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우 시인 웃는 연습, 2017, 창비
(백석문학상 수상 시집)
* 박성우(1971년 ∼) 전북 정읍 출생.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거미〉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면서 아동문학을, 2009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저작 및 출판 지원 사업에 청소년시가 당선되면서 청소년문학을 시작.
시집
2002년거미(창비)
2007년가뜬한 잠(창비)
2011년자두나무 정류장(창비)
2017년웃는 연습(창비)
청소년시집
2010년난 빨강(창비)
2017년사과가 필요해(창비)
동시집
2008년불량 꽃게(문학동네)
2016년 박성우 그림동시집1우리집 한 바퀴(창비)
2016년 박성우 그림동시집2동물학교 한 바퀴(창비)
어린이책
2017년아홉 살 마음 사전(창비)
2018년《아빠, 오늘은 뭐하고 놀까? -열 살 딸, 시인 아빠랑 세상책 읽기》(학교도서관저널) 박규연 글 그림, 박성우 사진
그림동화집
2012년암흑식당(샘터)
산문집
2015년박성우 시인의 창문 엽서(창비)
수상
2007년 제25회 신동엽창작상
2008년 제3회 불꽃문학상
2012년 제7회 윤동주문학상 젊은시인상
2013년 제1회 천인갈채상
2018년 제20회 백석문학상
카드 키드
카드가 사준 정장을 입고
카드가 사준 출근길은 벅차다
어쩌다 카드가 사주는 저녁은 근사하고
카드가 큰맘 먹고 들여준 침대는 근사하다
카드가 현금서비스 해준 축의금을 들고 다녀오는
직장동료의 결혼식은 처연하게 찬란하다
입사 삼년 차 카드 키드,
야근에 지쳐 귀가하는 밤은
카드가 카드론으로 얻어 준 원룸이 있어 아늑하다
카드 키드가 되기 위한 지난날은 아름다웠다
스펙에게 내준 대학생활은 교양 없이 품위 있었고
자기소개서 속으로 들어간 스펙은 뻔뻔하게 자랑스러웠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진 입사시험,
처음으로 면접 통보를 받던 날은
팬파이프 같은 빛이 눈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카드가 사주는 패스트푸드는 먹을 만하고
카드가 지켜주는 직장생활은 아직 견딜 만하다
정기적금을 해약해 카드에게 이체하고 남은 돈,
지방에 사시는 양친께 부쳐드리는 손은 대견하다
월급날 받은 급여는 어김없이 카드에게 옮겨간다
‘언제 취직할 거니’를 지나 ‘언제 결혼할 거니’까지
기적적으로 와 있는 카드 키드, 카드는
희망복근을 키워보는 건 어떠냐며 헬스클럽을 권유한다
쇼핑백 출근
입 다물고 살든
입 벌리고 살든
속 비우고 살든
속 챙기며 살든
언제 끈 떨어질지 모른다
마흔
거울을 본다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 거울을
보고 있는 사내를 본다 광대뼈가 불거져나온
마흔의 사내여, 너는 산다 죽을 동 살 동 살고 죽을 동 쌀 똥 산다 죽을 똥을 싸면서도 죽자 사자 산다 죽자 사자 살아왔으니 살고 하루하루 죽은 목숨이라 여기고 산다 죽으나 사나 산다 죽기보다 싫어도 살고 죽을 고생을 해도 죽은 듯이 산다 풀이 죽어도 살고 기가 죽어도 살고 어깨가 축축 늘어져도 산다 성질머리도 자존심도 눌러 죽이고 산다 죽기 살기로 너를 짓눌러 산다 수백번도 넘게 죽었으나 죽은 줄도 모르고
늦은 밤 거울 앞에 앉은 사내여, 왜 웃느냐 너는 대체 왜 웃는 연습을 하느냐
짜장면과 케이크
마을버스 정류장 모퉁이에 구둣방이 있다
한사람이 앉을 수는 있으나
누울 수는 없는 크기를 가진 구둣방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구둣방에 갔을 때였다
구둣방 할아버지는 수선용 망치로
검정 하이힐 굽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구둣방 귀퉁이에
짜장면 빗 그릇 세개가 포개져 놓여 있었다
어, 이거? 구둣방 할아버지는
위쪽 빵집 젊은 사장과
아래쪽 만두가게 아저씨가 와서
짜장면 송년회를 해주고 갔다고 했다
구둣방이 좁아 둘을 서서 먹고
구둣방 할아버지는 앉아서 먹었단다
구둣방 왼편에 놓인 서랍장 위에서
케이크 한조각이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검정 구두약 통 두개와
한뼘 반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 한조각,
누가 놓고 간 거냐고 묻지 않아도
누가 놓고 간 것인지 알 수 있는
아내의 구두를 구둣방에 맡긴 나는
빵집으로 가서 빵 몇 개를 골라 나왔다
아내의 구두를 찾아갈 때는
만두가게에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세밑이 따뜻해져왔다
넥타이
늘어지는 혀를 잘라 넥타이를 만들었다
사내는 초침처럼 초조하게 넥타이를 맸다 말은 삐뚤어지게 해도
넥타이는 똑바로 매라, 사내는 와이셔츠 깃에 둘러맨 넥타이를 조였다 넥타이가 된 사내는 분침처럼 분주하게 출근을 했다
회의시간에 업무 보고를 할 때도 경쟁 업체를 물리치고 계약을 성사시킬 때도 넥타이는 빛났다 넥타이는 제법 근사하게 빛나는 넥타이가 되어갔다 심지어 노래방에서 넥타이를 풀었을 때도 넥타이는 단연 빛났다
넥타이는 점점 늘어졌다 넥타이는 어제보다 더 늘어져 막차를 타고 귀가했다 그냥 말없이 살아 넌 늘어질 혀가 없어, 넥타이는 근엄한 표정으로 차창에 비치는 낯빛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넥타이를 잡고 매달리던 아이들은 넥타이처럼 반듯하게 자라주었다
귀가한 넥타이는 이제 한낱 넥타이에 불과하므로
가족들은 늘어진 넥타이 따위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행복한 옥신각신
집이 주구 지시오? 집이 누구 지시오?
