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829. 묵상글 (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 내게도 예언자의 운명이?. 등 )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8.29 04:42
- 내게도 예언자의 운명이?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불의한 결혼에 대해 예언하다가
죽게 된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어제도 얘기했고 여러 번 얘기한 바 있듯이 이것이 예언자의 운명입니다.
사실 하느님 뜻대로 잘살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실 리 없고,
그러므로 예언자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없 없으며,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그 말 곧 예언을 듣고서 고마워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고향에서만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합니다.
사실 예언을 들을 때 성인이 아닌 한 꽤 괜찮은 사람도 예언자를 피하고,
못된 놈은 되레 비난하거나 공격하고 특히 오늘 헤로데처럼 힘이 있거나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예언자들을 없애버리려고 하지요.
그러니 이런 예언자의 운명을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고,
그런데도 예언한다면 그것은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좋아서가 아니라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개인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 예언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그저 개인적인 희생으로 폄하하지 않고,
주님을 위한 죽음과 공동체를 위한 죽음으로 칭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은 그 사람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개인의 잘못을 공동체가 눈감아주거나 내버려 둬서는 안 되고,
누군가 얘기해줘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바로 예언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사랑은 개인의 잘못을 눈감아주거나 인내해주는 것보다
개인에게도 더 큰 사랑일 뿐 아니라 공동체에게도 더 큰 사랑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각게 됩니다.
나도 예언자가 될 것인가?
세례를 받는 우리는 모두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받는다고 하는데 예언자의 운명을 나는 거부할 것인가?
예언자의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억지로 할 것인가? 사랑으로 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이 운명을 거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 때문에 용기 내어 예언자의 운명을 받아들이되
겸손이 밑바탕이 되어야 함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인 양 예언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언자에게 더 필요하고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하느님께서 파견하셨기에 한다는 자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잘못하는 그를 위해서 파견하셨고
공동체의 의를 세우기 위해서 나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나를 싫어하고 미워할 것이기에 이것이 싫고 두렵습니다.
사랑으로 예언하려고 용기 내 보지만 무척 떨립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주님 없으면 떨려서 예언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연인 사이에 나눌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표현은 무엇일까요? 분명히 “I Love You”(사랑해)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가득한 곳은 아름답고 보기에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해’라는 말의 의미가 축소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해’라는 말 뒤에 ‘그런데, 하지만’ 등의 단어가 붙을 때입니다. 이런 단어가 따라오자마자, ‘사랑해’라는 멋진 말의 아름다움이 축소되고 의미도 대폭 줄어듭니다. 순수한 단어가 교묘하고 이기적인 말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해. 하지만 네가 이렇게 변한다면 더 사랑할 거야.”
“당신을 사랑해. 그런데 너는 약속을 잘 지키지 않아.”
이 사랑에 조건이 덧붙여지면서 그 가치가 축소되고 원 의미도 줄어듭니다. 실제로 이런 조건적 사랑을 외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주님께도 이렇게 조건적 사랑을 말해서 의미가 없게 만듭니다.
사랑이란 조건이 붙지 않을 때 의미가 있습니다. 나에게 잘해야, 나에게 도움을 줘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더 나눌 수 있는 사랑,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에 가까운 진짜 사랑에 집중해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예수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복음에서 헤로데 임금은 세례자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했다고 전해줍니다. 실제로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를 보호해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세례자 요한의 목을 건네줍니다. 바로 사람들에서 했던 맹세에 대한 행동이었지요. 맹세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자기 체면이 손상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존중하는데 조건이 붙자, 그 존중의 행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계속 외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붙게 되면, 사랑이 사라지고 맙니다. 사랑의 의미는 사라지고 나의 욕심과 이기심만 그 자리에 남게 될 것입니다.
헤로데 임금은 자기 행동이 옳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나중에 예수님 소문에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면서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역시 사랑에 조건이 붙게 되면 불안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조건 없는 진짜 사랑에 집중하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
오늘의 명언: 착한 일은 작다 해서 아니하지 말고, 악한 일은 작다 해도 하지 말라(명심보감).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오히려 고난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가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고난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로운 이의 무고한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필리 1,29 참조).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그의 목숨은 마치 은전 30냥에 팔리게 될 예수님의 목숨처럼, 억울하고 무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가 외치는 진리의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예언자의 소리는 가로막는다고 가로막히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눈치와 체면에 눈이 가려진 부패하고 부도덕한 권세가인 헤로데와,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와, 허영심에 찬 그의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의로운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불경스러운 네 가지 죄악을 봅니다. 권세가의 파렴치한 생일잔치, 소녀의 음탕한 춤과 그 어머니의 악의에 찬 음모, 임금의 무모한 맹세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결국, 무고한 의인의 죽음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고난을 떠올리면, 금세기의 의인으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떠오릅니다. 그는 히틀러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당시의 국가교회를 탈퇴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고,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나치에 의해 사형 당했습니다. 그는 “고난에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까닭이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 온 바람에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그가 <옥중서간>에서 썼던 이런 말이 적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말씀을 위하여 바쳤으며,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 말씀을 가르쳤다”
그는 참으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되, 예수님처럼 죽음을 통해 가르쳤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비록 혀가 잘려도, 온몸이 혀가 되어 외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예언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울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르 6,25)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제 혀가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고,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침묵에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아멘.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매일 정답만 얘기하지 마시고 다른 얘기할 수 없나요? 참 답답합니다. 정답은 저도 알고 있는데 실천하려고 하니까 왜 나만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 아직도 저 모양이니 어쩌면 좋습니까?
