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rite ; Esperanto
■ opening date ; March 14th, 2015
■ e-mail ; esperanto.ms@hanmail.net
02
카멜은 얼마 전 손님이 두고 간 석간신문을 방으로 가져갔었다. 방향제 용도로 쓸 말린 꽃잎을 으깨는데 필요해서 침대 위에 펼쳐둔 뒤 목욕을 하고 나와서야 1면에 실린 기사를 보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남서부의 렌프루 타운에서 시작된 연쇄살인은 아직 범인을 잡지 못해 경찰들이 애를 먹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는 물론 사지가 널브러진 피해자의 사진은 무척 노골적이고 괴기스러웠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카멜은 몇 번쯤 서늘해진 목덜미를 쓸어내리곤 했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 대 후반의 젊은 여성을 위주로 유괴하는 살인범은 무차별적인 학대를 가한 뒤 들짐승에게 물려 죽이는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있으며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는 지능범이라고 했다. 또한 시체는 항상 예배당이나 교회 근처에 버려둔다고 했는데 세간에선 일말의 죄책감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거니와, 시신의 회손 상태로 보아 죽인 후에도 피해자를 능욕하기 위함이라는 말도 했다. 경찰 측의 끈질긴 수사 끝에 한 달 전 4명의 용의자가 색출됐다고 했지만 여섯 건의 연쇄 살인에 대한 각각의 알리바이가 증명됨으로써 단 한 사람도 구속되지 않았다고 기사화 되어 있었다.
“자리가 불편한가 보군.”
마주 앉은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멜은 신문에서 보았던 살인사건을 생각하느라 자신 앞에 새로운 찻잔이 놓여있다는 것도 나중에 알아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을 향해있는 잿빛 눈동자가 가끔씩 황금빛으로 번뜩이는 착각이 일었다. 도저히 마주보고 있을 자신이 없던 지라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되도록이면 목소리를 들려주었으면 해.”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왕래하던 사이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한 달, 혹은 일주일 전, 심지어 어제 밤에도 함께 저녁식사를 한 사람처럼 말이다.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고 입술은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자꾸만……. 자꾸만 연쇄 살인자의 수법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그의 입술 사이로 번뜩이던 송곳니가 오버 랩 되었다. 이대로 있다간 새로 대접 받은 찻잔마저 깨버릴 것 같았다. 카멜이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마만이지, 10년?”
공식적으로 따지면 10년. 그러나 비공식적인 만남이 있었던 1년 전의 일을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하긴 양부모의 장례식 때 그를 본 건 카멜 혼자였다. 멋대로 뛰어대는 심장을 움켜쥐고 나무 뒤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있었으니까. 카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모님 장례식 때 뵈었어요. 그땐 너무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눈썹을 치켜 올린 뒤에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죽은 자를 애도하는 일은 영 취미가 없지만 갚을 빚이 있어서 마지막 호의를 보였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카멜 이외의 사람에겐 전혀 관심 없는 말투로 일관했다.
“그보다 천만다행이야. 평생 벙어리로 살아가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했거든.”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카멜은 이름이 적힌 종이를 가지고 있었다. 거리로 내몰기기 직전, 막무가내로 손에 쥐어주었던 거다. 누굴 만나, 어디로 흘러가든 이름만큼은 알고 있으라는 뜻이었는지 모르지만 잦은 학대로 인해 실어증에 걸려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그때에 ‘이름’이란 것은 단 하나 남은 재산과도 같은 것이었다. 실어증은 양부모를 만난 뒤 향수 가게 맞은편에 개인 병원을 개업한 이웃, 아이로 베티의 꾸준한 치료와 관심 덕분에 완치할 수 있었다. 거의 2년이나 걸렸지만 말이다. 카멜은 끔찍했던 과거의 잔상을 떨치려고 어금니를 깨물어 보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네가 생각났어. 겨울이 오면 특히 더.”
밤새 눈이 내리는 날은 더더욱. 하고 말끝을 줄이던 그가 멋쩍은 웃음소리를 냈다. 순간 카멜은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던 긴장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색하면서도 그가 내뿜는 진득한 인간미가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았다. 화염 속에 던져진 나무토막이 탁! 소리를 내면서 타들어갔다. 벽난로 가깝게 앉아 있던 카멜은 몸이 점점 더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가방을 열었다.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확인해 보세요.”
“아아. 그거…….”
