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34
4월21일[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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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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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tWOcRNy4PU4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 오흥서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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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착한 목자는 양들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 주일을 맞아 살레시오회 사목자로서 부끄러운 지난 날을 돌아보며, 그나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돌아봅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아무래도 우선적 사목 대상자인 아이들과 동고동락했던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에 둘러쌓여 있던 시절, 아이들이 제 목 위로 올라타 ‘이랴 이랴!’ 하던 시절, 아이들이 같이 놀아달라고 옷자락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시절, 저도 아이들을 좋아했고, 아이들도 제가 좋아 죽던 시절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가끔 아이들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찾아오는 후배 수도자들에게 저는 늘 똑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복에 겨운 소리 제발 좀 하지 마십시오. 나이 들면 아이들에게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답니다. 아이들과 아웅다웅하는 지금 이 순간이 호시절이고 꽃자리입니다. 지금 이 순간, 아이들과 함께 지상 천국을 만끽하십시오!”
1888년 1월 31일 돈보스코는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진단을 내리기 위해 주치의가 그의 시신을 검안하였는데, 검안을 마친 주치의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돈보스코의 시신은 마치 더이상 수선할 수 없는 낡은 코트처럼 너덜너덜했습니다. 그의 사인은 명백한 과로사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키 겨우 160센티 미터인 돈보스코의 어깨 위에 수천, 수만명 아이들이 매달렸으니, 그의 몸이 남아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소 주일을 맞아 요한복음은 착한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금쪽같은 시간을 나눈다는 것이 아닐까요? 착한 목자는 너무나도 당연히 양들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 사이에 머무는 것을 지상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그는 언제나 양들 사이에 현존하기에, 몸에서는 늘 양 냄새가 풀풀 풍기는 사람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나이가 들고, 그렇게 이승에서의 삶을 마무리 짓고 나면, 한 줌 재로 변할 우리 몸입니다. 뭐 그리 아깝다고 몸을 사리고 또 사립니까?
물론 건강을 잘 챙겨야,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봉사도 하고 헌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몸을 사리고 사리다 보면 좋은 시절 다 가고, 호호백발이 되고 나면, 봉사는커녕 도리어 봉사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변합니다.
다시 한번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하느님께서 주신 이 소중한 목숨, 파리 목숨처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에 백이십퍼센트 활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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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SOVWVe1-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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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만 살 수 있는 나라>
어느 나라, 어느 공동체든 그 공동체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능력’입니다. 모기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 살 수는 없습니다. 강도질하거나 사기를 치다가 감옥에 갇힙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재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여인 중 한 어머니의 아이가 죽었습니다.
질투 끝에 다른 엄마의 아기를 훔쳐 왔습니다. 둘이 그 아이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솔로몬은 그 아이를 반으로 잘라서 나누어 가지라고 합니다. 못된 여인은 그러자고 하고 진짜 엄마는 차라리 그 아이를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그 나라에 살 백성이 정해집니다.
아직 아이는 그 나라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를 그 나라에 살 자격을 얻기까지 키워낼 수 있는 여인은 그 아이의 생명을 위해 자기 소중한 아들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엄마밖에 없습니다. 이 역할을 우리는 ‘사제직’이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사제들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서품받아야만 사제가 아니라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왕직, 예언자직, 그리고 사제직에 참여합니다.
오늘은 착한 목자 주일, 혹은 성소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희생에 감사하여 그분의 뒤를 따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부활의 영광을 아버지께 받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자녀를 잘 키워놓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받는 영광처럼, 분명 그리스도는 부활하실 수밖에 없는 시스템 안에서 사셨습니다.
사제는 더 높은 세상과 더 낮은 세상을 연결해주는 중개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더 높은 존재와 머무는 것도 피 흘림이고, 더 낮은 이와 머무는 것도 피 흘림입니다. 하느님과 머물기 위해서는 죄를 죽여야 하고, 죄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도 참아내야 합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산속에서 40년을 산 할머니가 나옵니다. 그 할머니에게 제작진이 아무리 설득해도 할머니는 내려가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추운 겨울임에도 텐트를 치고 일주일 이상을 할머니와 머물며 말벗이 되어주고 이것저것 많은 도움을 줍니다.
할머니 마음이 열립니다. 그래서 제작진에게 자신이 가진 귀한 쌀과 김치로 밥을 지어줍니다. 제작진은 맛있다며 먹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미안해서 어떻게 할 줄을 몰라서 그래!”라고 말합니다.
사제의 피는 양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줍니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가자는 제작진의 말을 듣습니다.
할머니는 40년 만에 따듯한 밥과 잠자리에서 허리를 펴고 주무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송국에서 이러한 고생을 한 제작진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도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도와줄 것입니다. 이런 일이 하늘에서도 일어납니다.
성 다미아노 신부는 아무도 가지 않는 나병 환자들 촌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선교합니다. 그들의 무덤을 파 주고 고름을 닦아줍니다. 그 과정에서 본인도 나병에 걸립니다. 이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평소에도 “주님, 저에게도 같은 나병을 허락하시어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자신은 건강을 잃어버렸지만, 하느님께서는 나병 환자들 틈에서 일하는 내 선교의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희생을 내려주셨으니, 나의 이 희생은 극히 작은 것이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는 극히 유익한 것이었다.”
