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보리암
1111 대동문화 「한송주의 산사에서 띄우는 엽서」
‘죽은 나’를 위해 미리 천도합시다
좋은 지도자 한 분을 잃고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 지낸 이즈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죽음이 너무도 기막히고 처절하게 이루어져 국민들의 가슴이 더욱 절통함으로 미어져야 했습니다.
그 원한을 어찌할까, 가신 이의 마지막 심정을 헤아리면 아직도 더운 숨이 목울대를 차오릅니다.
그 업을 어이 씻을까, 남은 이들의 과보를 헤아리면 아득한 연민이 명치께를 짓누릅니다.
모두가 내 허물이니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대인의 풍모를 보이시고 떠났지만, 막다른 길에 이르는 동안 그 분이 겪어야 했던 한스러움의 자취까지 훌훌 털고 갈 수 있었을까 못내 염려되는 우리들입니다.
혹여 남아있을지 모르는 포한을 풀어드리는 것이 그나마 죄인된 우리들이 용서를 빌 수 있는 마지막 길일 것입니다.
몸을 벗은 이들은 이쪽 세상을 깨끗이 잊고 강 저쪽 언덕[彼岸]으로 편안하게 건너가야 합니다. 그래야 깨끗한 땅에서 최상의 안식을 누릴 수 있지요. 그걸 일컬어 서방정토(西方淨土)에 극락왕생(極樂往生)한다고 불가에서는 표현합니다.
하지만 이승에 비련이 남은 영혼은 얼른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과 저숭의 중간에서 속절없이 머뭇대며 헤맵니다. 특히 이승에 원한이 서린 고혼들은 슬피 호곡하며 중천을 떠돌지요.
중음(中陰)을 떠도는 원혼들을 달래 피안으로 인도하는 것을 일컬어 불가에서 천도(遷度)라 합니다. 좋은 곳으로 ‘옮겨가시도록 제도한다’는 뜻이겠지요.
우리 지역 진도에 유명한 씻김굿도 죽은 이의 원한을 씻어 천상으로 모신다는 의미에 있어 불가의 천도재와 똑같은 의식입니다.
흔히 천도재는 49재를 지내는데 그 까닭은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이르는 기간이 일곱이레인 49일이기 때문이랍니다. 이 동안에 이승에서 쌓은 업에 따라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아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여섯 가지 형을 얻오받게 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49일 안에 업장을 녹여 판결을 받을 준비가 되지 않으면 영원한 미결수로 중유(中有)에 머물게 됩니다.
이 기간 안에 업장을 녹여 천상에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일곱 번이나 영혼를 불러 용서빌고, 위로하고, 기원하고, 제도하는 겁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천도재가 그 분의 영가(靈駕)가 모셔진 김해 정토원을 비롯해 전국의 주요 사찰에서 많은 사부대중이 동참한 가운데 성대하고 엄숙하고 봉행되었습니다. 그 분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이 지극하고 또 영가가 품고 있을 원한에 대한 안스러움과 비통함이 그만큼 절절해서일 것입니다.
이번 비극에 대해 큰 허물이 없는 일반 국민들도 이처럼 죄의식 속에 가신 이의 안식을 빌고 있는데 그 분의 죽음에 직접 간접으로 책임이 있는 부류들은 참회를 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되레 그 분의 죽음을 매도하고 분향소를 철거하는 야만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를 외면하고 마지막 용서를 받을 기회를 스스로 팽개치고 있는 꼴이지요.
승보종찰 송광사에도 많은 불자와 국민들이 모여들어 초재(1재)부터 막재(7재)까지 일곱이레 내내 노 전대통령 영가의 극락왕생을 간절히 발원했습니다. 영단이 마련된 송광사 지장전은 송광사 스님들의 독경과 기도, 사부대중들의 분향 예경으로 안식과 평화의 분위기가 넘쳐났습니다.
일곱 번 재를 한번도 빠뜨리지 않고 지극하게 봉행한 주지 영조스님은 “많은 불자들이 찾아와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그 분이 참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신 분이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저희 사문들도 그에 감명받아 더욱 열심히 참회하고 기도했고요. 형언하지 못할 악연에 얽혀 사세를 하신 분이지만 국민들의 이런 간절한 발원을 받아 꼭 극락왕생 하셨을 줄로 믿습니다”하고 말씀하더군요.
스님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 천도 기도는 그저 영가에 음식 올리고 절하고 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가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이도 자신이 스스로 참회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깨끗하지 않고 어떻게 영가가 깨끗한 땅에 들기를 기원할 수 있겠습니까.
