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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선생님들 다들 건강하시지요?
일요일날 늦잠 자고 일어나서 부스스한 눈으로 메일 체크하다가 이 곳 사무국장이신 박응순 선생님의 메일을 읽었습니다. <계간 대동문화>에 저의 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싣고자 하신다고 관련해서 몇 가지 질문을 해주셨네요.
직장에 바쁜 일이 밀려있어 나가려던 참인데, 다른 숙제를 던져주셔서 이것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형님하고 저하고 나이 차가 워낙 많은데다 (8남매 중 형님이 첫째이시고, 제가 일곱째입니다. 어릴 때 같이 다니면 아빠냐고 물어보고들 그랬음), 제가 어릴 때 혼자 서울로 조기 유학을 가서 (부자셨던 우리 아버지가 똑똑한 아들놈 하나 KS 만들겠다고 조기유학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부모 떨어져 외로움 타다 KS에는 실패했습니다만..) 가족들하고 늘 떨어져 살았던 바람에 형님의 일화에 대해 많은 부분을 잘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냥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질문에 대해 간단히 답하겠습니다.
1. 고향지명은 무엇입니까?
- 전남 광양입니다.
2. 선생님 선친께서 한의원 주약국을 운영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향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는 말씀도 들은 것 같습니다.
- 아버님은 광양읍에서 “正和堂한약방”이라는 간판으로 한의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간판 이름은 기억 안하고 그냥 주약국이라고 했지요. 인자하시고 명의로 소문이 나셔서 집에 노상 손님들이 진을 쳐 마치 시장바닥 같았더랬습니다. 광양군에 한의원이 13개가 있었는데, 나머지 12개 한약방에 손님을 다 합쳐도 우리집 손님의 절반도 안될 거라는 말을 어릴 때 어른들한테 들은 적이 있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매우 유복한 환경이었습니다.
아버님은 평생 한학을 하셨는데, 학자로서 이루시고 싶었던 어떤 꿈에 대한 회한이 있으셔서 당신이 약장사를 해서 먹고 산다는 일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큰 형님이 순천고를 졸업하시고 의대를 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버님께서 말리셔서 법대를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아버님 당신의 회한을 전하신 것으로 들었고, 아마도 자식은 법관으로 立身揚名해주기를 기대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광양 향교의 典校(한자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를 역임하셨는데, 어른들 말씀으로는 500년 유학사에서 40대에 전교를 하신 분이 두 분 밖에 없다고들 하셨습니다 (이것이 맞는 이야기인지는 제가 알 수가 없습니다). 해방 이후 유학의 기세가 꺾인 시점이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제 자랄 때까지는 고을의 최고 어른으로서 전교의 명예와 위세가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약국으로서 고을의 최고 부자이기도 하셨고, 학자로서 신망도 얻으셔서 주약국이라고 하면 광양은 물론 순천, 여수 어딜 가든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주약국의 아들이라는 것은 우리 형제들 모두에게 참으로 대단한 자랑이고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자신도 어릴 때 아버님을 따라 향교에 가서 여러 가지 행사를 구경도 하고 아버님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론을 하시는 것도 보고 했으니, 형님은 아마도 향교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향교는 우리 형제들에게 각별한 추억을 가지게 해준 곳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고리타분할 정도로 유교적 예절에 집착하시고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이 있기도 하신 분이었는데, 형님이나 저도 이런 영향을 상당 부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향교의 추억도 이런 것들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또 아버님이 문장과 글씨에 이름이 있으셔서 전국의 유명한 한시백일장에서 큰 상을 받기도 하셨고, 광양의 유명한 현판이나 현충탑 같은 곳에 거의 아버님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문학가로서 형님의 기질도 역시 이런 아버님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3. 