나병에 걸려 돌아가시는데 뭐가 유익했다는 말일까요? 돌아가시면서도 “하느님 진실로 내 인생은 행복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영원한 행복에 들리라는 확신은 어떻게 얻을 수 있었을까요? 이 세상도 그러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의 시스템도 같을 것이란 확신 때문입니다.
이분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자 수많은 봉사자와 재정적 지원이 이어졌습니다. 성인은 이 모습을 보며 하늘나라에서 당연히 받을 보상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분과 함께, 이분을 이어 봉사하셨던 성녀 마리안느 코프 수녀는 나병에 걸릴 것을 걱정하는 동료 수녀들에게 자기 수녀원에서는 단 한 명도 나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확언하였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저승에서도 사제직의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은총이 한없이 주어짐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받는 영광은 자녀를 잘 키워내는 희생에 기인합니다. 이것이 사제만이 하늘나라 영광을 차지할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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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댈러스에 있으면서 뉴욕에서 왔다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제가 살던 동네에서 왔다는 분을 만나면 분위기가 좋아집니다. 서로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주 가던 공원, 즐겨 가던 식당, 미술관, 공연장 등을 주제로 할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왔다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제가 살던 명동에서 왔다는 분을 만나면 분위기가 더욱 좋아집니다. 명동 근처에는 갈 곳도, 볼 곳도 많습니다. 한옥마을, 남산, 청계천, 경복궁, 대학로, 남대문 시장이 있습니다. 먹을 곳도 많습니다. 광장시장의 빈대떡, 종로의 닭 한 마리, 북창동의 해장국, 명동의 칼국수, 을지로의 골뱅이, 남대문의 갈치조림, 장충동의 족발, 명동의 냉면 집이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주특기’가 있습니다. 운전, 행정, 통신, 공병, 정보, 헌병, 의무, 군종, 보병‘과 같은 주특기가 있습니다. 다른 할 이야기도 많지만 자신의 주특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에서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저는 행정 업무 그 중에서도 동원 예비군에 대한 업무를 보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의 주특기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기도, 선교, 성경, 나눔, 봉사, 성지순례’와 같은 것들이 주특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고, 교회에서 정한 ‘성소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하느님께 추수할 일꾼을 청하여라.”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님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부활 제4주일을 성소주일로 정했습니다. 추수할 일꾼인 ‘성직자와 수도자’가 될 젊은이들을 교회로 초대하자는 의미로 성소주일을 제정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소주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습니다. 제가 5년 동안 교구에서 성소국장으로 사목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신학생을 선발하는 것입니다. 신학생들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교구의 서품식과 성소주일 행사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으면서 기억에 남는 것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3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사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100만 명이 넘게 보았고, 지금도 예비자 교리에서 사용하는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사제’라는 작품을 통해서 사제가 되는 과정, 사제 서품식과 새 사제의 이야기, 다양한 사목의 현장을 담았습니다. 혹 관심이 있으신 분은 유튜브에서 ‘사제’를 검색하면 볼 수 있습니다. ‘구독과 좋아요.’는 사랑입니다. 제가 제작했기 때문에 저도 잠깐 출연합니다.
두 번째는 예비신학생을 위한 기숙사입니다. 신학교 옆에 5층 건물이 저렴하게 매물로 나왔습니다. 교구에서는 건물을 매입했습니다. 건물을 어느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관리국장 신부님은 원로 사목자를 위한 숙소로 사용하자고 하였습니다. 신학교 옆에 있으니 신부님들도 좋아하실 거라고 하였습니다. 청소년국장 신부님은 청소년 사목을 담당하는 신부님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자고 하였습니다. 신학교 옆에는 가톨릭 회관도 있고, 명동과도 가까우니 신부님들도 좋아할 거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예비신학생들 위한 기숙사로 사용하자고 건의하였습니다. 예비신학생들이 신학교에 가까이 있으면 사제성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결정은 추기경님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식사를 마치고 추기경님과 산보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추기경님 저 건물을 어디에 투자하시겠는지요?’ 원로 사목자를 위한 용도라면 과거에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청소년 사목자를 위한 용도라면 현재에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비신학생을 위한 용도라면 미래에 투자하는 하는 것입니다. 추기경님은 어디에 투자하기로 하셨을까요? 맞습니다. 추기경님은 저의 손을 들어 주셨고, 건물은 예비신학생을 위한 기숙사가 되었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난 일입니다.
세 번째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입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아시아 청년대회와 124위 시복식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에서 ‘영성신심분과’를 맡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가 성소국장이었기 때문에 그런 임무를 주었습니다. 저는 124위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을 제작하였고, 시복식에 필요한 자료집을 만들었습니다. 부족한 제가 그런 소중한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봉사자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소국장으로 5년 동안 있으면서 외부로 드러나는 일은 하였지만, 저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로 살아가는 데는 많이 부족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는 것도 많이 부족했습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겸손한 사제가 되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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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11-18: 나는 착한 목자이다
오늘은 성소주일(聖召主日)이며 이민의 날이다. 우리의 성소와 특히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고국을 떠나 이민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다. 오늘 복음에는 착한 목자가 양들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강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 목자의 모습은 이사야의 "야훼의 종"과 같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절)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양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며 양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신다. 또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양식으로 주어 배부르게 하려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분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생명을 내주셨다.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은 착한 목자만 할 수 있다. 그는 항상 이리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심이 없는 사랑을 지닌 목자이다.
