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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惟心)》은 1918년 9월 1일자로 창간된 불교잡지인데, 그해 12월 통권 3호로 종간했다. 판권장을 보면, 편집 겸 발행인 한용운(韓龍雲), 인쇄인 최성우(崔誠愚), 인쇄소 신문관(新文館), 발행소 유심사(서울·계동 43), A5판 64면, 정가 18전이다.
흔히 《유심》을 불교잡지라고 하나, 여기에는 몇 가지의 견해가 있다. 서지학자 백순재(白淳在)는 ‘불교수양잡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라 했고, 박노준(朴魯埻)·인권환(印權煥) 공저인 《한용운연구》(통문관, 1975)에는, “《유심》지를 순 불교 계통의 기관지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전혀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유심》지는 좀더 폭이 넓은 종합지로서 다분히 교양적인 색채를 띤 잡지였던 것이다”라고 했다.
또 김근수(金根洙) 저 《한국잡지사(史)》(청록출판사, 1980)에는 “목차로 보아 수양잡지 같은 감이 없지 않으나, 제목이 그렇고 발행인이 불교인인 점과 집필인의 대부분이 불교인들이고, 그 내용도 불교에 관한 것이 다수인 점으로 보아 ‘불교잡지’로 보는 것이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다 어슷비슷한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하여간, 이는 후세의 평자들이 《유심》을 보고 그 성격을 나름대로 말한 것이지, 발행인 한용운 자신이 처음부터 수양잡지나 종합잡지를 표방했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당시의 사정에 비추어볼 때 잡지는 〈출판법〉으로 허가되어 ‘종교·학술·문예’ 등에 국한된 내용으로만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요즘처럼 ‘정치평론이나 시사문제’를 아우른 종합잡지는 될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종합지란 포교(布敎)·선교(宣敎)에만 전념하지 않고 일반기사도 많이 실은 잡지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런데 한용운은 ‘계동 43번지’에다 셋방을 얻어 잡지사의 간판을 걸고 누구의 도움이나 동인(同人)도 없이 혼자서 창간했으니, 이는 ‘한용운 개인잡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 최초의 문예지인 《창조(創造)》(1919. 2)보다도 앞서 나왔고, 또 그가 지은 자유시 〈심(心)〉은 주요한의 〈불놀이〉보다도 먼저였으니, 《유심》은 ‘한용운 문학·한용운 사상’이 발표되는 터전이 되었어야 했는데 오래 나오지 못했다. 그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소년》은 최남선이 18세 때, 《창조》는 김동인, 주요한이 19세 때 낸 데 비해 그는 인생의 중반기에서 이 잡지를 낸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어떤 인생 길을 밟아왔는지 《한용운전집(韓龍雲全集)》〈전6권〉(신구문화사, 1973) 소재 〈한용운 연보〉에서 살펴보자.
그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結城)면 성곡(城谷)리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유천(裕天),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다. 6세에 서당에 들어가 9세에는 《통감(通鑑)》을 해득할 정도로 총명했고, 14세에는 천안 전(全)씨 정숙(貞淑)과 결혼했다. 1896년(18세)에는 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는데, 이때 의병(義兵)에 참가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홍성 호방(戶房)의 금고를 털어 1천냥(兩)을 탈취했다. 의병에 실패하자 고향을 떠나 산속에서 피신하다가 마침내 불문(佛門)에 귀의(歸依)했다.
1899년(21세) 설악산 백담사(百潭寺)로 들어가 불목하니(절에서 물긷고 나무하는 일을 하는 사람) 노릇을 하다가, 세계여행을 계획하여 원산(元山)으로 가서 배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海蔘威))로 건너갔으나,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는 곧 되돌아와서 이곳 저곳을 정처없이 떠돈다.
1904년(26세) 봄에 고향에 내려가 수개월을 머물고 다시 백담사를 찾아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마침내 중이 된다. 그해 12월에 맏아들 보국(保國)이 태어났다(6·25전쟁 때 생사 불명). 1905년(27세) 백담사 김연곡(金蓮谷) 문하에서 득도(得道), 전영제(全永濟) 스님으로부터 수계(受戒), 이학암(李鶴庵)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1907년(29세)에는 건봉사(乾鳳寺)에서 선(禪) 수업을 성취했다.
1908년(30세) 4월에는 일본 마관(馬關, 하관(下關))·경도(京都)·동경(東京) 등지를 돌면서 신문물(新文物)을 보았다. 동경 조동종(曹洞宗)대학(지금의 구마자와(駒澤)대학)에서 불교학과 서양철학을 청강했다. 이때 유학중이던 최린(崔麟)과 사귄다. 1909년(31세) 7월에는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불교 강사가 되고, 1910년(32세) ‘승려취처(僧侶娶妻)문제에 관한 건백서(建白書)’를 두 차례나 당국에 제출하여 불교계에 큰 물의를 일으켰으며, 그해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백담사에서 집필했다.
1911년(39세)에는 박한영(朴漢永)·진진응(陳震應)·김종래(金鍾來)·장금본(張錦峰) 등과 승주(昇州) 송광사(松廣寺)·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승려궐기대회를 열고 ‘한일불교 동맹조약’을 분쇄했으며, 범어사에 조선 임제종(臨濟宗) 종무원(宗務院)을 설치하고 관장(管長)에 취임했으나 망국(亡國)의 울분을 참지 못해 만주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박은식(朴殷植)·이시영(李始榮)·윤세복(尹世復) 등과 만나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서 고갯길을 넘다가 뜻하지 않게도 독립군에게 일본 첩자로 오인되어 총격을 받는다. 이때 입은 상처로 그의 고개는 비뚤어지고 체머리(요두증(搖頭症))를 앓게 되었다.
1912년(34세) 경전(經典)을 일반 대중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 《불교대전(佛敎大典)》을 기획,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고려대장경》 6,802권을 낱낱이 열람해 나갔다. 1913년(35세) 박한영·장금봉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하고, 5월 25일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했다. 1914년(36세) 4월 30일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했다.