바깥일 보고 잠깐 쉬러 집에 오니,
아흔 넘은 가춘할매가 나를 찾는다
집이는 밤낭구랑 대추낭구 읎지?
멫번을 옥신각신하다가
밤 여남은개와 대추 한알만 받고
가춘할매 겨우겨우 돌려보낸다
콩
유월 여드레, 좀 늦긴 했으나
콩을 대여섯알씩 텃밭에 묻었다
들락거리는 멧비둘기가 많아
콩을 한두알씩 더 보태 심고는
텃밭 위 이팝나무와 화살나무 사이에
대나무 장대 걸고 빨래를 걸어두었다
빨래는 성실한 허수아비가 되어
멧비둘기가 오는 것을 몇날이나 막았다
콩은 떡잎을 벌리는가 싶더니
줄기와 새순을 다부지게 밀어올렸다
올해는 콩농사 제법이겠구나,
밤마다 고라니가 내려와 연한
콩 순만 골라 똑똑 따 먹고 갔다
순을 죄 뜯긴 콩 줄기는
그야말로 볼품없이 앙상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어찌할 방법은 없었으나,
장맛비가 지나갔고 못 봐주겠던 콩은
곁줄기를 두배로 뻗어 무성해졌다
어느 폭설 밤에 고라니가 찾아와
콩 순을 따 먹은 게 아니라 밤마다
콩 순지르기를 하고 간 거라고, 끄먹끄먹
밀린 품삯을 내놓으라 하면 나는
콩을 몇됫박이나 퍼주어야 하나?
금수양반
가죽나무 그늘 질겨지는 오뉴월 마당에 든다
한동안은 일터에서 돌아와 쉬는 집이었으나 이제는 근근이
시 짓는 시늉 할 때나 쓰는 여덟평 조금 넘는 집,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며 살다가 두어달 만에야 들어보니 풀들이 자기 앞으로 무단 등기이전을 해갔다 마당 풀들에게 집을 뺏긴 나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물러설 수밖에 없다
책 두어권 겨우 빼서 뒤로 물러섰던 나는 안되겠다 싶어 예닐곱일 뒤에 다시 풀들의 집을 찾는다 한데, 누군가 마당 풀을 야무지게도 깎아놓았다 화장실 바깥벽과 가죽나무 둥치 타고 오르던 환삼덩굴까지 말끔하게 걷어내었다 수소문해보니 금수양반이란다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사는 집이 어딘지도 모르는 금수양반, 인근 면 소재지로 나가 돼지고기 두근 끊고 막걸리 세병 사서 금수양반 집을 물어물어 찾아간다
핫따매 벨 것도 아닌디 머덜라고 이런이야, 몇해 전 늦봄에 소로 쟁기질할 때 내가 식혜 캔 음료를 사다 준 게 고마워서 예초기로 풀을 쳐주었단다 글고 자네는 시인이잖여, 무단으로 등기이전을 해간 오뉴월 풀에게서 집을 찾아준 금수양반은 커피라도 한잔하고 가라며 손을 잡아끈다
초저녁 막걸릿잔 기울이다 스무살도 더 차이 나는 성님을 새로 얻게 된 나는, 금수성님 배웅받으면서 집으로 간다
다정다한 다정다감
내 어머니도 ‘김정자’고 내 장모님도 ‘김정자’다
내 어머니는 정읍에서 정읍으로 시집간 김정자고
내 장모님은 봉화에서 봉화로 시집간 김정자다
둘 다 산골짝에서 나서 산골짝으로 시집간 김정자다
어버이날을 앞둔 연휴 아까운 터에
봉화 김정자와 함께 정읍 김정자한테로 갔다
봉화 김정자는 정읍 김정자를 위해
간고등어가 든 도톰한 보자기를 챙겼다
정읍 김정자는 봉화 김정자를 위해
시금시금 무친 장아찌를 아낌없이 내놓았다
정읍 김정자는 봉화 김정자 내외에게
장판과 벽지를 새로 한 방을 내주었으나
봉화 김정자는 정읍 김정자 방으로 건너갔다
혼자 자는 김정자를 위해
혼자 자지 않아도 되는 김정자가
내 장인님을 독숙하게 하고
혼자 자는 김정자 방으로 건너가 나란히 누웠다
두 김정자는 잠들지도 않고 긴 밤을 이어갔다
두 김정자가 도란도란 나누는 얘기 소리는
아내와 내가 딸과 함께 자는 방으로도 건너왔다
죽이 잘 맞는 ‘근당께요’와 ‘그려이껴’는
다정다한한 얘기를 꺼내며 애먼 내 잠을 가져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이른 아침,
한 김정자는 쌀 씻어 솥단지에 안치고
한 김정자는 화덕불에 산나물을 삶고 있다
오래된 습관
지난 초겨울, 별다른 기별 없이
시골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였다
하이고 밥 없는디 어쩐다냐,
노모는 멀쩡한 싱크대 수도 놔두고
마당 수돗가로 후다닥 나와
찬물로 찰찰, 쌀을 씻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