팔걸이에 얼굴을 괴고 있던 그가 상체를 끌어당겨 상자를 집어 들었다. 포장을 뜯지 않은 상태로 코끝에 가져가 숨을 들이키더니 역시 좋은 향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곧 흥미를 잃고 다시 의자에 파묻혔다. 카멜은 그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먹이를 구하러 나온 산토끼가 천적을 경계하는 것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널 만나려던 구실에 불과해. 이젠 진짜가 눈앞에 있으니까 상관없어.”
“구실…… 이라니요?”
“최대한 부담 주지 않고 만날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생각해 냈어. 에반 카멜은 항상 입버릇처럼 아델라에 대해 떠드니까.”
생각에 잠긴 카멜을 관찰하던 그가 위스키 잔을 들어 아주 짧게 목을 축이고 내려놓았다.
“무슨 생각해?”
카멜이 대답했다.
“방금 하신 말씀이 너무 이상해서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현재형이잖아요. 아버지가 꼭 살아계신 것처럼 말씀하셨어요.”
아주 찰나 동안 그의 눈동자가 호박색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찰나여서 눈을 깜빡하는 순간 다시 잿빛이 되어버렸다. 카멜은 그의 눈빛이나 행동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보이지 않는 공포와 싸웠다.
10년만의 재회. 그러나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 날카로운 송곳니. 시시때때로 색이 변하는 눈동자. 진주보다 더 새하얀 피부, 그리고…… 연쇄 살인사건. 그 모든 것들이 엉킨 실타래가 머릿속을 포화상태로 만들었다. 그가 친절한 목소리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에반이 죽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야. 그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 해 줄 수 있나?”
“…….”
“아. 혹 시간이 없다면 다음으로 미뤄도 괜찮아. 앞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작정이니까, 판초.”
웃고 있는 건 오직 눈동자뿐이다. 그것은 뱀처럼 똬리를 틀어 카멜의 몸을 옭아매고 어느 곳으로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조여 왔다. 일말의 빈틈도 없이.
pandora
“시……. 가씨……. 아가씨!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가는!”
“앗! 뜨거!”
카멜이 반사적으로 냄비에 늘러 붙은 손을 떼어 귀에 대었다. 어디선가 고기 타는 냄새가 나는 듯했다.
“아휴, 그럴 줄 알았어. 테드, 가서 얼음주머니 좀 가져오너라.”
어릴 때부터 카멜을 보아오던 닐은 조심성 없는 그녀의 행동이 이상할 정도였다. 테드가 빠른 걸음으로 부엌을 향해 가는 것을 본 닐은 단단히 뿔난 표정으로 카멜을 훈계했다. 그래봐야 다정한 목소리의 잔소리뿐이지만.
“어제부터 이상하네요,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다치고, 멍들고. 계속 이러면 억지를 써서라도 방에 데려다 놓을 거예요”
“미안해요. 생각할 게 많아서 자꾸만…….”
“혹시……. 어제 그 저택에 가서 해코지 당한 거예요?”
“해코지는커녕 극진한 대우를 받았는걸요. 돌아올 때 타고 온 마차만 봐도 알잖아요. 정말 으리으리한 곳에 사는 분이었어요.”
카멜은 귀부인 대접을 받았던 어제 일을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말도 안 해주니까 걱정 돼서 그러시잖아. 누난 워낙 혼자 그러쥐고 사는 성격이라 옆에 누가 있어도 도통 털어 놓으려고 하지 않으니까.”
어느 새 얼음주머니를 가져 온 테드가 한 술 더 떴다. ‘미안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사과하자 또 어물 정 넘길 생각이냐고 잔소리를 하는 테드다. 모전자전이랄까.
“아까 이마에 난 혹은 괜찮아?”
“괜찮아. 아휴 행복해라. 아주머니랑 네가 없었다면 난 지금쯤…… 여전히 코 흘리게였을 거야.”
“푸웁. 뭐야, 그게.”
테드는 자기도 모르게 입속에 있던 바람을 훅 뱉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바보 흉내를 내는 카멜의 모습이 마치 애교를 부리는 여동생처럼 보였다. 카멜 역시 초승달처럼 휜 테드의 눈매를 인상적이게 바라보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테드는 양아버지였던 에반을 닮아가고 있었다.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말투나, 웃음소리, 걸음걸이 등 등 살아생전 에반을 보는 듯했다. 왠지 이런 날은 양부모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카멜이다. 부엌과 식당을 치우고 늦은 시간이 돼서야 방에 돌아온 카멜의 손엔 아직도 얼음주머니가 올려져 있었다.