1915년(37세) 영·호남에 있는 내장사(內藏寺)·화엄사(華嚴寺)·해인사·통도사·송광사(松廣寺)·범어사·쌍계사(雙溪寺)· 백양사(白羊寺)·선암사(仙巖寺) 등을 순례하며 강연회를 열어 열변으로써 청중을 감동시켰으며, 10월에는 조선선종(禪宗)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했다. 1917년(39세) 4월 6일 《정선강의(精選講義) 채근담(菜根譚)》을 동양서원에서 발행했으며, 12월 어느 날 밤 내설악 오세암(五歲庵)에서 좌선(坐禪)하던 중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悟道頌)〉을 짓는다. 그러고는 이듬해인 1918년(40세) 서울로 와서 그해 9월 《유심》을 창간하게 되었다.
먼저 창간사 〈처음에 씀〉을 읽어보자.
“배를 띄우는 흐름은 그 근원이 멀도다. 송이 큰 꽃나무는 그 뿌리가 깊도다.
가벼이 날리는 떨어진 잎새야, 가을 바람의 굳셈이랴. 서리 아래에 푸르다고 구태여 묻지 마라. 그 대(竹)의 가운데는 무슨 걸림도 없느니라.
미(美)의 음(音)보다도 묘한 소리, 거친 물결에 돛대가 낮다.
보느냐. 샛별 같은 너의 눈으로 천만(千萬)의 장애(障碍)를 타파하고 대양(大洋)에 도착하는 득의(得意)의 파(波)를.
보이리라 우주의 신비(神秘). 들리리라 만유(萬有)의 묘음(妙音).
가자 가자, 사막도 아닌 빙해(氷海)도 아닌 우리의 고원(故園), 아니 가면 뉘라서 보랴, 한 송이 두 송이 피는 매화(梅花).”
창간호의 목차를 본다. 〈창간사〉 ‘처음에 씀’, 〈시〉 ‘심(心)’ ··· 만해(萬海)/ 〈논설〉 ‘조선청년과 수양’ ··· 한용운(韓龍雲)/ ‘고통과 쾌락’ ··· 주관(主管)/ ‘고학생’ ··· 한용운(韓龍雲)/ ‘전로(前路)를 택하여 진(進)하라’ ··· 오세인(五歲人)/ ‘시아(是我) 수양관(修養觀)’ ··· 최린(崔麟)/ ‘동정 받을 필요 있는 자(者)― 되지말라’ ··· 최남선(崔南善)/ ‘수진(修進)’ ··· 유근(柳瑾)/ ‘유심(唯心)’ ··· 이광종(李光鍾)/ ‘우담발화(優曇鉢花) 재현어세(再現於世)’ ··· 우산두타(寓山頭陀)/ ‘종교와 시세(時勢)’ ··· 이능화(李能和)/ ‘심론(心論)’ ··· 김남천(金南泉)/ ‘반본환원(反本還源)’ ··· 강도봉(康道峰)/ ‘가정교육은 교육의 근본’ ··· 서광전(徐光前)/ ‘자기의 생활력’ ··· 김문연(金文演)/ ‘학생의 위생적 하기(夏期) 자수법(自修法)’ ··· 계동산인(桂東山人)/ ‘생(生)의 실현(實現)’ ··· 타고르 원저(原著), 〈소설〉 ‘오(悟)’ ··· 국여(菊如), 수양총화(叢話) 등이다.
이중 창간사 ‘처음에 씀’, 시 ‘심(心)’, 논설 ‘조선청년과 수양’·‘고통과 쾌락’·‘고학생’·‘전로를 택하여 진하라’ 등은 다 한용운의 글이요 작품이다. 만해(萬海)는 그의 호이며 만해(卍海)라고도 쓴다. 주관(主管)은 주재(主宰)나 주간(主幹)으로 보면 되고, 오세인(五歲人)은 그가 오세암에서 좌선 수도(修道)를 하고 나왔기 때문에 쓰인 별칭이다.
또 국여(菊如)의 소설 〈오(悟)〉도 한용운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그가 후일 〈흑풍(黑風)〉(《조선일보》연재, 1935), 〈후회(後悔)〉(《조선중앙일보》연재, 1936), 〈박명(薄命)〉(《조선일보》연재, 1938)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또 우산두타(寓山頭陀)의 ‘우담발화 재현어세’, 계동산인(桂東山人)의 ‘학생의 위생적 하기 자수법’, 타고르의 ‘생의 실현’ 등과 그밖의 잡저(雜著)를 다 한용운이 썼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전 64면 중, 40면 이상이 그의 글로써 채워졌으니, 그야말로 정력을 다 바치고 지낭(智囊)을 다 짜서 만든 개인잡지라 하겠다.
(여기에 싣는 ‘한용운의 글’은 오늘의 독자들이 읽기 쉽게, 한글 맞춤법은 현행대로 고치고, 한(漢)자는 ( ) 속에 넣었다. 이는 주로 《한용운전집》〈전6권〉(신구문화사, 1973)에 의거했다.)
이어서 그가 처음으로 발표한 자유시, ‘심(心)’이 펼쳐진다.
