관유를 성령 내지는 그영의 예표로 본 사람 중에 형제회 신학자인 C.A. Coates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영문 소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mybrethren.org/bios/framcac.htm
앤드류 머레이는 많은 분들이 아시고요.
낫띵님이 시간도 많으시고 공부를 많이 하시는군요~
현세에 하나님이 가장 크게 쓰는 종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최고의 신학자와 기도자, 능력자가 한국에서 쓰임 받고 있음니다만, 한가지 아쉬운것은
이들이 가족(특히 자녀)에 메어서 덕이 안되고 있을 뿐입니다.
저도 한때 외국인 선교사나 신학자들 중에 진리를 아는자들이 있는지
살펴볼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간단히 질문하고 있음에도 답변이 시원치가 못함을 느낌니다.
복음은 간단 명료해야 능력으로 나타나고 행함으로 나갈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홀리 스피릿과 더 스피릿을 왜 구분하여 썻으며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를 아신다면
좋겠습니다.
@조력자 "현세에 하나님이 가장 크게 쓰는 종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누구를 말씀하시는지요?
@조력자 "성령은 일반적으로 삼위 중 제 3격을 가리키나, 그 영은 삼위 전체가 포함된 개념입니다."
" 거기에다가 주 예수님의 부활하신 인성이 추가된 영입니다."
어떻게 더 간단하게 답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낫띵 한국에는 목사중에 과거에도 없고 현재도 미래도 없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능력을 행사하는 종도 있고
셰계적인 부흥사와 신학자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한국교회와 주의 종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선지자급 종도 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이 크게 쓰고 계시지만 부족한 부분(육신에 메인바)이 있어 한국교회가 지금의
모양입니다. 바울이 쓰고있는 더 스피릿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보혜사를 지칭한걸로 저는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승인하에 예수님의 분깃을 영으로 보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홀리 스피릿은 비둘기 같은 성령으로 보혜사 하고는 좀 구별되고 선지자 급이 받는
영으로 이해 하시면 어떻까요?
@조력자 제가 이런 부분의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는 처음이기에 듣지도 알지도 못한 애기라며 우기겠지만
성경을 이해 하는데 도움이 될것입니다.
이러한 몇가지 기초가 이해되지 않는한 성경을 무수히 읽어도 헛소리를 하게 되고
복음의 정리가 안되는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낫띵님은 지방교회 교인입니까?
아니면 기도 내용으로보아 지도자급으로 냄새가 납니다만,
몇해전 지방교회 장로들과 교제를 신청했지만, 상대가 회피하고 저도 바쁜 관계로
중단된바가 있습니다.
@조력자 "더 스피릿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보혜사를 지칭한걸로 저는 이해하고"
"홀리 스피릿은 비둘기 같은 성령으로 보혜사 하고는 좀 구별되고"---- 두 영을 '구별'하시니
일단 저와 공통 인식에 접근하셨다고 보고 싶습니다.
이제 두 영들의 '구별' 혹은 '차이'에 대해서만 조금 더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되겠네요.
@조력자 제가 어디 소속인지, 어떤 위치인지는 저는 진리대로 말씀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 "지방교회" 소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거듭난 사람은 다 그 거주지역을 범위로 하는 교회의 일원입니다.
또는 몸된 교회의 소속이거나요.
저는 낫띵 즉 아무것도 아닌 자 혹은 작은 형제일 뿐입니다.
@낫띵 우리는 다 지방교회다~라는 말씀은 낫띵님의 주장이고 저는 교회가 세워진 목적에 따라
분류해야 한다는 애기를 한바가 있습니다. 낫띵님이 주장하는 교회는 저는 지역에 기반을 둔
동네나 마을교회라고 부릅니다. 이를테면 교회는 신학교, 저가했던 기도학교,지금 하고있는
수도회,동창교회,가족교회,이민사회에 있는 민족교회,지금 한국에 많은 기도원이나 수도원교회등 종류가
많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일반적으로 소속을 묻는것은 분열된 모습을 보이는 현존의 교회들이 특정인의
교리나 주장을 집단적이고 주입식으로 교육시키는데 예수님의 복음에 빗나가 있는것을
발견 할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력자 제가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무엇인가가 중요할 뿐이지요.