정답을 알고 있는데 다른 것을 요구하면 어찌합니까? 물론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리로 가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말이죠.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은 흔들릴 수 있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에서 해답을 얻어야 명확합니다. 그리고 해답을 얻었으면 그리 사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고, 가슴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억울해도 인내하면서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천상에 보화를 쌓고 위로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하늘나리이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요한은 결국 목이 베어지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요한은 바른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육으로는 죽었지만, 그의 의로움은 끊임없이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을 동시에 마주하게 됩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몹시 괴로운 마음으로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생일 잔치에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주겠다.’ 고 맹세까지 하였고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요한의 머리를 갖다 달라’는 그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생일 파티에서 한마디 약속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취중에 한마디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정말 얼마나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무모한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참된 권위를 회복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잘못되었으면 거두어들여야지, 위신 체면 때문에 덮어버리면 결국은 파멸을 만나게 됩니다. 의인의 삶은 영광스럽게 기억되고, 자기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 급급해하는 사람은 결국 패배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오늘 우리 정치의 현실을 보면 걱정됩니다. 미래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대면하며 밑지고 손해를 보는,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의 뜻을 찾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승리자로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헛된 장담을 하거나 앙심을 품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좋지 못한 감정들을 몰아내고 나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처럼 어떤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제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당신께는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입술보다는 발걸음이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토마스 머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병자성사를 다니면서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습니다. 한분은 아들과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수술도 하고, 여러 고비를 넘겼지만 6개월 정도 재활 운동하면 어느 정도 좋아질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자신의 불행을 원망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습니다. 몸도 아프지만, 마음까지 아파했습니다. 재활 운동하면 걸을 수 있고, 좋아질 거라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행은 원망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하는데 형제님은 몸도 아픈데, 마음까지 아프니 안타까웠습니다. 형제님을 간호하는 가족들도 안타까워했습니다. 다른 한분은 7년 전에 근 무력증이 찾아왔습니다. 스티븐 호킹이 걸렸던 병(루게릭병)입니다. 천천히 근육이 마비가 되면서 지금은 손가락만 겨우 움직일 정도였습니다. 병원에서도 호전될 가능성은 없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고통을 형제님은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아직은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딸들이 잘 자라주는 것도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눈으로 움직이는 마우스가 있어서 텔레비전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딸들이 자라는 걸 보는 것도 감사하다고 합니다. 비록 몸은 마비가 찾아왔지만 형제님의 마음은 순수했고, 열정이 넘쳤습니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마치 욥과 같았습니다. 욥도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했다면, 나쁜 것을 주셨을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동료 사제들 중에도 불평과 원망 때문에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재능을 아깝게 소진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뜻을 몰라주는 본당 신부 때문에 힘들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교우들 때문에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새로 성전을 신축하는 곳에 가서는 성전신축 기금 마련이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기존의 성당으로 가서는 조직과 시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보좌 신부님의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뜻하지 않았는데 병이 찾아왔고, 오랜 시간 휴양 중에 있는데, 그것도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 때문이라고 원망했습니다. 몸이 불편하니 운동도 하지 못하고, 운동을 하지 못하니 몸은 더욱 불편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우리도 이제 모두 익어가는 때입니다. 아름다웠던 젊은 날을 회상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좋겠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동료 사제도 있습니다. 성전 신축하는 성당으로 3번이나 갔는데도 항상 싱글벙글 이었습니다. 일이 적으면 책 읽을 시간이 많아서 좋다고 합니다. 일이 많으면 결과를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간수치가 높아서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매일 꾸준히 운동했고, 지금은 누구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행복 바이러스가 있는 것처럼 그 신부님이 있는 곳에는 늘 웃음과 평화가 넘쳐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휠체어에 앉아서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형제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모든 것,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습니다. 제자들도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라고 생각했습니다.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소리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질 것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인공이 되는 것을 기꺼이 포기했고, 조연의 자리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축일을 세상을 떠난 날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날로 정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 역시 성령의 이끄심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일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요한은 한 번의 춤값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한 번의 춤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정치적인 모습들을 살펴볼 수도 있고, 인간의 욕망과 자기 과시도 볼 수 있습니다. 옳은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눈을 감아버리는 인간의 모습도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도 오늘과 같은 일들은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보다 내 자존심과 내 욕심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미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평등이 아닌 불평등을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선하지 않을 것을 선택할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이 내 중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중심 즉, 욕심과 욕망이 우리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말들을 들려줍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오늘부터 앞으로 우리 안에서 소리치는 하느님의 말씀이 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춤값 한 번으로, 내 욕심과 욕망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과 소리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우리 안의 그 소리가 더욱 커져서 우리 밖으로 힘차게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
갈비찜
한 달 전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친구가 온다고 합니다.
고생하고 살아온 친구가 온다고 합니다.
뭘 해줄까. 무엇을 대접할까. 고민고민 해봤습니다.
그리고 결정했습니다.
잔치 음식의 최고봉 ‘갈비찜’을 하기로 말입니다.
사실 ‘갈비찜’은 부담스러운 음식입니다. 가격도 부담스럽고 조리 시간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래도 ‘갈비찜’을 해 주고 싶었습니다.
여러 가지 채소를 갈아 양념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갈비를 사 와서 물에 담가 핏물을 제거했습니다.
준비된 갈비에 양념을 넣고 무와 당근도 큼지막하게 넣었습니다.
이제 푹 삶습니다. 고기가 흐물흐물 떨어져 나갈 때까지 긴 시간 삶습니다. 삶는 시간 동안 갈비찜을 먹는 친구의 행복한 얼굴을 상상하며 말입니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만드는 것 자체로 행복한 일입니다. 행복해서 음식을 만들기도 합니다.
오늘은 만드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참행복”
“주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보루시옵니다.”(시편71,3)
사제생활 35년 동안 처음부터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강조될 “삶의 중심, 하느님”입니다. 어제 수도공동체 소풍은 참 풍요롭고 충만하고 유익한 날이었습니다. 저에게 원내 매일 소풍을 제외한 외부 소풍은 이날이 유일합니다. 이번 주는 미사주례가 아니기에 자유롭게 일기쓰듯, 기록을 남기듯 쓰는 강론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강론 주제와 일치합니다.
“중심이 바로 선 사람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이런 사람만이 경쟁에 임할 자격이 있다.”<다산>
르네상스형 인간인 다산 어른의 말씀입니다. 르네상스형 인간이란 삶과 예술과 학문의 모든 분야에 정통한 사람”, 백과사전적 인간을 말합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의 챗gpt 세상에서 이런 인간의 출현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스스로 바로 잡은 후에 활을 쏘고, 적중하지 않더라도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돌이켜 본다.”<맹자>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하는 회개와 겸손의 미사전 참회의 기도는 정말 귀하고 고맙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탓이요, 제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기도문의 깊이입니다.
하늘 보며 기도하며 살라고 직립인간이요, 세상 어디서나 눈들면 하늘입니다. 밤 12:30분경 어김없이 잠깨어 수도원 자비의 집 본원 숙소 현관문을 열자 마자 눈들어 헤아리는 하늘의 별들입니다. 이어 집무실에 들어와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만세칠창입니다. 아주 오래 전 “땅의 행복”이란 시가 고맙게 떠올랐습니다.