“심(心)은 심이니라/ 심만이 심이 아니라 비심(非心)도 심이니 심외(心外)에는 하물(何物)도 무(無)하니라/ 생(生)도 심이요 사(死)도 심이니라/ 무궁화도 심이요 장미화도 심이니라/ 호한(好漢)도 심이요 천장부(賤丈夫)도 심이니라/ 신루(蜃樓)도 심이요 공화(空華)도 심이니라/ 물질계(物質界)도 심이요 무형계(無形界)도 심이니라/ 공간도 심이요 시간도 심이니라/
심이 생(生)하면 만유(萬有)가 기(起)하고 심이 식(息)하면 일공(一空)도 무(無)하니라/ 심은 무(無)의 실재(實在)요 유(有)의 진공(眞空)이니라/ 심은 인(人)에게 누(淚)도 여(與)하고 소(笑)도 여하느니라/ 심의 허(墟)에는 천당(天堂)의 동량(棟樑)도 유(有)하고 지옥의 기초도 유하니라/ 심의 야(野)에는 성공의 송덕비(頌德碑)도 입(立)하고 퇴패(退敗)의 기념품도 진열(陳列)하느니라/
심은 자연전쟁(自然戰爭)의 총사령관이며 강화사(講和使)니라/ 금강산의 상봉(上峰)에는 어하(魚鰕)의 화석(化石)이 유(有)하고 대서양의 해저(海底)에는 분화구(噴火口)가 유하니라/ 심은 하시(何時)라도 하사(何事) 하물(何物)에라도 심 자체(自體)뿐이니라/ 심은 절대(絶對)며 자유며 만능(萬能)이니라.”
창간호의 글 중에서, ‘조선청년과 수양’/ ‘고통과 쾌락’/ ‘고학생’/ ‘전로를 택하여 진하라’ 등은 모두 한용운의 논설인데, 그 내용인즉 한결같이 잠자는 조선 청년 학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교훈적인 것이다. 그중 〈고학생〉과 〈전로를 택하여 진하라〉에서 몇 대문을 옮긴다.
〈고학생〉 ··· “위인(偉人)이 세상에 나오매, 먼저 궁곤(窮困)으로써 그 뜻(지(志))을 쉬려(淬礪)하게 되느니라. 순(舜)은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굽고 이윤(伊尹)은 신야(莘野)에서 밭갈며, 루소는 잠자리를 창가(娼家)에 기탁하고 루터는 끼니를 이웃마을에서 얻어먹었으니, 일시의 궁곤은 비상한 대인격(大人格)을 도주(陶鑄)하는 천연(天然)의 사우(師友)요, 실습의 교육이니라.〈중략〉
궁곤은 능히 인생 생활의 실취미(實趣味)를 맛보며, 궁곤은 능히 타태(惰怠)를 구축(驅逐)하고 근면을 증장(增長)하여 전도(前途) 행복의 황야(荒野)를 개척하는 분투력을 얻으며, 궁곤은 능히 민생의 간험(艱險)을 연민(憐憫)하는 자선심(慈善心)을 양성하느니, 일시의 궁곤을 어찌 인생의 불행이라 말하리오.
나는 서울에 있을 때에 왕왕(往往) 고학생을 접견하는 영록(榮綠)을 얻었노라. 그러나 일선(一線)의 동정을 느끼는 외에 하등의 물질적 원조를 주지 못함은 실로 참괴천만(慙愧千萬)이로다. 고학생은 실로 주수(走獸) 중의 기린(麒麟)이요, 비금(飛禽) 중의 봉황(鳳凰)이라, 그 현재의 궁곤을 연민함보다 차라리 그 미래의 행복을 빌고자 하노라.〈하략〉”
〈전로를 택하여 진하라〉 ··· “인생은 여행자요 세사(世事)는 기로(岐路)니라. 세로(世路)는 대로(大路)도 있고 소로(小路)도 있고, 직로탄도(直路搭)도 있고 방혜곡경(旁蹊曲逕)도 있으며, 양장(羊腸)의 구곡(九曲)도 있고 벽립(壁立)의 천인(千仞)도 온갖 길이 다 있으니, 사람은 어느 길로든지 아니 가지는 못하리라.
세로는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요 중인(衆人)의 공로(公路)이므로, 아무라도 마음대로 갈 수가 있느니라. ······ 보통으로 평범하게 말하자면 선로(善路)는 낙(樂)이 되고 악로(惡路)는 고(苦)가 된다 하리라. ······ 무엇을 가리켜 선이라 하고 무엇을 가리켜 악이라 할는지 일정한 표준으로 선악의 정의를 내리기 어렵도다. 그러나 사람다운 일은 선이라 할 것이요, 사람답지 못한 일은 악이라 할 것이니 ······ 〈중략〉
조물(造物)은 결코 열자(劣者)·패자(敗者)를 내지 않느니라. 중생(衆生)이 동일(同一) 불성(佛性)이요, 천부(天賦) 인권이 균시(均視) 평등이거늘, ······ 세로를 구분하면 우자(優者)되고 승자(勝者)되는 근면(勤勉)과 용진(勇進)이 선로(善路)가 될 것이요, 열자되고 패자되는 타태(惰怠)와 퇴굴(退屈)이 악로가 될 것이니, 우리는 그런 줄을 알고서는 반드시 타태와 퇴굴의 악로는 형극(荊棘)과 토석(土石)을 쌓아 인적부도(人跡不到)의 사막을 만들고, 근면과 용진의 선로에는 서백리아(西伯利亞)의 대철로(大鐵路)와 같은 궤도를 설(設)하여 1일 천리(千里)의 급행으로 우자되고 승자되는 천국(天國)으로 나아갈지니라.”
또 창간호에는 ‘현상문예작품’을 모집하여 제3호에서 발표했는데, 이때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은 ‘이img src="http://sstatic.naver.net/imgfont/NVD12BK0TRNN/f537_NVD12BK0TRNN.png" alt="" class="imagefont" style="border: 0px; vertical-align: middle;">생(生)’으로 학생소설 〈고학생〉(상금 1원)과 시 〈마음〉(상금 50전)이 당선되고, 소파생(小波生)으로 낸 논문 〈현대청년(現代靑年)에게 정(呈)하는 수양론(修養論)〉이 선외가작에 들었다. 그밖에도 김형원(金炯元), 이중각(李重珏)의 시가 선외가작에 뽑혔다. 소파는 《유심》보다 먼저 《청춘》에도 당선되었고, 또 그가 주동한 경성청년구락부에서 《신청년(新靑年)》(1919. 1. 20)을 발행하게 된다. 그 《신청년》창간호 권두언을 한용운이 쓰게 된 것도 이때부터의 인연이라고 보면 되겠다.