브릴에 다녀온 뒤로 확실히 이상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 손님이 주문한 전표를 엉터리로 쓰질 않나, 물이 든 컵을 엎지르는 건 예삿일이고, 낮은 선반을 못 보고 가다가 머리를 부딪치기도 했다. 게다가 오늘은 난데없이 오일을 만들겠다고 설치다 손가락을 두 번이나 데였다. 정해진 동선대로 흐트러짐 없이 생활하던 일상에 낯선 그림자가 비집고 들어옴으로 카멜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이 감정은 도대체 뭘까. 설렘일까? 아니면 두려움일까?
카멜은 거의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양부모가 죽은 뒤론 더 그랬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를 반복하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꿈이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자신을 현실세계로 인도해준 것이 그였다. 언제나 그리워하고 있었고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다. 내면의 또 다른 자신이 그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생명의 은인이든, 이성의 존재든, 어떤 이유든지 상관없었다.
‘앞으로 너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작정이니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매혹적인 잿빛눈동자는 그 말이 절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 날카롭게 빛났었다. 어떤 대화를 나누었고 어떻게 돌아오게 됐는지 잘려나간 그림처럼 드문, 드문 생각날 뿐 기억이 온전치 못했지만 벅찬 감정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온전하게 살아있음을 뼛속깊이 각인시키고픈 허기가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올려 묶었던 머리를 풀고 잠옷을 갈아입으려고 막 블라우스 단추를 풀 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인기척 소리에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니 가스등 밑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모자에 가려진 얼굴을 알아 볼 수는 없었지만 무척 젊은 남자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었다. 서너 명의 일행도 보였는데 누군가는 방향을 가리키고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밀수사를 하는 경찰처럼 은밀하게 행동했다. 몇 번쯤 서로 의견을 주고받던 그들이 쏜살같이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완전히 커튼을 칠 때 그들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처음부터 그 곳에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다음날 아침. 테드가 조간신문을 보면서 기하학적인 표정을 지었다.
“발렌시아 호른. 25세. 다우닝 가 근처의 예배당 앞에서 사체로 발견……. 맙소사. 연쇄 살인마가 런던까지 왔나 봐!”
베이컨을 먹다 말고 소리치던 테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속 사건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해.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 피해자들은 들짐승한테 물려서 과다출혈에 의한 심장마비로 죽었었어. 온 몸이 상처 투성이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지. 발렌시아 호른도 심장마비로 죽은 건 맞지만 폭행당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기사가 났어. 누나, 어떻게 생각해? 모방범죄일까?”
“들짐승…….”
찻잔을 들고 있던 카멜의 시선이 공허했다.
“야산에서 잡은 늑대를 떼로 사육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 그런데 중요한 건 나랏일 하시는 귀족 나리들이 뭔가를 아주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는 거야.”
“숨기다니, 뭘?”
테드가 창밖을 살피는가 싶더니 자세를 낮추고 신문으로 얼굴을 살짝 가렸다. 덕분에 카멜까지 상체를 숙이면서 닐이 건네주던 머핀 바구니를 앞에 놓았다.
“어제 부엌문 경첩이 너무 낡은 것 같아서 새로 사려고 철물점에 갔다가 들었어.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시체를 발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얼어붙은 시체에 손을 댔는데 속이 다 썩어문드러진 호박처럼 살이 푹 꺼지더라는 거야. 죽은 사람의 몸에서 피가 몽땅 빠진 상태라고 했어. 그런데 신문 기사엔 그런 얘기가 전혀 없잖아. 어쩌면 들짐승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일지도 몰라.”
순간 카멜은 명치끝으로 전율이 스치면서 손등에 입을 맞추고 송곳니를 드러내던 남자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테드. 아침 식사시간부터 그런 소름끼치는 얘길 해야겠니? 아가씨가 불편해 하잖아.”
소곤거려도 다 들린다는 닐의 꾸중에 알았다고 건성으로 대답한 테드가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린 채 빵을 집어 들었다. 카멜은 다음 기사 내용을 마저 듣고 싶었지만 애써 모른 척 다른 일에 집중하려고 했다.
“지난달에 주문한 골든타임 들어왔어요?”
“새벽에 도착했어요. 한 자루나 되요. 일꾼이 투덜대기에 수고비를 좀 더 줘서 보냈어요.”
“네. 잘 하셨어요.”
“직접 만들어 보려고요?”
건포도와 아몬드가 뿌려진 머핀을 크게 한 입 베어 먹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카멜이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웃었다.