여기에 삯꾼이 나온다. 삯꾼은 세상 재물을 더 사랑하는 자들로 목자라고 불릴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현세의 보상을 위해 그들에게 풀을 먹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목자의 자리를 차지하곤 있으나 양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려는 마음이 없는 삯꾼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에 광분하고 영광만 탐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의 것만 추구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추구하지 않는다.”(필리 2,21) 즉 자신의 이익을 찾느라 하느님을 찾지 않는 이들이다. 이들은 누구든지 삯꾼이다. 이들은 자기 욕구가 채워지지 않고, 쓸모가 없다고 느끼면 양들을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12절) 이리는 악령이다. 이리는 어떤 사람은 만취하도록 유혹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탐욕을 불어넣고, 어떤 이는 교만으로 치켜세우고, 어떤 이는 분노로 파멸시켜 양들을 물어 가고 흩어 버린다. 삯꾼에게는 이런 이리에게 저항하고자 하는 어떤 열의도 양들에 대한 사랑도 없다. 그는 오직 눈에 보이는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양 떼가 아무리 크게 다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13절)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14절)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양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이 아버지와 가지고 계신 친밀한 관계와 같은 가까운 관계이다. 우리는 이 아드님과의 관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연결된다. 그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아시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알게 된다. 그분은 당신이 양들을 아시기 때문에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15절) 하신다. 목자는 양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이리들에게 양들을 넘기지 않으셨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양들을 지키셨다. 그분은 양들을 이끌고 생명을 주는 풀밭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16절) 이것은 다른 민족들도 함께 신앙을 고백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우리 바깥에 있지 않고 한 우리에서 한 목자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착한 목자께서 원하시는 하느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목자’ 안에 있으면서 한 목자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래서 한 ‘목자’를 따르게 해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17절)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아드님을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18절)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이 자발적인 것이고, 그분은 당신이 내놓으시고 되찾을 수 있다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당신의 죄의 결과가 아니라, 당신의 의지임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또한 그분이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18절) 하신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18절). 이 명령은 바로 세상을 위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17절) 하셨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는 분으로 아버지의 뜻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이 ‘명령’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온 것이다.
베드로는 구원이 이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양 떼에 베풀어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며,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고 한다. 부활하신 주님은 "생명을 주는 영"(1코린 15,45)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완전한 구원의 모습이 현시점에서부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부활이 될 것이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우리의 성소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이제 진정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주님을 묵상하고, 그 목자 아래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이것이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삶이다. 우리의 성소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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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부활 제4주일의 복음은 ‘착한 목자’에 대한 긴 담화의 결론 부분에 해당합니다. 오늘 복음은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이를 부연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 “나는 착한 목자다.”라는 선언 뒤에는 그 ‘착함’의 이유가 설명되는데,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목숨”(그리스 말 ‘프쉬케’)은 오늘 본문에 여러 차례 등장할 정도로 강조된 단어인데, ‘숨’ 또는 ‘호흡’을 뜻하며, 인간의 영혼, 생명, 활력 등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자기 숨과 영혼을 내주어 상대를 대신 살게 함을 뜻합니다. 그와 반대로 ‘목숨을 내놓지 않는 목자’는 “삯꾼”입니다. 삯꾼은 자기가 살고자 양들을 이용하고 불필요해지면 내다 버립니다. 그가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등장한 “나는 착한 목자다.” 다음에는 ‘앎’에 대한 내용이 소개됩니다. ‘안다’(그리스 말 ‘기노스코’)라는 말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배우는 인지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상대의 본질을 섬세하게 깨달아 이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제2독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를 생각하여 보라고 권고합니다.
특별히 오늘 제1독서에는 작은 반전이 등장합니다. 착한 목자는 사랑하는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만, 동시에 그 착한 목자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십니다. 목숨을 내놓는 목자는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 시기에 착한 목자 본문을 봉독하는 이유입니다.
양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맡겨진 양들을 하나하나 알고 생명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는 것, 그래서 그의 숨이 양들의 숨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 이 ‘착함’만이 목자가 가지는 진정한 힘이며 권위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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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요한 10,11-18)
1) 예수님이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고 믿으려면, 그 전에 먼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라고 믿어야 합니다. 당신이 ‘어떤 구세주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착한 목자’ 라는 말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라는 것을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착한 목자’이든지 아니든지 관심도 없고, 그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착한 목자이신 분’이고, ‘착한 목자이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선(善) 자체이신 분이고, 하느님의 본성은 선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한처음’부터 ‘착한’ 목자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해석할 때,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기 때문에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착한 목자이신 분이기 때문에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해석이 더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2)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은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사랑이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무슨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과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말에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예수님 말씀이 연상되는데, 예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3) “사랑하니까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말과 “사랑하니까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사랑하니까 목숨도 내놓을 수 있다.”라는 말은, 종교나 신앙과 상관없이 세상 사람들도 흔히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로 장담하는 것은 쉬운 일인데, 실제로 그것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 수난 때에 베드로 사도가 바로 그 말을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 그렇게 장담했다가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런 장담이 아닙니다.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려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목숨을 내놓으신 일입니다.>
4) 예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도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3,16-18.4,11-12)
<요한 사도가 “우리도 하느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말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기를 바라시는데, 응답하는 방법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12)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나는 착한 양인가?” 라고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하긴 한데, 나 자신이 ‘착한 양’이 되어서, 내 안에서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이 열매를 맺는 것이 나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고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자꾸만 한눈을 팔고, 옆길로 빗나가고, 세속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아닌가? 나는 정말로 예수님의 ‘착한 양’이 되어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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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한석 사도 요한 신부님]
<삯꾼에게도 필요한 인내>
전쟁의 참화가 프랑스에 드리웠을 때, 유다인 출신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교회 밖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이’를 자처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말로 자신이 좋아한 희랍어 단어 ‘ὑπομονή’(휘포모네, 인내)의 가치를 드러냅니다.
