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의 동기는 중국어 통역관(역관)인 제자 우선(優先)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 북경을 다녀올 때, 귀한 책인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의 <대운산방문집(大雲山房文集)> 두 책을, 다음해에는 120권이나 되는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집(皇朝經世文集)>을 구해서 스승에게 드린 것에 대한 제자의 고마움과 의리에 감동하여 가슴속 깊이 새겨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해서 그린 것이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論語). 줄인다면 세한도에 담겨있는 표면적인 의미는 이상적의 의리에 감동한 김정희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사람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 진다. 그대는 어찌하여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 잣나무처럼 변함이 없는가〞라는 내용의 발문(跋文)이 있고,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 있다. 1844년 이상적(李尙迪)은 이정응(李晸應)을 동지사(冬至使)로 하는 연행사(燕行使)에 동행하면서 북경에 세한도를 가져가서 완당의 시우(詩友) 인 오찬(吳贊)이 1845년 1월 22일에 그의 집에서 베푸는 연회에 참석하여 그 곳 명사 장악진, 장요손, 반증위, 조진조 등 16명에게 추사의 소식을 전하고 세한도를 자랑하며, 16명으로부터 받은 제찬(題贊)이 붙어 있고,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문(撰文)과 오세창(吳世昌),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작품을 완성한지 70년 후인 1914년에 작품 전체를 표구했다. ◈세한도(歲寒圖)가 160년 동안의 긴 여정은? 먼저 이상적은 역관 합격 이후 12차례나 중국을 다녀왔으며, 1847년 8차 연행 때 청나라에서 이상적 문집을 발간해 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하며, 김정희 제자 이상적이 간직하던 「세한도(歲寒圖)」는 이상적의 사후에 복잡한 긴 여정을 겪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경로를 보면 이상적의 제자 매은(梅隱) 김병선이 승계 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김병선은 아들 김준학에게 물려주었는데 한 동안 행방이 묘연하였다.
1930년대 중엽에 후지츠카가 청나라의 골동품가게에서 발견했다고 한다.(더 자세한 소유자가 있으나 묻어둔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중국철학 교수로 부임한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鄰 1879- 1948)가 추사의 학문세계에 매료되어 중국 베이징의 고미술 거리와 한국의 인사동 등지를 돌며 추사에 관련된 자료를 구입하였다.
서예가 손재형(孫在馨)(1902- 1981)이 1943년에 서울의 후지츠카집에 찾아가서 문안 인사를 하고 세한도를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후지즈카 지카시는 일본이 패망할 것을 예상하고, 1944년에 본국으로 들어갔다. 서예가 손재형은 즉시 일본으로 건너가 몇 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후지즈카의 집에 찾아가서 문안인사를 하고 가격은 얼마든지 요구하는 대로 줄 터이니 돌려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세한도」를 향한 끈질긴 손재형의 열정에 감복한 후지즈카는 두 달이 되던 날에 마침내 마음이 움직였다. 후지츠카는 아들을 불러서 자기가 죽으면 손재형에게 꼭 넘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손재형은 아무 말 없이 세한도만을 응시하다가 지금 넘겨 줄 수 없느냐고 했다. 그러자 후지츠카는“선비는 아끼던 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다. 어떤 보상도 받지도 않겠으니, 보전만 잘 해 달라”고 하면서 새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세한도가 귀국한 석 달 뒤에 1945년 3월에 태평양전쟁 공습이 시작되자 후지즈카 가족이 피난 가고 비운사이에 저택이 폭격을 당해 책과 서화 등 2개의 방에 가득 찼던 완당의 자료 등 방대한 자료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하마터면 세한도도 잿더미로 변해 영원히 우리의 곁을 떠날 번도 했던 것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후지츠카는 1958년도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세한도를 어렵게 지켜왔던 손재형씨는 세한도를 죽을 때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갑자기 정치에 입문하게 되어 그의 모든 재산을 걸고 하다보니 결코 세한도도 남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것이다. 세한도를 소유한 이근태 개성에서 온 미술수집가 손세기에게 넘겼다. 손세기는 후에 아들 손창근에게 물려주었다. 손창근(孫昌根)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2010년에 국가에 기탁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기탁이라서 소유권은 개인에게 있고, 보관하는 주체가 보관과 동시에 전시 등을 할 수 있다. 세한도에 대한 애정을 쏟은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지금은 제자리를 찾아 모든 이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또한, 2006년 2월에 토쿄의 후지즈카 아키나오(藤塚明直) 집에서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鄰)의 아들 후지즈카 아키나오(藤塚明直)씨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추사 김정희의 친필 20여 점을 포함한 추사관련자료 2,700여 점을 경기 과천시에 기증했다. 과천시에 기증한 연유는 완당 김정희가 두 번이나 유배생활을 겪은 뒤, 모든 것을 버리고. 만년에 4년간 머물던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곳에서 지냈는데, 이 초당(草堂)은 그의 생부(生父) 김노경(金魯敬1766-1837)이 한성판윤을 지내던 1824년에 과천에다 마련한 별서(別墅)이다. 1837년 김노경이 별세하자 완당은 부친묘역을 과지초당 인근 옥녀봉(玉女峰) 중턱에 모시고 과지초당에서 3년 상을 치루고, 그 후로 과천을 자주 찾아 초당에서 은거하면서 불교에 의지하다가 1856년 10월 10일 생을 마감한 곳이다. 2013년에 개관한 과천 주암동 추사박물관에 지하 1층에 「후지츠카」라는 이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후지츠카의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가 기증한 완당 관련 자료를 전시하게 된 것이다. 세한도(歲寒圖)가 고국의 품에 돌아 온 것은 손재형(孫在馨)의 공로임은 자타가 인정한 사실이고, 일본인 우지츠카 부자(父子)처럼 무상으로 기증한 고마운 마음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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