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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학교(문화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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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터 스크랩 ?신라 25대 진지왕은 과연 폐위되었나?
신영주 추천 0 조회 148 10.03.01 12: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라 25대 진지왕은 과연 폐위되었나?

 

 

 

 

경주시 서악동 선도산 기슭에 있는 진지왕릉

 

 

진지왕의 최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각기 다르게 나옵니다
삼국사기는 그냥 일찍 죽은 것으로
삼국유사는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를 소개하며 왕이 음란하여 쫓겨났다로 처리했습니다
보통 대다수 학자들은 삼국유사를 따랐습니다
왜냐하면, 김춘추가 뒤늦게 김유신의 도움으로 왕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비형랑 이야기가 워낙 설화나 민담 성격이 강한지라 사실로 보기는 좀 곤란합니다
그리고 재위 겨우 4년에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쫓겨났다면, 김춘추 아빠가 살아 남는다는것이 이상하지요
쫓아낸 측에서는 불씨를 막기 위해서라도 진지왕의 아들을 죽일 것이지요
연산군이 폐위되고 난 뒤 세자 황과 여러 왕자들이 죽은 것처럼요
아님 철저하게 왕권이나 권력과의 연줄을 차단시키는 삶을 살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춘추는 훌륭히 성장했고 요직에 접근했으며, 왕 후보에까지 오르게 되지요
김춘추의 아버지 역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보면 진지왕이 폐위되어 쫓겨났다고 보기는 좀 곤란합니다
위서 논란이 있으나 화랑세기에는 진평왕이 어린 그들을 아껴 돌보았다고 나오지요
즉 진평왕은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인데요...
못나 폐위된 왕의 아들에게 빚을 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 왜 그들은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을까요?
진흥왕의 나이를 보면 답이 나오지요
진흥왕이 죽었을 당시 나이는 43-45 무렵이지요
젊다고는 못하지만 많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진지왕의 나이도 즉위시 대략 이십대 중후반 정도로 볼 수 있지요
즉 진지왕이 젊어서 죽고, 어린 왕자만 남았는데 이들에게 나라를 맡기기에는 너무나 불안해 보였겠지요
비슷한 예로 예종 사후 왕실과 정국 안정을 핑계삼아 잘산군 성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지요
그와 비슷한 이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지왕 폐위는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때 고생과 진지왕의 이를 때 죽음이 합쳐져 전설처럼 전해져내려 오다가 일연에 의해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행실 나빠 폐위 되었다면 김부식이 기록 안 할리 없지요
그런 왕은 경계를 위해서라도 과장해 기록하는 것이 유가의 기록 방식이니까요

 

 

***********************************************************<우리역사문화영구회/이도형 2009.5.26>

 

 

 

<이 글에 대한 댓글>

 

물론 님의 주장하는 내용은 오늘날의개념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만 그런데 그러한 상식을 깨는 답이 비록 창작소설이든 아니든 바로 박창화의 화랑세기 필사본 내용입니다...필사본의 내용으로는 님의 의문이 쉽게 풀릴 수도 있지요.. 09.05.27 10:54

 
저 개인적으론 아직 중립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화랑세기> 필사본은 보면 볼수록 양날의 검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인(내지는 삼국사기 편찬시기인 고려시대 유학자)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고, 반대로 그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라사에 대한 답이 시원하게 뚫리게 되지요. 이도형님의 진지왕 폐위론 잘 봤습니다.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09.05.27 11:28

 

 

*******************************************************************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

생존기간 : (?∼579). 재위기간 : (576∼579)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아들이며,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으며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의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이미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진흥왕의 적손(嫡孫), 즉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뒤의 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계승에 다소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576)에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긴 사실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들어, 거칠부등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재위 2년인 577년에  서쪽 변경의 주군(州郡)으로 침입하여온 백제군을 일선군(一善郡:지금의 선산) 북쪽에서 격파하여 3,700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는 전과를 올렸지만.  내리서성으로 통하는 길은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熊峴城:지금의 보은군내로 비정)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음으로써 막히고 말았다.

이렇듯 불안정하게 왕위를 계승한 진지왕은, 백제와의 전투에서 결과적으로 패함으로써 더욱더 왕위를 위협받게 되었다.
비록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에 대해 단순사망사실만을 기록하였지만, 삼국유사에는 재위 4년만에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왕위행동이 매우 음란하여 나라사람들이 폐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나라사람이라는 신라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 즉 화백제도에 의한 폐위를 뜻한다.

또 화백제도는 만장일치제로, 겉으로 보기에는 귀족들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국가중대사를 합리적인 절차로 결정하는 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력을 장악하고 있는 특정 귀족세력이나 왕족세력에 의해 좌우지 되는 독재적 결정방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서로 다른의견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 제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폐위되자마자 진지왕은 사망하고 말았다. "폐위되어 죽다"란 삼국유사의 기록은 진지왕의 사인이 단순한 자연사가 아님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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