“구원을 실현하는 태도는 그 어떤 활동과도 비슷하지 않다..그것은 기다림, 한없이 지속되면서 어떤 충격으로도 뒤흔들지 못하는 주의 깊고도 충실한 부동성(不動性)이다.”(신을 기다리며, 2015년)
오늘 복음은 목자와 삯꾼을 대비시킵니다. 먼저 목자는 양을 소유한 이입니다. 양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돌봅니다. 양들이 그를 살게 하기에 자신을 돌보듯 양들을 돌봅니다. 그래서 이리의 위협에도 양들 곁에 가만히 머물 수 있습니다. 양과 목자의 목숨은 하나로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삯꾼은 고용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과 양들은 서로 관련이 없습니다. 그는 그저 받은 일당으로 자기 자신만 돌보면 그만입니다.
양은 목자에게는 소중한 존재이지만, 삯꾼에게는 자신의 삶을 꾸릴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인내’하는 태도로 드러납니다. 목자는 양들의 걸음 곁에 늘 함께 있습니다. 자신과 양들은 걸음 폭이 다르고 눈높이가 다르지만 함부로 재촉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인내합니다. 밤을 보낼 집으로 그들을 이끌고, 목을 축일 샘터와 먹이가 있는 풀밭으로 천천히 동행합니다.
양들이 더 살찌고 그들의 털이 더 윤택해지기를 자신의 삶을 담아 희망합니다. 하지만 삯꾼은 기다릴 수도 없고, 인내할 수도 없습니다. 어서 빨리 해가 떨어져 편안한 잠자리로 돌아가 쉬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양이 잘 먹어 살이 찌는 것은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기에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그에게 희망은 자기 자신일 뿐입니다. 하지만 삯꾼에게도 양들은 중요합니다. 그가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잘 돌본 양들을 보고 목자가 줄 품삯 덕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삯꾼에게도 목자와 같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목자를 닮아, 그가 했던대로 양들을 잘 돌보아야만 좋은 일꾼으로 다시 고용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삯꾼은 양들을 잘 돌봅니다. 그리고 양들과 함께 자신의 수고를 알아줄 목자를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부활 4주일인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이 날, 목자의 임무를 맡은 이들을 생각합니다. 선교사와 수도자, 성직자들은 그들의 일로 목자이신 주님을 대신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목자처럼 인내하고 기다리며, 희망하기를 기도합니다. 양들 곁에서 그들과 함께 걷기를 바랍니다.
비록 삯꾼처럼 주인에게 고용된 이들일 뿐이지만, 목자의 충실함이 그들을 감화시켜 그들도 목자와 같은 일을 하기를 원합니다. 양들 속에서, 누구보다 간절히 목자를 기다리며 인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침내’ 모두가 한 우리 안에 같이 모일 때, 그들이 찾고 또 살찌운 양들 곁에서 목자와 함께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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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양요왕 사도 요한 신부님]
<"관심과 기도">
+찬미예수님
오늘은 제61차 성소주일입니다. 성소(聖召)란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이라는 뜻으로 축성생활, 사제직, 혼인, 심지어 독신으로도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을 받아들여 세상에서 그분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올해 저는 사제생활 31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신자들은 성소주일이 다가오면 신부님은 어떻게 사제가 되었어요? 어떤 부르심이 있었나요?라는 등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저 하느님의 신비일 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린이 복사를 하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지만 당시에는 신학생이라든가 신학교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없던 관계로 그저 사제의 모습이 좋아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학생 때는 아예 사제가 된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갑자기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부터 부모님께서는 자녀들 중 사제 수도 성소가 있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기도를 하셨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포기할 무렵 제가 신학교에 가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뻐하면서도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그 후 저는 부모님의 기도와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사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신학생 시절 많은 유혹으로 인해 신학교를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때마다 부모님과 신자들의 기도 덕분에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에도 부모님, 가족, 신자들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느끼고 있습니 다. 저의 마지막 소망은 제의를 입고 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신자들의 기도가 더욱 필요함을 알고 있으며 감히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이 자리를 통해 다시금 신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소 주일은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우리는 성소 계발을 위해 더욱 많은 관심과 기도를 바치면서 하느님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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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진우섭 폰시아노 신부님]
<예수님의 ‘매력’>
교회는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을 ‘성소 주일’로 지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도구로 살아가기를 청하며 그들의 ‘꿈’을 기억합니다.