“땅의 행복은 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
별들 가득 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이래서 하늘에는 별들이요 땅에는 꽃들이라 믿습니다. 또 아주 오래전 41세 늦은 나이에 사제서품되어 신림본당(지금은 서원동본당으로 바뀜)에서 첫미사, “사람이 되는 길” 강론시 마지막 인용했던 <김준태>의 시가 반갑게 떠올라 나눕니다.
“하늘을 보면서 삽시다
땅 바닥을 보면서 삽시다
눈이 내리면
하늘을 보면서 삽시다
비가 내리면
땅 바닥을 보면서 삽시다
하늘과 땅 바닥을 보지 않으면
사람 몸뚱이는 총알이 돼 버립니다
사람 몸뚱이는 짐승이 돼 버립니다
두 눈에 하늘을 넣지 않고
가슴에 풀꽃 향기를 넣지 않으면
사람 목숨에는 늑대의 피가 흐르기 마련입니다
아, 이제 우리는 제발!
하늘을 보면서
사람을 보면서 사람이 됩시다”<1989.7.16. 신림본당에서 첫미사날>
어제는 계속되는 폭염이라지만 처서와 말복이 지나 성큼 가을 문턱에 들어선 느낌의 높고 푸른 하늘에 흰구를 두둥실 뜬 그림같은 장면같았습니다. 마침 어느 자매가 이런 풍경의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 줬고 제가 보낸 시와 함께 시화를 만들어 보내줘 많은 친지들에게 소풍 선물로 나눴습니다. 역시 오래전 시입니다.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 날아
흰구름 되네”<2006.8.>
푸른 하늘 품에 안겨 있는 흰구름처럼, 푸른 하늘 보면 누구나 푸른 하느님 품안에 두둥실 흰구름 되어 자유로이 노닐고 싶음은 인지상정입니다. 강화도 공동체 소풍 참 알뜰하게 보낸 하루였습니다. 세속의 푸른 하늘안에 흰구름 자유인 되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며 떠돌며 지낸 하루였습니다.
1.온수리 성공회 성당, 2.전등사, 3.동검도 채플, 4.조양방직(미술관 카폐). 5.샤브 올데이(저녁식사)
알게 모르게 많이 먹다보니 새벽 체중계에 올라서니 어제보다 1.4kg 늘었고 곧 감량할 계획입니다. 1906년에 건립된 대한성공회 한옥 건물이니 100년이 훨씬 넘었고 이젠 활력을 잃어 유적으로 전환되는 느낌이었지만 감회가 깊었습니다. 여기서도 100년을 훨씬 노송이 성당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이어 전등사였는데 곳곳의 건물에서 부처님 앞에서 불경을 드리는 스님들의 모습에서 살아 있는 절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이로웠던 것은 700년에서 250년 수령의 무수한 나무들이 전등사의 역사를 알리는 듯 했습니다. 사람이 오지 않으면 망합니다. 중이 절이 싫어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오지 않아 중이 절을 떠난다 합니다. 작금의 인구감소의 심각한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아무리 전통좋고 자연좋고 건물좋아도 사람이 오지 않으면 망합니다. 사찰, 수도원, 학교, 교회, 병원, 음식점,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베네딕도 수도회의 정주와 환대의 영성이 빛을 발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검도 채플의 주인공은 조광호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은 지금은 저명한 화가에 속합니다만 제 수도원 입회후 지원자 시절 담당 책임신부였습니다. 저보다 2년 연상이지만 제가 늦깎기로 입회한 까닭입니다. 채플의 운영도 자유로웠습니다. 물욕이 전혀 없는 신부님이 평생 벌었던 모두를 교회에 봉헌하는 마음으로 지은 채플입니다. 넓은 갯벌 넘어 마니산이 보이는 풍광좋고 전망 좋은 동검도 채플에서 공동낮기도를 바쳤고 카페에서 빵과 커피도 먹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대화의 소재는 챗gpt 였고 경악할 내용이었습니다. 인류가 망한다면 인공지능의 챗gpt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하느님 중심의 지혜로운 분별이 없으면 비인간의 괴물로 변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싶지만 인공지능에는 땀과 눈물의 개인과 공동체의 역사가, 사랑이, 생명이, 만남이, 친교가, 감정이, 영성이 없고 인간은 날로 불통의 외롭고 외로운 홀로의 인간이 될 수뿐이 없으니 새롭게 도래할 자업자득의 지옥입니다. 판도라의 열린 상자처럼 남은 것은 하느님 희망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날로 새롭게 함이 챗gpt에 대한 유일한 대안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영적인 것의 선택과 영적훈련 및 습관화가 절실하다 싶었습니다.
이어 조양방직 미술 카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서도 빵과 음료수를 먹었습니다. 곳곳에 카페였습니다. 수도원 방문하는 형제와 함께 1년 2회 정도 점심식사후는 꼭 배부른 상태에도 시간을 낭비하며 왜 굳이 카페에 가서 비싼 빵과 음료수를 먹는지 몰랐는데, 요즘의 관행이라는 것을 어제야 조신부님의 설명을 듣고 알았습니다.
도대체 세상 어렵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의 카페에 음식점이었습니다. 먹는 재미로 살다 싶을 정도로 정말 맛집에 먹는 것을 너무 밝히는 사람들이요, 날로 빈약해지고 척박해지는 문화, 예술, 인문, 출판 풍토가 정말 우려스러웠습니다. 이 먹는 돈으로 책을 사 본다면, 불우한 문화 예술가들을 돕는 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많이 생각했습니다.