향수 재료로 쓰이는 허브 중에도 향이 진한 골든타임은 귀족들이 가장 즐겨 찾는 ‘스텔라’라는 이름의 향수 주재료로 쓰인다. 주기적으로 양부모가 쓰던 방을 청소하던 카멜은 침대 서랍 속에서 향수제조에 관련된 책을 발견했었다. 워낙 꼼꼼했던 에반의 성격 상 재료의 혼합 비율에 관한 제조 방식은 물론 재료의 원산지까지 상세하게 적힌 내용 중에서 가장 공을 들였던 스텔라에 관한 내용을 읽고는 꼭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많은 양의 골든타임을 주문한 이유는 처음으로 도전하는 과제에 따르는 실수를 계산해두었기 때문이다.
카멜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뒷문으로 나갔다. 폐광에서 날아든 먼지와 안개가 뒤섞여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지독한 안개 때문에 아침 7시면 꺼졌어야 할 가스등이 아직도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러나 카멜은 전날과 다름없는 이런 평범한 아침 풍경을 좋아했다.
오픈 스페이스로 나가는 쪽문 아래에 자루 가득 들어 있던 허브 재료를 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서너 대의 마차가 지나갔고 이웃집 꼬마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인사를 했다. 곳곳에 눈이 얼어붙은 길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당부했지만 이미 꼬마는 날쌘 고양이처럼 멀어진 뒤였다. 길 건너 포목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선파티가 끝가지 전까진 늦잠을 좋아하는 가게 주인도 늑장을 부릴 수 없을 것이다.
카멜의 양부모는 살아생전 워낙 조용하게 사생활을 즐겼으므로 이웃들과의 관계가 원활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평판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얌전하고 선량한 부부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중 가끔씩 인사를 주고받으며 저녁식사를 함께했던 이웃이 포목점 주인인 비즈 제롬이었다. 포목점 바로 옆 건물은 병원이었는데 카멜의 실어증을 완치시켜준 아이로 베티의 개인 병원이었다. 과일 장사를 해서 남편이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내조한 베티 부인은 안타깝게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어서 카멜이 어렸을 적엔 친 딸처럼 예뻐해 주었고 양부모의 장례식까지 치러준 은인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카멜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현관 청소를 마치고 나온 테드가 낡은 천으로 꽁꽁 묶어 놓은 수도관을 보고 말했다.
“날씨 좋을 때 배관공사 미리 해둬야 할 것 같아. 지난주처럼 수도가 얼어버리면 큰일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학교 갈 생각이나 해.”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잖아.”
“오늘 확답을 듣기로 했지, 생각할 시간을 준다고 하지 않았어. 다음 학기도 빼먹으면 돈이 더 많이 든다는 것만 알아둬.”
테드가 한숨을 쉬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그때 길 건너에서 진한 녹색의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안개 속으로 걸어 나왔다. 창이 넓은 화려한 모자엔 드레스와 같은 색의 깃털이 꽂혀 있었고 화려한 장신구들은 여자가 걸음을 뗄 때마다 같이 흔들렸다. 카멜과 테드가 동시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힘없이 비틀거리는 게 쓰러질듯 말듯 위태로웠고 초점을 잃은 눈빛은 유령을 본 것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아주 천천히 카멜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던 여자가 입을 뻥긋거렸다.
“맙소사, 테드!”
카멜은 너무 놀라서 테드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쥐고 소리쳤다. 가까이 다가오던 여자는 마치 폐에 구멍이 난 사람처럼 목소리 대신 피를 뱉어냈다. 잠겨 있던 쪽문을 열고 여자를 부축한 테드가 잠깐 균형을 잃었지만 곧 다리에 힘을 실어 여자를 등에 업었다. 여자의 드레스는 물론 테드의 등은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카멜이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자 식탁을 치우고 있던 닐이 포크를 떨어트리며 짧게 비명을 질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객실로 달려가 문을 열었고 침대 위에 여자를 옮긴 뒤 의사를 부르려고 뛰쳐나가던 테드가 조심성 없게도 작은 화병 하나를 깨트렸다. 닐은 뜨거운 물과 타월을 준비해 방으로 가져왔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요!”
“일단 남자들이 오기 전에 코르셋부터 벗겨야 할 것 같아요. 저 좀 도와주세요, 아주머니!”
카멜은 정신을 잃은 여자의 드레스를 벗기고 단단하게 가슴을 조이고 있던 코르셋을 벗겨냈다. 옷장에서 흰색 잠옷을 꺼내 입히자 새하얀 여자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뜨거운 물로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고 입가에 귀를 갖다 대고서 제대로 숨을 쉬고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치장하고 있던 장신구들을 빼어 은 접시에 올려놓고 멍으로 얼룩진 몸을 닦아주다가 목덜미 안쪽으로 깊숙하게 파인 상처 자국을 보았다.
“아, 아가씨!”