각 교구와 수도회는 ‘성소자의 급감’을 실감하며 걱정의 목소리를 내놓는 현실입니다. 그에 대한 수 많은 원인을 여러 가지로 제시, 분석하며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이런 와중에 저는 가장 완벽한 해답을 프란치스코 교종의 ‘복음의 기쁨’에서 발견합니다. ‘신앙 전수를 위한 새로운 복음화’라는 단락 14항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의무를 강요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사람,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 주는 사람, 그리고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매력’ 때문입니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사회 운동의 한 복판에서 시민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엄청난 ‘매력’을 발견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원했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 역시 많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개인적 희생과 헌신이 바탕이 되기도 했지만, 시민들은 교회를 지탱하는 ‘예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대도, 교회도 변할 수 있지만, 오직 하나 변하지 않는 건 ‘예수님이 보여 주신 매력’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보았을까? 그것은 기쁨, 아름다운 전망, 풍요로운 잔치에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배려입니다. 한 마디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 ‘매력’을 발견한 이들이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수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겠다고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주사위(주님을 사랑하고 위하는 청년들의 모임)’라는 공소 찬양 봉사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매력을 제대로 느낀 청년들?) 이들이 봉사 때 불렀던 노래 중에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있습니다. 이 노래 중 “그대 나섬은 출가요, 새로 남, 이별, 아픔, 십자가 길. 그 분의 부름과 그대의 선택인 것, 사랑의 길인 것을. 두려워 마오. 그대여, 주저 마오 무너져도 놓지 마오.”라는 부분이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제성소, 수도성소, 가정성소’라는 모든 길에서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갈릴래아 호수라고 그대 바램처럼 잔잔하지 않고, 가르멜산 오르는 길은 너른 산책길이 아닌 것을, 넘어져도 임의 자락 놓치지” 말고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다른 무엇도 아닌, 예수님의 ‘매력’을 풋풋한 향기로 선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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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얼마 전,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습니다. 국민의 봉사자, 일꾼을 뽑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본인만 열심히 선거 운동을 해서 당선되었을까요? 선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 국회의원 후보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을 한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습니까? 도와준 사람이 아닌, 그저 국회의원 한 사람만 알 뿐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자기를 모든 국민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자기 역할에서 최선을 다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음 그 자체로 만족합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중요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 동네 치안을 담당하시는 분, 마트에서 계산을 도와주는 분들 역시 중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름도 아니 얼굴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 중요한 사람들로 인해 편하게 지금을 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리에서 중요한 자기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사랑을 그리고 자기의 헌신을 몰라 준다고 억울해하고 화내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또 남들이 나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 주길 바라면서 실천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자체로 만족하며 행동하는 사람만이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입니다.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한 날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를 계발하고 육성하는 일에 꾸준한 기도와 필요한 활동으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면서, 착한 목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즉,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묵묵하게 수행하셨습니다. 목자의 참된 요건은 단순히 양 치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양들에 대한 관심과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랑 그리고 양 떼의 주인에게 충실한 것이 착한 목자의 자질입니다.
성소는 단순히 사제 성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성실하게 사는 삶이 바로 성소에 부합하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 속하는 양이 되어 자기 성소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충실한 양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성소를 다시금 생각하고, 자기 자리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를 떠올리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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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착한 목자이시고 우리는 양입니다. 그리고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스스로 내놓는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성소(聖召)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부르십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자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 중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하느님 자녀에로의 부름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소’ 하면 성직자나 수도자의 부름만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성직자, 수도자 이전에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 이전에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기 부름을 받은 대로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삶을 살아야 하고 결혼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혼인 안에서 가정을 꾸리고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성소는 더 높고 낮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양들을 알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이웃을 위한 희생, 봉사에 한몫을 다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부름입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의 양 떼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그렇게 할 때 그 양도 목자를 알게 되고 또 그의 음성에 기쁘게 달려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 반가워야지 부담스러우면, 안 되겠습니다. 부담스러우면 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왕이면 반가운 목소리, 기다려지는 음성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만큼, 나도 주님을 알기에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모르면 그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 안에서, 또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알고 서로의 음성에 귀 기울여 주는 넉넉함이 그 구성원임을 확인해 줍니다. 한 주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위한 헌신과 희생, 봉헌의 삶을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이 나와야 영적 풍요로움에 도움이 되느니만큼 특별 성소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 공동체에서도 가까운 시기에 성직자 수도자 성소에 응답할 수 있는 젊은이가 나오길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는 고유한 생활 신분에서 나름대로 작은 방식으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희망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직자는 “복음 선포를 위하여 자신을 봉헌하고,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성찬의 빵과 함께 자신을 쪼개어 나누며,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모든이에게 드러냅니다.”(프란치스코교황)
저는 누가 신학교 입학의 동기를 물으면 ‘오기(傲氣)로 갔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께 지나가는 말로 “신학교 갈까?” 하고 던져놓은 것이 어머니에게는 큰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저에게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서 친구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뜸 “너 신학교에 가야 하겠니? 신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께 효도 해야지.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 어머니하고 저의 어머니하고 그러셨답니다.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 실은 그 여자 친구보다 더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어쨌든 그 말씀을 듣고 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신학교 갈까?’가 아니라 “어머니, 저 신학교 가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반대는 시작되어 “신학교 가면 학비는 물론 용돈도 주지 않을 것이고 너와 나는 끝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기가 생겨서 “그래도 갑니다” 하고 버텼습니다. 그때 후원자가 생겼습니다. 바로 위 누나가 공무원이었는데 학비를 마련해주겠다고 제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때 누나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의 안배였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원서를 준비할 때가 되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본당신부님께서 추천서를 써 주실까? 실은 본당을 떠나 공부하였기 때문에 신부님을 잘 몰랐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어쩌나?