너무 물질적인 식욕, 성욕, 물욕 추구의 삶에 날로 빈약해지는 영성과 날로 쇠퇴하는 정신문화 풍토는 인류사회를 낙관할 수 없게 합니다. 죄도 많은 세상에 정신 질환은 일상적인 현실이 되었습니다. 정말 쓸만한 사람들이 날로 사라져가는, 서사를 지닌 거목들은 없고 얄팍한 잡목들 우거진 야산같은 세상이 전개된다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지옥도를 보는 듯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사람은, 제대로의 참사람은 순교자 세례자 요한뿐이요, 나머지는 사람의 탈을 쓴 괴물들입니다. 헤로디아와 그의 딸 살로메는 물론이고 예수님께 호감을 지닌 듯한 헤로데이지만 하느님 중심이 없기에 경박하고 우유부단하며 부족한 분별의 지혜로 의인 세례자 요한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광야인생여정, 하느님 중심의 성인도 있겠고 중심을 잃어 세상 것들에 중독되었을 때 괴물도, 야수도, 악마도, 폐인도 될 수 있겠습니다. 얼굴은 사람이지만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도 있듯이 축생(畜生;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의 비유)같은 인생도 얼마나 많은지요. 인면마심(人面魔心)이라는 말도 나올 듯 합니다. 저절로 불교의 윤회설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 중심의 파스카의 삶이 얼마나 절박한지 깨닫게 합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느님 중심의 일당백의 주님의 전사, 참사람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인공지능이 뛰어나다 해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저만은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저처럼 76세 나이에 하루종일 소풍후 8:40분에 취침하여 12:30분에 일어나 01시부터 04시까지 제가 저절로 알아 강론을 쓸 수 있겠는지요? 이건 제 자랑이 아니라 하느님 자랑입니다. 강론 끝나는 대로 다시 감사의 만세칠창을 바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시편71,5-6ㄱㄴ). 아멘.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죽였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아니
사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죽임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임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였습니다
참회하는 이가
늘어날수록
제 탓 없이
죽임을 당하는 이는
줄어듭니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3)
충동적인 맹세
우리는 불경스러운 세 가지 죄악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파렴치한 생일잔치, 소녀의 음탕한 춤, 임금의 무모한 맹세가 그것입니다. 이것이 혜로데가 받은 심판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맹세를 깨든지 아니면 맹세를 깨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부끄러운 행위를 저질러야 했습니다. 너무 경솔하게 맹세한 나머지, 맹세를 지킬 경우 매우 불행한 결과가 예상된다면 현명하게 판단하여 기꺼이 맹세를 거두어야 합니다. 맹세를 깨지 않으려고 더 큰 죄악으로 치닫기보다는 차라리 당장 맹세를 깨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고약하고 어리석은 나발을 죽이고 그가 지닌 모든 것을 파괴하겠노라고 주님께 맹세했지만 현명한 여인 아비가일의 중재로 곧장 위협을 거두고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맹세를 깨 버리는 일이 죄라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1사무 25,2-39 참조). 그러나 춤추는 소녀에게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주겠노라고 맹세한 헤로데는, 손님들에게 허풍쟁이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예언자의 죽음을 춤에 대한 상으로 허락함으로써 식탁을 피로 얼룩지게 했습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0 하느님은 기뻐하고, 고난을 겪고, 복을 주고, 위로하신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이사 49,13).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요한 8,12)
지혜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혜는 나에게 모든 좋은 것을 가져다주었다”(지혜 7,11). 이 위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하지만 피조물의 위로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에는 무언가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위로는 순수하고 잡스러운 것이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몸 달아 하십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선물로서 주시고자 안달하십니다. 하느님은 마치 하늘나라와 지상의 나라와 자신의 모든 행복과 자신의 모든 신성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우리를 사랑하시다가 바보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위로해 줄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나 외에는 어떤 것과도 관계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나에게 완벽하게 주십니다. 하느님은 그것을 항상 가장 순수한 상태로 모든 피조물에게 주십니다.(229)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영혼 승화의 비결
히야친타도 유행성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녀는 오빠보다 좀 뒤늦게 병석에 눕게 되었고 프란치스코가 죽은 다음 일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애처로울 정도로 가없은 순교의 길을 걸은 다음 드디어 묘지에 이르렀는데, 아니 천국으로 개선해 갔는데, 그 순교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녀가 어떻게 해서 성모님께 대한 사랑과 희생 정신으로 그 영혼을 승화해 나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앞서 히야친타의 화 잘 내는 얼굴도 보았고 까다롭고 샐쭉해지며 극단적으로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노는 것에 열중하는 면 등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귀부인의 방문은 이 소녀의 영혼을 온통 바꿔 놓았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되었고 고통을 당할 때도 강했으며 용감했다. 그리고 벗들을 즐겁게 해주는 경우가 아니면 장난을 치지 않았다. 소녀는 비로소 죄를 짓고 주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는 죄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어린 소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저 죄인들의 죄를 기워 갚는 신자가 적은 탓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자신의 영혼과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 이 외에 이 세상에서 바람직하고 원함직한 것은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더구나 영웅적인 고행자가 된 것이다. 지옥의 환시를 본 다음부터 세번 째 발현) 그녀의 화제는 맡아 놓고 죄인들과 영원한 벌이었고 그녀는 온전히 이 생각에 몰두하게 되었으니 말하자면 이 생각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가끔 그녀는 앉은 채로 근심스럽게 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지옥! 지옥! 거기 떨어진 사람은 정말 정말 불쌍하다. 아아, 나뭇잎이 불에 타듯 타고 있다. 아, 타고 있어."(167)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6,25)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입니다. 교회가 세례자 요한 성인의 탄생과 죽음을 기념하는 일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이는 곧 세례자 요한의 삶이 예수님의 구원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감사송에 이렇게 세례자 요한을 증언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저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먼저 생각났습니다. 이 우화는 아무도 임금님께 진실을 말하지 않았잖아요. 왜냐하면 힘이 있는 사람들은 자주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나쁘게 쓸 수 있다, 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는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어린아이는 거짓을 모르기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눈과 솔직한 목소리를 가져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권력이나 지위, 계급이 가진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잘못을 고발하고 폭로하는 것은 솔직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확신과 절대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 정의와 진실을 향한 의지의 문제라고 세례자 순교 축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가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대목은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열두 제자의 파견((마르 6,7-13)과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6,30-44) 사이에 삽입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린 요한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굳이 여기에 삽입한 이유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두고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난 것이다.”(6,14)하고 착각하고 있었으며, 이 소문을 들은 헤로데 역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6,16)라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시점에 요한은 헤로데의 군사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고(1,14), 오늘 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공교롭게도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헤로디아의 꾐(6,19-28)에 빠져 세례자 요한을 목 베어 죽임으로서 그의 사망일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도덕적으로 건전하지 못하고 부적절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들은 것은 하느님의 꾸짖음이었건만 그는 오히려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고 그의 목을 베어 죽임으로 하느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먼저 그는 자기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은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일이었습니다. 율법에도 “네 형제의 아내의 치부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형제의 치부이다.” (레18,16)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무력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패륜이 어디 있습니까? 또한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충언을 무시했습니다.
