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짜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어휘풀이] -백무선 : 함경북도 백암(白巖)에서 두만강의 삼림 지대을 가로질러 무산(茂山)에 이르는 협궤 철도. 1944년에 개통되었다. 길이는 192.1km -연달린 : 잇따른
[작품해설] 1945년 겨울에 창작되고 네 번째 시집 『이용악집』에 수록된 이 시는 이용악의 시에서는 보기 드문 연가(戀歌)풍의 작품이다. 1939년 이용악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최재서가 주관하는 『인문평론』의 편집 기자로 근무하다가 1942년 고향 경성(鏡城)에 돌아가 있던 중,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귀경(歸京)하여 그 이듬 해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게 된다. 이 시는, 해방 직후 혼자 상경하여 서울에서 외롭게 생활하던 그가 무산(茂山)의 처가에 두고 온 그이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5연으로 이루어진 자우시이지만, 의미상으로는 기·승·전·결의 전형적인 형식에 수미 상관이 구조를 곁들인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연[기]에서 시인은 ‘북쪽 작은 마을’에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하고 자신에게 묻고 있으며, 2~3연[승]에서는 어느덧 시인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북쪽의 가족을 찾아가는 모습이 제시되어 있다. 그 곳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 백무선 철길’을 이용해 ‘느릿느릿 밤새어 달려’야 다다르는 깊은 산골이다. 지금쯤이면 그 곳으로 향하는 화물 열차듸 검은 지붕에도 눈이 내릴 것이며, 가족들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4연[전]에서 화자는 그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 그러므로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이라는 시행의 ‘차마’라는 시어 속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이 응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 어쩌자고 잠을 깨어’라는 구절은 바로 시인이 머물고 있는 서울 잉크병마저 얼게 할 정도로 추운데, 그 곳 무산이 가족들은 얼마나 추울까. 하는 화자의 가족들에 대한 염려가 잘 드러나 있다. 5연[결[에는 ‘북쪽 마을’에 함박눈이 쏟아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1연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묻는 단순한 질문이라면, 5연은 동일한 시행이면서도 시인의 그리움 내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마침내 눈으로 화하여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잉크도 얼어붙게 할 정도의 추위를 몰아오는 ‘함박눈’임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것을 ‘복된 눈’으로 생각하는 인식의 태도이다. 해방이 되자마자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가족들을 처가에 남겨 두고 상경하였던 그로서는 ‘눈’울 새 시대를 위한 하늘의 축복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 시는 ‘북쪽’에 두고 온 가족을 향안 그리움을 ‘함박눈’과 추위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으며, 잉크마저 얼어붙게 하는 모진 추위는 역설적으로 시인의 따뜻한 가족애를 보여 주는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작가소개] 이용악(李庸岳)
1914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5년 『신인문학』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등단 1939년 일본 상지(上智)대학 신문학과 졸업 김종한과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 발간 1939년 귀국하여 『인문평론』 기자로 근무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1950년 6.25 때 월북 1971년 사망
시집 :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이용악』(현대시인전집 1, 1949), 『이용악시선집』(1988), 『북쪽은 고향』(1989),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