그런 가운데 시골 공소를 방문하신 테오필라 수녀님의 “하느님의 뜻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힘들게 하지 말고 기쁘게 보내라”는 말씀에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 입학할 때는 학비도 살림살이도 모든것을 어머니가 준비해 주셨습니다. 신학생 신분으로 있을 때 여자에게 전화만 오면 걱정하시고 신부가 되어서도 자나 깨나 걱정하셨습니다. 이놈이 끝까지 잘 살아야 할 텐데…그러면서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시면서 꼬박꼬박 졸기도 하시고, 그래서 묵주기도 한 번을 몇 시간을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도 나오고…그냥 주무시라고 해도 상관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당신이 할 것은 다 해야 한답니다. 졸음을 지적하니 자존심이 상하셨나 봅니다. 이런 어머니의 기도가 저를 여전히 지켜주었고 이제는 신부로 33년을 살았습니다.
한번은 여자 신자 분이 옆자리에 앉으신 것을 보고 ‘보기 좋지 않다’. ‘뒤를 돌아보지 마라.’고 편지를 쓰셨습니다. 미국 사목을 할 때 한번 편지를 받았는데 ‘공부할 때 용돈을 제대로 주지 못한 게 가슴이 아프고 신학교 간다고 할 때 반대한 것이 안타깝고 면목이 없으시다’고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신부님 생각하면 한없이 기쁘다. 앞날을 보고 사는 것이 인생이니까 어려움을 잘 견뎌라. 집 걱정, 어미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하느님의 부르심은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서 잘 부추겨 줘야 하고 어떤 사람은 오기가 생기도록 해 주어야 하고요. 사실 ‘제가 신학교 갈까?’ 하고 얘기한 것도 시골 공소 회장님이 “너는 신부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시골 공소에 어울리는 4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시집가고 하나는 수녀가 되고 둘은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구보다도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한마디 말이 귀한 열매가 맺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응답은 나의 몫입니다. 하느님은 부르시고 나의 협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젊은이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참된 목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꺼이 선택하시길 기도합니다. “어느 곳에서 살아가고 있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일에 투신합시다. 투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집시다.”(프란치스코 교황).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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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지녔는가?>
요한 10,11-18 (나는 착한 목자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받은 명령이다.”
<나는 지녔는가?>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버림받은 벗들의
짓눌린 속 볼 수 있는
착한 눈
나는 지녔는가?
서러운 벗들의
신음소리 들을 수 있는
착한 귀
나는 지녔는가?
주저앉은 벗들에게
희망을 속삭일 수 있는
착한 입
나는 지녔는가?
쓰러진 벗들을
정성스레 일으킬 수 있는
착한 손
나는 지녔는가?
외로운 벗들에게
기꺼이 달려갈 수 있는
착한 발
나는 지녔는가?
아무 것도 아닌 벗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착한 마음
죽어가는 벗들을 살리려
목숨 내놓을 수 있는
착한 삶
나는 지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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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은 부활 제 4주일이며 성소주일입니다. 성소라는 것은 거룩한 부르심,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강론을 시작하며 저의 사제성소를 떠올려 봅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께서는 제가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셨고 저 역시 그에 동의해 자연스럽게 사제의 길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성소의 첫 위기는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삭막한 남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의 유일한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저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이전까지 몰랐던 이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제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았습니다. 또한 그 시절 저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는데, ‘소설가’라는 꿈이었습니다.
평소 책과 글쓰기를 좋아했던 저는 각종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게 됐고 그 덕에 소설가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이성에 대한 두근거림과 사소하긴 하지만 언뜻 느껴지는 무언가에 대한 재능. 장래 희망이 바뀌는 것은 이 둘 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리하여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접은 채 새로운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머니께서는 제가 미처 상상할 수 없던 어마어마한 딜을 하셨는데, 예비 신학교에 나가기만 하면 오천 원의 용돈을 더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오천원은 꽤나 큰 돈이었고 저는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나가게 된 예비 신학교. 그곳에서 만난 저의 담당 신학생은 문예창작과를 그만두고 신학교에 진학한 분이었습니다. 유난히 문학에 목말라있던 저와 그 신학생은 많은 대화가 통했고 결국 저는 그에게 푹 빠져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다시 갖게 되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학하게 된 신학교. 평온하게 사제가 될 꿈을 꾸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 길 역시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미련이 남은 꿈이 저의 마음을 현혹했고, 나는 왜 일반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을까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신학교의 공부도 기도도 의미 없게 느껴졌고 사제의 삶은 외롭고 힘들어만 보였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 타인을 돕는 삶은 굳이 사제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신학교에서 탈출해야 하나, 뒷목을 잡고 쓰러지실 어머니는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제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성소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몰랐던 시간들. 당신을 피해 달아나려는 저를 끝까지 붙들어주시고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사랑. 이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 너무 죄송하고 감사해서 사제가 되던 날 펑펑 울었던 기억도 납니다.