한용운은 잡지의 권두언은 빠짐없이 자신이 썼다. 그것은 《유심》만이 아니고, 후일 《불교》(1931. 7~1933. 7)지의 사장이요 발행인이 되었을 때도 한 호도 빠뜨리지 않고 권두언에다 자신의 사색, 자신의 숨소리를 그대로 담았다. 여기에 《유심》제2, 제3호의 권두언을 옮긴다.
제2호의 권두언은 〈일경초(一莖草)의 생명(生命)〉이다.
“강상(江上) 수봉(數峰)의 푸른 빛 너머로 백모란화(白牧丹花)같은 한 조각 구름이 오른다. 무엇보다도 민속(敏速)한 나의 뇌가 무엇을 느끼려다가 미처 느끼지 못한 그 찰나, 구름은 벌써 솜뭉치 같이 피어서 한 편 하늘을 덮어온다.
선아(仙娥)야, 그 솜뭉치 좀 빌려라. 가벼운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보드라운 싹을 싸 주자. 선아는 침묵이다. 그러나 넘칠 듯한 애교, 나를 향하여 동정을 들어붓는 듯하다. 어느 겨를에 그리 청명하던 창공(蒼空) 수묵색(水墨色)의 장막을 편 듯하다.
베개 위에 오려는 낮 졸음을 쫓는 패연(沛然)한 소리, 대한(大旱)의 야(野)에 활수(活水)가 났도다. 아아, 나의 감사를 표하는 시선(視線) 새삼스럽게 벌써 갠 강상(江上)의 수봉(數峰)에 댄다.
제 아무리 악마라도 어찌 막으랴. 초토(焦土)의 중에서도 금석(金石)을 뚫을 듯한 진(眞)생명을 가졌던 그 풀의 발연(勃然)을. 사랑스럽다, 귀(鬼)의 부(斧)로도 마(魔)의 아(牙)로도 어쩌지 못할 일경초(一莖草)의 생명.”
제3호의 권두언은 〈약동(躍動)〉이다.
“천애(天涯)의 악로(惡路), 운명의 신(神)이 아니다. 너의 분묘(墳墓)는 주저(躊躇)가 아니고 무엇이냐. 인생의 경로(逕路)는 쾌락도 아니오, 비애(悲哀)도 아니오, 활동뿐이라. 혹한(酷寒)을 막음이 털외투뿐이랴. 힘있게 운동을 할지다. 성서(盛暑)를 피함이 선풍기가 아니다. 냉정한 두뇌는 백도(百道)의 청천(淸泉)을 초월하리라.
개산(開山) 공성(攻城)의 대포(大砲)도 허공이야 깨칠소냐. 넓고도 넓다. 너의 금도(襟度)로 제 아무리 가리고자 하지마는 사무치는 찬 빛이야 흑암(黑暗)인들 어찌하리. 곤산(崑山)의 돌(石)이 굳지 아니하랴마는 파사(波斯)의 시(市)에 백옥(白玉) 황(黃)옥 홍(紅)옥 청(靑)옥.”
이처럼 활기 있는 발행을 하다가 그해 12월에 제3호를 내놓고는 종간하고 만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다음해인 1919년 3월에 일어난, 3·1독립운동에 그가 주역으로 크게 활약한 사실을 떠올리면 누구나 짐작이 될 것이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 29인이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 모였다.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되자, 사회를 맡은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安淳煥)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했다. ‘선언서’는 이미 인쇄 배포했으므로 이 자리에서는 낭독하지 않기로 하고, 한용운이 33인을 대표하여 식사(式辭)를 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해서 한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자, 그러면 다 함께 독립만세를 부릅시다!” 간단하고 명료한 1분도 안 걸린 연설이었지만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한 셈이었다. 그러고는 다 같이 소리 높여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때 헌병·경찰 80여명이 들이닥쳐 의기(義氣) 충천(衝天)해 있는 29명 전원을 체포 연행했다. 모두가 당당했고 태연하게 잡혀갔다.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을 옮겨 본다. 그 순서는 선언서 원본에 있는 그대로이다.
손병희(孫秉熙) 길선주(吉善宙) 이필주(李弼柱) 백용성(白龍城) 김완규(金完圭) 김병조(金秉祚) 김창준(金昌俊) 권동진(權東鎭) 권병덕(權秉悳) 나용환(羅龍煥) 나인협(羅仁協) 양전백(梁甸伯) 양한묵(梁漢黙) 유여대(劉如大) 이갑성(李甲成) 이명룡(李明龍) 이승훈(李昇薰) 이종훈(李鍾勳) 이종일(李鍾一) 임예환(林禮煥) 박준승(朴準承) 박희도(朴熙道)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신석구(申錫九) 오세창(吳世昌)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최성모(崔聖模) 최 린(崔 麟) 한용운(韓龍雲) 홍병기(洪秉箕) 홍기조(洪基兆)
그날 참석하지 못했던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3인은 이내 자진 출두하여 수감되었고, 김병조만은 중국으로 피신 망명했다.
《한용운전집》 제1권, 정광호(鄭珖鎬) 집필 〈민족적 애국지사로서의 만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대표자 33인을 물색하는 데 있어 우선 곡절이 생겼다. 처음에는 손병희와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商在), 그리고 귀족 중에서 박영효(朴泳孝), 이렇게 네 사람을 대표로 내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 셈인지 이·윤·박 세 사람은 참가하기를 거부, 할 수 없이 제2차의 교섭 대상을 물색하게 되었는데, 이때 물망에 오른 사람이 한규설(韓圭卨)과 윤용구(尹用求)였다. 그러나 이들 또한 미지근한 태도를 보일 뿐, 적극적인 언질을 꺼리는 것이 아닌가.