어쩌면 이런 점이 다윗 왕과의 차이점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취함으로 인해 나단 예언자로부터 질책을 들었을 때, 담요가 젖도록 밤새 회개하는 통회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질책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헤로데는 사람들 앞에서 경솔한 맹세를 해서 인생 일대 최악의 실수, 대형 사고를 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부하신 것처럼 맹세는 함부로 하면 아니 되는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석에서 자기 기분에 들뜨고 살로메의 춤에 매료되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6,22)라는 약속을 맹세한 것입니다. 그 맹세가 올무가 되어 결국 그는 의인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는 엄청난 역사적 범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잘못을 범하고서도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 번민은 했지만 회개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나 활동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의 순교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세례자 요한은 불의한 일을 질책하는 일에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대 권력자인 왕을 찾아가 그의 면전에서 그의 부도덕함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질책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예언자로서의 사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신 것입니다. 이는 곧 미구에 예수님 또한 그렇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주님으로 하여금 이제 요한이 준비하고 마련한 그 길을 통해 적극적으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모두 그리스도가 아니지만,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준비하고 마련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진리와 정의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예언자적 삶을 살도록 불림 받았음을 오늘 기념일은 우리를 자극하고 도전합니다.
“악인은 제 악함 때문에 망하지만, 의인은 죽음에서도 피신처를 얻는다.”(잠14,32)라는 말처럼, 헤로데는 자신이 범한 그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그와 반대로 세례자 요한은 한낱 못나고 치사한 임금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요한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결과로 말미암은 순교를 통하여 그가 바라던 하느님의 피난처, 성채이며 보루인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5,10)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먼저 오시어 스스로 작아지신 세례자 요한 /
박윤식 [big-llight] 2024-08-28 ㅣNo.175471
‘그때에 헤로데는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그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이다. 여자에게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단다.
사실 요한 세례자는 예수님에 앞서 그분의 길을 닦고 준비한 위대한 예언자이다. 성인은 헤로데의 불륜을 책망하다가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였다. 성인은 이렇게 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지만, 그는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 같다. 이는 예수님 죽음을 미리 보여 주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의 죽음을 기억한 것은, 4세기 무렵부터 사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세례자 요한이 혼인에 관한 성스러운 명령을 폐기한 헤로데를 향해 대담하게 꾸짖었다. 시대의 예언자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는, 자신의 생일을 맞이해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연회를 연다. 외모를 뽐내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음탕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 손님들의 쾌락과 방탕 속에서 헤로데의 무모하고 경솔한 맹세가 요한의 죽음을 앞당겼다. 이렇게 그의 일생은 철저하게 구세주의 앞날을 예고하는 삶이었다. 성인은 헤로데의 처와 그녀의 딸의 공모로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다. 철저하게 구세주의 앞날을 준비하신 그 의로웠던 분이, 한 소녀의 춤 값으로 희생되셨다니 참으로 두고두고 어이가 없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 죽음이 뜻하는 두 가지 성격을 볼 게다. 그의 마지막은 무죄한 이의 억울한 죽음이었다. 저항 한번 하지 못한 채 권력의 횡포에 소리 없이 소중한 목숨을 잃으셨다. 교회가 해마다 성탄 시기에 헤로데에 의해 죽은 죄 없는 아기들을 순교자로 이해하며 기억하듯, 성인의 그 어처구니가 없는 죽음은 한 예언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한 완성이었다.
따라서 성인은 예언자의 전통에 따라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불꽃처럼 주님의 말씀을 먼저 온 이답게 온 지역에 전하였다. 이러한 그의 운명을 보면서, 역사 안에서 반복되는 지금 이 혼돈의 시대에도 끊이지 않는 죄 없는 이들의 희생이 떠올라 마음이 무겁다. 또한 권력의 횡포에서도, 주님께서는 죄 없는 이의 희생과 의인의 죽음을 잊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을 새기자.
사실 누구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는 것은 그리 쉽지는 결코 않을 게다. 더구나 그 대상이 권력자이거나 윗분일 때는 더더욱 그럴 수 있겠다. 그래서 책임자 주변에는 충언을 해 줄 이 드물고 결정권자의 입맛에 맞장구나 치는 간사한 무리들이 늘 자리를 잡아 앉는단다. 이런 일은 상하 관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무릇 교회 안에서조차도 일어날 수 있다. 결정권자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이 일수록 그 주변의 인물도 참 중요하다. 악은 늘 누군가를 희생시키니까.
이렇게 의로운 성인의 억울한 죽음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 체면 때문에 신의를 저버린 적은 없었는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는지를. 욕심은 언제나 부패하기 마련이고 무엇보다도 거기에 쉽게 물든다. 우리는 부패된 세상이라는 탓보다는 스스로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는 신앙인이었으면 한다. 세례자 요한 성인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셨고, 그런 만큼 예수님께서 걸으실 길을 분명히 미리 준비한 분이셨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요한의 죽음 자체는 아주 간략하게 서술됩니다.
그가 죽을 때 무슨 말을 하였는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였는지도 일러 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죽음입니다.
요한의 입장에서 생각하였을 때, 차라리 헤로데가 처음부터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면 죽는 이유가 더 명백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오히려 요한의 주장이 더 두드러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고 싶어 하였을 때까지도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헤로디아가 헤로데를 설득해서 요한을 죽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약속한 선물을 주려고 요한의 목을 가져오게 합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고 나서 반지 하나를 달라고 하였든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였든 헤로데는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을 죽일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헤로디아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주려고 죽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경비병은 감옥에 가서, 마치 반지 하나를 가져오듯이 담담하게 요한의 목을 베어 들고 옵니다.
그러나 경비병이 감옥으로 요한을 찾아간 날, 요한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그가 맞게 될 예언자의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명분으로는 요한을 죽일 수 없었기에, 불의는 어떻게든 진리의 목소리를 죽이는 길을 찾습니다. 요한은 그에게 걸맞지 않은 이유로 소리 없이 죽임을 당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가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예레 1,19).
