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진과 장의
소진(蘇秦)은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유세가(游說家)로 주(周)나라 낙양 출신이고 출사후에 제후국들을 돌며 유세를 하였으나 푸대접이었다.
조나라 숙후를 찾아간다. 여기서 그는 진(秦)나라의 동진을 막기 위해서 함곡관 동쪽의 여섯 나라가 합종하여.. 서로 도우며 진나라에 대항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설파한다. 이후 소진은 강성해진 진에 맞서서 한, 위, 조, 제, 초나라를 찾아가며 6국이 상호 연합하여 강성해진 진(秦)을 제압하자는 내용을 골자로 합종책(B.C.333년경,合縱策)을 제시하게 된다..
6국 합종의 장이 되어 한동안 반진 연대를 이끌면서 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6국은 각자 동상이몽이었으므로 이해 관계가 달라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B.C.318년에 와해되고 만다..
이런 합종의 약속을 깨기 위해서 끈질긴 물밑 작업을 한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소진과 동문수학했던 장의였다..
장의(張儀)는 소진과 동문수학했지만 항상 자신이 소진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다. 장의는 진나라에서 둥지를 틀면서 제일 먼저 손을 쓴 것은 위나라의 환심을 사는 외교에 주력하며 합종책을 깨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렇게 소진이 죽으면서 합종책은 와해되어 갔다. 이것은 장의의 역할이 주효했다. 장의가 제후국들을 종횡무진으로 찾아다니며 6국의 종약을 깼다. 장의는 소진과는 다르게.. 6국이 각각 개별적으로 진과 동맹함으로써 다른 제후국을 제압하자는 술수를 사용했다. 6국이 가진 각국의 동상이몽을 파고 들었다. 장의는 진나라 혜문왕 시절 승승장구했다.(이때는 굴원이 초나라에서 내침을 당해서 고향으로 내려와 있을 때이다.). 하지만 혜문왕에 이어 등극한 진 무왕은 세치혀를 놀리는 장의의 잔재주를 싫어했다. 장의는 위나라로 가서 정승이 되었으나 1년만에 죽고 만다. 하지만 장의의 뛰어난 능력과 수완 덕분에 진은 계속하여 성공을 거둠으로 진나라가 전국 통일의 기본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사마천 태사공은 이 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삼진(三晉)에는 권모술수와 임기웅변에 능한 유세객들이 많았다. 합종론과 연횡론을 주장하며 진나라를 강하게 만든 자들은 대부분 삼진출신이다. 장의의 계책은 소진의 것보다 더 교활한데가 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소진을 더욱 미워한다. 그 까닭은 그가 먼저 죽자 장의가 그의 단점을 드러내고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두 사람 모두 나라를 기울게 하는 위험한 인물이라 하겠다.
(소진과 장의는 동문수학한 친구로서, 두 사람의 우정을 말하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사마천은 나라 사이를 이간질하거나, 술수를 부리는 외교를 좋게 보지 않았다.)
첫댓글 말 잘하는 소진.장의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