@낫띵 수도회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으실 것입니다.
사람의 소견을 따라 임의로 하는 소위 사역은
훗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불에 태워질 나무와 풀과 짚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낫띵 제가 주장하는것이 의미가 없다니요?
낫띵님이 성경을 베껴서 쓰는것이 아니라 성경의 글귀에 낫띵님의 주장이 가미되어 있기에
말씀을 나누고 있는것입니다.성경의 교회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지만,
지방교회는 그장소 마다 그지역의 이름을따서 교회 간판을 붙이는것이 교회라고 주장을
하시기에 저는 모임을 교회라 하는데 그모임의 목적에 따라 교회 모임을 붙인다고
애기를 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수도회는 수도를 목적으로 모이고 지금의 동네(지방)교회는
예배나 선교를 목적으로 모이는것이 아닌가요?
@조력자 아닙니다.
지역교회(또는 지방교회)는 주님의 몸을 전제한 개념입니다.
우주가운데 유일한 주님의 몸이 그 지역에 그 지역을 '단위'로 나타난 것이지요.
수도원 교회는 우선 성경에 그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우주적인 하나의 교회를 전제한 것이 아님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는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 임의로 교회라고 만들고 임의로 이름을 붙이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결국 분열의 씨앗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붓하게 끼어드는 사람이 없이 대화를 하고 있는데 다른곳에 똑같은 애기를 복사해서 장을 펴는
이유가 뭔가요?
그 주제가 꼬리글로 다루기에는 너무 비중이 큰 진리라
별도로 가져간 것입니다.
@낫띵 여기서 토론하는중에 낫띵님이 거론하는것은 중요하지 않은것이 없습니다.
저도 이것저것 바쁜 사람이지만, 귀하의 영혼이 귀중하기에 시간을 내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수도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으며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너가 십자가를
지고 죽은후에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따라서 나자신을 먼저 죽이는 훈련을 하는곳이
수도회 입니다.
자신이 속한 모임만 교회라는 생각은 교만의 극치가 아닌가 생각하고
교회의 역사와 현존하는 교회의 모양들을 더 폭 넓게 공부하시고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을 존중하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조력자 교회에 대한 정의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데 다름이 있을수 있으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임이 꼭 지역이름으로 모여야 하고 다른 교단이나 교파가 여러 이름을 걸고
모이는 교회를 터부시 한다니 참으로 참담 합니다.
성경에는 꼭 이렇게 하라고 명령과 규격이 있는것도 있지만 자율적으로 할수있는것도
많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은 비유가 많고 자신이 깨달아서 나가야 하는 말씀도 많다는 애기입니다.
이번 토론의 핵심은 낫띵님의 글에 헷갈리기에 질문을 드리고 답변을 경청한 것입니다
타이틀은 교만 떨지마라로 시작했는데 글의 내용과 기도내용이 일치 않으므로써
여러 질문을 드린것입니다
@조력자 제가 다른 것은 다소 관대한데,
교회에 관한 진리만큼은 단호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낫띵 수도원에서 모이든, 가정에서 모이든 모이는 그 자체를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는 문제는 별도입니다.
@낫띵 자~ 좋습니다.
교회에 대해서는 우리 카페 회원들께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낫띵님은 완고한 편이십니다. 저는 가정(가족)교회를 장려하는 편이구 집을 수도원이나
기도원이라 생각하고 가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운데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방법을
연습하라고 합니다.
물론 동네(지방)교회도 나가서 배울것은 배우고 연합할것은 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주장이 진리라고 말하고 성경적이라고들 말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낫띵님과 대화해본 결과로는 특별히 다른 그리스도인보다 진리를
관통했다고는 생각이 안듭니다.
@조력자 저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는 교회의 성경적인 기준과 그에 근거하여 제가 실행하는 것을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에게 그것을 강요할 마음은 없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책임아래 믿음 생활하다가 그 날에 그리스도의 심판대(고후5:10) 앞에서 결산하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