민중의 신망으로 보나 지체로 보나 이들이 꼭 가담을 해 줘야 하겠는데 한결같이 모두 꽁무니를 빼는 데는 참으로 낭패였다. 이때 교섭에 나섰던 사람은 최남선, 송진우 그리고 현상윤 등의 젊은 학자였다. 이 젊은이들로부터 그간의 경위를 듣고 있던 만해는 화가 불끈 치밀었다. 성미가 원체 급했던 그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노기에 찬 그의 얼굴에서는 드디어 욕설이 튀어 나왔다.
‘죽기 참 힘든 게로군!’ 자못 마땅치 않은 기분을 억제키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무슨 일을 저질러버릴 수도 없는 일이요, 따라서 귀족을 포기하고 다시금 교섭을 가진 것이 바로 각 종교단체였던 것이다.
······ 직접 서명치 아니하는 최남선이 선언문을 짓는다 함은 불가(不可)하니 자기가 직접 쓰겠노라 주장을 하다가 시간 관계로 ‘공약삼장(公約三章)’만을 첨기한 것이라든지, 33인을 대표해서 식사를 했다는 일, 만세 3창을 선창했다는 일 등은 이 운동에 있어서의 그의 비중이 어떠했음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된다.”
한용운의 제자 김관호(金觀鎬)가 모아 엮은 〈만해가 남긴 일화〉에서 3·1운동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한용운전집》제6권 소재)
△ 월남 이상재와 결별
3·1운동을 준비할 때, 선생은 이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호응을 가장 널리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종교단체와 손을 잡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독교 측의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을 만나서 대사(大事)를 의논했다. 이 자리에서 월남은, “독립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請願書)를 제출하고 무저항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오” 라고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선생은,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요, 침략주의에 대한 민족의 해방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본위(他力本位)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라고 주장했다.
△ 당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
선생은 최린의 소개로 천도교 교주 의암(義庵) 손병희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의암은 조선 갑부 민영휘(閔泳徽), 백인기(白寅基) 그리고 고종(高宗) 못지않은 호화생활을 했으며, 조선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자가용 자동차까지 가지고 있었다. 선생이 3·1운동에 천도교측이 호응해 주기를 요구했더니, 의암은 먼저 이상재는 승낙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손 선생께선 이상재 선생의 뜻으로만 움직입니까? 그러면 이 선생이 반대하니 선생도 그를 따르렵니까? 그러나 이미 대사(大事)가 모의되었으니, 만일 호응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하고 힘의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적이 놀란 의암은 자기를 총대표로 내세우는 조건으로 서명(署名)을 승낙했다. 의암의 이 승낙으로 천도교의 여러 인사들은 의암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 권총을 끄집어냈다
3·1운동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선생은 당대의 거부(巨富) 민영휘(閔泳徽)를 찾아갔다. 그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하므로 권총을 끄집어냈다. 민영휘는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돕겠다고 맹세했다. 이때 선생은 힘있게 쥐었던 그 권총을 그의 앞에 놓았다. 이 권총은 다름 아닌 장난감 권총이었다. ······ 민영휘는 맹세한 터라,
“비밀리에 모든 협조를 하겠소. 그에 필요한 비용도 주겠소. 그러나 이후부터는 다시 나를 찾지 말고 내 아들 형식(衡植)과 상의하여 일을 하시오. 부디 성공을 비오.” 라는 간곡한 뜻을 말했다. 민형식은 이 일이 있은 후, 선생의 절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 되어 물심 양면으로 조선독립을 도왔고, 선생이 별세했을 때(1944. 6. 29)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서 선생의 죽음을 슬퍼했다.
한용운은 미결수로 있을 때, 1) 변호사를 대지 말 것 2) 사식을 넣지 말 것 3)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세 가지 투쟁원칙을 밝혀놓고는, 자신이 내세운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의 공약을 그대로 실천해 나갔다.
그런데 하루는 한방에 있던 동지들이 너무도 고되고 지루했던지 “이대로 갇혀 있다가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 평생을 감옥에서 썩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해들 하는데, 때마침 ‘극형에 처한다’ 는 풍문까지 나돌자, 이에 놀란 한 사람이 그만 겁에 질려 훌쩍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추태를 보고 있던 만해는 옆에 있던 똥통에서 끈적끈적한 그것을 한 주먹을 쥐고는, “이 비겁한 놈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그렇게도 슬프냐? 정 그렇거든 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한 것을 당장 취소해 버려라” 하고는 손에 쥔 오물을 우는 사람의 얼굴에 사정없이 후려쳤다. 이 일화는 여러 사람의 글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는 옥중에서 후세에 빛을 내는 3편의 유명한 문건(文件)을 남겼다. 그 첫째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感想)의 개요〉(일반적으로는 〈조선독립의 서(書)〉또는 〈조선독립 이유서(理由書)〉라고도 함), 둘째는 〈한용운 취조서 및 공판기〉, 셋째는 〈일본 위정자에게 경책(警責)한다〉등인데, 여기서는 〈조선독립의 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이 글은 일본인 검사가 그에게 “독립을 선언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말로는 다 할 수 없으니 글로 적어 주겠노라”하고 쓴 것인데, 이를 현대문으로 옮기면 200자 60장이 넘는다.
이 논문은 1) 개론, 2) 조선 독립선언의 동기, 3) 조선 독립선언의 이유, 4) 조선 총독정책에 대하여, 5) 조선 독립의 자신(自信)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서는 그 소제목 순서대로 한두 대문씩을 옮겨본다.
1.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시체와 같고 평화가 없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다. 압박을 당하는 것의 주위는 무덤과 같이 되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것의 환경과 생애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우주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기본은 자유와 평화인 것이다.〈중략〉
18세기 이후의 국가주의는 실로 전세계를 풍미(風靡)하여 그 들끓어오르는 꼭대기에서 제국(帝國)주의와 그 실행의 수단인 군국(軍國)주의를 산출하기에 이르러, ······ 따라서 국가 또는 민족 사이에 살육·정벌·강탈을 일삼는 전쟁은 자못 그칠 날이 없어서 몇 천년의 역사를 지닌 나라를 폐허를 만들며, ······ 전세계를 대표할 만한 군국주의 국가로는 서양에는 독일이 있고, 동양에는 일본이 있는 것이다.”