핏물로 변해버린 물그릇을 비우려고 가까이 다가온 닐이 소스라치게 놀라 카멜을 불렀다. 카멜 역시 긴장했는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카멜은 여자에게서 벗겨 놓은 드레스를 슬쩍 훑어보았다. 사교계 시즌이 한참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것은 분명 귀족 집안의 부인이나 자제일 거라고 추측했다. 뜨거운 물에 적신 타월이 식기 전에 다시 몸을 닦기 시작했다. 핼쑥한 얼굴을 닦으려고 베개에 파묻힌 어깨를 들어 올리자 병든 닭처럼 목이 뒤로 꺾이면서 얼굴 살이 푹 꺼졌다. 닐이 뒷걸음질 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주머니. 벽난로 좀 지펴주세요. 이 사람 몸이……. 얼음장 같아요.”
눈을 질끈 감던 닐이 곧 정신을 차리고 벽난로에 장작을 넣어 불씨를 지폈다. 때마침 테드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두툼한 글래드스턴(양쪽으로 열리는 왕진가방)을 끌어안은 의사를 침대 옆으로 데려왔다.
“선생님.”
“카멜, 일단 환자 상태부터 확인하고 얘기하자꾸나.”
아이로 베티는 능숙한 솜씨로 정신을 잃은 여자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온 몸에 멍 자국이 퍼져있었는데 그것들은 드레스와 벨벳 소재의 긴 장갑으로 교묘히 가려졌을 법한 위치에 드러나 있었다. 맹수의 송곳니로 물린 듯한 이빨 자국 두 개와 목 언저리에 살점 일부분이 뜯겨져 있었는데 피가 굳으면서 지혈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상처를 소독한 뒤 더 이상의 출혈이 없도록 붕대로 감았고 여기저기 긁힌 타박상도 치료했다.
“도대체 이런……. 몸이 이 지경까지 갔는데도 멀쩡히 걸어 다녔다는 게 믿기지 않는구나.”
“잔인한 상처를 입었어요.”
“그래. 과다출혈로 심장마비가 오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다. 카멜,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겠니?”
“설명할 것도 없어요. 갑자기 이런 모습을 하고 나타났는걸요. 그보다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이로 베티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입원중인 환자로 병실이 꽉 찼어. 폐렴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어린 아이들이 대부분이라 강제로 퇴원을 시키지도 못하는 입장이란다. 다행이 병원에서 가까우니까 내가 수시로 들려서 상태를 확인해 보마.”
“할 수 없죠. 그런데 선생님. 혹시 이 여자…….”
아이로 베티가 청진기를 가방에 넣은 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카멜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로 베티의 의료행위를 꼼꼼히 관찰하던 테드가 아! 하고 손뼉을 치며 말문을 열었다.
“연쇄 살인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카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무언의 침묵은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발렌시아 호른의 시체가 발견된 지 겨우 10시간 밖에 안 지났어. 게다가 저 여잔 멀쩡히 살아 있잖아.”
“멀쩡한 건 아니야. 그리고 범인한테서 도망쳤을 지도 모르잖아. 어쨌든 신문에 났던 피해자에 대한 내용과 비슷한 점이 너무 많으니까 의심해 볼 문제야.”
카멜은 정신을 잃은 여자를 내려다보면서 그녀가 이십 대 중반정도 됐을 거라고 추측했고 들짐승한테 물린 상처가 그 증거라고 했다. 그러나 테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는 지능범이 피해자를 도망치게 놔뒀을 리가 없다고 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닐이 흥분한 테드의 팔을 잡아끌고 객실 밖으로 나갔고 아이로 베티는 환자가 안정을 취하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두 시간 뒤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대신 환자가 그 안에 정신을 차린다면 반드시 연락 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갔다. 카멜은 원인 모를 두려움이 자신의 몸뚱이를 옭아매고 있다고 느꼈다. 서둘러 창문의 걸쇠를 잠근 뒤 여자 곁에 앉았다. 테드의 말처럼 들짐승을 이용한 범죄가 아니라 사람의…… 소행이라면? 의심으로 가득한 카멜의 시선은 잠든 여자의 목 언저리에서 벗어날 줄 몰랐고 빛이 차단된 방안엔 어둠뿐만 아니라 지독히 소름끼치는 침묵도 함께 가라앉았다.
며칠 동안 인산인해였던 가게는 하루아침에 조용해졌다. 카멜은 괘종시계가 오후 다섯 시를 알리자마자 서둘러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안절부절 하고 있던 닐이 카멜을 맞이했다.
“좀 전에 깨어났어요. 그런데…….”
