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이라는 나라를 쏘다니며
- 어안 최상호
1. 첫날 칸차나부리에서의 1박
영주교직원산악회에서 모처럼 가까운 이들 부부동반으로 상하의 나라 여행을 계획한다고 했다.
친구가 권유하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듣자말자 눈빛이 반짝이는 아내 때문에 그러마하고 말았다.
오른쪽 무릎 연골이 찍어졌대서 관절내시경수술을 받아 아직 무리하면 안 되었지만
출발할 때까지 약물치료를 받다보면 어느 정도 견딜 만 해질 것으로 자문자답했다.
정월 초이튿날 새벽 2시에 약속장소에서 일행들을 만났다. 인천공항까지 모두 눈을 붙였다.
아침을 간단하게 떡국으로 때우고, 출국 수속을 하면서 항공권을 받고 아시아나항공과 업무제휴를 맺었다는 TAI항공에 캐리어를 부치고 이륙을 기다렸다.
새벽 6시 30분에 도착하여 3시간을 기다렸다가 9시 35분에 이륙했다.
모두들 겨울옷을 벗고 바람막이 정도로 추위와 더위를 같이 맞을 준비가 됐다.
태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는 우리나라 역사와 거의 비슷한 입헌군주국가 이다.
국왕이 존재하며 실제 권력도 입법부/군부와 비슷하게 나누고 있다고 한다.
일제 때 우리 민족이 징용으로 끌려가 고생한 나라이고
6.25때는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했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우방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승무원들의 생김새에서도 낯선 느낌은 없었다.
체격은 물론 피부색깔이나 쌍꺼풀도 비슷하였다.
오후 1시 반에 방콕 수완나폼 공항에 도착했고, 우리나라와 시차가 2시간 난다고 하니
머무는 동안 두 시간은 젊게 살 수 있다는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캐리어를 찾고 출구에서 만난 현지 안내인은 20년차 교포였는데,
서글서글한 인상에 달변가였다.
고대역사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꿰고 있었지만,
줄거리가 없고 이야기 시점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되묻는 이들도 있었다.
전세버스는 최고급 리무진이어서 오가는 길이 편안할 듯 했다.
첫 방문지는 바로 미얀마의 침략이 잦았다는 칸차나부리라는 곳이었다.
방콕에서 버스로 무려 세 사간 반이 걸리는 곳이다.
정속으로 달린다고 쳐도 300Km가 넘는다.
가는 내내 언덕 하나 없었고, 산봉우리 역시 보이질 않았다.
그저 길가로 우뚝 선 야자수나 바나나 그리고 사탕수수밭 뿐이었다.
태국의 3대 생산품이 바로 소금과 사탕수수 바나나라고 했다.
태풍과 지진은 없으나 우기에 강우가 많고 잦아서 민가의 대부분이 2층같은 1층집에 거주한다고 했다.
빈부격차가 심하다보니 2층 이상을 올리더라도 엘리베이터는 엄두도 내질 못하고
그저 아래층에 공간을 두고 있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변두리 지방에는 4층 이상 높이의 건축물이 보이질 않았다.
신기한 것은 모든 차량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단 것인데, 아마도 영국의 영향을 받은 탓일 게다.
또 하나 십중팔구는 일제 차량들인 점도 특이사항이라 하겠다.
나중에 들으니 일본은 2차 대전 중에도 협력국가를 자임했던 태국에 직접적인 수탈을 하진 않았다고 한다.
전쟁 후에도 당시의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공장을 세우고 왕실의 번영에 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했고,
빈번했던 군부 쿠데타에도 간접 지원을 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추구했다고 한다.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좁은 도로가 자주 막히자 일본이 앞장서서 자기들 돈으로 고가도로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단다.
왕실과 군부에서 승인을 해주고 통행료를 받도록 해주었으니
불과 5년 만에 건설비 전액을 회수했고 일본은 최신설비와 같이 운영권을 왕실에 넘겨주었다고 한다.