형제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 4남 4녀였는데, 가장 막내가 사고로 일찍 죽어서 3남 4녀가 되었습니다. 형님은 그 가운데 가장 맏이로 아버님 사후 대가족의 기둥 역할을 하시느라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입니다. 형수님 역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4. 성대 재학중 학생운동과 관련하여 서대문구치소인가 수원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이 부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저는 너무 어렸을 때 이야기라 직접적으로 그 상황을 알지는 못합니다만 형님이나 가족들에게서 이 사건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형님이 대학 졸업반이었던 때 한일국교정상화와 관련하여 많은 학생시위가 있었고, 이 때 성대 학생회에서 작성한 성명서를 형님이 다듬어주었다고 합니다. 1964년에 이와 관련해 전국적인 계엄령이 선포된 6.3 사태가 있었으니 바로 이 때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형님은 그 무렵 여러 가지 문학상도 받으시고 문재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학생회에서 성명서를 다듬어 달라는 부탁을 했고, 형님이 이를 거절하지 않고 손질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당국에 연행되어서 서대문 구치소에 보름간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전도 유망한 수재였던 형님이 수감되시니 이로 인해 우리 가족들이 받았던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던 것 같습니다. 서슬퍼렇던 군사 정권의 계엄령하였으니 더 험한 상황으로도 갈 수 있었을텐데 아버님이 나름대로 영향력을 발휘하셔서 백방으로 애쓰신 끝에 보름만에 빼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형님으로부터 그 때 이 사건이 당신의 인생 진로를 바꾼 사건이었다고 하는 말씀을 여러번 들었습니다. 법학도로서 구치소 생활을 하면서 아마도 많은 심리적 충격을 받으셨던 듯하고 그것이 법학에 대한 미련을 끊게 만든 요인이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 사건으로 그 후에 진로에도 상당한 제약을 받으셨던 듯하고 결국 광주에 정착하신 데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5. 기타 주동후 선생님의 진실되고 순수한 삶을 부각시킬 만한 일화가 있으면 답변 부탁드립니다.
- 형님의 일화와 관련해 제가 생각나는 것은 순천고 동기였던 김준배 선생님과의 우정이나, 돌아가신 광양 출신 문인들 정채봉, 이균영 선생님들과의 만남 등입니다. 형님이 대학 졸업하신 후 데모 경력 때문인지 오랫 동안 취직을 못하시고 백수생활을 하셨는데, 그 때 서울에서 저하고 같이 하숙을 하시기도 하셨고, 군대 다녀와 백수상태로 결혼을 하신 후에는 서울에서 신혼살림을 하셨더랬습니다. 그 때 제가 국민학생으로 형님 댁에 같이 살았는데, 앞서 말씀드린 분들이 자주 찾아와 소주잔을 기울이곤 하셨더랬습니다.
김준배 선생님은 형님하고 가장 친하게 지내셨던 친구분이신 것 같은데, 형님과는 순천고에서 늘 1-2등을 다투었던 것으로 알고 있고 서울대로 진학을 하신 후 일찍 사회진출을 하셔서 기업인으로 안정적인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두 분이 모두 수재 타입이신데 개구쟁이 기질도 있으셔서 죽이 아주 잘 맞았던 것 같습니다. 한잔씩 하시면 “저 못가에 삽살개 저 못 속에 맹꽁이”를 폼나게 합창하시고 하셨습니다.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 부자집 대문 앞에다 둘이 같이 방뇨를 하고 도망치고 했다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하시곤 했지요.
정채봉 선생님과 이균영 선생님은 자기들 어린 시절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문재로 이름을 날리던 저의 형님이 일종의 우상이었고, 방학때 형님이 고향에 내려오면 찾아와 여러 가지 문학수업을 받기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채봉 선생님의 동화 “초승달과 밤배”에 나오는 주성길이라는 이름의 대학생이 형님을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바 있습니다. 형님의 어린 시절 이름이 “길성”이어서 집안 어른들은 노상 길성이라고 불렀는데, 초승달과 밤배에서는 이 이름의 흔적을 남겨놓았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형님의 고향 후배 한 분이 저에게 “너희 형님 대학 시절에 정말 멋있고 대단하신 분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샤프한 지성과 문학적 감성,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유머까지 두루 갖추셨던 분이 저의 형님 아니셨나 생각합니다.