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객실로 들어간 카멜은 잠시 놀란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지독한 열병을 앓다가 일어난 사람처럼 초췌하기 그지없는 몰골로 앉아 있는 여자가 고개를 들어 카멜을 쳐다보았다. 두 팔로 다리를 감싸고 앉아있던 여자의 눈빛은 적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멜은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다가갔다.
“우리, 아침에 만났어요. 기억해요? 허락 없이 옷을 갈아입힌 건 미안해요. 하지만 상처가 너무 심한데다 정신을 잃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댁이 어딘지 말씀해주시면 전보를 치겠습니다.”
여자가 흥분하지 않도록 카멜은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제야 자신이 걸친 옷가지며 여기저기 몸에 감긴 붕대를 보고는 상황을 이해하는 듯 했다. 카멜이 한시름 놓으며 어깨 너머로 닐에게 말했다. “테드를 불러주세요.” 닐이 급한 걸음으로 뒤뜰을 향해 걸었다. 그 사이 크게 숨을 들이 킨 여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위험에 노출됐어. 날 구했으니까……. 날 쫓던 자들이 당신 얼굴도 봤을 거야. 분명해.”
굳게 잠긴 창문을 경계하던 여자의 얼굴빛이 공포에 질려 파랗게 변해갔다. 충혈 된 눈동자를 치켜뜨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면서 불안 증세를 보였다.
“우리가 당신을 발견했을 때,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시면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아무도 못 도와. 다 죽을 거니까.”
카멜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경찰을 부를게요. 당신이 위험에서 온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할 때까지 지켜달라고 할게요.”
“그깟 경찰 나부랭이들이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꿈 깨. 권총으로 위협하고 폭탄을 쏘아대도 소용없는 짓이야!”
침대 위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여자가 방안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 창문은 잘 잠겼는지, 이상한 사람들이 집에 찾아와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요구하지 않았냐는 둥 정신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멀찍이 떨어져서 여자가 흥분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리던 카멜이 방문을 닫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문에 몸을 기대고 섰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할게요. 그러니까 말해 봐요. 당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죠?”
여자는 울먹이기 직전까지 가서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죽음이 눈앞에 닥친 사람처럼 그저 공허함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자신에게 처한 현실을 물리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오로지 숙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듯 했다. 죽음을 부르는 이름. 여자는 미친 듯 떨려오는 입술을 열고 말했다.
“사……. 사울팽. 으……. 꺄악!!”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다. 순간 카멜 역시 무시무시한 환영을 본 것처럼 두려움에 떨었다. 막 집으로 들어온 테드가 그 소리를 듣고 의사를 부르러 뛰쳐나갔고 오열하던 여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됐으나 결국 기력이 다됐는지 정신을 놓고 말았다.
아이로 베티가 카멜의 집을 찾은 건 오후 9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폐렴환자가 급증하여 당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의사의 손길이 닿자 여자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깊은 잠에 빠졌다. 소녀처럼 잠든 얼굴이 측은할 정도였다. 카멜은 그녀가 연쇄살인의 피해자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겪고 있는 지도 모르고 걱정하고 있을 그녀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명치가 따끔거렸다. 베티는 환자 한 명이 완쾌되어 퇴원할 것이므로 내일 오전 중엔 여자를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 전까지 발작을 일으켜 난동을 부리지 못하게 잘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행여 자해한다거나 흥분해서 남을 상처 입힐 지도 모를 위험을 두고 하는 충고였다. 카멜은 가족들과 교대로 환자 옆을 지키기로 했다.
새벽 두 시쯤 되었을 때, 여자는 악몽을 꾸는지 몸을 뒤척거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들릴 듯 말듯 미약하게 헛소리도 했다. 교대를 하려고 들어온 테드가 문 옆에 서서 고개 짓을 하자 복잡했던 상념을 떨쳐버리고 일어선 카멜이 값을 두 배로 쳐주겠다고 하며 마차를 불렀다. 목적지는 브릴리언스였다.
“이 시간에 거길 왜 간다는 거야?”
테드는 한사코 말렸지만 결론이 어떠하든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한 카멜의 행동은 곧 실천되었다. 코트를 입고 밖으로 나가자 살인적인 추위가 뼈 속으로 파고들었다. 테드의 불평으로 잠이 깬 닐이 그녀를 배웅하려고 잠옷 차림에 두꺼운 코트를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늦은 시간이라 만나주실지 모르겠지만 혼자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 건 더 이상 못하겠어요. 기다리지 말고 주무세요.”
“테드가 따라나서겠다고 성화에요. 게다가 저 여자 일만 해도 마음이 불안해서……. 기다렸다가 날이 밝으면 출발하는 게 어때요?”