요한은 헤로데에게 꺾이지 않았습니다.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55)
==========================================================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허무한 죽음,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죽음에는 참으로 다양한 유형의 죽음이 있습니다.
살아생전 국가와 이웃을 위해 큰 족적을 남겼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눈물 속에 떠나는 황홀한 죽음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백수를 누리면서 평생 잘 지내다가 후손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는 편안한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죽었다 깨어나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한 한 청춘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습니다.
난폭하고 오만한 지도자의 그릇된 정책, 게으름과 무성의, 안일무사함으로 인해 벌어진 대참사, 그로 인한 희생자들의 죽음도 정말 이해가 안됩니다.
오늘 수난 기념일을 맞이하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구약 시대 마지막 대 예언자, 자기 뒤에 오시는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잘 닦은 선구자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한때 타오르는 횃불 같이 찬란했던 그의 삶이었습니다.
죽는 모습도 그에 못지 않게 장엄하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사악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헤로디나의 간계와 허당 기질이 다분한 헤로데의 허언 한 마디로 인해, 세례자 요한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어이없는 참수형을 당하고 맙니다.
요한의 머리는 댕강 잘려져 쟁반에 담깁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담긴 쟁반을 받아든 헤로디아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하고 수치스런 죽음인지요.
대예언자의 결말이 너무나 초라하게 끝이 나는 것 같아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든 분위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허무한 죽음,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예언자로서의 삶과 죽음의 본모습인 듯합니다.
쓸쓸하고 아쉽고 드러나지 않는 삶과 죽음,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빛내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삶과 죽음이 곧 예언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신산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그것이 참 예언자로서의 삶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이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항상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또 다른 예언자들인 사제들과 수도자들, 선구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보다 가난해지도록 그들이 좀 더 고독해지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그들이 갖출 것 안 갖출 것 다 갖추고 떵떵거리며 산다면, 그것처럼 예언자로서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로 산다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박해받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일, 사회 정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는 일, 남들이 마다하는 선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일,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일, 그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제대로 된 예언자의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랜 역사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참 신앙인의 길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를 뛰어넘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손해 보는 삶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언자의 길이요 의인의 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비록 비극적이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구원사업 성취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출생은 물론 생애 전체, 죽음까지도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위해 온전히 봉헌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요한 세례자의 죽음
오늘은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이다. 세례자 요한의 삶은 모두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였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가실 길을 닦아드린 다음, 그 길을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자기의 제자들을 그분께 인도하고 순교하신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를 흘리기까지 견디어낸 사람들과 수도자들의 아버지이다. 요한 세례자는 고행과 순교의 두 면을 보여준 분이다. 그는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말하였고,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순교하였다. 그분은 당신의 삶으로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피로써 주님을 증거하신 분이다. 헤로데 왕의 잘못을 간하다가 잡힌 몸이 되었는데, 이제는 헤로데의 만용이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를 볼 수 있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그 예언자적 정신은 항상 계속됐다. 예언자의 삶은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권력은 진리를 외치는 입을 막아 침묵하게 하고, 또한 침묵을 강요하곤 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들은 그 권력에 맞서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외쳐왔고 지금도 외치고 있다. 그 예언자적 삶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계승해야 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들이 바라고 기다리고 있던 엘리야라고 알기도 하였고,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예수님 안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고 세계를 지배할 승리를 가져다줄 정복자로서 엘리야를 생각할 수도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서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분은 엘리야를 무한히 능가하시고 예언자들을 초월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기도와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그분이 누구시라고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만에 빠져 죄 없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헤로데와 같은 잘못은 범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요한 세례자의 자세를 본받고, 예언자적 삶을 살아가며 주님을 우리의 참 구세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대하고 모시는 우리 되도록 하여야겠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경을 안 읽는 이유는 이 습관을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이 순교한 날을 기념합니다. 헤로데는 왜 세례자 요한을 존경하면서도 목을 자르게 명령했을까요? 우리도 살다 보면 옳은 일이지만, 알면서도 그 일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인데,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성경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목을 치지는 않지만, 먼지가 쌓이게 두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이 좋은 걸 알면서도 읽지 않는 것이나 헤로데가 하느님 말씀을 듣기 싫어 목을 치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 신자가 성경을 읽는 시간은 반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책을 읽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독서 시간은 세계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성인 10명 가운데 6명 정도는 1년 동안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이 좋다는 것은 다 압니다.
유명인들 몇 명의 말을 들어봅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모두 책에 있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찾아주는 사람이 바로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에이브러햄 링컨)
“당신은 결코 독서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워렌 버핏)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마을 도서관이었다.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이 독서 하는 습관이다.”(빌 게이츠)
“남의 책을 많이 읽어라 남이 고생하여 얻은 지식을 아주 쉽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다.”(소크라테스)
이렇게 책은 마음의 양식만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돈도 많이 벌게 해 주는 길이 됩니다.
그런데도 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책을 읽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 사람 중 대표적인 인물이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그런데 오프라 윈프리는 ‘감사일기’도 강조합니다.
신기한 것은 감사일기를 쓰는 사람 중에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미라클 모닝’으로 유명한 할 엘로드도 감사를
강조하는데 아침엔 반드시 책을 읽으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왜 감사와 책읽기가 함께 갈까요?
책은 마치 세례자 요한처럼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지침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지침은 내가 그 사람에게 감사할 때만 관심이 생깁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을 때인 사춘기 때 부모의 모든 말은 잔소리가 됩니다.
그러나 부모에게 감사할 때는 부모의 가르침에 귀를 쫑긋 세웁니다.
고마울 때만 듣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그저 이해하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습관이 들여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감사는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부모가 똑같이 사랑해줘도 어떤 아이는 감사해하고 어떤 아이는 불만스럽습니다.
EBS에서 한 달간 부모를 칭찬하는 숙제를 사춘기 아이들에게 시켰을 때 아이들은 처음엔
힘들었지만, 나중엔 잘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집과 부모가 좋아져서 말을 잘 듣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감사일기를 억지로라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저희 성당은 감사일기를 나누어주고 매일 그날 읽은 성경 구절이나 하.사.시. 한 문장씩을 쓰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가 말씀을 읽게 하여 헤로데처럼 좋은 걸 알면서도 예언자의 목을 치는 사람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선순환됩니다.
감사하면 성경을 읽게 되고 성경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명을 받습니다.