2.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후 자존(自存)성이 강한 조선인은 사방에서 일어나는 어느 한 가지 사실도 독립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의 동기로 말하면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민의(民意)를 무시하고 암약(闇弱)한 주권자를 속이고 몇몇 소인배가 당국자를 우롱하여 합병이란 흉포한 짓을 강행한 뒤로부터, 조선 민족은 부끄러움을 안고 수치를 참는 동시에, 또한 분노를 터뜨리며 뜻을 길러 정신을 쇄신하고 기운을 함양하는 한편, 어제의 잘못을 고쳐 새로운 길을 찾아왔다.〈중략〉조선인은 당당한 독립국민의 역사와 전통이 있을 뿐 아니라, 현재 문명에 함께 나아갈 만한 실력이 있는 것이다.〈하략〉”
3. “아아, 나라를 잃은 지 10년이 지나고 지금 독립을 선언한 민족이 독립 선언의 이유를 설명하여야 되니, 실로 침통함과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독립의 이유는 이를 네 가지로 나누어 보겠다.
길짐승은 날짐승과 무리를 이루지 못하고, 날짐승은 곤충과 함께 무리를 이루지 못한다. 같은 길짐승이라도 기린과 여우·삵은 그 거처가 다르고, 같은 날짐승이라도 큰 기러기와 제비·참새는 그 뜻이 상당히 다르고,〈중략〉 최근의 사실만 보더라도 청(淸)나라의 멸망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치적 혁명 때문인 것 같으나 실은 한(漢)민족과 만주족의 쟁탈인 것이며, 티베트족이나 몽고족도 각각 자존을 꿈꾸며 기회만 있으면 소요를 일으키고 있다.〈하략〉”
4.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뒤 조선에 대한 시정 방침은 ‘무력압박’(武力壓迫)이라는 넉 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전후 총독 곧 데라우찌(寺內)와 하세가와(長谷川)로 말하면, 정치적 학식이 없는 한낱 군인에 지나지 않아 조선의 총독정치는 한마디로 말해 헌병정치였다. 바꾸어 말하면 군도(軍刀) 정치요, 총포(銃砲) 정치인지라, 군인이 특징을 발휘하여 군도 정치를 행함에는 자못 유감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인은 헌병이 쓴 모자의 그림자만 보고서도 독사나 맹호를 본 것처럼 기피하였으며, 무슨 일이건 총독정치에 접할 때마다 5천년 역사의 조국을 회상하며 2천만 민족의 자유를 묵묵히 기원하면서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피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이것이 곧 합병 후 10년 동안에 걸친 2천만 조선 민족의 생활이었다.”
5. “이번의 조선 독립은 국가를 창설함이 아니라, 고유의 독립국이 한때의 치욕을 겪고 나서 국가를 회복하는 독립인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요소 곧 국토·국민·주권이 조선 자체에 대해서는 만사가 구비되고 남음이 있으니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각국의 승인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조선과 각국의 국제적 교류는 친선을 지키고 서로 좋은 감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개론’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정의·평화·민족자결의 새 시대이므로, 조선 독립은 그들이 즐겨 좇을 뿐 아니라 원조까지 할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일본의 승인 여부에 달렸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도 승인을 망설이지 않을 줄로 생각한다.〈중략〉
아아, 일본은 기억하라. 청일전쟁 후의 마관(馬關)조약과 노일전쟁 후의 포츠머스조약 가운데서 조선 독립의 보장을 주장한 것은 무슨 의협(義俠)이며, 그 두 조약의 먹물 흔적이 마르기도 전에 곧 절개를 바꾸고 지조를 꺾어, 간사한 꾀와 폭력으로 조선의 독립을 유린함은 그 무슨 배신인가. 지난 일은 그렇다고 치고 앞일을 위하여 충고할 뿐이다. 지금은 평화의 일념이 족히 세계의 좋은 징조를 만들려 하고 있으니 일본은 힘써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의 원문은 “자유(自由)는 만유(萬有)의 생명(生命)이요 평화(平和)는 인류(人類)의 행복(幸福)이라, 고(故)로 자유(自由)가 무(無)한 인(人)은 사해(死骸)와 동(同)하고 평화(平和)가 무(無)한 자(者)는 최고통(最苦痛)의 자(者)라”로 시작되는데, 앞의 글은 이를 현대문으로 옮긴 것으로, 정해렴(丁海廉) 편역 《한용운산문선집(韓龍雲散文選集)》(현대실학사, 1990)에서 발췌했다.
이 글은 공판 자료로만 쓰인 것이 아니라, 그 전문(全文)이 비밀리에 해외로 빠져나가 임시정부 기관지로 상해에서 발행하던 《독립신문》제25호(1919. 11. 3)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大要)〉란 제목으로 게재되어, 일본의 침략을 국제적으로 드러내놓고 규탄했던 것이다. 이때의 《독립신문》주필 겸 사장은 이광수였다.
앞에 나온 김관호(金觀鎬)가 엮은 〈만해가 남긴 일화〉는 주로 3·1운동의 전후의 것이라면, 다음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그 이외의 일화에서 추린 것이다.
△ 일송 김동삼 선생 장례
중국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마포형무소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 선생의 시신(屍身)을 돌볼 사람이 없어 감옥 구내에 버려둔 것을, 만해가 자진 인수하여 심우장(尋牛莊) 자기 방에다 모셔 놓고 5일장을 지냈다.〈중략〉 그런데 홍제동 화장터는 일본인 경영이므로 미아리의 조그만 한국인 경영의 화장터에서 장례를 치렀다. 영결식에서 만해는 방성대곡을 했다. 사람들은 만해가 우는 것을 그때 꼭 한번 보았다고 한다.
