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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아저씨
그는 가볍다. 그가 몰고 다니는 1.5톤 트럭엔 백여 개 남짓한 화분이 실려 있는데, 난초 미니장미 베고니아 꽃기린 제라늄 시클라멘 아이리스처럼 작은 것에서부터, 벤자민 행운목 홍콩야자 관음죽 몬스테리어 파키라 등등의 관엽목들과 소사나무 분재까지 아파트 길가에 조랑조랑 내려놓았다. 숯에다 풍란을 올린 화분도 몇 개 있다.
“아유, 예쁘기도 해라.” “이건 무슨 꽃이에요?” 아주머니들이 트럭 앞에 쪼르르 모여 한마디씩 한다. 덩치 큰 나무 화분보다 계절화나 미니선인장 화분들이 인기다. 그는 아줌마들에게 꽃 이름과 물주는 법을 제법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듯하지만, 그럴 때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본다면 성의 없는 표정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누가 화분을 사든 말든 그는 별로 관심이 없다.
매사가 그랬다. 그는 실패의 연속인 자신의 인생에 대해 오래,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좀처럼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조차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대체로 친구와 형제의 도움 없이 혼자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왔는데 기껏해 소주 한 병이면 알딸딸해진다.
실패도 좌절도 가벼운 만큼 성공이나 행복 또한 가벼울 것이다. 그는 해가 제법 남은 오후인데도 벌써 화분들은 슬슬 거둔다. 언제든지 집으로 돌아가 입 꾹 다물고 텔레비전을 볼 준비가 되어 있다. 아이들이야 소란을 피우든, 어쩌면 그의 죽음도 영혼도 화분처럼 가볍기만 할 것이다.
박스리어카 장 씨
- 꽃피는 백골
그는 사랑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사랑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숱한 고비를 넘고 허기를 끄면서 그냥 살았다. 죽은 아내에게도 평생 그 말을 해 주지 않았다. 감은 눈의 장막에 과거의 장면들이 스쳤다. 식민지와 육이오와 보릿고개가 지나갔다. 4.19와 5.16과 고속도로가 지나갔다. 부모 형제도 지나갔다 자식들도 지나갔다. 울면서 아내도 지나갔다. 그는 점점 혼자가 되었다. 그는 혼자인 것에 상심하다가 분노하다가 잠꼬대처럼 울컥 뭐라고 내뱉었다. ‘이놈들아’인지 ‘야야야’인지 귀조차 가물가물했다. 듣는 이 없이 쇠잔한 그는 이윽고 남은 숨을 거두었다. 한줄기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초개의 생을 마감하는 이슬방울이었다. 그는 가장 평화롭게 몸을 놓았다. 그는 말 대신 긴 냄새로 사랑을 피웠다. 녹아내린 몸이 장판을 타고 번지다가 번지다가 천천히 말랐다. 봄이 왔다.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목련꽃이 뒤늦은 시취를 풍겼다. 아홉 시 뉴스에 그의 죽음이 불려 나왔다.
# 경북 경주 출생으로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 1988년 계간 <불교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제1회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는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 <눈과 도끼>, <중얼거리는 사람> 등이 있다.
정병근 시인의 시집『우리 동네 아저씨들』이 사유악부 시인선05로 출간이 되었습니다.
이번 시집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사회에 동네마다 있는 소시민들의 애환 유머, 능청, 그리고 이에 대한 시인만의 통찰을 담은 시집으로 지금까지 이 나라 시단에서 보지 못했던 시의 광경들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일상의 단면 속에 있는 우리 주위의 자영업자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농담 같은 삶들을 자연스런 시어로 녹여 낸 이번 시집은 치열하게 현재를 살아가는 동네 아저씨들의 웃음과 슬픔을 가감 없이 독자에게 선보이는 동시에 시인만이 성취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감동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출판사 서평)
[출처] 시집 <우리 동네 아저씨들>/ 정병근 시인|작성자 영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