성소 주일을 기념하는 미사를 드리고 있는 오늘, 저의 성소 이야기를 들으셨지만 사실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는 저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은 사제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결혼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혼인 성소를 받았고 어떤 이는 독신의 삶으로 천상의 삶을 증거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를 통해 세상에서 죽은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길이며, 전적으로 다른 이를 돕기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학창시절 저의 삶이 그러했듯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고 하느님의 부르심보다 더욱 더 달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이 도처에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들 뿐 아니라 미움, 원망, 시기, 질투와 같은 많은 감정의 유혹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던 성소의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저는 종종 이 말씀을 기억하며 제 삶의 의미를 되찾곤 합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피상적이고 덧없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과 숭고한 목적과 근본적인 선택을 하려는 갈망. 곧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이들을 섬기고자 하는 갈망을 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과 아낌없는 투신의 길, 힘들지만 용기가 필요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길에서 여러분은 섬김의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대하여 더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선택받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성소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매우 특별함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선 아무나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믿고 사랑하고 기대하시는 자를 당신의 협조자로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성소 주일을 맞이해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요청에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지만 우리는 종종 다른 여러 가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하느님의 목소리를 지나치곤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오늘 복음의,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길, 희생의 길로 부르시는 이유는 우리가 고통스럽길 바라셔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며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의 누구도 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 바로 그분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 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제가 성소를 지키며 나아갈 수 있음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선을 행했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이 있다면 그마저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이라는 사실이 매번 부족한 저를 일으켜 세웁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를 사랑의 길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다시금 생각하며 그 사랑 안에 머무는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음성에 기쁘게 응답하는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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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聖召)의 여정>
-희망의 순례자-
“착한 목자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주님은 말씀으로 하늘을 여셨네. 알렐루야.“(입당송:시편33,5-6 참조)
오늘은 제61차 성소주일이자 일명 착한목자 주일이기도 합니다.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로서 불림 받는 우리 모든 신자들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는 절호의 날이기도 합니다. 새삼 성소주일에 확인하는 바,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인, 우리 삶의 모두인 착한 목자 예수님입니다. 문득 제가 좋아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얼마나 멋진 하느님 아버지의 정의인지요! 순간 제 좋아하는 열정넘치는 농부 자매 레지나가 생각납니다. 착한목자이자 농부이신 아버지를 닮아 평생 민초(民草)들의 목자로 말씀의 농부로 일관하신 예수님이요 저도 묵묵히 “말씀의 농부”가 되어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 우보천리(牛步千里) 우직하게 강론을 씁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라는 옛 어느 대선후보자의 말처럼 예수님도 그러했을 것이며 저 또한 초지일관 그런 심정입니다. 오늘 주님의 수제자이자 제1대 교황인 사도 베드로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의 확신에 넘친 말씀이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일깨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1-12)
바로 이런 착한목자 예수님께 불림받은 우리 믿는 이들이요, 예수님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기에 저는 서슴없이, “예수님은 언제나 영원히 나의 사랑이자 운명이다!” 고백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참으로 착한목자 주님을 따라 사는 모든 이들의 고백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착한목자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사람들이라면 참으로 초연한 자유를 누릴 것이며 다음 옛 어른의 말씀도 그대로 공감할 것입니다.
“가난은 쪼들리는 처지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남들과 비교하는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된 상태다.”-다산
“도에 뜻을 두면서도 누추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선비와는 함께 도를 논할 수 없다.”-논어
이렇듯 도(道)자체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듯 가난을 사랑하는 참 선비같은 참 성소자들인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
바로 이런 우리 성소자들의 빛나는 모범이 현재의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입니다. 말그대로 교황 재위 11년 동안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로서 일관된 삶입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었을 때 금과옥조의 말씀들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역사가들에게 교황님은 인류(humanity)의 종들이자 전문가들이 될 것을 요청하다.”
어제 교황님을 찾은 역사가들에게 주신 요지의 말씀입니다.
“평화의 장인(artisans of peace)이 되십시오.”
엊그제 교황님을 방문한 이태리 5천명의 소년소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목자들이 되십시오.”
어제 교황님을 찾은 미래의 사제들인 신학생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교황 비오 7세(1742-1823)는 참으로 힘든 시대 소통의 달인이셨다”
역시 어제 비오 7세에 관한 요지의 귀한 말씀을 나눠 주셨습니다.
시간 되는대로 위 원고들 출력하여 읽어보려 합니다. 하루하루 교황직의 성소에 한결같이 충실하신 88세 고령의 교황님지만 정신은 하느님을,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아 영원한 청춘입니다. 젊음은, 영적건강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찾는 열정에, 사랑에 있습니다. 교황님의 제41차 성소주일 담화문도 공감, 감동 만점입니다.
-“성소주일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아버지께 거룩한 성소의 선물을 청하는 기도에 특별히 봉헌된 날입니다. 기도는 희망의 첫 번째 힘입니다. 여러분의 기도하면 희망이 자라나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저는 기도가 희망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편에 희망이 존재하지만, 그 희망에 이르는 문은 나의 기도로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례자입니다.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순례는 목적없는 여행이나 정처없는 방황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날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곧 평화와 정의와 사랑 안에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걸음을 내딛으려고 노력합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며 이를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하여 한걸음 한걸음 내딛고 있기에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입니다.
모든 성소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희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성취된 구원은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희망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이런 희망에 힘입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도전들에 맞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궁극적 소명을 날마다 미리 맛봐야 합니다. 바로 지금도 우리는 일치, 평화, 형제애를 향한 하느님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구도 이 부르심에 배제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고유한 생활 신분에서 나름대로 작은 방식으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희망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잠에서 깨어납시다. 우리가 저마다 교회와 세상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성소를 찾고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가 될 수 있도록, 무관심을 뒤로하고 우리 스스로를 가두어 놓곤 하는 감옥의 문을 열어젓힙시다. 삶에 대한 열정을 지닙시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가신 것처럼, 우리 또한 기쁨의 전령이자 새 생명의 원천, 형제애와 평화의 장인이 될 수 있도록 일어나 희망의 순례자로서 길을 나섭시다.”-
수제자 베드로의 후계자 다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옥같은 성소주일 강론의 핵심부를 인용했습니다. 우리 모두 희망의 순례자, 평화의 건설자로 각자 불러 주신 삶의 자리에서, 살아 있는 그날까지 “성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소의 여정의 중심에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신 착한목자가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다음 복음 말씀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나는 착한목자다. 착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나는 착한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짧은 말마디이지만 심금을 울리는 전율케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착한목자 예수님을 사랑하고 알아 닮아가는 성소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희망과 평화의 성소 여정은 바로 자발적 사랑의, 끊임없는 비움과 겸손의 순례여정이자 순교여정임을, 날로 착한목자 예수님과 더불어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깊어지는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마침내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될 것이다.”