광주에 정착하시고 방송국 생활을 하시면서는 폭음을 자주 하시고, 술이 과해지면 민망한 주사를 하셔서 주위 사람들에게 종종 원망을 듣기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들 입장에서는 형님이 가지셨던 꿈과 재주에 비해 이루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한 회한과 분노가 그런 주사로 표현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나 순수한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셔서 정치하는 사람들을 이놈 저놈 도둑놈이라고 욕을 많이 하셨고, DJ를 사기꾼이라고 노상 비난하셔서 저희 가족들 입장에서도 걱정을 많이 했더랬습니다. 사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사기꾼이라는 것이야 국민 모두의 상식이기도 하지요.
형님이 방송국 생활을 하시고 광주의 명사로 이름도 있으면서 술을 많이 드실 때 모르는 사람들이 “방송국 기자가 자기 돈으로 술먹냐? 얻어먹고 다니니까 그렇게 많이 마시지.”하는 말들을 하는 걸 저도 몇 차례 들은 적이 있는데, 저로선 저의 형님의 품성이 결벽증이 있을 정도로 얻어먹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유명인들하고 어울리기에도 바쁘실 정도의 분인데도, 이름 없는 사람 누구하고든 거리를 두지 않고 밤내 소주잔을 기울이는 분이셨습니다. 돈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이 사신 분이었고, 남한테 얻어 먹는 것을 못견뎌하는 성미라 형수님이 노상 경제적인 문제로 고생을 많이 하셨더랬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우리 집안이 엄청난 대가족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형님은 주약국의 큰 아들로 온 집안의 대소사를 말없이 치루시고 친척들 누구와도 밤새워 소주잔을 기울이셨습니다.
제가 감탄을 하는 것은 그렇게 자주 많은 술을 드시고도 직장에는 지각을 안하실 정도로 충실하셨고, 그 바쁜 언론인 생활의 와중에도 늘상 문학을 생각하시고 창작활동도 하셨다는 점입니다.
형님이지만 동생으로서 솔직히 형님의 작품이 문학적으로 얼마 만한 평가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도 하는데, 직장생활을 하시면서 온갖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소홀하지 않고도 그만한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인 일로 시간을 내자면 헉헉거리는데, 그 점에서 형님의 남다른 집념과 열정에 대해 감탄하고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저의 형님에 대해 점수를 주고자 합니다.
끝으로, 에고, 직장에 나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거 쓰다보니 벌써 한 나절 다 갔네요. 동생이랍시고 이야기 한다는 게 혹시라도 고인에 대해 오히려 누가 되는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만 추려서 잘 정리해 주신다면 감사하겠네요.
제 자신에 대해서는 전에 간단히 소개를 드렸습니다만, 한국외대를 나와 영국에서 경제학 박사를 했고, 정부연구소인 산업연구원에서 국제경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사별해서 아들 하나 키우면서 적적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마침 이번 주에 나온 중앙일보사의 이코노미스트에 제 칼럼이 실렸는데, 혹시 관심 있으시면 아래 주소에 가서 보시면 제 글과 사진이 있습니다. 제가 쓴 원문을 그 쪽 데스크에서 마음대로 바꿔놔서 저는 대단히 마음에 안드는 글이기는 합니다. 사진도 홀아비 티가 나서 영 맘에 안들고..
http://www.econopia.com/Article.asp?RepoDate=20040820202938&locdir=colu
그럼 여러 선생님들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 도움이 될까 싶어 제가 가지고 있는 형님 관련 사진들을 몇 장 앨범에 올려놓겠습니다.
첫댓글 빛바랜 사진 속에 서계신 주동후 선생님과 가족들의 모습, 그리고 고인에 대한 존경이 한없이 묻어있는 님의 글, 가슴이 쓰리게 다가옵니다. 하늘나라에 가계신 주동후 선생님이 너무나 보고싶은 밤입니다.
베컴아빠님, 올려 놓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사진도요.
저도요... 고맙습니다. 자주 놀러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