닐은 혹시 카멜이 연쇄살인의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됐다.
“살인자가 누구든 달리는 마차에 달려들 만큼 어리석은 바보는 아닐 거예요. 제가 없는 동안 저 여자분 좀 잘 보살피고 계세요. 부탁해요, 아주머니. 그리고 열쇠 챙겨갈 테니까 문단속 단단히 하시고 행여…….”
카멜은 잠시,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지 않았냐고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여자의 모습을 생각해냈다.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오길 요청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하세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요.”
닐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멜은 서둘러 마차에 몸을 싣고 목적지를 말했다. 다행이 마부는 브릴리언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힘차게 말고삐를 당기자 바퀴가 힘차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불길한 예감에 빠져들게 했다.
* * * *
“늦은 시간에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그 분을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요.”
비에 젖은 옷자락을 털며 저택 안으로 들어온 카멜은 후끈한 기운이 얼굴에 확하고 닿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브릴은 언제 찾아와도 저택 외관의 위압감이 가혹한 중력처럼 어깨를 짓누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젖은 코트를 받아주던 집사 잭 파울로는 새벽 2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여전히 반듯한 옷차림과 정갈한 모습을 한 채 카멜을 맞이했다.
“오히려 주인님께선 기뻐하실 겁니다.”
카멜을 응접실까지 정중하게 안내한 그가 타월을 가져다주었다. 때 아닌 소나기 때문에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는 잠깐 동안에도 옷이 흠뻑 젖어버렸다. 벽난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타고 있었는지 불길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고 군데군데 심지가 꺼져있었다. 젖은 머리와 옷을 닦고 있을 때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진 회색빛의 드레싱 가운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카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죄송합니다. 연락도 없이 늦은 시간에…….”
“천만에. 네가 날 먼저 찾아주다니 기뻐서 계단을 뛰어 내려 온 참이야.”
그는 온화한 얼굴로 카멜을 달랬다. 뛰어내려 왔다고는 했지만 그의 숨소리는 전혀 벅차지 않았다. 단지 금빛 머리칼이 약간 흐트러졌을 뿐이었다. 그제야 카멜은 벽난로 위에 있던 위스키 잔과 아델라 오일 병을 보았다.
“이 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어. 내 집에서 너의 향기가 배어 있는 유일한 곳이거든.”
카멜은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벽난로의 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적극적인 공세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타월을 꼭 움켜쥐었다.
“실례인줄은 알지만 여쭤볼 게 있어서 왔어요.”
“실례라니, 당치도 않아.”
그는 카멜 곁으로 다가가 타월을 뺏어 들고 천천히 머리카락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네겐 그 어떤 무례도 허락했어. 마음 쓰지 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카멜을 다시 소파에 앉히고는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릴 심산으로 침묵을 지켰다. 좀체 카멜 입을 열지 않자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며 그녀가 타고 온 마차를 돌려보내라고 집사에게 명령했다. 집사가 예의를 갖추고 응접실을 나가는 것을 보고나서야 카멜이 낮게 숨을 몰아쉬었다.
“경황이 없어서 제가 혹 실수를 범하더라도 오해 없이 들어주세요.”
익살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던 그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멜이 다시 운을 띄웠다.
“요즘 아무 때고 호외 기사들이 터지고 있어요. 연쇄살인마의 광적인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가 도배 된 신문들이요.”
“음. 바깥출입을 안 한지 꽤 돼서 잘 모르겠지만 기괴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더군.”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연쇄살인이 런던에서까지 일어났어요. 문제는 지금 저의 집에 머물고 있는 한 여자가 그 피해자 일 것 같다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큰 상처를 입고 집 앞을 지나는 걸 발견했어요. 피도 많이 흘렸고 정신도 온전치 못해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해요.”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물었다.
“이야기의 취지는?”
카멜의 이마에 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는 느긋함을 보여주던 남자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카멜은 그의 숨결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슬쩍 물러나 앉았다.
“연쇄 살인마는 들짐승한테 물려 죽이는 방법으로 피해자를 해친다고 했어요. 그리고 몸속에 있는 피를 몽땅…… 사라지게 하는 기괴한 짓을 한데요. 그런데 그 여자 목에도 물린 상처가 있었어요. 아주 날카로운…… 이빨 자국이…….”
“판초.”
카멜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남자의 잿빛 눈동자가 냉혹하게 번뜩였고 순식간에 두 팔이 결박당한 채로 소파에 눕혀졌다. 카멜은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소리와 맞먹는 심장박동을 일으키며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동공에 담은 채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했다.
“날 의심하고 있군.”