△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총독부의 어용단체인 31본산(本山) 주지회에서 만해에게 강연을 청해 왔다. 만해는 거절했으나 간청하므로 마지못해 나갔다. 단상에 오른 그는 묵묵히 청중을 둘러보고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였으나 청중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는 “그러면 내가 자문 자답할 수밖에 없군. 제일 더러운 것을 똥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무엇일까요?” 라고 말했으나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러면 내가 또 말하지요, 나의 경험으로는 송장 썩는것이 똥보다 더 더럽더군요. 〈중략〉” 그리고는 다시 한번 청중을 ?어보고 “송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고 한번 더 물었다. 그러면서 만해의 표정은 돌변하였다. 뇌성벽력같이 소리를 치며, “그건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 하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곳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 쌓아둔 것을 보았겠지!
만해는 웅변이면서도 좀처럼 농담을 하거나 익살을 부리지 않고 침묵을 지키었다. 그러나 방(棒)은 유명하며 누구보다도 무게가 있었다. 어느날 장사(長沙)동에 있는 설태희(薛泰熙) 옹 댁에 명사들이 모였었다. 이야기에 꽃을 피우다가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가 8만대장경을 다 보았다고 호언 장담하자, 옆에 앉았던 만해는 “고하가 보았다는 말은 쌓아 둔 것을 보았다는 말이겠지”하고 넌지시 말했다. 이때 한자리에 있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이 폭소를 터뜨렸다.
△ 난 그런 거 모르오
만해가 불교사에 재직하고 있던 어느날, 식산(殖産)은행에서 도장을 갖고 오라는 공한(公翰)이 왔다. 그러나 선생은 갈 리가 없었다. 그후 식산은행 측에서 서류뭉치를 들고 불교사까지 찾아와서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왜 도장을 찍으라는 거요?” 선생의 물음은 간단하였다. “선생님 성북동에 있는 산림(山林) 20여만평을 무상으로 선생님께 드리려는 겁니다. 도장을 찍으시면 선생님의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선생은 홱 돌아앉으며 “난 그런 거 모르오” 하고 거절하였다.
△ 시시한 심부름꾼에게 호통
어느날 한 청년이 목침덩이만한 보따리를 들고 선생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은근한 낯빛을 지으며, “선생님 이거 얼마 안 되는 것입니다만 살림에 보태 쓰시라고 가져왔습니다.” ······ 상당히 많은 액수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데 젊은이, 나를 이렇게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그 돈을 대관절 누가 보내는 것이지?” “저 실은 총독부에서 들어오라 해서 갔더니 ······” “뭐라구!” 채 말끝이 떨어지기도 전에 선생의 낯빛은 갑자기 굳어졌다. 그 돈보따리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선생은 그 돈보따리로 젊은이의 뺨을 후리치며 “이놈 젊은 놈이 그 따위 시시한 심부름이나 하고 다녀! 당장 나가!”하고 소리쳤다.
△ 육당은 죽었소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지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는 그 뒤 변절하여〈중략〉만해는 이미 마음으로 절교하고 있었다. 어느날, 육당이 길에서 선생을 만났다. 만해는 그를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빨리 걸어갔으나 육당이 따라와 앞을 막아서며 먼저 인사를 청했다.
“만해 선생 오래간만입니다.” 그러자 선생은 ······. “당신 누구시오?” “저 육당 아닙니까?” 만해는 또 한번 물었다. “육당이 누구시오?” 만해는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葬送)했소.”라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 조선불교계의 대표적 인물
‘조선불교계의 대표적 인물’에 대한 투표가 월간지 《불교》에서 실시된 적이 있었다. 피투표자는 조선인 승려에 한했으며 투표자는 아무나 할 수 있게 하였다. 그 결과 한용운이 422표로 으뜸이고, 차점은 방한암(方漢岩)이 18표였고 나머지는 10표, 3표에 불과했다. 이것만 보아도 당시 만해가 차지하고 있던 조선불교계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이 무렵 정인보(鄭寅普)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청년들은 만해 선생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하여 한때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또 홍명희(洪命憙)는 “7천 승려를 합하여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 만해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명 아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다.
한용운 자필 회갑 즉흥시총총육십일년광(怱怱六十一年光)
운시인간소겁상(云是人間小劫桑)
세월종령백발단(歲月縱令白髮短)
풍상무내단심장(風霜無奈丹心長)
청빈기각환범골(聽貧己覺換凡骨)
임병수지득묘방(任病誰知得妙方)
유수여생군막문(流水餘生君莫問)
선성만수진사양(蟬聲萬樹趂斜陽)
바쁘게 예순한 해가 흘렀건만
인간은 소겁(小劫)의 창상(滄桑)이라 이르네
설령 흐르는 세월 속에 흰머리 짧아져도
모진 풍상도 일편단심 어쩌지 못하리
가난에도 범골(凡骨)은 바꿀 줄 알았고
고통 속에 묘방(妙方)을 깨달음 뉘 알리오
물같이 흐르는 여생(餘生)을 그대는 묻지 마오
숲속의 매미 소리만 해지도록 들려오네
한용운은 1922년 3월, 3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 나왔다. 5월에는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철창(鐵窓)생활’이라는 자신의 옥살이를 피력하는 강연을 했다. 1925년 8월 백담사에서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 1926년 5월 회동서관(匯東書館)에서 발행했다.
《님의 침묵》에는 88편의 창작시가 수록되고, 앞머리에는 ‘군말’이라는 서시(序詩)가 있고 뒤쪽에는 ‘독자에게’라는 후기가 있다. ‘군말’의 첫 구절인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한 이 ‘님’은 아름다운 연인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랑하는 민족과 조국을 상징한 표현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해설이다.