혼씻김을 하기 전에 주재자가 반드시 몸과 마음을 목욕 제계해야 하는 이치나 천도 기도를 올릴 때 기도하는 이가 먼저 참회하여 청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이치나 매한가지입니다.
천도할 때 집전하는 스님은 땀을 흠뻑 쏟습니다.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지요. 어떤 이는 영가의 혼이 업장이 무거울수록 집전하는 스님이 시달림을 당한다고 합니다만, 천도재 자체가 의미가 막중하고, 정성이 요구되는데다가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절집에서는 천도기도 많이 집전하는 스님은 기가 일찍 쇠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천도 집전 스님은 크게 세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 자신을 참회로써 청정히 씻는 일. 둘째, 영가를 참회시켜 이승에 대한 집착을 놓게 하는 일. 셋째, 남은 이들을 참회시켜 선업을 쌓게 하는 일.
천도재에서는 금강경(金剛經)을 독송합니다. 독경으로 영가들을 제도합니다. 금강경의 요체는 바로 ‘공’이지요. 선업이건 악업이건 모두가 ‘공(空)’이니 이승의 일일랑 모두 잊고 저 언덕으로 어서 건너가시라고 설법하는 겁니다.
금강경을 수십번 독송하면서 스님 자신이 공으로 참회하고 죽은 이를 공으로 참회시키고 산 자들을 공으로 참회시키는 것입니다. 천도란 공참(空懺)을 세 번 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네요. 遷度則 三空懺也라^^.
결국 천도란 궁극적으로 보면 자기 스스로를 참회시켜 선업을 닦게 하는 일이라는 얘기입니다.
한 마디로 죽은 이를 위한 천도는 곧 나를 위한 천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천도교를 창도한 수운(水雲)선생이 제시했던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지 말고 나 자신을 향해 위패를 모셔라는 ‘향아설위(向我設位)’와도 맥락이 닿네요.
아예, 죽은 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올리는 천도재도 있습니다. 이를 예수재(豫修齋)라고 부릅니다. 천상에 나는 길을 미리 닦는다는 뜻이지요. 죽은 뒤에 할 불사를 살아서 거꾸로 한다고 해서 역수재(逆修齋)라고도 합니다.
예수재 하면 먼저, 내가 죽은 뒤에 자손들이 미령해 천도를 해주지 않을까 염려해서 손수 내 길 내가 닦는다는 노파심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겠지요.
죽음을 미리 체험하고 남은 삶을 착하고 성실하게 살겠다는 자기다짐의 뜻이 더 크다고 봅니다. 왜, 미리 유서를 쓰고 현재의 삶을 되돌아 보는 의식도 있잖습니까. ‘웰다잉’이라 해서 잘 죽는 법을 미리 연습하는 행위도 더러 있고요.
사후의 세계를 현재로 끌어당겨 체험함으로써 생사일여의 깨달음을 이루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홀가분하고 여유있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자는 의미에서 예수재는 매우 슬기로운 의식이라고 여기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풍습상 예수재는 흔히 윤달에 많이 지내더군요. 올해는 음력으로 오월에 윤달이 들어 있어 요즘 절집에 예수재가 한창 성황입니다. ‘공달(空月)’이라고도 하고 ‘섞은 달’이라고도 하는 윤달은 손(損)이 없다해서 예로부터 선망조상에 관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 그 하나로 자신의 천도재도 이때 지내는 것 같아요.
예수재는 세이레, 즉 21일 동안 대덕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으며 죄업을 참회하고 선업 쌓기를 발원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때 조상이나 자손에 대한 길닦음을 함께해도 또한 무방하지요.
나의 죽음을 내가 곡하는 가운데 나의 위패를 모신 영단에 절하면서 나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나의 천도재를 한번 치러보지 않으시렵니까.
참, 천도재는 사람에게만 하는 게 아니더군요. 우주 만물에 불성이 있다는 실유불성(悉有佛性)의 도리에 따라 모든 죽음이 모두 천도의 대상입니다.
지난해 말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에 있던 금강송이 말라죽자 월정사 스님들이 걸게 천도재를 지내 나무천도재는 처음이라며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지요. 그 소나무는 450년 묵은 천연기념물이어서 요즘 세상에 특별히 대접을 받은 모양인데 실은 예로부터 우리 선인들은 마을 당산나무가 가시더라도 극진히 제사를 모셔 극락왕생을 기원해 왔으니 따지고 보면 나무천도재가 새삼 새로울 것은 없는 행사입니다.
세월이 묻은 바위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지극한 마음으로 천도재를 지냈던 옛 어른들을 본받아 우리들도 뭇생명을 받들어 모시는 마음을 내어야 하겠습니다.
한송주/ 월간 송광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