그 사명 때문에라도 삶이 의리있어집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실행할 힘을 얻기 위해 성체성사나 고해성사에서 멀어지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 감사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어린이처럼 되려는 태도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감사일기를 씁시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박해와 순교는 예언자의 운명이 아닙니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마르 6,17-21ㄱ).”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6-29).”
1) 여기서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만 보고,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보호하려고 했고, 헤로디아만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것은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잠깐 가두어 놓았다가 다시 풀어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헤로데는 백성의 여론을 살피면서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적당한 때가 되기를 기다렸는데, 헤로디아는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죽이려고 했습니다.
헤로데가 그런 헤로디아를 막은 것은, 요한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의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20절의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는, “백성들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헤로데가 백성의 여론을 두려워하며”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잃고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임금 자리를 유지하려면 로마 황제에게 잘 보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백성의 지지가 중요했습니다.
만일에 반란이나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황제는 그 책임을 헤로데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기 싫어했으면서도 경청하는 척 했다는 뜻입니다.
21절의 “좋은 기회가 왔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기에 좋은 기회가 왔다는 뜻입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에 대해서 당시의 백성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헤로데는 자기 생일에 세례자 요한을 처형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헤로디아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2)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이라는 말은, 요한을 죽이는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경솔함과 경망스러움을 의식하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과 자존심이 손상된 것을 괴로워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23절).” 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의 영주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왕국’ 자체가 없었고, 자기가 다스리는 갈릴래아 지역의 절반을 로마 황제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누군가에게 줄 권한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헤로데 자신도 자기의 약속이 헛되다는 것과 자기의 맹세가 거짓 맹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3)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다가 권력자에 의해서 살해당한 ‘순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예언자가 그렇게 박해받고 순교하는 것을 ‘예언자의 운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미리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또 그렇게 박해받고 순교하라고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보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사람들이 받아들여서 모두 회개했다면, 또 헤로데와 헤로디아도 회개했다면, 요한이 박해받고 순교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것,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고
당신에게로 돌아서서 사는 것을 바라십니다.
<예언자들의 순교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들의 범죄입니다.>
우리 교회가 수없이 겪었고,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겪고 있는 박해와 고난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그 뜻을 거역하는 범죄일 뿐입니다.
물론 순교자 자신은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기꺼이 하나의 밀알이 된 분들입니다.
그래도 박해와 순교를 하느님의 뜻이라고, 또는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살인죄를 지은
헤로데 같은 자들을, 하느님께서는 왜 내버려 두시는가?
그런 박해자들에게 바로 천벌을 내리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헤로데 같은 자들도 하느님의 자녀이고, 잃은 양이고,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곧바로 천벌을 내리지 않고 기다리시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서 작업을 하다보면 어린 아이들과 함께 앉아있는 엄마들을 종종 만납니다. 아이들은 유모차를 타고 있을 정도로 정말 어린 ‘아가’들인데 대부분 엄마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영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엄마들은 그 옆에서 이웃들과,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이지요.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상황에는 아주 큰 문제가 있습니다.
아직 글씨조차 읽지 못하는 어린 나이 때부터 영상매체에 무분별하게 노출되는 아기는 스스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글자를 읽지 못하는 ‘난독증’에 걸리거나 책을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책은 그것을 읽는 동안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해야 하고, 사건의 정황과 주인공들의 심리를 생각해야 해서 머리가 피곤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상매체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상에 담긴 메시지를 비판이나 선택없이 수용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편안한 것만을 찾고 쉬운 길만 걸으려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상황 탓을 하고, 주변 사람들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노라고 그들 핑계를 댈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자신입니다. 생각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잘못된 점을 수정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전혀 모르지 않았음에도, 그런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놓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는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약속이 초래할 후폭풍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지 않았습니다. 왕국의 절반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헤로디아에게 주어졌을 때 그녀가 그 권한을 이용해 어떤 목표를 이루고자 할지 ‘모른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 사이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눈엣가시 같은 ‘세례자 요한’을 제거하려고 시도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헤로데도 마음으로부터 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 죄 없는 예언자를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그의 양심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 폭넓은 지지와 신뢰를 받고 있는 세례자 요한을 정당한 이유나 명분 없이 해치면 성난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뿐이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세례자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의붓딸의 청원은 그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왕이라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왕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적당한 핑계 거리도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그 기회와 핑계를 이용하여 자신이 마음 속으로 원했던 욕망을 실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그가 한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바뀌지 않은 것은 그도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질러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 어떤 말로도 무죄한 의인을 살해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세례자요한의 피에 대한 죄값을 치러야하겠지요.
우리 안에도 헤로데와 같은 마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그것이 죄라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초래할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로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조차 지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그 말을 지키려고 하는 단호한 용기와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세례자 요한의 수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의미입니다.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예언자의 소명”
예언자 예레미야는 왕들과 대신들, 사제들, 백성들에게 하느님이 말씀을 전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해야 할 메시지는 그들을 반대하는 것이고 그들은 다수인데다가 세력이 있어서
예언자 혼자로서는 역부족인데다 외로운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밀어붙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예레 1,17)
예언자는 두려워했던 대로 왕의 대신들에게 미움을 받고 온갖 음모에 휘말려 감옥에
갖히고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늘 주님 앞에
하소연합니다.
오직 믿을 분이란 주님 뿐이신데, 돌아오는 것은 죽음의 위협과 사람들이 빈정거림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끝내 하느님의 사랑에 두 손을 들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는대로 용감하게
사람들에게 나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 세례자 요한은 참으로 큰 사람입니다.
비록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그림자 역할을 했지만 그는 자신의 예언자 소명을 소신있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당당히 헤로데의 불륜을 지적합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세례자 요한은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갖히는
신세가 됩니다.
헤로데 생일의 연희 석상에서 춤을 잘 추었던 헤로디아이 딸은 댓가로 어머니 헤로디아가
원하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청하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세례자 요한은 어이없게 죽음을 맞아야 했습니다. 주님의 시대가 열리면서
세례자 요한은 마지막 예언자의 역할을 순교로 마무리합니다.