《한용운전집》 제1권에 실린 영문학자 송욱(宋稶)의 〈시인 한용운의 세계〉에서는, 《님의 침묵》이 나왔을 무렵의 한용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만해는 대선사(大禪師)·석학(碩學), 몇 해의 감옥살이를 겪은 독립투사, 이러한 모든 것을 겸한 인물이다. 그런데 몇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그는 다시 한번 놀라운 변신(變身)을 보여준다. 그는 시집 《님의 침묵》의 원고를 완성하고(1925, 46세), 다음해 책으로 내놓음으로써 20세기에 가장 깊은 사상을 표현한 한국 시인임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을 끊임없이 해나갔다. 1927년 1월 신간회(新幹會) 발기에 참여하여, 5월에는 중앙집행위원 겸 서울지회장으로 뽑혔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 때는 조병옥(趙炳玉), 감병로(金炳魯), 송진우, 이인(李仁), 이관용(李灌鎔), 서정희(徐廷禧) 등과 이 학생의거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위대한 한국인 한용운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 잡지 이야기를 한자리에서 다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못다 한 아쉬움을 덜기 위해, 시인 조지훈이 쓴 〈민족주의자 한용운〉(《사조(思潮)》 1958. 10)의 몇 대문을 옮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근대 한국이 낳은 고사(高士)였다. 선생은 애국지사요 불학(佛學)의 석덕(碩德)이며 문단(文壇)의 거벽(巨擘)이었으며, 선생의 진면목은 이 세 가지 면을 아울러 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지사(志士)로서의 선생의 강직한 기개(氣槪), 고고한 절조(節操)는 불교의 온축(蘊蓄)과 문학작품으로써 빛과 향기를 더했고, 선교쌍수(禪敎雙修)의 종장(宗匠)으로서의 선생의 증득(證得)은 민족운동과 서정(抒情)시로써 표현되었으며, 선생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또한 민족과 불(佛)을 일체화(一體化)한 ‘님’에의 가없는 사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지조(志操)가 한갓 소극적인 은둔(隱遁)에 멈추지 않고, 항시 적극적인 항쟁(抗爭)의 성격을 띠었던 것도 임제선(臨濟禪)의 종풍(宗風)을 방불케 하는 것이요, 선생의 불교가 또한 우원(迂遠)한 법문(法門)이 아니고 현실에 즉(卽)한 불교였던 것도 호국(護國)불교·대중(大衆)불교가 그 염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문학은 주로 비분강개와, 기다리고 하소연하는 것과, 자연 관조(觀照)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비분강개는 지조에서, 자연 관조는 선(禪)에서 온 것이라 한다면, 그 두 면을 조화시켜 놓은 것이 사랑과 하소연의 정서라 할 수 있다. 선생의 문학은 이 사랑과 하소연의 정서에서 가장 높은 경지를 성취했던 것이다.
혁명가와 선승(禪僧)과 시인의 일체화――, 이것이 한용운 선생의 진면목이요, 선생이 지닌 바 이 세 가지 성격은 마치 정삼각형과 같아서 어느 것이나 다 다른 양자(兩者)를 저변(底邊)으로 한 정점(頂點)을 이루었으니, 그것들은 각기 독립한 면에서도 후세의 전범(典範)이 되었던 것이다.〈중략〉
문학가로서의 선생의 위치도 거대한 존재이다. 《유심》을 간행하던 때는 육당 최남선 선생이 《청춘》지를 발행하던 전후이거니와, 독립선언서의 기초(起草)를 이 신(新)문장운동의 선구자에게 양보하지 않으려 한 기백 뒤에는, 선생이 당대 시문(詩文)의 문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옥중에서 선생이 기초한 〈조선독립(朝鮮獨立)의 서(書)〉라는 긴 논문은 육당의 〈독립선언서〉에 비하여 시문(時文)으로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요, 조리가 명백하고 기세가 웅건할 뿐 아니라, 정치 문제에 몇 가지 예언을 해서 적중한 명문이었다. 이것은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에 대신하기 위해서 기초한 것이었다고 한다.〈중략〉
선생의 평생의 님은 민족이었다. 석가의 님이 중생이듯이, 맛치니의 님이 이태리이듯이, 선생의 님은 중생이요, 또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의 중생 곧 우리 민족이 그 님이었다. 장미가 봄비를 기다리듯이, 길 잃은 어린 양에게 길을 인도하는 것이 선생의 일생 염원이었다. 이는 선생의 심서(心緖)가 그대로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시집 《님의 침묵》의 서시(序詩)로 실린 그 사상의 대(大)강령이다.
그러므로 선생은 민족을 배반하는 자를 사갈(蛇蝎)과 같이 미워하셨고, 이 생각 때문에 선생의 후반생은 불의(不義)에 대한 증오와 비타협의 고고(孤高)한 투쟁이었다. 포악한 일제의 발굽 아래 비틀어진 세상에 국내에서 끝까지 민족정신의 지조를 지킨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 많지 않은 속에서도 진실로 매운 향내의 면에서 능히 선생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분이 없다.〈중략〉
대저 지조(志操)란 것은 신념을 위하여 인위가 자연을 거세(去勢)하는 힘이니, 고귀한 부자연이다.〈중략〉부자연이기 때문에 지조를 지키는 사람은 고집을 지니는 것이며, 고귀한 인상을 궁행(躬行)하기 위해서 일체를 포기한 최악의 경우를 미리 체념해야 한다. 비타협의 정신은 고집의 기벽(奇癖)으로, 또는 창광(猖狂)으로 오해 받는 수가 많다. 한용운 선생도 그 지조 때문에 여러 가지 기벽이 있다. 참으로 선생을 이해하고 보면, 그 기벽은 기벽이 아니라 웃어버릴 수 없는 눈물이 깃들어 있는 확집(確執)일 뿐이다.〈하략〉”
[네이버 지식백과] 큰스님 한용운이 발행한 유심 - 1918. 9 (한국잡지백년2, 2004. 5. 15., 현암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