그의 목소리가 가슴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카멜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이번 사건과 아무런 연관도 없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왔어요. 그래서 직접 얘길 들어보고 싶었던 거예요.”
“네가 원하는 대답을 못 해줄 수도 있어.”
“당신은 절대 살인마가 아니에요.”
“날 알지도 못하잖아. 그런 터무니없는 믿음은 어디서 생기는 거지?”
“절대 그럴 리 없으니까요. 그때 날 구해주셨던 분이…… 그런 극악무도한 살인마라니 말도 안돼요!”
카멜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아주 잠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네가 알고 있는 그 남자가 누구지?’라고 반문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면 그 믿음은 깨지게 될까?”
카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10년 전 글래스고우 성당 앞에 버려져 죽을 번한 자신을 구해줬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그의 정체성 따위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시 만났다는 것, 그리고 마주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결박하고 있던 카멜의 손목을 슬쩍 놓았다. 작은 힘에도 부서질 듯한 몸이 아스라이 떨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쉽게 놓아주고 싶지도 않았다. 몸을 숙여 하얗고 가느다란 목선에 숨을 묻고 작게 속삭였다.
“말해 봐, 판초. 나를 ‘뭐’라고 생각하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카멜이 대답을 회피했다.
“넌 똑똑하니까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기억하지? 네게 거리낌 없이 보여줬던 나의…… 송곳니를.”
방망이질 하듯 뛰어대는 심장 위로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스쳐지나갔다. 곧 허리를 타고 등 뒤로 파고들어 자기 쪽으로 카멜의 몸을 끌어당겼다. 카멜은 살갗을 파고드는 서늘한 기운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두려웠지만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자신을 애태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갈증. 그 너머에 도사리는 위험한 쾌락의 감정들이 고통의 초극과 밀접하게 엮여 야릇한 향기를 풍겼다. 그의 입가엔 어느새 새파랗게 날이 선 두 개의 송곳니가 번뜩이고 있었다. 카멜은 결국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나를 믿는다고 확신하나?”
카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떨고 있으면서도?”
카멜이 용기를 내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카멜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번지는 순간 그는 온 몸의 말초신경이 제멋대로 폭발할 것 같은 충동을 일으켰다. 그녀의 심장이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두려움을 점점 잃어갔다. 어둠에 대한 두려움, 삶의 연장을 위해 잃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이성을 짓누르는 본능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들은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못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견딜 수 없던 것이 바로 오늘처럼 카멜을 마주하게 될 날을 기다리는 악몽 같은 10년의 시간이었다.
“널 선택했을 당시, 나는 아주 큰 고뇌에 빠졌었다. 네가 과연 내가 사는 세상에 발을 들였을 때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참혹한 진실을 경험하고 고통스러워 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네가 나에 대한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 내겐 매 순간이 생지옥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참았어. 널 다시 손에 넣게 되는, ‘오늘’을 위해서.”
“오늘을…… 위해서?”
“계획이 좀 틀어지긴 했지만 결과야 어쨌든 난 널 원해. 그건 진심이다.”
붉은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갈증으로 말라버린 카멜의 입술을 삼키고 묵직한 체중을 실어 몸을 겹쳤다. 강열한 숨결이 입속을 헤집고 다녔지만 조금도 따뜻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키스가 끝났음에도 카멜은 눈을 뜨지 못했다.
“우리는 어둠의 피조물일 뿐,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에게 창조된 것임은 분명해. 단지 신의 광명이 두려워 평생 어둠속에 묻혀 사는 저주를 지녔지. 인간들의 생피를 갈구하면서 영생을 살아야만 하는 저주 말이야.”
그제야 천천히 눈을 뜬 카멜의 눈동자 속엔 슬픈 잿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로 가득 차 있었다.
“지극히 한 때를 살아가는 너희들은 우리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이해부족의 부산물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먹이사슬에서 가장 최강의 자리에 있다고 자만한 우리들은 좀 더 세련되고 품위 있는 호칭으로 불려 지기를 바랐어.”
그가 입술을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나, 알렌 브로이드는 뱀파이어다. 이 정도면 만족한 대답이 되었나?”
★
투척 후 도망!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예상하고 있었지만...뱀파이어...으 점점 두근두근거리는 이야기이길
소재자체가 좀 매니악하고 은둔형이라서 걱정입니다. 두근두근거릴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즐거운 하루 되세요^^
OST랑 완전 하나가 되는 글이네요.. 뱀파이어란 소재를 좋아해서ㅋㅋ더더욱 몰입하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배경음악 선정은 저를 암울하게 만들죠; 칭찬받아서 다행이어요. 고맙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