온 인류를 품에 안은 아버지의 마음을 대변하는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아 부단히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함을, 또 세상을 향해 활짝 교회의 문을 열어야 함을 배웁니다. 착한목자 예수님 눈에는 온 인류가 하느님의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의 말씀이 우리를 격려하며 성소의 여정에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입니다.”(1요한 3,1-2참조)
바로 언젠가 뵈올 하느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마침내 그분을 닮아가는 성소의 여정이 끝날 때 주님과의 반가운 만남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니 성소자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우리 삶의 자리에서 기쁘게 감사하며 희망의 순례자로 평화의 건설자로 살아갑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렇게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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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좋으신 목자의 착한 양들?>
저는 가능하면 우리말을 쓰자는 주의자인데 오늘 복음의 목자에 대해서만은 한자어를 쓰자고 주장합니다.
지금 우리의 번역은 주님을 “착한 목자”라고 번역했는데 한자어 “선한 목자”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입니다.
선한 목자 안에는 착한 목자와 좋으신 목자의 두 가지 뜻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착한 목자라고 번역하면 아버지 보시기에 착한 아드님만 강조되고, 우리에게 참 좋으신 주님이라는 측면은 빠져 있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께는 착한 아들이시지만 우리에게는 좋으신 목자시지요.
이는 마치 맛이 좋은 과일을 맛이 착한 과일이라고 번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 ‘당신은 제게 참 좋은 목자십니다.’라고 해야지, ‘당신은 제게 참 착한 목자십니다.’라고 해서는 안 되지요.
어쨌거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목자가 되신 분이시고,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께로 책임지고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목자는 삯꾼과 다르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삯꾼은 돈을 벌려는 사람 곧 돈에만 관심이 있지 양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어서 이리로 인해 양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때 자기 목숨을 바쳐 구할 마음이 없습니다.
삯꾼의 관심 없음에 대해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당신 목숨을 바쳐 우리를 살리시는 구원자시고,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는” 유일무이한 구원자십니다.
사실 우리의 부모가 나를 아무리 사랑하셔도 나를 구원하지 못하시고, 아무리 내가 나를 사랑해도 나의 구원에 너무도 철없이 무관심하지만 주님만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이렇게 철딱서니 없는 나를 구원하시려고 불철주야 애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 구원자이시기에 당연히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여기서 주님께서 나를 아심은 나를 속속들이 아심이고 그래서 관심과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그 결과입니다.
나의 죄도 속속들이 다 아시지만 나의 약함도 아시고 나의 고통도 다 아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목자는 우리를 잘 그리고 다 아시는데 우리는 이런 주님을 알고 있고 잘 알고 있습니까?
양들도 당신을 안다고 하셨는데 우리도 주님을 잘 아느냐 그 말입니다. 주님을 잘 그리고 다 알지 못하더라도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것만이라도 아느냐 그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으신 목자인데 우리는 그분의 착한 양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참 좋으신 목자인데 나는 길잃은 내 이웃 양들에게 무관심하니 좋은 목자도 아니고 좋은 양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좋으신데 나는 착하지 않음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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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
<착한 목자!>
오늘 복음(요한10,11-18)은 '착한 목자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10,11)
부활 제4주일인 오늘은 '제61차 성소 주일'입니다.
성소 주일은 1964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7-38)는 말씀에 따라 제정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聖召)'는 다양합니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믿는 이들의 모든 자리가 성소'입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에서 '특별성소, 곧 사제, 수도자, 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요즘 사제, 수도자, 선교사의 길을 가려고 하는 성소자의 수가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저출산 등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교회와 오늘 복음 안에서 특별성소가 처한 위기를 바라봅니다.
그 이유는??
믿는 이들이 신앙의 본질인 부활의 기쁨을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별성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들이 부활의 기쁨을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야 할 부활의 기쁨'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내 것을 내놓는 것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내 것이 비워지는 기쁨'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특별성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이들의 약함, 곧 그들의 '개인주의'와 '정체성의 위기'와 '열의가 식어 있음'을 지적하십니다.(78항 참조)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은 사제, 수도자, 선교사들이 많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목자의 존재 이유와 사명'은 '너를 위해 죽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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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9wBQKPC9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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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 11)
연두빛
새순이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첫마음으로부터의
첫시작을 되새기는
소중한 사랑의
성소주일입니다.
가장 귀한
부르심과
가장 귀한
따름의
잊지 못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매순간이
빛나는
선택이며
빛나는
감사였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그만큼
마음가짐이
중요한
성소의
여정입니다.
자기를
살리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는
착한 마음을
주시고
착한 양은
착한 마음을
냅니다.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착한 목자와
착한 양의
만남입니다.
우리의
매 순간은
이 특별한
만남으로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시며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십니다.
성소의 여정은
두 손을 모으는
기도의 여정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저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착한 목자
앞에서
묻고 답하는
은총의 성소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확신을 가지고
걸어가야 할
가장 소중한
성소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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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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