일본이 세계경제강국이 된 데는 그만한 선견지명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한때 인기를 끌었는데 일본처럼 AS를 바탕으로 한 판매망 설치가 아닌 그냥 대리점으로 팔기만 했을 뿐이었단다.
차량 고장이 일어날 때 부품을 쉽게 구할 수가 없게 되어 점점 퇴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다행스럽게 요즘에는 현대승합차가 인기몰이 중이고 아주 비싸게 주문하고도 3개월 이상을 기다린다고 한다.
TV드라마 대장금의 인기는 시청률 80%로 역대급이었고,
한국어나 음식문화에 대한 인기는 아직도 유효하다고 한다.
물론 BTS의 한류도 한몫을 톡톡하게 함은 물론이라고 한다.
태국국민들은 불교를 숭앙하고 환생을 믿고 있어서
이승에서 복덕을 쌓아야 후생에 왕족으로 환생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서
너나없이 출가하여 수행하는 탁발스님에게 생활필수품과 식료품을 공양함에 인색하지 않다고 한다.
돈이 없는 이들은 자연에 널린 꽃을 꺾어 바치고,
비교적 헐값으로 구입한 식재료를 공양하기도 하는데,
대승불교인 우리와는 달리 소승불교에서 스님은 살생을 금하고 있지만
남이 죽인 고기는 섭취한다고 한다.
탁발에서 거둔 것 중에서 먹고 남는 것은 사원으로 보낸다고 한다.
끼니때가 지나면 사원 마당에서 빈민구제에 쓴다고 했다.
돈이 되는 물건들도 있어서 명망을 얻은 스님들은 굉장한 치부도 했다는데,
재능이 뛰어난 빈민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고, 사원에서 관리를 맡고 있단다.
라마5세 국왕 취임 후에는 선정을 베풀었고 빈민도 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국립 학교도 세워 의무교육 국가로 변모하였고
왕족이나 귀족들도 평민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게 하여 신분격차를 의식하지 않고 있단 이야기가 놀라웠다.
숙소는 리조트형식의 호텔이었는데 우리 일행들에게 건물 한 동 전체를 제공해주었다.
1층 과 2층 그리고 3층에 여장을 풀었다.
다리가 불편함을 눈치챈 지인이 아래층으로 바꾸어 주어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저녁을 먹기 위해 버스를 타고 15분정도 나가서 큰 호수로 갔다.
호수에 바지선을 띄우고 호수 가운데로 나가서 미리 주문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통돼지 바비큐로 저녁을 먹었다.
약한 향신료를 썼는지 먹기에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 채소와 열대과일은 맛이 좋았다.
첫째 날 밤이라고 약간의 술을 곁들였고,
우리 술 소주 한 병에 12,000원을 주고 애주가들만 얼큰하게 마셨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금영노래반주기로 저마다 노래도 흥겹게 불러 제꼈는데
식사 도우미들은 1인당 1,000원이 미안할 만큼 극진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일행들도 특별하게 노래 부른 값을 치렀다.
어둠이 내린 호수에는 우리와 같은 다른 바지선도 몇 척 떠 있었다.
모두 한국인이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 휘황찬란한 조명이 돌고 비명에 가까운 노랫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봉사료도 더 주고 싶었지만 아내 앞에서 선뜻 만 원을 꺼내기가 두려웠다.
아마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가이드가 정해진 팁 말고는 절대 주지 말라고 권했음도 핑계 삼기에 아주 적절했다.
호텔로 돌아와 씻고 잠을 청했지만, 마치 강아지 울음 같은 새소리 때문에 쉬 잠들 수 없었다.
이곳 새들은 낯이 설면 저렇게 저희들끼리 소식을 주고받을지도 모르겠다며 혼자 웃다가 돌아누웠다.
<계속>
첫댓글 마치 내가 여행길에 나선 것처럼 설레는 기분으로 태국여행에 푹 빠져봅니다.
며칠 전 이 글을 읽고 이제야 이렇게 답글을 올립니다.
글따라 여행이지만 태국 바람이 불고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생생한 느낌으로 와 닿습니다.