언젠가 존경하는 은사님이시던 선 신부님께서 수도원을 산보하시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외로워야 한다고요. 사람들과 더불어 있지만 주님께서
외딴 곳에서 또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듯 주님을 만나러 떠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인기, 사람들과의 친교도 중요하지만 늘 주님과 함께 하는 그래서 때로는
떠나 있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훗날 신부님의 말씀은 공부하는
데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부님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사람은 외롭지만 그러나 주님이 함께 계시고 진리가
또한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이나 은수자 중에 많은 분들이 사막에서 지내시며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침묵과 광할한 사막이 있었지만 그들의 삶은 결고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광야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니시던 주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반대를 받고 또 생명의 위협도 받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예언자 예레마야와 마지막 예언자 세례자 요한의 삶을 묵상하며 우리도 세상의 번거로움에서
잠시 떠날 수 있는 침묵과 여유를 갖도록 합시다.
세상은 나를 잊을지라도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좋으신 주님께서!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의 신앙고백의 자리는 어디인가 ♣
매순간이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의 갈림길이다.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순간들,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처신과 선택들에 과연 하느님께서 숨쉬도록 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의 대목에는 “의롭고 성스러운 사람”(6,20)의 억울한 죽음과 헤로데 일가의 잔인한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나는 일상의 삶에서 어떤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가?
오늘의 복음의 배경은 벌써 기원전 1세기경부터 있었던 하스모니아 왕가의 처절한 왕위 쟁탈전의 연장선상에 있다. 곧 정치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고 로마제국의 힘을 빌어야 할 만큼 국력도 약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례자 요한은 추종자가 약 6천여 명에 이르는 대단한 세력의 중심인물이었다. 따라서 정치권은 긴장하였고 그를 처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유대고사, 18권 116-119항 참조).
더구나 헤로데 임금은 여덟 번이나 결혼하여 열 명의 부인을 거느렸음에도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함으로써(6,17) 유대교법으로 어겼다(레위 20,21). 요한은 그의 불륜을 고발함으로써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를 선포하였다. 이런 그의 처신이 그들의 미움을 사게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렇게 그는 피를 흘려 주님께 대한 최상의 증거를 드러냈다.
요한 세례자의 전 생애는 그리스도께 대한 증거 자체였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가실 길을 준비해드린 다음 그 길을 예수님께 내어 드리고 제자들을 그분께 인도하고 사라졌다. 나아가 그는 고행과 순교라는 성덕의 두 유형을 몸소 보여 주었다.
요한은 참으로 인간적인 명예를 누릴 처지에 있었으나 하느님의 일에 몰두하였고 겸손하게 자신의 분수를 지길 줄 알았다.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말했으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 3,16)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들꿀을 먹으며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고행과 극기의 삶을 살았으며 결국 ‘주님의 길’을 준비하러 왔던 그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여기서 정치와 종교의 충돌, 세속적인 사고방식과 신앙의 진리가 충돌할 때 나의 ‘신앙고백의 자리’는 어디인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신앙고백은 세례자 요한이 목숨을 바쳐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입으로는 요한 세례자를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결국 딸의 청을 받아들여 요한의 목을 쳐서 죽인 헤로데는 오늘도 나와 우리 사회 안에서 끊임없이 출현한다.
매순간 나는 요한 세례자처럼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두려움 없이 선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헤로데 임금이나 빌라도 총독처럼 현실과 이권, 편의와 물질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가? 그렇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으며 참 행복을 거부하며 사는 것임을 알아차려야 하리라! 내 몸과 마음이 머무는 자리가 곧 신앙고백의 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40829.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구원의 길로 담대히 걸어가는 삶
<2024.8.29> 아침을 여는 묵상 (시 106:1~12절)
❝구원의 길로 담대히 걸어가는 삶❞
❚ 허물과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허물과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 구원 얻은 우리는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삶이어야 합니다(1~5절).
여호와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시인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위대하신 권능을 선포하라고 말합니다(2절). 그러면서 공의를 지키는 이들과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이 복이 있다(3절)고 말합니다. 시인은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셨던 것처럼 현재 자신과 그의 공동체가 당면한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서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합니다(4~5절). ‘주의 유산’은 구체적으로는 아브라함 언약에서 주시겠다고 언급하신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히 짓밟혀 수치와 치욕의 대상으로 몰락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가나안 땅이 다시 과거 다윗 시대에 누렸던 영광과 자랑의 장소가 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진정으로 복된 자는 이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의 가치관 속에서 풍족한 자가 아니라 철저히 우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귀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이고 이 세상적으로는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미련 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이며 복된 자입니다. 아울러 환난과 고통 가운데 빠져 있는 내 자신을 돌아보시고 찾아오셔서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주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므로 받는 진정한 복을 기대하며 구원의 길로 담대히 걸어 나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능력과 권능을 의지하는 삶이어야 합니다(6~8절).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처럼 죄를 지었으며, 나쁜 길을 걸으며 악행을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6절).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푸신 기적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홍해에서 범한 죄에 관하여 언급합니다(7절).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의 계속되는 긍휼에도 불구하고 이적과 기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를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위기 가운데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신실한 사랑을 보여줍니다(8절).
이스라엘이 겪는 고통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들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이루어진 죄악의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그러한 백성들에 대한 구원의 진정한 의도는 단지 구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구원의 경험을 통하여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전능하신 분이심을 재차 인식시킴으로써 장차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했음에도 금세 잊고 눈 앞에 당면한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어려운 환경 때문에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지하므로 구원의 길로 담대히 걸어 나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구원과 은혜를 찬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9~12절).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막는 홍해에게 호통을 쳐서 바닷물을 말리셨고, 그들로 깊은 바다를 광야처럼 지나가게 하셨습니다(9절). 그런 후에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원수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이 대적을 덮으므로, 그 가운데서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여습니다(10~11절,새번역). 그제서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12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적하려는 세력은 항상 존재해 왔고, 현재에도 존재하고, 주님께서 오시는 날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세력이 철저하게 망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권력의 힘으로 대적들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영적 홍해는 여전히 깊음을 자랑하고, 금방이라도 그 물이 우리의 인생을 덮칠 것 같은 상황일지라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 깊음 위를 담대하게 걸을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신 구원의 길을 믿고, 신뢰하므로 당당하게 그 길을 걷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붙들려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소중한 것에 붙들려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에게 구원과 은혜를 주심에 대해 찬양하며 구원의 길로 담대히 걸어 나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의 가치관 속에서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되새기며 매 순간 감사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시 106:1~1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